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독자로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필을 해서 그토록 큰 감동과 희열을 제공해준
작가에게 감사와 치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설 혼불서 민족장래 기도
우리는 작가에게 감사하기를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현실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대시켜 주고, 삶의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준 작가의 무한한 은혜는
예사롭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 겨레의 혼을 되살리는 너무도 막중한 작업을
시작해 놓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고 한다.
가혹하고 슬픈 삶을 살다간 영혼들의 쓰라린 혼불이 너무도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어서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이 시키는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명희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득한 선조로부터 오늘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산천초목·생활습관·사회제도·촌락구조·역사·세시풍속·관혼상제·통과의례,
그리고 주거의 형태와 복장과 음식이며 가구·그릇·치레·소리·노래·언어·빛깔·몸짓들을
그저 토막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행하고 치르고 감당했던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과 염원과 애증이 선연히 살아나도록 애절하게 재생해냈다.
그 무한한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작가를 만나본 후 친구가 되었는데,
최명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흔히 예술가들은
매우 자기 중심적이고, 배려를 베풀기 보다는 받는 쪽인데, 최명희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월간지에 연재를 하면서 마감날이 다가오는데
원고가 써지지 않아서 노심초사하는 중에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만나서는 전혀
자신의 초조함을 내색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즐겁고 다정한 대화를 하곤 했다.
최명희는 자신의 50세 생일날은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기는 음식을 대접하며 시중만 들겠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들이 서로 서로 알고 사귀게 되기를 바란다고.
○겨레의 넋 담은 모국어구사
정말 그녀다운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암에 걸려 투병하게 되자 그녀와 ‘혼불’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유명·무명 인사들이 함께 모였다.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결성식에서 최명희는 자신을 그 자리에 모인 보석같이 귀한 분들을 아름다운
목걸이로 꿰는 보잘것없는 ‘실’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기라성같은 명사들이
세팅을 이루는 보석의 중심 다이아몬드였다.
최명희는 암과 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암은 매우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나를 찾아온 손님이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해서 섭섭지 않게 떠나보내야 한다고.그래서
그녀는 지옥의 고문보다 더 무시무시한 항암제 치료의 과정을 불평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순하게 견디다가 갔다.
단군신화의 속의 웅녀는 최명희에게 크나큰 영감이요 위로였다.쓰디쓴 쑥과 아
린 마늘을 먹으면서 1백일동안 굴 속의 암흑을 견디는 시험을 이기고 사람이 된 곰 할머니의
신화에서 그녀는 우리 민족의 표상을 보았다. 그 고독·절망·눈물을 극복한 웅녀의 인내력이
우리의 유전 형질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 그녀의 언어
구사는 구구절절이 모국어의 혼에 대한 경배요, 애절한 사랑의 고백이다.
그녀가 재생해낸 순결한 모국어는 우리 민족 정신의 指紋(지문),
겨레의 넋이 찍힌 무늬, 그리고 민족혼을 담는 그릇이다.
이토록 나라가 어수선하며 국민의 심성이 피폐하고 황량해진 이 때,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요란한 ‘제2건국운동’이 아니고 우리에게 순결한 심성과 삶에 대한 지극함을
되찾아주는 사람과 책이 아닐까 한다.
출처 - myhome.naver.com/hl0705/choi.htm/문화일보 1998년 12월 19일
작가 최명희
1947년 남원 사매 노봉 본적(전주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쓰러지는 빛" 등단
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 당선『혼불 제1부』
▷ 17년간 집필(5부 전 10권), 전북애향대상,세종문학상,
단재문학상, 호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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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판사 서평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을 복간하면서
꽃심을 지닌땅 한국, 한국에는 혼불이 있다. 한국인은 혼불을 읽는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이 “혼불”을 쓰게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나, 첫째로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나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를 다른말로 하면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있는 넋의 비밀들이 늘 그리웠다. 그리고 이 비밀들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여 어우러지는 현상을 언어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하여 섬세하게 복원해 보고 싶었다.」 -미국 시카고대학 초청강연 중에서-
20세기초 격변의 세계사는 제국주의열강의 패권주의에의한 침략전쟁과 새로운 시민계급등장에의한 사회질서의 재편등 변혁과 소용돌이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격변의 흐름은 우리전통사회와 문화의 맥을 흔들어놓고 나라는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을 안겨주며 사라지고 의연한 조상정신을 보전해야할 한가문의 종가는 방황했다.
작가 최명희는 이러한시대를 배경으로, 흔들리며 방황하고 사라저가는 우리혼을 되살려, 이곳 꽃심을 지닌땅에, 밝고 환하게 빛나는 혼불이 살아있는시대를 꿈꾸며 17년의 긴세월을 혼불집필에 몰두했다.
내정신과 몸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작가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 다른말로 나에 대한 그리움이 혼불을 쓰게된 중요한 바탕이라고 술회하면서, 우리조상 선조들이 이루어낸 모든 것들, 우리정신의 원형질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인간 자연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있는 넋의 비밀들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서 존재할 수 있게하여, 우리혼의 무늬가 오늘 내삶과 한탯줄로 잇기 위해서는 어머니 할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혼불안에 되살려 놓는 것이다.
작가가 소설혼불 속에 담은 많은 사상중에는, 보름달과 그믐달을 두고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말하며, 대칭적 동서남북 방위를 설명하며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 자연이 주는 평화는 옆에 있고 동등하며 순환하는 동남서북의 개념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종부 청암부인은 내 홀로 내뼈를 일으키리라 다짐하며 강인한 서릿발 틀을 세우고 그안에 다사로운 모성적 정감을 채워 한몸에 음양을 갗춘 자웅동체로서의 거대한 여성성을 보여주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다. 우리의 혼, 나의 혼,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불빛같은 알맹이를 담고있는 우리말의 씨로, 기승전결이 아닌 우리의 서술방법으로 우리선조들의 삶의 방법, 사유방식을 여러이야기와 역사, 의식 의례를 통하여 실체를 보여주고, 박제된 역사자료가 아닌, 살아숨쉬는 존재로서의 느낌을 복원하여, 시대를 극복해나가는 사회상을 그려내면서, 오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삶과 내일의 방향을 암시하는 것이다.
● 대하소설 혼불과 작가 최명희
.......소복한 종부 청암부인은 흰 덩에 앉아 신행을 갖추면서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고 다짐한다. 무너지는 기둥을 곧추세우고 시부의 상을 치르며, 조카 기채를 아들로 입양한다, 몰락해가던 종가를 홀로 일으키고, 아들 기채가 손자 강모도 생산하여 가문에 대를 이었으며 저수지축조의 대역사도 마치지만, 합방당한 나라는 사라지고, 창씨개명의 강요로 가문보전의 위기를 당한다. 손자 강모는 효원과의 혼인에 좌절하며, 소꿉동무 사촌 강실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다가가지만,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은 자포자기의 방관과 도피, 퇴폐적 낭만으로 자신을 내몰면서 방황한다. 버려진 고아로 태생이 천민인 춘복은 타고난 운명의 한계를 비관하면서, 신분을 바꾸고 뛰어넘을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데.....
소설 “혼불”의 배경은 1930년대 말. 전라도의 한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宗家)를 지키며 치열하게 몸을 일으키는 宗婦 3대와, 천하고 남루한 상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애환에 대한 이야기다. 어두운 역사, 암울한 시절. 외형적으로는 국권을 잃고 일제의 탄압을 극심하게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고 있던 이중적 시대상황 속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상처받고, 뒤집히고, 고뇌하며, 한없이 몸부림치지만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삶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모두 원고지 1만 2천장에 달한다.
“魂불”의 작가 최명희는 1947년 10월10일, 전북 전주시 풍남동에서 아버지 成武씨와 어머니 妙順(陽川 許氏)의 2남 4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최명희는 전주 풍남초등학교와 전주 사범병설중학교를 거쳐 전주 기전여자 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72년부터 74년까지는 모교인 전주 기전여자 고등학교에서, 그리고 74년 봄부터 81년 2월까지는 서울 보성여자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면서 ‘가장 잊지 못할 스승’으로 존경받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 말고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면서 탁월한 감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은 그는 80년, 단편소설 ‘쓰러지는 빛’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다음 해인 81년에는 동아일보가 창간 60주년 기념으로 공모한 장편소설 모집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1980년 봄 4월에 첫 문장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를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 문장 “그 온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를 쓰기까지 꼬박 17년이 걸린 이 대하소설 “혼불”은 맨 처음 동아일보에 1부를 연재하고, 이후 월간 시사 종합지 “신동아”에 88년 8월부터 95년 10월까지 7년 2개월에 걸쳐 2부에서 5부까지를 연재한 뒤 모두 열 권으로 묶었다. 1996년 12월 전5부 10권으로 대하소설 혼불이 출간되자 단숨에 밀리언셀러(million seller)에 오를 만큼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으며, 전문가100인에 의뢰한 20세기말 90년대 최고의책으로 선정되었으며 한국문학이 이룬 가장큰 성과로 평가되었다. 독서계는 대하소설 혼불 신드롬(syndrome)에 빠저들었다. 오로지 한 작품에 17년이라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긴 세월을 바쳐 탄생한 이 작품은 이제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 최명희가 소설 “혼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근원적인 정서, 원형질에 대한 완벽한 복원이었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 班常의 주인공들을 통해 불과 60여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살고 입고, 먹었던 풍경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불과 6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할 뿐인데도 그것이 아득히 먼 시절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공백을 할퀴고 간 우리 사회의 현대화 과정 때문이라고 작가는 생각하고 있었다. 엄청난 빠르기로, 걷잡을 수 없는 가속도까지 붙으면서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도태시키는 비정할만큼 야멸차고 단순한 시대 논리. 그러나, 그렇게 급속도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는 결국 모국어를 해체시키고, 모국어가 해체된다는 것은 곧 민족 정서가 변질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믿고 있었다. “어둠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도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어둠이야말로 삼라만상의 지신(地神)이며, 생명의 모태다. 빛이 밝게 빛나려면 어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신의 불인 혼불은 사실은 혼돈의 시대에 더 환하게 타오를지도 모른다.”
그의 노력은 권위 있는 여러 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었다. 1997년 7월, 제11회 단재상 문학부문상 수상을 시작으로 같은 해 8월에는 전북대학교에서 주는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10월에는 문화체육부가 주관하는 제16회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인 1998년 1월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5회 여성동아 대상을 수상했으며, 6월에는 호암재단이 주관하는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상을 수상했고 정부는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작가 최명희는 17년 동안 투혼했던 “혼불” 외에도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놓았는데, 판소리꾼의 이야기를 담은 중편 소설 ‘제망매가’와 ‘몌별(袂別)’, ‘정옥이’,‘만종’,‘주소’ 같은 단편 소설들은 이미 그 문학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94년에서 96년에 걸쳐 미국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초청 받아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한국학과에서는 그의 강연 내용인 ‘나의 魂 나의 문학’을 고급 한국어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제는 전설이된,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아름다운 문체와 모국어에 대한 숭고한 신념으로 몰두했던, 작가 최명희는 1998년12월11일,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과 함께 꽃심을 지닌 이땅, 그가 사랑했던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 하나. 그 안타까움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그는 이제 고향 전주의 ‘최명희 문학 공원’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밝고 환하게 빛나는 혼불이 살아있는 세상은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문단에서는
-최일남(소설가) 소설 만들기에 대한 최명희의 ‘혼불’ 같은 투신(投身)의 결정이 곧 혼불이다. 그가 묘사한 우리 삶의 진짜배기 원형질이 슬프고 아름답게 차근차근 다가온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의 의식(리추얼)이나 그 사이에 낀 여러 풍속사의 극채색에 가까운 묘사는 놀랍다. 아, 이런 소설도 있구나 싶고 이건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는 걸 새삼 느낀다.
-유종호(문학평론가) 최명희는 문체에 관심하는 희유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정겨운 서정성과 예스러운 정취를 지향하는 문장으로 된 <혼불>은 우리말의 보고로서 주술적인 힘과 기운마저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으면 판소리 가락이 된다. 독특한 울림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노작(勞作)이다.
- 이청준(소설가) 최명희의 소설을 대하면 어느 벌족한 가문의 종가 댁 잔치마당엘 들어선 것 같은 설레는 기대감과 아련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나는 곧 거기서 울을 넘는 음식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이어 뜨락을 메운 질펀한 흥취와 안방 여인네들의 정겨운 어우러짐, 그리고 사랑채 어른들의 경세담들을 모두 한마당에서 만난다. 고색창연한 그 일문의 내력을 숨기고 있는 뒤꼍 대밭의 은밀스런 속삭임까지도.
- 임헌영(문학평론가) 일제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가 <혼불>에 이르러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역사의 격심한 갈등과 대변혁 속에서도 의연히 민족혼의 알맹이를 마모시키지 않고 영글 수 있게 만든 것은 옹골찬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청암부인을 비롯한 숱한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 아내, 여인상을 최명희는 애절함과 그리움으로 우리 시대에 부상시켜 준다.
- 김열규(문학평론가) 최명희는 출중한 ‘이야기꾼’이다. 근대 말과 현대에 걸친 그 아픈 과도기의 구석구석, 바꾸어 말해서 안방, 집안, 고샅에서 사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현장을 바늘귀로 헤집어서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는 그 아린 사연들을 풀이하는 ‘이야기꾼’이다. 이 작가는 장단이며 사설에 걸쳐서 그녀의 고향 남도의 판소리 흥이며 기운을 이야기에 싣는 것을 절묘하게 연행(演行)해 보이고 있다. 전통적 이야기 곧 전통적 서사(敍事)가 오늘의 역사를 만나서 이룩한 최절정이 곧 <혼불>이라고 해도 좋다.
- 이동하(문학평론가) 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은 여성적인 넋의 고혹스러움과 섬세한 문체의 마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면서도 대하 서사시적인 규모를 지닌 일대 거작이며 엄청나게 폭이 넓은 사회소설이다. 이야기 중심, 사건 중심이 아닌 소설 장르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이 작품으로, 최명희의 소설사적 지위는 이미 확고한 것으로 굳어졌다. <혼불>은 앞으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 서지문(영문학자) <혼불>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면서 또한 수용과 인내로 역사의 잔인한 파도를 이겨낸 극복의 역사이며, 우리 갖가지 생활양식과 규범, 속신(俗信)의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수천만 자에 달하는 이 대작(大作)을 단어 한 개, 토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찬란하고 영롱한 장편의 서정시로 완성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 장일구(문학평론가) <혼불>의 가장 큰 매력은 조탁한 언어이다. <혼불>의 언어는 마치 생동하듯 우리의 느낌에 다가서는데, 우리는 주술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이 빛나는 언어에 매료된다. <혼불>에 빠져드는 것은 결국 문화 고유의 예술성과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 고 은(시인) 최명희는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새겨 넣고 있다. 그의 글씨는 철필이나 만년필로 쓰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 가면서 새기는 철저한 기호이다. <혼불>은 지금 우리 문학에 횡행하는 온갖 소음과기만을 무섭게 경고한다. 최명희, 그는 분명 신들린 작가이다.
책속으로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1-7)
종가는 단순히 큰집이라는, 대대로 맏이의 집안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중의 기쁨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제사 때에 첫번으로 신위(神位)에게 술을 드리는 초헌(初獻)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종손이 먼저 드린다. 제사에서의 위치도, 문중의 원로 어른인 문장(門長)은 좌중에 끼어서 있지만 종손은 맨 앞자리 한가운데 혼자 앉는다. 종회(宗會)도,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에 있는 문장의 집에서가 아니라, 종손의 집안 종가에서 열게 되며, 종중(宗中)의 모든 기록 문서는 반드시 종가에 보관하여 대대로 전하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종회에서의 자리도, 종손이 문장보다 상좌(上座)에 앉는 것이다. 비록 종손이 이제 이십도 채 못된 홍안의 소년이라 할지라도, 백발의 수염을 늘이운 문장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종손은 종중의 기둥일세. 우리들은 가지야. 종손은 대대손손 바른 핏줄을 보전하여 우리 가문을 이어가야 하느니.”문장은 어린 종손에게 몇 번이고 이른다. (1-89)
작년부터 시작한 일이 해가 바뀌어 순종 임금 융희 5년, 경술(庚戌), 서력으로 1910년 여름. 공사가 막바지를 향하여 치달을 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청천벽력, 천만 뜻밖에도, 팔월 스무아흐렛날,“조선은 망하였다.”했다.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미처 실감도 하기 전에 매안의 저수지가 완성되었다. 오랜 공사 끝에 숙원하던 저수지를 얻은 매안은, 통곡 소리 진동하는 대신, 거꾸로, 짙푸른 하늘 아래 부시도록 하이얀 열두 발 상모를 태극무늬 물결무늬 휘돌리며, 북 치고, 장구 치고, 꽹매기, 징소리 한바탕 흐드러지게 어울어, 하늘에 정성껏 고사 지내고, 넘치는 기쁨을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백성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나라를, 망하였다, 할 수 있단 말이냐. (1-155)
감잎 같은 매끄럽고 도톰한 본견과, 풀 먹인 열한새 광목 하얀 호청이 서로 접히고 펼쳐지면서 와스락거린다. 사위가 고요하여, 물 밑바닥처럼 적막한 방안에 홀로 이불 펴는 소리만이 낙엽 소리처럼 부서진다. 뒤안의 감나무 가지에서 때를 맞추어 마른 잎사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중 몇 잎은 떨어지는지 마당에 구르는 소리가 떼구르르 난다. 산이 가까운 탓인가. 떡갈나무 잎사귀들, 참나무, 상수리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사그락거리는 소리도 바로 귀밑에서 들린다. 솨아아. 문득 효원의 귀에 친정 대실의 대바람 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성성한 대숲의 대이파리들이 날을 파랗게 세우며 바람을 일으킨다. 아아. (1-166)
흡월정이란, 음력으로 초열흘부터 보름까지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陰氣)를 생성해 주는 달의 기운을 몸 속으로 빨아들이는 일을 말했다. 그렇게 하면 여인의 몸에 달의 음기가 흡수되어 혈력이 차 오른다는 것이다. 저 무궁한 우주를 한 점 달에 응축시켜 몸 속으로 흡인하는 힘. 그 혈력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1-242) |
첫댓글 무더운 여름날...대하소설 완독을 하심도 참 좋지요 피서법 가운데 하나가 아닐런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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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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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 불면 찾아 내 봐얄텐데...
이북 사서 눈 좀 잘 관리하면서 꼭 봐야할 목록^^ 이건 오디오 북 있으면 산속에서 일주일 살아야겠어요^^
아름다운 문체와 보이지 않는 부분들의 묘사가 정말 뛰어난 책이였어요.![강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40.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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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의 표현은....
대나무를 볼때마다 떠오르곤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