+ 그리스도의 평화
신학 하는 즐거움 회원님들께,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게시판의 묻고 답하고에서 오랜만에 신학 토론의 주제가 올라와 확인해보고
몇 글자 답변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좀 회원님들께 공유해드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여 오늘의 생각노트에 다시 올려봅니다. 우선 요즘 경황이 없어서 카페에 자주 들리지도 못하고, 회원님들과의 좋은 글을 나누지도 못하는 것에 죄송한 마음이네요.
그래도 청보리님의 질문과 평화댁남의 답녀이 민감한 주제가 될 있기에 몇 가지 생각의 고리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청보리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지오의 선서문" ( 교본 재141쪽) 중 다음 내용을 교회가 공인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내리셨나요?
성령 칠은이 성모 마리아가 얻어 주시는 은사(능력)인가요?
평화댁님의 나름대로의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레지오 영성에서 실린 마리아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글도 실어주셨습니다.
이런 논의 속에서 나름대로 제 생각을 정리해서 게시판에 답글을 올렸는데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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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에서 가장 활발한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서 레지오 선서문에 담겨져 있는 내용에 대한 신학적 문의에 감사 드립니다.
충분히 질문을 하실 수 있는 내용이고, 나름 평화댁님의 답변도 일리가 있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은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해답을 드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전제로 말씀드려야 할 것은, 마리아와 관련된 모든 가톨릭 신학의 주제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신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토대 위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신심과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진리들의 위계'라고 부릅니다. 즉, 진리에도 위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교리와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다"라는 교리는 분명히 그 믿을 교리라는 진리에 있어서 위계 질서가 있다는 말이죠. 후자의 진리는 전자의 진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강의하면서 신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신학과 신심은 상호 결합되어 있지만, 때로는 신심이 신학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신학은 신심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점은 마리아 신심과 공경의 오랜 가톨릭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신심 단체 입니다. 신심단체란, 교회의 다양한 신심들, 즉 그리스도 신앙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영성 조직을 뜻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역시 하나의 신심 단체입니다. 비록 마리아 공경과 마리아의 교회 안에서의 독특한 지위를 생각하면 다양한 신심들 가운데 마리아 신심이 차지하는 교회사적 무게와 한국 천주교에서 마리아 신심이 성장하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교회에서 공인한 신심 단체이면서도, 국제적 조직이지요.
문제는 이 레지오 마리애가 고백하고, 선포하는 신심의 핵심에는 신학적으로 과장되거나, 때로 오해를 빚을 수 있는 신학적 요소들이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청보리 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은 신학적으로 다분히 문제가 있는 구절입니다. 마리아의 중재성은 당연히 하느님 은총의 특은으로부터 나옵니다. 마리아 역시 한 역사의 인간으로 구원된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는 어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여인으로 고백됩니다. 구세주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기르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여정을 함께 걸으셨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셨고, 사도들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자리에서 초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죠. 이 점은 평화댁 님이 지적하셨듯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 신심의 뿌리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신학적인 원리에서 보면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결정적인 협력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믿음의 순종이 없었더라면 강생의 신비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지위는 가톨릭 신학의 역사 안에서 신심의 영역과 맞물려 고유한 지위를 갖습니다. 그것이 가톨릭교회가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근거입니다.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의 선서문이 과연 정당하냐는 물음은 신학적인 물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선서문의 내용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은 마리아 신심을 전면에 내세운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에 비춰볼 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마 '성모 마리아만을 통해서' 혹은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이란 표헌은 다분히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점이지요. 마치 개신교가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를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려면 레지오 마리애 신심 운동이 시작된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1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공산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근대주의의 이성의 합리주의의 여파로 신앙의 위기만이 아니라, 교회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유럽의 전쟁 통에 참된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을 때였지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그야말로 서구 교회의 가장 최악의 혼란기였고, 문명의 전환기였으며, 종교와 신앙이 가장 심각하게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무신론이 팽배해지고, 그리스도교의 존립에 큰 위기가 닥친 때였지요.
마리아 신심과 마리아 관련 단체들이 활발하게 발생하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왜 성모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독 교회 안에서 사적 발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셨을지도 고민해봐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모님의 발현은 5천번도 넘게 증언되었는데, 유독 이 시기에 성모님 발현이 기적적으로 교회로부터 공인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확실한 신앙의 징표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요. 흔들리는 교회와 신앙을 지킬 의무를 지닌 가톨릭교회가 성모님의 기적적 발현을 통해 이 시대의 불신앙을 넘어 초월적 하느님의 개입을 증언할 필요가 있었고, 신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성모님의 모성을 통해 품어 안아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때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진 적은 없지만, 이 시기 만큼 성모 신심이 발전한 적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이런 분위기에서 흔들리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성모님의 품과 그분의 성덕, 그리고 그분의 통고의 삶에 대한 깊은 체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아일랜드의 가장 깊은 마리아 신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지요.
그래서 마리아 신심의 가장 절정에 이른 시기에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과 사상, 선언문들이 정립되었고, 그것이 교황청으로부터 승인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신앙 증거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서구 교회 중심의 신학과 그리스도교가 세상과 배타적으로 맞서던 흐름과는 달리 세상 속의 교회, 대화하는 교회, 쇄신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 다시 정립되면서 마리아 신심도 다시 교회의 본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심은 어느 정도 과도한 시대적 요청 속에서 중립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마리아 신심이 있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마리아 신심을 강조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신심은 어디까지나 신앙에로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가 없이는 신앙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요. 문제는 그 통로의 다양성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회는 오랜 모성에 대한 깊은 체험 덕분에 마리아 신심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의 한국 교회의 신심단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리아 신심 외에도 가톨릭에는 성체 신심, 예수 성심신심, 성인 공경의 신심 등 다양한 신심의 통로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 신심들 가운데 마리아 신심도 하나의 통로이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리아 신심가들이나 마리아 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는 한 명의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균형감각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도한 마리아 신심에 대한 문제와 마리아 신심을 통한 신앙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가 신심 단체란 표현을 쓴 것은, 그 단체의 정관과 규정이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신념의 표현이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은 그런 신심을 고백하고, 그 정신 안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늘 고민하고 있지만, 하나의 신심이 균형감각을 잃을 때 맹신이 되고, 광신이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가 이루어 놓은 놀라운 선교 열정과 교회 성장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모든 신념이 이념이 될 때 배타성이 발생합니다. 다양한 신심을 통한 신앙 성장의 길을 인정하면서도 성모님의 놀라운 성덕과 신앙의 모범, 교회의 어머니성을 균형있게 고백할 때 진정한 보편적 가톨릭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긴 글이 되었네요.
나름대로 두 분의 신학적 토론이 오랜만에 제 신학 하는 즐거움을 이루어주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글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제 카페의 회원이라면 제가 평화방송에서 했던 강의나 이 카페에서 나눈 글들을 읽으시면서 좀 더 그리스도교 신앙의 풍요로움을 맛보시길 기대합니다.
만추의 사색에 감사드리고, 모든 회원님들이 신학의 즐거움에 빠져보시길 빕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카페지기 송용민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