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신달(莘達)이며, 현손 관(瓘)은 고려 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7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承禮)와 소정공파(昭靖公派:坤)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판도공파는 승례(承禮)의 아들대에서 다시 제학공파(提學公派:珪)·부윤공파(府尹公派:普老)·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집안이다. 승례의 아들 번은 세조의 국구로서 그의 맏아들 사분(士昐)은 우의정, 둘째 사균(士昀)은 예조판서, 셋째 사흔(士昕)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사분과 사흔 두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왕비가 나와, 왕실을 배경으로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일가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사균의 증손 임(任)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며, 장경왕후는 여필(汝弼)의 딸로서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사흔의 증손인 지임(之任)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을 낳은 뒤로 장경왕후의 오빠 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 즉 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원형(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소정공파는 승례의 형 승순(承順)의 아들 곤(坤)의 후손이다. 곤은 정종 때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 이조판서를 지냈다. 손자 호(濠)는 성종의 국구로서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면서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필상(弼商)의 증손 현(鉉)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사로(師路)는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이조판서 강(絳)과 다섯 아들 지미(趾美)·지선(趾善)·지완(趾完)·지경(趾慶)·지인(趾仁) 등이 뛰어났으며, 특히 지선·지완의 형제 정승이 유명하다. 지선은 현종 때 병조·이조·공조판서를 거쳐, 숙종 때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지완은 어영대장·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한편 숙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비경(飛卿)의 손자 봉구(鳳九)·봉오(鳳五)·봉조(鳳朝), 그리고 증손 심형(心衡) 등이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다. 봉구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 때 집의(執義)·찬선(贊善) 등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봉오는 영조 때 대사헌·우참찬 등을 지냈으며, 봉조는 암행어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영조 때 부제학이 되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또 심형은 영조 때 부제학·예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노성윤씨(魯城尹氏)란 노성(魯城:論山)에 세거한 파평윤씨 돈(暾)의 후손을 가리키며, 충남에서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의 다섯 손자 가운데 특히 황(煌)은 아우 전(烇)과 함께 학자로 유명하다. 황의 여덟 아들 중 순거(舜擧)·문거(文擧)·선거(宣擧) 세 아들이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문거는 효종 때 동래부사를 지내고 경학(經學)·성리학·서예에 뛰어났고, 선거는 거유로서 숙종 때 예송(禮訟)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의 아들 증(拯)은 숙종 때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으며, 왕과 한번의 배면(拜面)도 없이 상신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증은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하자 송시열의 노론에 대항하여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아들 행교(行敎)도 대사헌이 되었다.
이밖에도 정승급 인물로는 인경(仁鏡)·동도(東度) 등이 있다. 인경은 각조의 판서를 거쳐 인종 때 좌의정·영의정이 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동도는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학자로는 정(鼎)·경남(景男)·낙(洛) 등이 유명하다. 근세인물로는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을 폭사시킨 의사 윤봉길(尹奉吉)이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2만 1477가구에 71만 3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판도공파의 파조(派祖) 윤승례(尹承禮)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영평군(鈴平君) 척(陟)의 자(子 - 承休,
承度, 承順..)로써 오형제 가운데에서 五房으로서 장단군 장목동
(現 장군 진동면 작목리)에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 년(서기 1367 년)
에 신 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 년
(서기 1371 년)경에 신 돈(辛旽)이 주살된 후에 풀려나서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公)을 세웠으며 창왕 1 년(1389)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
(權近)과 함께 명나라 사신(史臣)으로 갔다와서 명제(明帝)지시에
따라서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다.
이어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판도 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충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거나 두문동 72현 처럼 절조를 지켰다.
이때 파평산에 들어가 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그리워하면서
노후를 보냈다고 전한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며 사후 작목동 묘좌에 안장되었고 후에
손녀(孫女)인 번의 딸이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로 책봉
(冊封)됨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또한
손자인 공간공 형(炯이 좌익공신에 책훈되어 순충보조공신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후손들 중에서 많은 고관대작과 학자(學子)가
배출되어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첫댓글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자료들을 자판 몇 번 두드리면 상세히 알 수 있으니..
큰아빠,삼촌의 설명과 함께 가계를 잘 파악하였으니 자존심을 지켜가는 데 차질 없기를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