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비보이의 춤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그들의 춤과 음악, 자유로움은 하나의 문화컨텐츠로 성장해, ‘마이너리티 문화’에서 ‘또 다른 한류’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 비보이의 폭발적인 성장의 축에 비보이 황대균이 있다 댄스 퍼포먼스 ‘더 코드’의 한 장면 ‘2007 코리아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배틀 중인 황대균 팀장과 T.I.P(Poto by Monica Chang) 1994년, 우연히 동네 형들의 춤을 본 소년은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혼자 연습을 시작한다. 얼마 후 소년은 학교 운동회 때 반대표로 춤을 춘다. 그 5분의 공연은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그저 그런 아이였던 소년을 학교에서 가장 춤 잘 추는 ‘스타’로 바꾸어 놓았다. 그 후 15년이 흘렀고, 지금 그 소년은 한국을 대표하는 비보이(B-boy)가 됐다. 바로 대한민국 1세대 비보이 황대균(29) 씨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춤추던 친구들과 ‘T.I.P’(Teamwork Is Perfect) 라는 팀을 만들었는데, 그 멤버와 명칭을 그대로 이어와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루에 8시간씩 연습하며, 국내에 내로라하는 댄서들과 매일 같이 배틀을 했는데, 제가 추는 춤이 ‘비보잉’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춤이 직업이 될 것이라는 목표 따위는 없었다. 단지 춤이 좋았고, 그때만큼은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았을 뿐이다. 황 팀장이 춤을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그가 짊어지고 있던 현실 때문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황 팀장의 집에는 엄청난 빚이 남겨졌고, 그 빚은 무려 20년 동안 가족의 발목을 붙들었다. 20살이 되던 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춤’ 하나였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연예인. 사실 황 팀장은 그룹 H.O.T의 창설 초기 멤버였다. 전 H.O.T 멤버 문희준 씨와 같이 오디션을 보고 당당히 합격했지만 준비기간 동안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결국 탈퇴했다. 황 팀장은 다시 한번 도전했다. 하지만 연예계 생활은 그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목이 아프고 뻐근할 정도였지만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싫었다. 결국 연예인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다시 언더그라운드로 돌아왔다.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떳떳했고 자유로웠다.
비보이, 세계대회 첫 수상 지금이야 비보이가 여러 분야에 활동하면서 관심을 받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보이는 부모 걱정이나 끼치는 그저 싹수 노란 녀석들에 불과했다. 이런 비보이가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바로 세계대회에서의 연이은 수상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황 팀장을 비롯해 8명으로 구성된 ‘비쥬얼 쇼크’의 ‘2001 독일 베스트 오브 더 이어’의 수상이다. “당시만 해도 ‘베스트 오브 더 이어’가 어떤 수준의 대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국내 예선에서 우승하면 세계 비보이들과 겨룰 수 있다는 정도였죠. 물론 해외 비보이들 역시 한국 비보이에 대해 정보는커녕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 관중 2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대회였습니다. 저희 팀 퍼포먼스의 중점은 부채를 이용한 ‘한국’의 이미지였습니다. 마지막은 대형 태극기를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였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습니다. 무대를 내려오니 그때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습니다. 다른 팀의 실력을 확인하면서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는데, 시상식 때 ‘비쥬얼 쇼크’라는 외침이 들렸어요. 바로 ‘베스트 쇼’라는 최고의 퍼포먼스 상을 수상한 겁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 팀이 호명됐고 이번에는 배틀 4위 수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비보이의 세계대회 첫 수상경력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 비보이가 세계에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 다음해부터는 ‘익스프레션’, ‘겜블러’, ‘라스트포원’ 등의 국내 비보이 팀이 차례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비보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마이너리티 문화’로 취급되던 비보이를 찾는 곳은 늘어났고, 문화관광부는 ‘신 한류’로 평가해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한국보다는 세계에서 먼저 인정받은 문화, 그것이 바로 한국 비보이다.
황대균의 또 다른 배틀 "사람들은 춤으로 언제까지 먹고 살 수 있겠느냐 걱정하는데, 그들은 비보잉을 단지 ‘춤’으로만 볼 뿐 ‘문화와 상품’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비보이는 분명 새로운 ‘문화 컨텐츠’입니다. 이미 많은 광고와 공연 등에서 비보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성공적인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동아시아 무용가 백향주 씨와 호흡을 맞춘 댄스 퍼포먼스 ‘더 코드’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 ‘더 코드’는 관음보살무, 고구려무희, 공작새 춤, 몽골춤 등의 동아시아 춤과 비보잉을 접목시킨 새로운 시도의 퍼포먼스였다. 서로의 영역을 최대한 드러내면서 호흡해야 했기에 보통 난관이 아니었다. 5분짜리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무려 1시간 20분짜리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이었지만 황 팀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더욱 욕심이 났다. 결국 더 코드는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랐고, 난타와 점프 등에 이어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2006년 6대 문화상품으로까지 지정됐다. 이후 황 팀장에게 러브콜이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삼성전자에 초정돼 ‘도전’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A-브리지’(A-Brige) 의 ‘드림 잇’(Dream it) 뮤직비디오에 주인공을 연기했다. 일주일에 두 번 서울예술종합대학 스트릿댄스과에 강의도 나간다. 최근에는 삼청각에서 외교관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 타임코드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뮤지컬인데 무술과 마술, 비보잉 등을 접목한 환타지입니다. 외국의 라이온킹이나 태양의 서커스 등을 볼 때마다 저런 대규모 공연을 제작해 해외에 수출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었습니다. 주위에서는 타임코드를 제작한다 해도 규모가 너무 크고, 비보이라는 편견 때문에 대형 공연장을 확보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 나가서라도 공연을 할 겁니다.” 단지 대형 뮤지컬을 제작하고 싶다는 꿈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후배 비보이들에게 좋은 밑거름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의 바람도 담겨 있다. 황대균 팀장은 종종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돈을 많이 벌겠다’고 대답한다. 이 역시 비보이 관련 수익사업을 펼쳐 그 이익금을 다시 비보이를 양성하는 데 쓰고 싶은 목표에서 나온 것이다. 후배들에게 실력과 열정을 가진 선배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성공이 그들에게는 곧 하나의 목표가 된다는 황 팀장의 생각이다. “비보이들은 나이가 들면 어린 비보이와의 배틀을 꺼려합니다. 이겨야 본전이고 지면 손해죠. 하지만 저는 그런 배틀 스타일을 즐깁니다. 우리나라 비보이의 역사가 짧은 것이지 나이가 많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힘든 만큼 저에겐 큰 모험이고,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도전했을 때의 두려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황 팀장은 ‘휴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기도 한데,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그 시간에는 항상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 운전을 할 때도 음악을 틀지 않는다. 생각하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춤 하나에 목숨을 건 황대균 팀장과 대한민국 비보이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치열한 노력이 또 하나의 새로운 대한민국 비보이 역사를 탄생시키길 기대해 본다. ‘나에게 있어 새로운 퍼포먼스는 도전이기도 하다. 춤을 만들고 연습하는 동안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배틀이다. 나는 늙지 않는다. 비보이기 때문에……’ - 중앙일보 조인스 닷컴 황대균 씨의 칼럼 중-
<자동차생활, 2007년 08월호 - 저작권자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