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16>
나리[百合]
나리는 백합(百合)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리를 비롯하여 향기가 없고 꽃 색이 다양한 꽃들을 ‘나리’라 지칭하고, 꽃송이를 크게 하고 향기를 진하게 만든 원예 식물을 백합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백합은 나팔 모양의 꽃이 흰색이므로 ‘흰 백(白)’자의 백합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백합’의 어원은 흰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백 백(百)’자로, 땅 속에 있는 저장 양분을 보유하고 있는 알뿌리(구근)가 많은 인편(비늘잎)으로 구성돼 있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 종의 나리들을 총칭하여 ‘나리’라 하며, ‘참나리’를 일컫는 말로 한정하여 쓰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나리’의 끝 음절이 ‘리’인 것과 같이 다른 나라의 백합꽃 이름의 끝에도 ‘리’가 붙습니다. 영어의 ‘Lily’, 일본어 ‘유리’(ゆり)’, 프랑스어 ‘Lilie’ 등이 그것입니다. 백합과 비슷하게 생긴 원추리도 그 이름 끝에 ‘리’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원산지인 나리꽃이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면서 이름까지 따라갔다가 현지에서 변음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 국내 식물 해외 유출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밝혀진 것만 해도 100년이 넘습니다. 백합과 식물의 경우, 미국 국립수목원의 아시아 식물 담당자였던 베리 잉거는 1984년과 1989년 소흑산도부터 울릉도, 설악산까지 우리나라 땅 곳곳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잉거가 최초로 발견한 ‘홍도 비비추’(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는 품종 개량을 거쳐 ‘잉거 아이 비비추’란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보급되었고, 영국 등 다른 나라에도 수출되었습니다.
네델란드 백합 연구 중심지인 와게니겐 구근류 연구소에서는 울릉도 특산 섬말나리를 비롯한 한국산 나리 9종을 확보하여 백합 품종 개발에 활용하였습니다. 백두산 등에 자생하는 날개하늘나리는 조생종 백합 신품종 소재, 솔나리는 핑크빛 백합 원료, 하늘나리는 노랑 및 붉은 백합 소재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백합 왕국’의 뿌리는 한국산 나리라 할 수 있습니다.(KBS 일요스페셜 ‘꽃의 전쟁’ 보도)
나리는 전 세계에 130여 종이 분포하는데 그 중 아시아에 71종, 유라시아 11종, 유럽 12종, 북아메리카에 37종이 분포하며 변종을 포함하면 600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도 다양한 야생 백합 즉 나리꽃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리꽃은 꽃송이가 황적색이지만 노랑땅나리, 누른하늘나리, 분홍색 솔나리나 흰솔나리와 같은 것도 발견됩니다. 나리의 종류는 꽃이 피는 방향, 잎이 달리는 모양, 꽃의 색 등을 고려하여 구분합니다. 꽃이 피는 방향이 땅을 향하는 것에 속한 것으로서 참나리, 중나리, 땅나리, 솔나리가 있고,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는 하늘나리와 뻐꾹나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옆을 향하는 것으로는 말나리가 있습니다. 잎이 어긋나는 것으로는 참나리, 중나리, 땅나리, 솔나리, 하늘나리, 뻐꾹나리가 있고, 돌려나기(윤생) 잎을 가진 나리로는 말나리, 하늘말나리, 섬말나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종류의 나리들 중에서 대표적인 나리는 참나리입니다. 주황색을 띠는 중나리, 땅나리, 말나리 등에 비해 더 짙은 진홍색의 꽃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더욱이 꽃잎에 흩어져 있는 까만 점들은 호랑이의 털무늬를 닮아 더 강렬해 보입니다. 그래서 참나리의 영어 이름은 ‘tiger lily(호랑나리)’입니다.
참나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당하관(堂下官)의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던 호칭인 '나으리'의 줄임말 '나리'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백리는 참나리, 탐관오리는 개나리라 했는데, 참나리꽃은 아름답기도 하고 긍정적인 면이 많아 좋은 의미의 이름인 '참나리'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에 정진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렸던 책거리그림에 나리꽃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 나리꽃의 상징이나 의미가 벼슬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백합과의 꽃을 나리꽃이라고 부른 것은 백제 때부터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백제 유민의 노래로 농사일을 할 때 부르던 메나리에 ‘뫼나리’가 나옵니다. 묘지에서 자라는 나리라 해서 ‘뫼나리’입니다. 뫼나리는 ‘망우초’ ‘넘나물’이라고도 하는데, 나리와 비슷한 원추리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황산벌전투에서 전멸한 백제군의 한 병사가 슬픔에 빠져 있는 아들 형제의 꿈에 나타나 ‘이 꽃을 달여 먹고서 백제를 부흥시키라’고 명했고, 그리하여 두 형제는 다시 굳세게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뫼나리꽃아 뫼나리꽃아/ 저 꽃이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이 져서 농사일 피력하네/ 얼얼얼 상사디여 어디여 상사디여// 뫼나리꽃아 뫼나리꽃아/ 저 꽃이 피어 번화함 자랑마라/ 구십춘광 잠깐 간단다/ 얼얼얼 상사디여 어디여 상사디여
이 나리라는 단어가 일본으로 건너가 ‘유리’(ゆり · 百合)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재미있게도 경상도에도 나리를 ‘유리꽃’이라고 부르는 고장이 있다고 합니다. ‘노래하는 歷史’의 저자 이영희 박사는 일본어 ‘유리’는 우리말 ‘얼[泉]’에서 바뀐 말이라 하였습니다. “ ··· ‘얼’이 ‘얼이’라고 두 마디로 늘어나는 한편 ‘어’가 ‘유’로 변음된 것이다. ‘얼이’는 또 일본에서 ‘이리’라고도 불렀다. ‘얼’이란 ‘샘’의 옛말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 ‘연(淵)’ 또는 천(泉)도 우리 옛말로 ‘얼’이었다. 백합화의 꽃 모양을 자세히 보자. 긴 줄기 맨 위에 피어나는 꽃잎은 마치 힘차게 솟아오르다 벌어지는 샘물의 분수와 같다. 옛날 옛날엔 우리나라에서도 백합화를 ‘얼이’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서정범 박사는 우리말 ‘나리’가 일본으로 건너가 ‘nuri > nyuri > yuri’의 발달을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어사(語辭) 분화에 의해 n 아래의 모음이 중모음화함으로써 n음이 y 앞에서 탈락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우리말인 나리는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생하고 있는 우리 꽃이었음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려 때는 이두 명칭인 견내리화(見乃里花), 대각나리(大角那里)라 불리다가 조선시대 초에는 ‘견이일(犬伊日, 개의날)’, ‘개이일이(介伊日伊, 개의날이>개나리)’로 불렸으며, 그 후 ‘동의보감’ ‘산림경제’ 등에는 ‘개나리불휘’로 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초의 ‘물명고(物名攷)’에는 “흰날이’는 향기로운 흰 백합을 말한다, 또한 ‘산날이’는 붉은 꽃이 피는 산단(山丹)을 가리키며 ‘개날이’는 붉은 꽃에 검은 반점이 있는 권단(卷丹)을 말한다. 뿌리는 쪄서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날이’에서 변화하여 ‘나리’가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리의 어원을 두고 전문가에 따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권세가 높은 사람을 지칭하는 ‘나리’에서 왔다는 설과 ‘날(日)’을 의미한다는 설, ‘나물’을 의미한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