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고성에 도착 했습니다.
고창고성은 원주민이 끄는 당나귀 마차를 타고 둘러 보았습니다. 원주민이 무언가 말을 걸어왔지만 전혀 알수가 없고
손짓 발짓과 짐작으로 겨우 의사 소통을 해본다. 나이와 자녀 정도....
고창고성은 고창국의 도읍터로서 당나라에 멸망한 국문태가 왕이었던 나라입니다.
이곳 고창고성 전성기에는 5만여명의 인구가 살았다한다.
당시는 흙으로 외성과 내성이 있었으며 흙으로 집을 짓고 굴도파고 살았다하나 그 굴들은 교하 고성과 달리 지상에 위치한
굴들이었으며 이지역들은 강수량이 적었기에 비바람 걱정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강수량이 없고 건조한 기후인 까닭으로 몇천년을 방치 해 왔지만 아직도 그 형태들은 남아있다.
국문태는 현장법사가 인도 여행을 할때 많은 도움을 준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현장은 짧은 기간동안 고창국에 머무려 했으나 국문태의 부탁으로 한달간 고창국에 머무르게 됩니다.
고창성엔 현장과 고창국왕의 사연이 전해지고 있었다.
현장이 구사일생으로 이오국(현재의 하미)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창국의 사자가 와 있었다.
그는 현장의 인품에 반하여 흠모하게 되었고 사자가 고창국으로 돌아가 열렬한 불교신자였던 고창국왕 국문태에게 보고하자,
왕은 준마 수십 필과 마차를 딸려 환영사절을 보냈다. 현장법사는 원래 고창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으로 가려했으나
고창국왕의 간절한 청원을 뿌리칠 수 없어 고창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은 당나라 현장법사가 불교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도중에 들러 국왕의 간청으로 한달간 설법한 곳으로 전해진다.
사막의 작은 나라에 불과한 고창국에 귀인이 나타나 설법을 베푼다는 것은 부처님의 계시와 같은 위력을 지녔을 것이다.
당시에는 돔형태로 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천장이 없어졌고 후세의 사람들이 아무리 복원을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실패를 했다고 한다.
이곳이 현장이 한달간 설법한 자리입니다.
이곳에 단이 있었고 현장은 국왕 국문태의 어깨를 밟고 단위로 올라서서 설법했다고 전해집니다.
국왕이 일개 승려를 위해 자신의 어깨로 발 받침을 해주었다는 일화가 국왕 국문태의 신암심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국문태는 심지어 고창국 사람 전체를 제자로 만들고 현장을 도사로 삼겠다며 떠나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결국 현장은 인도에 가서 불전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다시 고창국에 들리는 조건으로 고창국을 떠나는것을 허락받습니다.
그러나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십몇년이 걸려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 올때 쯤은 고창국의
국왕 국문태는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이 집권을 하고 있었기에 현장 법사는 이곳에 눌러 앉지 않아도 되었다.
고창고성 옆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군입니다. 고창국과 당나라 무덤 456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들에서는 2700건의 문건이 출토되었습니다. 대부분 불교와 마니교, 경교 등의 종교문서입니다.
그 중 특이하게 216호 분 묘실에는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풀이한 6첩병풍이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된 지하 고분 세곳을 들어가보았습니다.
물론 흙벽돌로 지어진 무덤인데 서민 관리 상인을 대표한 무덤 세곳이었으며 내부는 촬영 금지 되었으나
몇천년전의 그림과 조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습기가 없어서 미라와 유물들이 석지 않아 보존이 되어
온것이었습니다.
미이라가 있는 묘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무덤에는 6폭 인물도가 그려져있었고 한 폭씩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써야 할 점들을 상징적으로 청결 말조심 인격 등을 강조하여 삶의 교훈을 주고자 한 것으로 보였다
이곳은 교하고성입니다.
교하고성은 말그대로 물이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로 흐르는 물이 2갈래로 갈라져 고성을 돌아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흐르고 고성은 섬과 같은 지형이며
교하고성은 평평한 땅 앞에 부딪친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깊은 협곡을 이루어 형성된 천혜의 요세입니다.
연약한 흙이 흐르는 물에 깍여, 양쪽으로 몇십미터 높이의 계곡을 만듭니다.
아래를 쳐다보니 그 높이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며 작은 그랜드 캐년 같은 느낌이....
교하고성은 버들잎 모양이며 2천년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남북1,7km 동서 300m의 크기입니다.
대략 5,6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불교 탑들이 많이 보이고 카레즈가 건설되기 이전에
투르판에 사람이 살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크로드의 유적 중 200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보전이 잘 된 곳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더운 지방인 관계로 지하로 흙을 파내려가 여러 시설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차사전국은 고창국에 지배를 받다가 다시 당나라 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고창국 시대는 고창국 외곽 수비를 위해 군사 주둔지로 쓰였다고 했다.
한때는 몽고의 징기스칸이 이곳을 침략하면서 요새와 같은 언덕위에 지하로 구성된 시설물들로 인해 점령이 어려워
교하성을 포위하고 한달 이상을 지켜서 외부와 고립시키고 식량과 생필품 공급을 막고 교하천에 독약을 풀어
교하성 우물에 독약이 스며 들게하여 군사들을 독살하였다 한다.
우리의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도 이 교하고성을 지나 실크로드를 횡단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래는 동문을 지키던 초소....이 교하성은 동문과 남문 2개의 성문과 5개의 우물이 있었다.
교하성은 고창성과 달리 언덕위에 위치하면서 지하로 굴을 파서 생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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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대불사가 있던 자리다.
교하 고성의 제일 높은곳에 사찰이 있었다. 사찰의 이름은 대승사이다. 대승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말해준다
1천 오백년 전 예 고성의 폐사지에 불과하지만 왕궁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으로 보아 불교의 위력과 불자들의 신앙심을 짐작할 만하다. 이 성을 축조하는데 22년여가 걸렸다고 한다.
저 낭뜨러지 교하성 밖 계곡을 끼고 교하성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터전이다.
교하천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이곳이지만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내려 겨울을 빼고는
마르지 않는 강이다.
현지 조선족 가이드와 함께....
천연의 요새 수십미터의 자연 토성을 보십시요.
투루판의 수리시설 '카래스"
카레스는 중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만리장성과 남북을 잇는 대 운하와 함께 고대 3대 공사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2,000년 전의 한나라시대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수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투루판에는 물이 없으므로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을 끌어와야만 하였다. 너무나 건조하고 더운곳이라 지상으로는 물이 증발하여 수로를 이용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하로 물을 끌어 와야했다.
만연설이 녹아 흐르는 계곡을 따라 땅을 파고 지하수를 연결시킨 수로가 카레스이다.
투루판 지역의 이 지하 수로는 총연장 5,000Km수준이며 투루판 사람들이 이 수로를 이용 식수도 해결하고 농사도 짓고 있다.
지하에 있는 카레스박물관에는 수로 곁으로 당시의 수맥을 찾는 방법, 우물을 파는 모습, 지하수로의 토사를
끌어 올리는 시설 등을 모형석상으로 만들어 진열 되어 있었다.
투루판의 포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레즈입니다.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180배나 많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바로 지하수로입니다. 찬산산맥의 눈녹은 물을 지하 수로를 통해 투르판 시내까지 끌어들이는 대역사를 벌인 것입니다.
카레즈는 페르시아어로 '지하수'라는 뜻이라고 하기도 하고, 중국인들은 카레즈를 굴착할 때 쓰는 도구, 즉 흙나르는 광주리를
부르는 운토광(運土筐)의 중국어 발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카레즈는 네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수직으로 파내려 간 水井, 우물과 우물을 잇는 암거(暗渠), 하구로 내려오면서
드러난 물길인 명거(明渠), 그리고 몰길의 종점에 물을 저장하는 노패(澇珼) 가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볼록한 것이 수정이고
그 사이를 잇는 지하수로가 암거입니다.
카레즈는 3인- 5인 1조로 작업을 하는데 한명이 흙을 퍼내면, 뒤로 날라주고 다른 한명은 수정에서 흙을 위로 퍼올리는 것입니다.상류로 올라갈 수록 고도가 높기 때문에 우물은 그만큼 깊이 파야 합니다.
하나의 카레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킬로에서 수십키로미터 수로를 파야합니다.
불과 지름 1m정도의 공간에서 이루어 지는 이런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 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카레즈가 천여갈레나 되며 총연장은 무려 50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포도 건조대 /투르판의 포도는 이곳 사람들이 수천년간 혹독한 자연과의 싸움에서 얻은 값비싼 보물이다.
투르판의 포도가 유난히 달고 맛있는 것은 건조한 사막에서 이민족이 만들어 낸 보물이기 때문일것입니다.
소공탑....
소공탑은 이슬람 사원이며 이슬람의 무덤이다. 한편으론 사막의 등대로 불리워 지기도 한다.
역시 이것도 흙벽돌로 축조되었다.
포도 농장 방문 각종 건포도 시식과 위그로족 민속 공연/포도 시즌에 들리면 당도가 높은 싱싱한 포도를 맛볼수있다
이날의 관광을 모두 마무리하고 투루판의 명물 양고기 통구이 바베큐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민속 공연 관람...
양 한마리로 우리 일행 8명이 떡을 치고 ....
숙소인 교하 호텔로 돌아와 투루판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오전 시간 내내 사막길을 달려 우루무치로 향하며 차창관광 했다.
우루무치로 향하는 길목엔 소금 호수도 있었고 유전도 있었고 세계 제일의 풍력 발전소도 보았다.
광할한 사막에 펼쳐진 풍력 발전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연 에너지원으로 설치 할곳이 너무나 많았고
개발할 땅도 너무나 많았서 부러웠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신강성을 비롯 다른성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가 엄청 많지만 아껴두고 총 소비량의 60%만 국내공급으로
충당하고 40%는 수입 해서 쓴다고 한다. 그 60%도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우랄알타리산맥 부분 유전에서 집중
캐내어 사용하고 있단다. 왜냐하면 그 유전은 유맥이 러시아와 통해 있서 먼저 캐내어 쓰는 사람이 임자이니
확실한 국내 부분은 아껴두고 있다. 정말 부러운 사라다.
석유 구입 할 돈으로 황페한 땅에 나무나 많이 심어 이웃나라에 황사 피해나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경제권은 한족이 쥐고 있으며 모든 해택도 한족이 우선이며 소수민족은 취업도 어렵고 살기가 어렵다.
첫댓글 비 오는날 구름 덕분에 메마른 세상 구경 잘 하고 갑니다. 또 구름은 바람따라 어디로 가실까?????
댓글 주셔서 감사 합니다. 여행을 다녀온후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그곳들의 특징들을 메모 해 놓는 버릇이 생겨 정리한 겸에 올려 두었는데 다음 여행시 참고 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계획은 5월30일경에 실크로드 시작점인 중국 서안에서 돈황 까지 가보려 했으나 6월초에 행사가 겹쳐서 뒤로 미루어야겠네요.7월엔 스위스 딸아이집에나 갔다가 한달정도 머물면서 인접국이나 둘러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