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文敬公 諱 稱 墓所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이천리 산55번지에 있으며 서기 1369년 고려 공민왕18년 에 태어나서 서기 1439년 조선 세종21년 12월 28일 별세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이곳에 禮葬으로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적은 河陽이시다. 字는 仲通 호는 敬菴이다. 서기 1390년 고려 공양왕2년 文科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후 좌보궐에 특임되고 이어 봉상시승으로 禮制의 제도화에 힘썼다. 서기 1400년 정종2년에 사헌부의 집의, 판내섬시사등을 역임하였다. 1411년 태종11년 예조참의가되어 처음으로 學堂을 세우게하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喪制 등을 法典化하는데 노력하였고 서기 1416년 태종16년에 예조참판에 승진하고 1419 년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 서가 되시었다. 1433년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서기1439년 12월 향년71세로 일생을· 맡쳤다. 이에 세종은 국장을 반포하고 諡號를 文敬이라 했다. 世宗 三十여년을 태평성대라 일컬었으며 聖王이라 이름한다. 당시에 명상 黃海 村의 知體와 許敬菴의 正大함이 그 根本이였다고 후세인들이 지적한다. 公이 卒함에 世宗은 그자리를 비워둔채 2년, 公의 大祥을 지나고 그 후임을 임명하였다하니 世宗이 얼마나 그 人材를 중히 여겼는가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公의 출생시기가 고려말엽이라 국정이 문란하고 사회기강이 혼탁하니 土林들이 모두 책이나 읽고 시나올으며 한가로히 묻혀살기를 즐겼으나 유독 文敬公만이 댓상현의 정훈(가르침)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힘써 실천할 것을 주장하며 지행일치 를 솔선수범으로 실천하므로 그후 한흰당 김종직,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제 이언적, 되게 이황, 제현이이어서 출현함에 동방유학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 시었다. 公의 뜻을 기리어 士林이 경상도 河陽땅에 琴湖書院을 세워 후학육성과, 敬菴思 想연찬에 힘써오다 서기 1790년 正宗 庚戌年에 宜額이 내렸으나 1871년 高宗8年 辛未年에 厄을 당하였다. 그후 土林이 지난날 서원이 있던곳에 碑石을 세워 그곳을 안게하고 또한 子孫世居의 땅 釜谷에 六架屋을 건축 폭湖書院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敬花墓域은 世宗朝때의 국장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어 당시의 제도를 고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하여 학계에 주목을 받고있으며 당시 세워졌던 남수문이 지은 비석이 그대로 있으나 문자가 풍우에 훼손되어 식별이 불가능하므로 근래 다시 돌을 구해 각자하여 세웠다. 公은 小學과 中庸을 精讀하여 모든 처신에 根本으로 삼으니 太宗, 世宗 世代에 宰相으로서 輔弼할때 五禮六典을 편찬하고 成均四學을 建立하여 堯舜의 聖世를 인도하였다. 참되게 살다가신 公의 발자취는 후손으로써의 자긍심과 인생을 살아가는 밝은 둥불의 역할을 해준다 하겠다. 1991.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