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진천지역 답사후기
"문화답사의 향기, 책에 듬뿍 담았죠", [삼국유사유적답사회]
“6년 우리나라 문화유적답사의 결실을 한 권에 담아 일반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2005년 발족한 (사)영남불교문화원 삼국유사 유적답사회(회장 이승우)는 이달 20일 전남 장흥군 정남진에서 답사회 동인지 ‘흔적’을창간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답사회는 그동안 순수 시민단체로 전국의 문화유적을 탐방하며 우리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키기에 앞장서왔다.
창간호 ‘흔적’에는 답사 후기를 비롯해 논단, 대담, 문단, 사랑방 등 50여 명 회원들의 글이 실려 있어 일반인들이 유적답사 안내서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편집을 맡은 박기옥 부회장은 “전문가의 글과 함께 답사를 하면서 느낀 이야기 등 알찬 내용으로 꾸몄다”며 “회원들의 글을 보면서 횟수를 거듭할수록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안목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답사회는 그동안 40여회 이상 국내외 문화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문화재 발굴과 사라져가는 문화를 복원시키는 일에 제 몫을 다했다. 삼국유사유적답사회는 김윤곤(영남대 명예교수, 국사학), 김태엽(대구대 국어국문과 교수) 고문, 김재원(역사학자) 원장 등 쟁쟁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꾸려져 있어 지역 문화유적답사회 중 독보적 명성을 얻고 있다.
회원들에게 해박하고 깊이 있는 명품 해설자로 통하는 김재원 원장은 “조상이 남긴 문화의 흔적에서 앞서 살다간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며 후손에게도 좋은 유산을 남겨야겠다는 사명감으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흔적' 출판으로 우리 답사회도 역사에 작은 흔적을 남긴 것”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답사는 매월 셋째 일요일에 실시하며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인터넷 카페 cafe.daum.net/ynbculture]
라는 2011년 3월 25일 자 [매일신문/사회/20면]에 영남불교문화원에 대한 소개글이 이철순 시민기자의 사진이 포함된 글이 큼직하게 게재되었다.
신문을 마룻바닥에 펼쳐 놓고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차에, 해박하고 깊이 있는 명품 해설자로 통하는 김재원 원장이라는 기사 부분을 보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련한 기억이 있었다.
예전, 언제쯤이었던가? 기억도 희미한 시기에 영남일보에서 시행하던 문화행사로 불교유적지 답사를 따라 다니며,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삶과 오랜 세월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야기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시공을 넘나드는 구수한 얘기를 들었던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잠시 혼자만의 미소를 머금다가, 잘 사용하지도 않는 먼지 쌓인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급히 신문에 소개된 카페를 검색하여 카페에 가입을 하였다. 언제쯤 김재원이란 분의 다정다감했던 얼굴을 뵐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마음 가득한 채로....
그분이 많은 답사회원의 하나였던 오래전의 나를 기억할리는 없을 테지만 재미난 얘기를 많이 들려준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을 말릴 수 없나보다. 나의 답사 여행은 이렇게 인터넷 카페 가입을 시작으로 맘속 깊이 숨겨져 있던 나의 역마살 끼는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드디어 4월 17일 답사여행지로 첫 출발, 카페에 김재원 원장님의 게시글을 보고 마눌님의 동의를 얻어 입금순으로 선착순 40명까지라는 터에, 남에게 뒤질새라 입금부터 하고 박경훈총 무님에게 입금 내용을 알려드렸다. 오매불망, 달력을 쳐다보고 세월아 네월아를 독촉하며 어릴 적 소풍가던 날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로 돌아가 가슴 졸이며 기대하던 그날이 오기만 기다린다.
출발하는 날 이른 아침을 라면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집의 나서서 아파트 입구에 나오니 마침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운전기사님을 재촉하여 총무님이 사전에 알려준 용산동 홈프러스 지하주차장 출구에 도착, 홈프러스 정문이 있는 큰 길은 여러 곳으로 가는 관광버스가 무척이나 붐비는 곳이지만 번잡한 탑승지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마찬가지여서 인지, 이곳 역시 그리 만만치가 않다. 벌써 어디론가 떠나려고 기다리는 등산장구를 착용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연신 차량들이 도착하여 몇 사람씩을 태워 출발하곤 한다.
답사 차량에 대한 사전 안내가 없었기에 도착하는 버스마다 달려가서 차량 앞 유리창에 붙여 놓은 행선지를 확인하느라 왔다 갔다 하며 나름대로 바쁘다. 이곳에서 승차하는 회원도 있음직한데 처음 가는 답사여행이라 회원들의 얼굴을 모르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착할 시간이 지나 혹시 버스를 놓친 게 아닌가 싶어 총무에게 전화를 하니 잠시 후 승차 위치에 도착할 수 있다는 소리에 바짝 긴장했던 맘이 풀려 담뱃갑을 꺼내어 한 가치 빼서 물고 휴 ~ 하는 걱정과 함께 연기를 내뿜는다.
곧 이어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총무에게 확인을 하고 차에 오르니 단체여행객들의 인솔자가 앉는 자리에 원장님이 계셔서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이제야 출발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오는 찰나, 옆 자리에 앉아계신 회원님이 떡을 나눠주신다. 이게 웬 떡이냐? 오늘은 억수로 운이 좋은 날인가 보다. 아침부터 떡도 생기고,
차가 출발하자 잠시 후, 목에 걸 단체여행객들의 목걸이형 팻말과 오늘 답사할 곳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서를 나눠준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총무님의 오늘 행사진행에 대한 안내이야기, 회장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원장님 특유의 구수한 얘기가 시작되었다. 나눠준 답사지의 설명글을 읽으랴, 원장님의 얘기를 들으랴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깬 탓에 비몽사몽간에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휴게소에 도착했다. 예전, 공부 못하던 학생시절에 수업시간에 졸고 휴식시간에 노는 식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서인가?
커피 한 잔까지 곁들이고 다시 차가 출발, 원장님의 얘기는 계속되고, 그리고 또 이어지고, 한숨 잔 뒤라 이젠 원장님의 얘기가 조금씩 귀에 들어온다. 처음 찾아 갈 곳이 베티성지라는데 천주교 신도들을 박해하던 시절의 성당이 있었던 곳이어서 무척이나 골짜기 인지 운전수아저씨가 이리저리 길을 헤매신다. 몇 차례나 길을 물어 어느 골짜기에 들어갔는데 기도원 같은 건물이 있는 막다른 곳에서 차를 어렵사리 되돌려 나와 겨우 도착한 베티성지. 계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것 같다.
대구 근교에 있는 한티성지처럼 깊은 산중에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리 높지도 않은 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회원들을 따라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길을 오르는데 숨이 가빠온다. 워낙 운동부족 탓이리라. 숨을 헉헉 몰아쉬며 회원들의 맨 끝에서 따라가다 보니 성당건물이 나오는데 다른 회원들은 더 위로 올라가고, 에라 나는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한도이다.
한국인으로서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을 한 곳이어서 천주교의 성지가 된 곳인데 산 중턱에는 양업관이 건립되어 있고 그곳에 이르는 길 입구에 최양업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산길 좌측에는 1처에서 14처에 이르는 예수의 고난의 모습이 청동의 흉상이 작은 돌에 붙여져 드문드문 있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사진만 몇 장 찍고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잠시 후 회원들이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다가 원장님이 화단에 놓여 있는 돌을 발견하고 이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형구 돌이라며 형구 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천주교 신자들을 죽일 때 돌구멍에 밧줄을 넣어 반대쪽에서 잡아당겨 사람들을 소리 없이 죽이는 형구로 사용된 돌이라고 하며 대구의 있는 관덕정에 원장님이 기증하신 게 하나 있다고 하신다.
베티성지를 뒤로하고 다음 답사지인 보탑사로 향했다. 작은 삼거리길을 지나는데 시골학교의 운동회가 열리는 곳이 베티성지에 가기 전에 길을 몰라서 한 번 지나쳤던 곳이다. 왁자지껄한 곳을 지나 잠시를 달리다 보탑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 원장님이 점심시간이 되었으니 밥부터 먹으로 가자고 하시며 절의 옆길로 걸어가시는데, 딴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뒤질 수 있나 싶어 부지런히 원장님을 뒤따랐다.
차례로 줄을 서서 큼직한 접시에 밥과 나물반찬 세 가지와 미역국을 받아 식탁으로 가서 먹는데 봄의 제철 나물로 요리한 반찬에서 봄 향기를 느끼며 맛나게 먹었다. 함께 간 마눌님이 "어중간한 식당에 가서 먹는 것 보다 절에서 이렇게 먹으니 깔끔하고 좋다"고 했더니 건너 자리에서 점심을 드시던 원장님이 ‘그럼 다음 달에도 절밥을 먹을까요?’ 하신다. 한 칸 건너 자리에서 ‘소주 한 잔 곁들이면 금상첨화겠다’ 하니, 또 다른 자리에서 ‘절에서 술을 먹을 수 있나?’하니, ‘곡차는 괜찮다’라고 얘기를 하지만 누군가 술을 준비 했겠나. 담소와 함께 즐거운 점심을 공양하고 각자 절 구경을 나섰다.
남들보다 먼저 점심을 해결하고 식당을 나와 마눌님과 함께 이곳저곳 다니는데, 절 가운데 서 있는 3층 보탑은 신라 황룡사 9층 탑 이후 처음으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목조로 건축물이라고 한다. 1층은 금당으로 사방불이 모셔져 있고, 2층은 법보전으로 8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가 있으며,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보탑 뒤켠에는 초파일이 다가 와서인지 연등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고 주변의 산신각은 너와지붕의 귀틀집 형식의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영산전에는 부처님에게 설법을 듣는 500 비구들의 모습을 모셔 놓았고, 누워있는 부처님을 모신 적조전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차 안에서 원장님이 부처님의 형상에 대해 얘기해 주신 ‘부처님은 세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앉아있는 부처님은 명상을 하거나 휴식을 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이고, 누워있는 모습의 부처님은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이고, 서있는 부처님은 고행하는 부처님의 모습이라던데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부처님이 낮잠주무시고 계시는구나" 여겼을 터다.
따가운 봄 햇살을 피해 작은 나무그늘에서 어영부영 잠시 쉬다가 보물 제404호라는 " 백비 " 는 다음 기회의 볼거리로 남기고 사천왕 문을 나서서 회원들과 함께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김유신 장군 생가터로 향했다. 홍무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령산 아래의 생가터에는 김유신 장군의 찬헌비와 근래 복원했다는 생가가 있었다.
연이어 찾아 간 곳은 길상사, 출발하기 전에는 진천에 생전의 법정스님이 길상사라는 절을 지은 것인가 생각했는데 한자 명칭이 吉祥祠 라는 김유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다. 충청북도 기념물 1호인 길상사에서는 가락 김씨 종친회 주관으로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원장님의 말씀에 따라 잠시 추도 묵념을 하고 오늘 마지막 답사지인 농다리로 향했다.
농다리 마을에 도착하여 농다리 전시관에 먼저 들려 농다리에 관련된 사진과 고려시대 초기 상산 임씨의 시조인 임연장군이 놓았다는 등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기록을 보고 농다리가 놓여진 세금천으로 갔다. 천 년을 이어 왔다는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28 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농다리는 지네 다리 모양으로 본래는 28간의 교각으로 만들어 졌으나 유실되어 현재는 24간만 남아 있다고 하나 미쳐 헤아려 보지는 못하였다.
이 다리에는 재미난 전설이 전해 내려 오는데, 고려 고종 때 임행(林行)이라는 장군이 세금천에서 눈보라가 치는 겨울 아침 세수를 하고 있는데 젊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냇물을 건널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그 연유를 물으니 친정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가는 길인데 내를 건널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효심에 감탄한 임행 장군은 하루 아침에 이 다리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을 건너는 아낙네는 아들을 낳을 수 있고, 노인이 다리를 건너면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하는데, 몇 차례 건너봄 적도 하지만 한 번만 건너보고 무병장수할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곳저곳에서 농다리 사진만 몇 장 찍고 되돌아 나왔다.
버스가 주차된 마을로 와서 구산동 상산 임씨 천년세거지(龜山洞 常山林氏 千年世居地)라는 커다란 돌표식이 곁에 있는 마을의 정자에 앉아 한 분 회원님이 사온 막걸리로 하루의 피로를 회원님들과 정다운 담소와 함께 풀며 잠시 쉬다가, 차에 올라 나의 삶의 터전인 대구로 오는 차창에 기대어 “생거진천(生居鎭川) 이라 했으니 이제 진천은 돌아 봤고 웅크리며 사는 현실이 사거용인(死去龍仁)까지 되겠나? 어찌됐던 그건 나중 일이고 그리운 고향, 그리운 나의 집으로”, 나는 꿈속을 헤매고 차는 마구 달린다.
쓰임이 있을 것 같으면 원고를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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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쩜 그렇게 잘 정리 하셨습니까. 역시 파정 선생 답습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원고 고맙습니다.
당연히 귀하게 쓰겠습니다.
저의 메일 주소는 giok0405@hanmail.net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