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리틀 사이공’의 영웅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2년 5월 초 어느 날, 전 선장은 한 재미 교포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미국에 있는 피터 누엔씨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전 선장은 누엔씨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찾으려 애쓰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두 사람은 그 뒤 편지와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을 주고받다가 2003년 가을 무렵 서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2004년 5월 전 선장은 누엔씨로부터 미국에 와 달라는 초청장을 받는다. 전 선장과 누엔티
전 선장이 LA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은 2004년 8월5일. 그때 이미 전 선장은 미국 내 한국교포 사회는 물론 베트남인 사회의 영웅이 돼 있었다. LA의 베트남 커뮤니티인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의 최대 일간지인 ‘누이 비엣’지가 전 선장이 방문하기 1주일 전쯤인 7월27일, 20여년 전 한국인과 베트남인 간에 벌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휴먼스토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는 베트남 보트 피플 출신 피터 누엔씨가 20년 전 남중국해상에서 자신들을 구조해준 한국인 전 선장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연락이 돼 미국으로 초청했다는 내용이었다. 전 선장이 인도적인 난민 구조를 했음에도 선장직에서 쫓겨났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 있었다.
미담은 한인 언론과 미국 주류 언론에 잇따라 보도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보트 피플이 주축이 된 미국 내 베트남 커뮤니티는 거족적인 ‘환영위원회’까지 구성할 정도였다.
지난날 공산 베트남을 탈출해 보트 피플이 되었던 사람들은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조를 외면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의 주변 국가들조차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선창에 구멍을 내면서 까지 항변에 나선 난민 선박이 있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전 선장이 보여준 행동은 리틀 사이공에서 ‘영웅’으로 칭송되기에 충분했다.
리틀 사이공은 미국에서 베트남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코리아타운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정도, 오렌지카운티의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는 불과 몇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975년 4월30일 수도 사이공이 공산 베트남 정권에 의해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뀌자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타운 이름을 ‘리틀 사이공’으로 내걸고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2004년 8월5일 오후 4시경, 전 선장은 부인 김기자(47)씨, 막내딸 휘진(16)양과 함께 대한항공편으로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공항에는 한 시간 전부터 누엔씨 가족과 ‘전제용 선장 환영위원회’ 관계자, 그리고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베트남인들은 한글로 ‘전제용 선장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왔다.
전 선장이 입국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누군가가 “영웅이 도착했다!”고 소리쳤다. 입술이 타들어갈 만큼 애타게 기다리던 누엔씨는 그 길로 뛰어나가 전 선장을 왈칵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전 선장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누엔씨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전 선장은 “참 오랜만이야. 11시간이면 이렇게 만나는데…. 몸 건강한 걸 보니 정말 기쁘군” 하고 말하며 “땡큐”를 연발하는 누엔씨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19년이라는, 실로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만남의 순간이었다.
피터 누엔씨의 세 가지 소망
1985년 전 선장의 구조를 받은 피터 누엔씨와 베트남 난민들이 부산 적십자난민수용소에서 찍은 단체사진.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수용됐던 누엔씨가 LA ‘리틀 사이공’에 정착한 것은 1987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살았다.
첫 번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 전 선장을 찾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목표 = 베트남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건 세 번째 목표였다.
가족을 데려오는 것보다 전 선장을 찾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이었다. 전 선장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 목표는 이뤘으나, 전 선장을 찾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누엔씨는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전 선장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부인과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 그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2001년 말, 자신이 근무하는 페어뷰 병원의 동료직원인 김순자씨가 휴가차 한국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누엔씨는 다시한번 전 선장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감동받은 김씨는 한국의 친척들을 동원해 전 선장을 찾는 일에 적극 나섰고, 마침내 2002년 5월 제부로부터 경남 통영에 살고 있는 전 선장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누엔씨는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세 가지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에 감사했다.
그 순간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945년 1월1일 베트남 북부 쾅빈성에서 태어난 누엔씨는 10세 때 부모를 따라 공산 월맹을 탈출해 남쪽 다낭에 정착해 살았다.
그는 신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24세 때인 1968년 월남군에 입대해 1973~75년까지 합동군사위원회의 연락장교(중위)로 근무하면서 파리협정위반사항 및 포로교환업무를 담당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던 1975년 4월30일, 사이공에 있던 누엔은 월맹군 탱크가 진입하는 광경을 허탈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길거리에선 시민들이 흐느껴 울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그는 월남군 근무경력 때문에 체포돼 6년 동안 정치범 재교육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을 때, 그의 집은 이미 공산당 간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후환이 두려웠지만 요시찰 인물로 찍혀 거주지에서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신분을 바꿔야 했다.
그는 공산당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교사자격증을 구입했다. 안경을 쓴 자신의 모습이 군인보다는 교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남쪽의 롱탄이라는 지방으로 이주해 교사와 농사일을 겸하며 연명해 갔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은 더욱 악화돼 가기만 했다. 아내가 아파도 약을 살 수가 없어 인근 절에서 구한 약초를 먹여야 했다.
그 지역에서도 공산당의 잔인무도한 행위와 위선적인 행동은 끊이질 않았다.
공산 베트남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누엔씨는 결국 탈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탈출은 고사하고 작은 목선을 타고 공해상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탈출자금도 문제였지만 자칫 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이 같은 이유를 설명하고 혼자 떠날 것을 결심했다. 가족들은 ‘나중에 데려가겠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1985년 11월10일 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누엔씨는 가족들과 작별의 키스를 나누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붕타우 인근 해안은 목선을 타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목선이래야 조그마한 통통배에 불과했다. 남녀노소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모두 9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에 올라탔다.
정원을 한참 초과한 숫자였다. 이들은 배를 타기 전 선주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사람마다 모두 뱃삯이 달랐는데, 목선 선주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조금 깎아주기도 했다.
다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누엔씨는 예외였다. 바다에서 외국 선박을 만날 경우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에 정착한 누엔씨는 뱃삯 2000달러를 모두 갚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그보다 훨씬 높은 뱃삯을 지불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바다로 나간 목선은 남쪽으로 향했다. 인도네시아 쪽인지 말레이시아 쪽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렇게 나흘 밤낮을 항해하던 목선은 기상이 악화되면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식량과 식수 그리고 기름이 바닥난데다 엔진마저 고장을 일으켜 망망대해에서 둥둥 떠다니는 신세가 됐다. 공해상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탄 목선은 적어도 20여척의 외국 선박들을 만났다. 그러나 하나같이 못 본 척 지나쳐버렸다.
표류한 지 나흘째인 11월14일 오후 4시30분경, 폭풍이 오려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때 대형 선박 한 척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선원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구조해주려는 것 같았다.
난민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그 선박도 그냥 지나쳐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박정희를 좋아하는가?”
그 후 1시간 쯤 지나자 또 한 척의 대형 선박이 나타났다. 난민들은 또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 선박 역시 아무런 반응 없이 계속 북진했다. 그런데 잠시 뒤 선박이 회항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누엔씨의 설명이다.
“5~10분이 지났을 무렵 그 선박이 갑자기 회항하더니 10여m 거리까지 다가왔다. ‘코리아-부산’이라는 선적명이 보였지만 그게 남한인지 북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가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어느 나라냐’고 국적을 물었다. ‘코리아’라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다시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남한’이라는 답이 왔다. 그 말에 우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나의 세 번째 질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아하느냐’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공산국가인 북한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됐든 당시에는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