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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개속에 묻혀가다”
김 용 필
그가 화서도를 찾은 것은 꼭 32년 만의 일이다. 낮선 해양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는 마도로스에겐 고향이란 것이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사치스런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다. 조국, 고향, 그리운 사람들과의 결별은 그 땅이 그에게 가슴 아픈 사연을 너무 많이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절대 다시는 영혼까지도 그 땅에 발을 딛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뱃길을 인천항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는 평생 바다에서만 살기를 고집한 국제 화물선 선장이었다. 필립핀 무역회사 소속 화물선의 선장으로 화물 운송차 상해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가 기수를 인천항으로 돌린 것은 1주일이란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운 조국,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날 땐 하늘을 향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을 왜 생각나게 하느냐고.......그러나 5대양 6대주를 떠돌았지만 어느 한곳 그가 정착할 땅은 없었다. 마도로스에겐 머무는 곳이 고향이다. 이 항구, 저 항구, 정을 남기고 그걸 추억하며 사는 집시 같은 삶이었다. 그는 순간의 기분만으로 행복을 느끼고 살았다.
어느덧 화물선은 해무 짙은 대한민국 서해로 깊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이곳을 떠날 때도 그랬다. 인천항의 해무는 세계적인 것이었다. 그 안개 속에 젖으며 인간이란 존재가 무력함 속에 빠지고 만다. 언제나 그랬다. 짙은 해무는 불길한 사건만을 예감케 했다. 그는 안개 속을 깊숙이 들어서서 인천항에 정박할 의사를 조타하고 있었다. 꼭 일주일만 머물 생각이었다. 대체 일주일 동안 이곳에서 뭘하려고 찾아온 것인가? 그는 누군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한국을 떠난지 꼭 45년 만의 일이다. 화서도 공작원 탈출 사건이었다. 고된 훈련과 인간적인 대우를 해달라고 일어선 폭동이었다. 세상 사람은 그들을 간첩단이라고 불렀다. 31명 중 모두 사살로 탈출은 끝났다. 그런데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다. 누구도 살아 있으리라고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31명의 탈영군 속에 한 사람의 생존자가 있었다.
그는 거대한 화물선을 인천항에 입항시켜 놓고 체류 수속을 마친 후 조용히 선장실에 앉아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생각하면 정말 불행한 인생이었다. 고국이 싫어서 외국을 떠도는 사나이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찾아왔단 말인가. 그러나 그에겐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려고 찾아온 것이다. 그에겐 조국은 무거운 짐이었다. 조국이 그를 버렸고 그가 조국을 버렸다. 납북되어 북한에서 1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지옥의 땅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해 생사결단으로 탈출을 했으나 죄명은 간첩이었다. 그것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공작원으로 착출 되었다. 그러나 대우받지 못한 굴욕을 견딜 수 없어서 또 탈출을 하였고 이 나라에서 사람으로 대접 받을 수가 없어서 먼 외국으로 밀항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배에서 내려 곧장 화서도행 여객선을 탔다. 그리운 섬 화서도, 지긋지긋한 악몽이 되살아났지만 그래도 추억의 섬이었다. 정말 많이 변했다. 그는 모텔을 잡아놓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인도 였던 화서도가 관광지로 바뀐 것이다. 가까운 영종도에선 비행기가 쉴 사이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해수욕장엔 방갈로에 채워져 있었다. 그는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섰다. 해변을 거닐며 지난 추억 속의 일들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화서도 공작원 폭동 사건의 주역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마음속에 무겁게 내린 짐을 풀어버리려는 힘겨운 결단이었다. 물 나간 화서도 해수욕장은 하얀 갯벌을 드러내고 햇빛이 강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햇볕에 드러난 갯벌에 작은 생물이 꿈틀대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섬의 느릅나무 숲에선 향긋한 목향이 풍겨 나왔다. 그때는 이런 향기조차 맡을 수 없는 고통의 땅이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은 최병문 교관이었다. 그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찾다가 우연히 최병문씨의 거처를 알게 되었고 그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마음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풀기 위해서였다.
1971년 공작 임무 수행할 날을 얼마 안 남겨놓고 대원들이 교관 몰래 긴급 모의작당을 하였다. 그것은 폭동이었다. 현지 지휘관과 교관을 사살하고 화서도를 탈출하자는 모의였다. 공작원해체, 국가를 위하여 큰일을 하겠다고 힘겹게 훈련한 결과가 무산되는 순간에 오는 회의였다. 그 심정을 권력자에게 하소연 하겠다는 결의로 폭동을 일으켰다. 마침내 어선을 탈취하여 31명이 인천으로 들어갔다. 인천에서 다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방송과 시민들은 군복을 입은 무장 공비가 서울에 난입했다고 소요하기 시작했다. 군경도 그들을 간첩이라고 단정하고 추격을 가했다. 그런데 그들은 간첩이 아니고 공작원이었다.
국민들은 공작원이란 존재를 아무도 몰랐다. 공작원들은 서울 대방동에서 군경과 충돌하면서 모두 사살 되거나 자결을 해버렸던 것이다. 군과 경찰은 31명의 탈출자 중에 한사람도 생존자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 속에 강동욱이란 이름도 있었다. 그는 살아서 도망을 갔다. 그런데 화서도 공작원 교관이었던 육군 준위 최병문은 전원이 사망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강동욱이 도망간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보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강동욱은 최병문 준위가 자신이 도망 간 것을 알면서도 전원 사살이라고 공포한 것에 평생 짐을 지고 있었다. 절대 세상에 나와선 안 될 사람이었다. 최준위의 결단은 한사람의 부하를 살리기 위한 거짓 증언이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컷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수소문하여 최병문 준위를 만남 용기를 냈다.
서해의 바다는 옛날처럼 칙칙한 그늘이 있었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바다만을 보아왔던 그에겐 다시 보는 칙칙한 흙빛은 가슴의 멍이었다. 바다에 익숙한 사나이. 바다를 절대 떠나선 살수 없는 그에겐 늘 이 화서도의 칙칙한 흑내음이 가시지 않았다. 물 나간 갯벌엔 생명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갯벌에 내 뒹구는 고동 게가 짝짓기를 하려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는 해변을 거닐며 자생하는 해당화 군락지 앞에 우뚝 섰다. 꽃이 지고 빨간 열매를 맺고 있었다. 해당화는 그녀가 좋아 한 꽃이었다. ‘하지란’. 잊을 수 없는 그녀. 그가 생존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여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서 꼭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과 머슴으로 만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었이다. 사실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깨진 것은 죽기 전에 최병문을 만나 사죄하고 용서를 빌려는 것도 있지만 그만이 그녀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화서도를 탈출한 대열에서 이탈하여 새 삶의 길을 찾아 도망을 다닐 때 만난 여인이며 그를 숨겨준 은인이었다. 그는 해변에 앉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몽롱한 여운 속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곳은 고군산군도의 ‘무녀도’ 였다. 대열에서 이탈한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군산까지 내려왔고 어떤 어부의 도움으로 무녀도 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 고장 부자인 김달수란 선주의 집에 어부 머슴으로 들어갔다.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채 머슴으로 고용된 것은 이 집 마나님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처음은 호구지책으로 밥을 빌고자 일거릴 찾은 곳인데 이 집 안주인 하지란 부인이 그를 머슴으로 고용했고 그 날부터 그는 배에 나가서 어부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곱고 예쁜 주인마담은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사나이가 머슴으로 들어왔는데도 인간적인 동정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다. 눈이 유난히 크고 피부색이 고운 아름다운 미색의 부인이었다.
어부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겐 영원한 도피처가 될 수 있었고 그녀가 좋아서 어렵지 않았다. 그는 조기잡이 어선을 타고 거의 바다에서 살았다. 한번 나가면 열흘 이상을 바다에서 보내고 만선 때 들어와선 대엿새쯤 준비를 하고는 다시 출항을 하였다. 그가 탄 어선은 5명의 동료 선원이 타고 있었다. 어장을 치는 곳은 서해 전역이었다. 철을 따라 조기잡이, 꽃게잡이, 우럭잡이 등 여러 어종을 찾아 그물을 내리곤 하였다.
어장은 멀리 연평도나 백령도까지 달려가서 설치하곤 하였다. 이곳은 그에게 정말 안전한 도피처였던 것이다. 조업에서 돌아오며 주인마담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좋은 옷가질 사주고 봉급 외에 용돈도 두둑이 주었다. 꼭 반년을 그런 도피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들에게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음 출항을 위하여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는 늦게 해변 어선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야심한 밤, 주인아주머니가 야참을 해 가지고 왔다. 막걸리와 꼴뚜기 안주였다.
“강씨, 너무 고생이 많구먼요. 이거나 마시고 하세요.”
바로 주인 아주머니였다.
“아니, 이런 야심한 밤에 주무시지 않고 이런 음식을.......”
“너무 고생이 많아 대접하고 싶었어요. 우리 같이 마셔요.”
며 그녀는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잘 익은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그도 그녀의 잔을 따라주었다. 잔을 주고받다가 두 사람은 몽롱하게 취해 버렸다. 그녀는 홍조빛 볼에 수줍은 연민의 표정에 연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씨는 참 매력 있는 몸을 가졌어요. 힘이 넘쳐요.”
“젊어서 그렇죠.”
“여자 친구가 있어요? 어느 여자인 들 군침을 안 삼키겠어요?”
“무슨 말씀을....... 주인마님 고마워요, 오갈 데 없는 절 이렇게 극진히 보살펴주시니 말입니다.”
“강씨, 미안해요, 아무리 봐도 강씨 같은 사람이 이런 외딴 섬에서 어부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내일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항상 마음속엔 어느 날 갑자기 떠날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서 머물지만 곧 떠나겠지 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반년이 지나도록 강씨는 우리 집 일을 도와 줬지요. 고마워요.”
“고맙긴 저가 고맙죠. 사실은 전 갈 곳이 없답니다. 하던 사업 다 말아먹고 살아갈 용기마저 없었는데 주인마님이 잘 봐준 덕분에 잘 버티고 있어요.”
“정말 갈 곳이 없나요? 처자식은?”
“없어요, 혈혈단신인걸요.”
“강씨 같은 남자가 혈혈단신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사실이랍니다.”
그는 먼 허공을 바라보며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 죄송해요. 어머니, 그는 어머닐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가 갑자기 가슴을 내밀며 다가섰다.
“강씨, 그 넓은 가슴으로 절 좀 안아줘요. 저 외로운 여자예요.”
그녀는 볼을 붉히며 그에게 기댔다. 여인의 살 냄새가 내부로 스며들면서 왈칵 어떤 흥분 현상이 일어났다. 욕정이 몰아쳤던 것이다. 부드럽고 고운 피부가 볼에 닿자 오금이 조여드는 황홀함이 일었다. 그녀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부인, 이래선 안 됩니다. 내가 부인 집에 살 수 없잖아요.”
“좋은 걸요. 난 강씨가 좋은걸요. 어느 여자가 강씨 같은 사내를 보고 품어보고 싶지 않겠어요.”
“남편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안겨왔고 그는 그녀를 더 깊게 포옹했다. 새역사는 다시 창조되고 있었다.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강씨, 떠나지 말아요. 오래 같이 살아요.”
그녀는 두 팔을 짝 펴고 늘어지면서 말했다.
“사장님을 어떻게 봐요? 난 사장님께 죄를 지었어요.”
“걱정 말아요.......비밀이잖아요. 그리고 내가 먼저 한거잖아요. 내가 강씨를 좋아한걸요.”
그 후 그녀는 남편 몰래 그를 불러 들였고 그들의 섹스 행각은 남편의 눈을 피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물일에서 돌아오면 그녀는 그를 은밀한 곳으로 끌어들여 섹스 행각을 벌렸다. 그녀는 그를 남편 이상 대접했다.
“이제 관계를 끊어요.”
“두려울 게 없어요. 남편은 불구예요. 사내구실을 못 한다고요.”
“불구, 사실인가요?”
“돈만 보고 시집왔는데 와서 보니 성불구였어요. 돈만 가지곤 못살겠어요. 내겐 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남자가 필요해요.”
“그렇지만 이건 안돼요.”
“우리 도망을 가버릴까? 난 절대 강씨를 놓치지 않을 거야.”
“부인, 저도 부인을 사랑해요, 그렇지만.......... 전 안돼요.”
주인 마담은 그를 남편 이상으로 극진히 모셨고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의 정사는 남편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두 사람은 이제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은 아이의 탄생에서 시작 되었다. 부인이 임신을 한 것이다. 남편은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말에 놀라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표정은 괴로움에 차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불구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참고 있기란 힘든 고통이었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두고 참았다. 그것은 우울증을 유발했다. 그런데도 남편 몰래 두 사람의 정사는 계속 되었던 것이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부인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불행이 찾아왔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야?”
남편이 아내를 다그쳤다.
“당신의 아들이지 누구 아들이겠어요?”
“정말 내 아들이야?”
“그럼요, 능력이 살아났나봐요.”
“정말!”
그런데 그날 밤 어선 창고에서 강씨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한참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허리를 몽둥이로 내쳤다. 벌떡 일어나보니 사장이었다.
“머슴 놈이 감히.........”
라고 소리치곤 남편은 발가벗은 아내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어창을 나갔다. 큰 일이 났다.
“도망을 가요.”
그녀가 외쳤다. 그러나 부인이 당할 것을 생각하니 도망을 갈수가 없었다. 그냥 어창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남편이 찾아왔다.
“꼭 한번만의 실수로 넘기겠어, 다시는 아내를 만나지 마라.”
무겁게 한마디 하였다.
“네 주인님,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기잡이 나갈 준비나 해요.”
용서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전부터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내가 어떤 자의 자식이든 아이를 낳아주길 바랬던 것일까? 그래서 침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기잡이배를 몰고 바다로 나갔다. 그후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었고 부인도 미소를 띠며 살갑게 대했다. 그러나 이제 이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런데 남편이 불렀다.
“나갈 생각 같은 건 말아요.”
“네. 사장님.”
그러나 부인은 남편 몰래 그를 불러냈고 정사는 계속 되었다. 도저히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배를 타고 백령도 근해로 꽃게잡이를 나갔다. 배엔 2명의 어부가 동승하였다. 해무가 자욱한 바다에 그물을 내려놓고 꽃게를 유인하고 있었다. 안개가 끼며 꽃게가 많이 오른다. 그가 시름없이 짙은 해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동료 어부 2명이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그를 들어 물속에 던져버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떨어져 허우적댔다. 그러나 동료 어부들은 그를 구해주지 않고 배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백령도 쪽으로 멀어져 갔다. 주인의 사주를 받은 살인이었다. 그들은 그를 수장 살인하고 유유히 떠났다. 틀림없는 주인의 수작이다. 주인 남편이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대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데 그 태연한 위장 속엔 무서운 증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용서라는 말은 살인의 경고였고 미소 띤 표정은 마의 증오였다. 아내를 범한 사내를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바다에서 허우적이고 다니다가 의식을 잃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땐 북한군의 경비정이었다. 북한의 경비정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조난당한 어부로 생각한 북한 경비정은 그를 구출하여 북한으로 끌려갔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의도한 죄가 없다고 집단 농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북한에 살면서 고통스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녀에 관한 소식을 모르고 20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와 그 자식이 그리워졌다. 그 자식이 보고 싶어서 마침내 그는 북한을 탈출하였던 것이다.
여름 바다 석양에 낙조가 붉은 물을 발하더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해변에 어둠이 내리고 사람들은 다 방갈로 속으로 들어간 후 한 무리 갈매기 떼들이 해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인근 암벽에 보금자릴 틀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방갈로 숙소로 돌아왔다. 어둠은 고요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분명히 온다고 했는데........
최병문,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시간은 밤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오지 않았다. 그가 오늘 오지 않으면 내일 오겠지, 아무튼 일주일간의 시간이 있으니 만날 수 있겠지. 일주일 후에 배를 상하이에 대야 한다.
그는 눈을 감고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있었다. 최병문, 하지란, 그리고 그 아이, 화서도 공작원 시절, 힘든 훈련 때의 불안과 공포가 되살아났다, 힘든 어부생활, 중국에서의 난민 생활, 필립핀으로 방황, 그리고 원양어선을 탔던 기구한 운명이 추억으로 되살아나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지난 세월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노크소리 똑, 똑, 똑 세 번,
“강동욱씨, 강동욱씨.......”
뇌리에 익은 목소리 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 앞에 서있는 60대 후반의 노인, 어둠 속에서도 그가 최병문씨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들어오세요. 최병문 교관님.”
“강동욱씨가 맞나요?”
“네, 교관님, 제가 강동욱입니다.”
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늙었군요.”
“교관님도요.”
“세월이 32년이나 흘렀으니까요. 어떻게 알고 날 만나자는 이유가 뭡니까?”
“수소문했지요. 꼭 물어볼게 있어서요. 교관님은 그 날을 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요.”
“그렇지만 전 평생을 괴로워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교관님은 왜 절 살려뒀습니까? 도망가게 했잖아요. 그렇게 살려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라고 했잖소.”
“그러나 그 의문이 평생 날 괴롭혔습니다. 왜 내가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란 말을 하지 않고 비밀로 붙였느냐는 겁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강동욱을 바라보았다. 60이 넘은 주름진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는 그때의 사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운이 좋아서 사살되지 않은거죠.”
“그런데 내가 도망갔다고 신고를 왜 안했나요?
“살고자 하는 인간의 절실한 절규를 저버릴 수 없었지요.”
“내가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 쳤나요?”
“그랬지요. 그보다 나를 생각해서 살린거죠.”
알 수 없는 표현이었다. 화서도 공작원 탈출사건, 31명의 공작원이 군경의 포위망 속에서 모두 사살되었다.
화서도의 공작원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군인이었다. 그곳에 모인 병사들은 교도소에서 중형을 받은 인간쓰레기들이 자청하여 목숨을 국가에 내놓고 갱생의 길을 택했다. 죄값과 맞바꾸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고된 훈련은 빡세게 계속되었다. 최병문은 바로 공작원의 교육을 담당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교관이었다. 그는 도사견처럼 악랄하게 지옥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단계별로 추진되고 있는데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상부에서 공작원을 해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동안 받은 교육이 수포로 돌아가고 공작원 비밀을 아는 대원들이 골치였다. 다시 감옥에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회로 내보낼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 사실을 알고 대원들은 집단 탈출을 모의 하였다. 언젠가는 우리들을 죽일 것이다. 상부에 살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의사를 전달하자.
훈련 도중에 31명의 대원이 무장한 채 배를 탈취하여 인천으로 나가서 버스를 강탈해 타고 권력자를 만나러 갔다. 이 사실이 오도 되었다. 방송은 북괴 간첩이 서울로 진입 했다고 떠들어 댔다. 즉각 군경이 행로를 차단하였다. 대원들은 영등포에서 군경과 대치되었다. 그리고 교전 끝에 모두 사살되거나 자살을 해버렸다. 31명 중 30명이 죽고 한 명이 탈출했다. 그런데 30명이 탈출하여 다 죽었다고 보고를 끝내버린 것은 교관 최병문이었다. 이 대열에서 증발된 한사람은 강동욱이었다. 그런데 그도 죽은 것으로 처리 해 버렸던 것이다.
“교관님, 왜 내가 도망간 것을 알고도 내버려 뒀나요?”
“더 이상 묻지 마시요. 그건 내가 살기 위해서요.”
“그랬군요. 그때 총상을 입은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은가요.”
“천만다행으로 총탄이 목을 관통했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었소.”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강동욱, 당신은 그 후 어떻게 지냈나요?”
그는 고갤 떨어뜨리고 한참 울먹이더니
“원양어선을 탔습니다.”
“그랬군요.”
“네. 어부로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중국, 베트남, 필립핀으로 떠돌다가 원양어선을 타고 외국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고된 인생을 살았구먼요. 그러니까 국제 화물선을 타고 다녔다는 말이지요?”
“네, 어쩌다가 무역선 선장이 되었고요. 필립핀 여자와도 결혼을 했어요.”
“잘 됐군요.”
교관님은 그가 탈출하여 무녀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를 체포 할 수 있었는데도 체포하지 않았다. 그것은 문책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 때 내가 도주한 것이 어떻게 비밀로 묻혔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이젠 세상에 나와도 됩니다. 아무도 당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한국에 와서 여생을 같이 보냅시다.......”
“전 죽은 사람입니다. 절대 교관님께 누가 되는 일은 안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만나자고 했나요?”
“이 말을 묻고 싶어서였고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하지란 부인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세요? 내가 그때 무녀도에서 하지란 부인과 그런 사이라는 것을 교관님이 알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그 부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교관님은 내가 그 집에서 머슴을 산 것 등, 내가 움직이는 동태를 일일이 알고 있었잖아요. 무녀도로 날 잡으러 왔잖아요. 그런데 잡아가지 않았잖아요.”
“당장 잡아서 감옥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인간적인 동정이 그렇게 할 수 없었지요.”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하지란씨 소식은 모르는군요?”
“어딘가에 잘 살고 있겠죠. 왜 그녀의 소식이 알고 싶은가요?”
“그녀는 내 자식을 낳았거든요.”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자식을.......?”
“네. 그녀와 내 자식을 잉태했었거든요.”
최병문씨는 다시 고갤 떨어뜨리고 깊은 생각에 젖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강동욱씨가 무녀도를 떠난 후 그녀는 남편에게 소박을 맞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쫓겨난 그녀는 당신을 찾아다녔지요. 그런데 당신이 남편에 의해서 바다에서 수장사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나갔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찾지 않았답니다.”
하지란과 최병문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상부에서 알았다. 쉬쉬하면서 생존자를 잡아 드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최병문은 강동욱의 뒤를 밟고 다녔다. 그를 살해하려고 뒤 따라다녔다. 그러나 차마 잡아 드릴수가 없었다. 기구한 그의 인생에 한줄기 희망과 인간다운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내 강동욱이 죽었다는 것을 부인으로부터 알게 되었고 강동욱 때문에 소박을 맞고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동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으려고 하였다.
“난 당신이 하지란의 남편에 의해서 죽은 걸로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그리고 절대 다시는 화서도 이야긴 꺼내지 맙시다.”
“저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입니다.”
“의문이 풀렸다면 이제 볼일이 없네요.”
“교관님, 그런데 부탁이 있습니다. 하지란 씨를 찾아주십시오.”
“하지란씨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나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했던 꼭 한명의 여인이고 내 아들의 어머니까요. 내 아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래요.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런데 얼마나 머문다고 했지요?”
“일주일입니다.”
“알겠소.”
그는 어둠의 해변을 걸어 나갔다. 그러나 하루, 이틀, 며칠을 기다려도 최병문씨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출항 날이 가까워지는데 초조해졌다. 그는 갑판에 기대어 먼 항구를 바라보며 하지란 을 그리고 있었다. 자식이 보고 싶었다. 그 아이가 잘 자랐으며 서른 살이 넘었을 것이다. 내일이면 출항을 해야 한다. 24시간, 운명의 시간이남았다. 한 시간 두 시간 다가오는 시간의 흐름 속에 그는 애탄 가슴을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는 걸려 오질 않았다.
사실 아픈 상처 때문에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딛지 않으려던 결심을 했건만 그의 한마디 진실을 듣고 싶어서 귀국을 했지만 그를 만 난후 그녀와 자식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최병문 씨의 말이 떠올랐다. ‘문책 받기 싫어서 침묵했어요.’ ‘기다리시오, 알아봐드리죠.’ 허무한 무너짐, 무너지는 허무 뒤엔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정 조국을 떠났던 이유는 죽은 자로 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에도 살지 못하는 변방의 경계인이었다. 그래서 정착을 못하는 아웃사이더 였다.
출항전야,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서둘러 중국으로 가서 화물을 싣고 싱가포르로 오라는 것이었다. 긴급명령이었다. 그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러나 최병문의 연락은 없었다. 그는 배에 올라 출항을 준비했다. 기적을 울리며 방향키를 돌렸다. 출항, 다시는 어떤 미련도 그리움도 지워버리기로 했다.
배는 어느덧 인천항을 떠나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핸드폰 전화소리.
“여보세요”
굵직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강동욱 선장님이세요.”
“그렇습니다. 누구세요?”
“전, 하지란씨 아들입니다. 최병문씨는 저의 아버지고요.”
“뭐라고요? 최병문씨가 아버지라고요?”
“네, 어머니가 망설이기에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왜 직접 안하고요?”
“용기가 안 나나 봐요.”
“강동욱 선장님, 어머니께 전화를 해보세요.”
청년은 하지란의 핸드폰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받을까요?”
“받을 겁니다. 아버지! 잘 가세요.”
라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버지, 아버지라고......그 청년이 분명히 아버지라고 했다.강동욱 선장은 곧장 하지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최병문씨가 남편입니까?”
“네, 제 남편입니다.”
“그리고 내게 전화를 걸었던 청년은 최병문씨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강동욱씨 아들입니다.”
그녀는 한참 흐느끼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우두커니 먼 인천항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이 아들이란다. 기막힌 사실이었다. 배는 힘차게 서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하지란과 최병문은 부부였고 청년은 그의 아들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하지란과 최병문 교관이 부부가 된 데는 운명적인 사연이 있었다. 하지란은 선주 남편의 학대에 못 이겨 가출로 방황 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물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이곳에 와 있던 최병문이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녀를 강동욱이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강동욱 때문에 소박을 맞은 하지란 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여인을 그냥 볼 수 없어서 동정으로 시작 한 것이 결국은 같이 살게 된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최병문은 평생 강동욱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은 살고 있었다. 언젠가 그 사건이 불거질 때 무서운 책임과 문책이 따른다는 것에 고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여인과 아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고 살아야 한다. 몇 번을 죽었을 생명이 덤으로 사는 삶인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이며 사치다.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 고국을 떠난 변방인 이 아닌가,
배는 어느덧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희미하게 서해 바다가 멀어지고 있었다. 절대 다시는 저 땅에 발을 딛지 않으리라. 그는 크게 기적을 울렸다. 해무가 짙게 내려 시야를 가려 앞이 안보였다. 지독한 해무, 해무가 끼며 늘 사건이 벌어졌다. 화서도를 떠나던 그 날도 백령도에서 죽을 뻔 한 그 날도 해무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안개 속에 묻혀가듯 변방을 헤매어야 할 영원한 경계인인 자신이 한없이 처량했다. (끝)
작가 프로필
소설가 : 김 용 필 (美岡)
-약력-
KBS 교육방송 극작가로 데뷔하여 소설집 「청살무」로 등단. 한국소설가 협회 이사, 마포문인협회 부회장 역임, 국정 홍보 리포터, 여수 인터넷 방송 주필, 칼럼리스트.
수상 : 바다문학상, 여수 해양문학상, 등대해양문학상, 창작스토리 공모상, 월드컵문학상, 직지 소설문학상
장편소설 : 잃어버린 세월, 인간사냥, 사마르칸트 여인, 잃어버린 백제, 아골타의 황금제국, 연암 박지원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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