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의 첫 본문은 인사말이자 로마서 전체의 서문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3 당신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으며,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짧은 인사말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인사말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런 주장은 당시 초대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맛디아라는 인물이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열두 사도로 채택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사도에 대한 기준이 제시됩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닌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로 인정을 받으려면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줄곧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줄기차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다메섹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게서 부르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사도의 직무를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들과는 다른 경로로 부르심을 받은,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는 더욱 특별한 사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사명과 로마서를 써보내는 목적을 밝힌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바울이 언젠가는 로마에 가서 교인들을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답니다.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라는 단어는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문장을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습니까? 뜻이 명확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공동번역은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을 했기에 이해하기 쉬운 장점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갖가지 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 안에 그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이 담겨있다는 '자연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바울은 한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욕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서 당시 로마세계에서 유행하던 동성애 문제를 지적합니다. 26~27절을 보겠습니다.
26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27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바울이 동성애를 죄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보수적인 신학과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이 본문에 입각해서 동성애를 죄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이 문제를 바울의 편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인 건 분명하지만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기에 그의 생각에도 한계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견해에 동의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선택과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살불살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살불, 즉 부처도 죽이고, 조사, 즉 먼저 깨달은 스승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대다수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물론 바울조차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과, 실제 하나님, 실제 예수님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분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바울의 주장까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니 한국 교회의 한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장 종반부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온갖 죄목들이 열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