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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9월 8일 주일
[(녹) 연중 제23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뽑으시어, 믿음으로 부유하게 하시고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방황하는 모든 이가 아버지 말씀으로 용기를 얻어,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함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놀라우신 일들을 우리와 함께 찬양하도록 기도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는 말씀으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4-7ㄴ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5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예언이 선포된 때에는 비현실적인 꿈이었습니다. 뜨거운 땅이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이 샘터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것도 머나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기적들을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방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나 권력은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10,42)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에서 그 답을 말하여 줍니다.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우리가 눈먼 이의 눈을 열고 귀먹은 이의 귀를 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가 실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 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평’에 불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 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 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리함으로써>
상지종 베르니르도 신부님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들음으로써
말 못하는 이가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함으로써
귀먹은 이가
듣게 하는 것입니다
보임으로써
볼 수 없는 이가
보게 하는 것입니다
스밈으로써
느낄 수 없는 이가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품음으로써
외로운 이가
함께하게 하는 것입니다
먹힘으로써
배고픈 이가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눔으로써
가지지 못한 이가
갖게 하는 것입니다
돋움으로써
시들어가는 이가
푸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끎으로써
멈춰선 이가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섬김으로써
보잘것없는 이가
어엿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디시보드 (Disibod)
활동년도 : +700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빙엔(Bingen)
같은 이름 : 디센, 디쎈, 디씨보드
성 디시보드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자기 고향에서 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는 매우 호소력을 지닌 설교가이자 사도였으며, 신도들의 신심을 뜨겁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7세기 중엽에 아일랜드를 떠나 독일 선교에 나섰다. 그는 빙엔 근교 나헤(Nahe) 계곡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이 나중에 유명한 디센베르크(Disenberg) 수도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여기서 인근 주민들을 사목하면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디센(Disen)으로도 불리는 그는 7월 8일에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성 세르지오 1세(Sergius I)
활동년도 : +701년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세르기예프, 세르기오, 세르기우스, 세르지우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 살던 어느 상인의 아들인 성 세르기우스(또는 세르지오)는 이탈리아의 팔레르모(Palermo)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687년 12월 15일에 교황 코논을 계승하여 교황으로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황 선출에는 잡음이 많았고, 또 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교황의 동의도 없이 692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궁전의 커다란 원형 거실(trullus)에서 개최하여 트룰라눔(Trullanum) 교회회의라고도 불리는 회의의 칙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황제와 위험스런 논쟁에 말려들었다. 만일 세르기우스가 이 칙서를 인정하게 되면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대등한 교회 구조상의 위치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카리아(Zacharias)란 장군을 로마로 파견하여 교황을 체포해 오도록 하였으나, 로마 시민들이 단결하여 이를 저지하고 자카리아를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황제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689년 성 세르기우스는 성토요일에 로마로 성지순례를 온 웨식스(Wessex)의 왕인 성 카이드발라(Caedwalla, 4월 20일)에게 세례를 주었고, 695년에는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프리지아(Frisia)의 대주교로 서임하여 영국 선교와 독일 그리고 프리슬란트(Friesland)에서의 선교활동을 격려하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성 세르기우스 교황은 직접 로마에 있던 음악학교(스콜라 칸토룸)를 다니면서 전례 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미사 중에 '하느님의 어린 양'(아뉴스 데이, Agnus Dei)을 노래하도록 명하였다.
성 코르비니아노 (Corbinian)
활동년도 : 670/680?-725/730년?
신분 : 주교, 선교사
지역 : 프라이징(Freising)
같은 이름 : 꼬르비니아노, 꼬르비니아누스, 꼬르비니안, 코르비니아누스, 코르비니안
성 코르비니아누스(Corbinianus, 또는 코르비니아노)는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진 믈룅(Melun) 근처 샤트르(Chatres)에서 프랑크 혈통의 아버지 발데키소(Waldekiso)와 어머니 코르비니아나(Corbinia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으나,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성 코르비니아누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까지 사망하자 샤르트르에 있는 생제르맹(Saint-Germain) 성당에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성덕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영적인 지도를 청하며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번잡함을 피해 로마(Roma)로 갔고, 베드로(Petrus)의 묘지 근처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그의 명성을 들은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 2월 11일)가 그를 주교로 서품하고 선교 임무를 맡겼다. 그는 바이에른(Bayern) 지방의 프라이징으로 파견되어 열렬한 선교사로서 활약하던 중 자신의 후원자이던 그리모알트(Grimoald) 공작의 결혼을 공적으로 반대하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공작이 자기 동생의 미망인인 빌트루디스(Bildrudis)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코르비니아누스는 특히 그 미망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그녀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발견하자마자 미란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리모알트가 전투에서 희생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 후 성 코르비니아누스는 바이에른 지방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며 여생을 보냈고, 오베르마이스(Obermais)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725년 또는 730년 9월 8일에 바이에른 지방의 오베르마이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그가 세운 오베르마이스 수도원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계승자이자 전기 기록자인 아르베우스가 769년에 성인의 유해를 프라이징으로 옮겼다. 성인의 상징은 곰인데, 이 곰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이 쓴 가면이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
성 하드리아노 (Hadrian)
활동년도 : +304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같은 이름 : 아드리아노, 아드리아누스, 아드리안,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소아시아 니코메디아의 궁중 관리였던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또는 하드리아노)는 일단의 신자 무리들의 인내심과 열렬한 믿음에 감동하여, 비록 자신이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그의 아내인 성녀 나탈리아(Natalia, 12월 1일)는 옥중의 남편을 찾아다니며 신앙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사형 언도를 받고 방문객의 면담이 금지되자, 아내는 소년 복장으로 위장하고 관리들을 매수하여 남편의 온갖 고통을 위로하고 신심을 굳게 해 주었다. 그가 죽는 현장에 아내도 참석하여 처절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의 축일은 순교한 날인 3월 4일에 지내기도 하나, 로마 전례에서는 그의 유해가 로마(Roma)로 이장된 9월 8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한편 성녀 나탈리아는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니코메디아의 어느 궁중 관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피신하여 여생을 지냈다. 성 하드리아누스는 군인들과 푸주한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