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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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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성(五國城) |
금(金) 나라는 여진의 흑수부(黑水部)로 우리나라의 북도와 가장 가깝다. 송(宋) 나라의 황제가 잡혀 와서 오국성(五國城)에 구금되었으니 반드시 우리 국경과 서로 가까웠을 것이다. 흑수부 지역에서 가장 깊고 들어가기 어려운 곳은 오랄성(烏喇城)이다. 오(烏)와 오(五)는 우리 음으로 비슷하니 ‘오국’은 아마도 오랄의 잘못인 듯하다. 오랑캐족들의 땅 이름이나 사람 이름은 대부분이 음으로 하고 글자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통지(一統志)》에 보면, “삼만위(三萬衞)에서 1천 리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오랄이 바로 그곳이다. 《성경지(盛京志)》에는, “오랄 지역에는 이름이 없는 성이 많다.” 하였으니 어느 곳이 오국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뿐이다.오랄에서 동남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7백 30리인데 토문은 곧 두만강(豆滿江)이다. 이것도 음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니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년중 언제나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계산기정 제2권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4일-24일]
4일(을축)
심양(瀋陽)
심양은 옛날의 숙신(肅愼)과 읍루(挹婁)의 땅이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처음으로 심주(瀋洲)를 설치하고 정리부(定理府)의 관할로 하였다. 요(遼) 나라 때에는 무원소덕(無遠昭德)과 삼하락교(三河樂郊)라고 하였다가 흥료군(興遼軍)이라고 고쳤으며 명(明) 나라 때에는 심양중위(瀋陽中衛)로 삼았다. 청(淸) 나라 때에는 봉천부(奉天府)에 예속하였고 또 성경(盛京)이라고도 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이 창업한 땅이다. 그 북쪽은 몽고(蒙古 몽골)의 지경이고, 그 동쪽은 개원(開原)으로부터 오랄선창(烏喇船廠)을 거쳐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는 1300여 리이며, 서쪽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 1400여 리이며, 요동부터 동팔참(東八站)을 넘어 우리 국경에 이르기까지가 500리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서(序)
백두산(白頭山)을 유람하러 가는 진택(震澤) 신공 광하(申公光河)를 전송하는 서 기유년(1789)에 지음.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고, 지지(地志 지리서)에 이른바 장백산(長白山)이다. 그 산맥이 서쪽으로 선비(鮮卑)에서 일어나서, 동북쪽으로 흑룡강(黑龍江)의 위에 이르고, 그 한 가닥이 남으로 꺾이어 우리나라 경계의 북쪽에 이르러 우뚝하게 일어나서 북진(北鎭)ㆍ여진(女眞)ㆍ오랄(烏喇)의 으뜸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말갈(靺鞨)이 되고, 서쪽으로 여연(閭延)ㆍ무창(茂昌)이 되고, 서남쪽으로 발해(渤海)가 되었는데, 그 뿌리가 땅에 서리어 수천 리나 뻗어 있다. 그 위에는 큰 못이 되어 주위가 80리나 된다.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갑진 13년(1364), 원 지정 24년
○ 2월에 우리 태조가 서북면에서 군사를 이끌고 철관(鐵關)에 이르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모두 기뻐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담기(膽氣)가 저절로 배가 되었다. 한방신(韓方信)ㆍ김귀(金貴)와 함께 삼면(三面)에서 진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화주(和州 함남 영흥(永興))ㆍ함주(咸州) 등의 주(州)를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ㆍ삼개가 여진 땅으로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恭愍王四)
신해 20년(1371), 대명 홍무 4년
○ 9월에 서경 도만호 안우경(安遇慶)과 안주 상만호 이순(李珣)을 보내어 오로산성(五老山城 올라산성(兀刺山城))을 치게 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통사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우리 군사가 오로산성을 쳐서 이기고, 원나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합라불화(哈刺不花)를 사로잡았다.
세종 19년 정사(1437,정통 2)
9월22일 (기유)
이천이 이끄는 야인 토벌군이 승전했음을 알려오다
“이번 9월 초7일에 좌군 도병마사 상호군 이화와 우군 도병마사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이 산양회(山羊會)에서 압록강을 지나갔고, 도절제사 이천 등은 만포 구자(滿浦口子)의 앞 여울을 지나서, 11일에 좌·우군이 고음한(古音閑) 지방에 들어가서 적의 전장(田庄)을 양쪽으로 공격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므로 좌군은 홍타리(紅拖里)로 향했고, 도절제사의 군대는 오자점(吾自岾)에서 강을 따라 내려와서, 적의 소굴 12호를 수색하고는 적 35명을 목 베이고 5명을 생금(生擒)하였으며, 소와 말들을 빼앗고 그들이 쌓아 둔 서속을 불태웠습니다. 12일에는 우군이 파저강을 지나서 올라산성과 아한(阿閒) 지방을 수색하였으나, 적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단지 1명만 목 베이고, 그들의 집과 콩과 서속을 태우고는 즉시 파저강을 도로 건너서, 13일 새벽녘에 우군과 도절제사 군사들이 함께 오미부(吾彌府)에 이르러서 그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이미 적이 미리 알고 다 숨어서 드디어 그들의 빈집 24호와 쌓아 둔 콩과 서속들을 불태웠습니다. (사료인용 끝. 원문은 분량이 많아서 생략하였습니다. {사료출처 한국 고전 번역원 http://www.itkc.or.kr/})
이 사료에서 나오는 지역은 조선의 함경, 평안의 외곽지역으로 압록강, 두만강 이북지역으로 만주지역이며 사막과 초원지대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달단과 여진을 막기 위해 조선태조가 제집 지붕처럼 드나드는 곳으로, 리성계의 동네인 달단동이 있는 곳이다. 달단이 뜻인가 음인가? 이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음가이다. 달단은 타타르이고, 타타르는 몽골이며, 시대에 따라 흉노,정령, 골리간, 길리길사(키르키스)로 불리웠던 족명이다. 이 지역은 당서에도 나와 있듯이 당태종 리세민이 정령을 정복한 지역으로 백야 현상이 있는 곳이고, 조선의 함북, 온성이며 지금의 러시아령 타타르 공화국 정도로 보여진다. 연경은 이지역에서 멀지 않고 몽골은 유주/연의 막북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 대비달자는 무엇이고 온성은 어디인가?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8년 임술(1682,강희 21) > 11월24일 (정묘) > 최종기사
숙종 8년 임술(1682,강희 21)
11월24일 (정묘)
영창군 이침 등이 청국에서 돌아오다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沈) 등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불러 보고 그 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부사(副使) 윤이제(尹以濟)가 말하기를,
“저들은 스스로, ‘남방(南方)은 이미 안정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태극 달자(太極㺚子)의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매번 황제와 함께 수렵할 것을 청하는데도, 청나라에서는 두려워하여 해마다 금(金) 3백 50만 냥을 주어서 때우고, 청나라 장수 장용방(張勇方)이 섬서(陝西)를 수비하며 꾀를 내어 묶어 두고 있는 까닭에, 아직 군사를 일으킬 일은 없으나, 이것이 복심(腹心)의 병통이 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몽고가 기세를 부리게 되면, 천하는 앞으로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어떻게 유독 해를 입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겠느냐? 훗날의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윤이제가 말하기를,
“심양(瀋陽)의 성곽(城廓)은 온전하고, 인민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산해관(山海關)의 북쪽인 무령(撫寧)·영평(永平)·통주(通州) 등지는, 성곽과 읍사(邑舍)가 무너진 것들을 전연 그대로 버려두고 있었습니다. 북경(北京)의 성문(城門)과 태화전(太和殿)도 모두 무너져 있었으나, 수리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퇴각하여 수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까닭에, 관내(關內)의 여러 지역들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심양과 영고탑(寧古塔)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어, 근거지를 삼으려는듯이 보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남방을 평정하였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대비 달자(大鼻㺚子)와도 군사를 서로 대치하고 있어, 태학사(太學士) 명주(明珠)의 아들을 보내어,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필코 무찔러 없애라.’고 하였다 합니다.
또 들으니, 청나라 황제가 곧 희봉구(喜烽口)에서 크게 사냥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북경을 출발하여 떠나려 할 때에, 세째 아우가 간(諫)하였지만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희봉(喜烽)은 곧 몽고 지방이므로, 그 속셈이 몽고에 군사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함인 듯합니다. 저들 나라가 근년에 심한 흉년으로 인하여 길거리에는 도적떼의 근심이 있어 사람들을 밤에 나다니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으며, 물가는 폭등하여 쌀이 귀하기가 금과 같고, 벼슬아치들의 탐풍(貪風)이 크게 유행하며, 사치(奢侈)하기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일선(李一善)도 말하기를, ‘눈앞에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가 곧 닥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흉년이 그 같은데, 탐욕이 풍속을 이루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꾸미는 문서(文書)마다 벌금만을 물리는 것으로 일삼는다면,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윤이제가 말하기를,
“지난날 예부 상서(禮部尙書)였던 분은 우리 나라 일이라면 모든 것을 크게 감싸주고 돌보아 주었는데, 근자에 액성격(額星格)이 상서가 되고서는 사람됨이 매우 까다롭고 세세하여, 이일선이 말하기를, ‘액성격이 예부에 오래 있게 되면 후일 일이 생길까 염려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38 집 613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태극 달자(太極㺚子) : 몽고(蒙古) 추장(酋長)인 황태길(黃台吉)·청태길(靑台吉)을 이름.
[주D-002]태화전(太和殿) : 청나라의 궁전.
[주D-003]대비 달자(大鼻㺚子) : 악라사(卾羅斯). 곧 러시아를 이름.
국역조선왕조실록 > 숙종 11년 을축(1685,강희 24) > 4월2일 (신묘) > 최종기사
사은사(謝恩使) 남구만(南九萬)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다... 중략...들으니, 대비 달자(大鼻㺚子)가 모반(謀反)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기에 청(淸)나라 사람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키어 가서 정벌(征伐)하고자 하여 산서(山西)와 산동(山東)과 광서(廣西)와 광동(廣東)의 군사를 수십여만을 다 징발(徵發)하였고,............
여기서 보면 분명 대비달자=악라사=러시아=몽골을 말하고 있으며, 대비달자에 대해 문견잡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문견잡기(聞見雜記) / 하(下) / 대비달자(大 鼻 韃子) :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靑眼),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오늘날의 러시아인을 말하고 있다. 즉 슬라브족의 계통들의 형상이다. 동방견문록에서는 쿠빌라이의 용모에 대해 폴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주들 중의 대군주인 쿠블라이 카안은 이렇게 생겼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의 알맞은 체격이고 아주 보기 좋게 살이 올라와 있으며 신체 모든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장미처럼 희고 붉으며, 눈동자는 까맣고 아름다우며, 코는 잘생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김호동 역주〕231페이지
Concerning the Person of the Great KaanThe : personal appearance of the Great Kaan, Lord of Lords, whose name is Cublay, is such as I shall now tell you. He is of a good stature, neither tall nor short, but of a middle height. He has a becoming amount of flesh, and is very shapely in all his limbs. His complexion is white and red, the eyes black and fine, the nose well formed and well set on.(The Travels of Marco Polo/Book 2/Chapter 8 〔translated by Henry Yule 헨리 유울: 펠리오와 함께 동양사학계의양대거물이다.〕http://en.wikisource.org/wiki/The_Travels_of_Marco_Polo/Book_2/Chapter_8
윗글은 마르코가 본 동양인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특징적인 부분은 키와 코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서양인이 보았을 쿠빌라이의 키는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중간이다’ 라고 생각한다면,그의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로 보이며, 체구도 균형이 잘 잡힌 준수한 외모이다. 코는 높고 잘 생겼다고 까지 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서양인의 관점에서 코가 잘 생겼다는 것은 통상 동양인 특히 우랄 알타이 몽골리안의 코생김새 와는 다른 것이다. 징기스칸이 타타르를 정벌했으니, 순수 타타르=러시아=슬라브와는 눈색과 머리색은 다르나 그의 용모는 마치 코카서스인을 연상하게 한다. 조선태조의 용모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용모와 조선 지배층의 용모에 대해서는 차후 서술하겠다. (오늘날의 헝가리/불가리아인들을 생각하면 참고가 될 듯 싶다.) 참고로 쿠빌라이 영정이라는 사진과 러시아인, 헝가리/불가리아인 사진을 올린다.
[사진]원세조 영정
s.t 이슈트반 1세 헝가리 왕
lajos 1세 헝가리왕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1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3세
한편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데 광서와 광동의 군대를 동원한다? 군사전략적으로 결코 합당하지 못하다는 판단이다. 특히 현 중국대륙의 광동,광서라면. 그렇다면, 광동, 광서는 서 아시아쪽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또 온성을 보면 만하 6진(滿河六鎭)이라 하여 조선 시대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에게 두만강 가에 여섯 진을 설치하도록 시켰는데, 그 6진은 경원ㆍ경흥ㆍ부령ㆍ온성ㆍ종성ㆍ회령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편
⊙ 온성 도호부(穩城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진 절제사(鎭前制使)가 이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경원도 좌익 병마(慶源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高麗)의 땅이었는데, 중간에 야인(野人)이 또한 그 땅의 빈 것을 틈타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다.【온(溫)과 온(穩)은 소리가 서로 근사(近似)하므로, 온(穩)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 세종 22년에 비로소 군(郡)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 이남에서 안변(安邊) 이북까지의 각 고을의 민호(民戶)를 옮겨 채웠다. 〈세종〉 2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11권 문집 론 온성론
唐書回紇傳曰。瀚海之北。骨利幹之地。
: 당서회흘전에 이르길, 한해의 북쪽은 골리간의 영역이다.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신당서(新唐書卷三十五 ,志第二十一, 天文一
http://www.xysa.net/a200/h350/17xintangshu/t-035.htm
若令距陽城而北,至鐵勒之地,亦差十七度四分,與林邑正等,則五月日在天頂南二十七度四分,極高五十二度,周圓百四度,常見不隱。北至晷四尺一寸三分,南至晷二丈九尺二寸六分,定春秋分晷五尺八寸七分。其沒地才十五餘度,夕沒亥西,晨出醜東,校其裏數,已在回紇之北,又南距洛陽九千八百一十五裏,則極長之晝,其夕常明。然則骨利幹猶在其南矣。
여기서 보면 회흘의 북쪽 골리간의 지역, 락양에서 구천 팔백리 지역에 백야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야현상
http://cafe.daum.net/3LinePoem/5hwR/14469?docid=LumH|5hwR|14469|20101116184409&q=%B9%E9%BE%DF%C7%F6%BB%F3
위도 대략 48 ° 이상인 고위도 지방에서는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 18 ° 이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백야가 되는 지역과 그 기간은 다음 식으로 알 수 있다.
90 °-φ-δ<18 ° 여기서 φ는 관측점의 위도, δ는 태양의 적위이다.
예를 들면, 북위 60 °에서는 90 °-60 °-18 °<δ가 되어, δ>12 °인 기간 동안 백야현상이 생긴다. 한편, 태양의 적위는 동지 또는 하지 때 최고 23.5 °에 이르므로 위도 48 ° 이하 지역에서는 백야현상을 볼 수 없다. 백야현상은 북극 지방에서는 하지 무렵에, 남극 지방에서는 동지 무렵에 일어나며, 가장 긴 곳은 6개월이나 계속된다.
이러한 기록에서 보여지듯이 온성에 백야현상이 있었고, 골리간을 언급하면서 다산선생이 온성을 거론한 것은 두 지역이 같은 지역내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북극지역으로 현재의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부르크, 스웨덴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대비달자, 몽골,타타르는 이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두만강과 매우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으로 이곳 남부에 올라산성이 있었으며, 그 지역은 서시베리아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한다.
ⓓ조선에는 사막(계문연수)이 있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경자년(1720, 숙종 46) 하
<일부발췌>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정유년(1777, 정조 1) 12월 25일
<일부발췌>
별산점(鱉山店) 30리를 가서 한낮에 왕씨(王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고 또 5리쯤 갔다. 멀리 바라보니 서남간에 긴 수풀이 끝없이 내다보인다. 연무(煙霧)가 반 이상을 덮었는데, 은해(銀海)가 출렁여 숲 사이의 인가(人家)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위로는 나무 끝에 가리어 희미하게 구름 사이로 출몰한다. 이것은 대개 시야가 아득하고 들 빛이 희미하며, 해협(海峽)이 가깝고 아지랑이가 은은히 비쳐 신기루(蜃氣樓) 같은 현상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보이는 것이 점점 없어진다. 참으로 1개의 기관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것을 매양 ‘북경팔경(北京八景)’으로 치는 것인데 소위 ‘계문연수(薊門煙樹)’라는 것이다. 《제경경물지(帝京景物志)》에서는, 연성(燕城) 서북 모퉁이 고계문(古薊門) 토부(土阜) 옆에 있는 임목(林木)을 경사 팔경(京師八景) 중의 연수(煙樹)로 치고 있고, 명 나라 김유자(金幼孜)의 제영(題咏)에도 분명히 지적한 것인데, 우리 사람들이 근거도 없이 잘못된 인습을 가지고 와전한 것 중에 이런 것들이 많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분명 압록에서 북경은 사막지대이고, 이곳은 幽州,燕京,薊 지역이다. 그래서 북경팔경 중의 하나가 계문연수(薊門煙樹)인 것이다. 따라서 북경/유주는 몽골,만주와 접해져 있고, 사막지대이고, 북방을 수비하는 관문의 중심지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며, 중원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락해야하는 요충지이다, 또한 강력한 기병을 가지고 중원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물들의 예로 안록산, 요태조, 주전충, 원세조 쿠빌라이, 조선태조 리성계등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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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상태님!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나는군요. 이 글을 세번쯤 나누어 실어주면 더 좋겠습니다. 너무 길어요! 다음에 계속되는 글도 조금 짧게 구분하여 실어주면 좋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본글을 나누어서 올려놓았습니다. 게시판을 도배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