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님이 당나라 장안으로 귀국하자 당태종은 "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라고 칭찬하며 현장법사의 역경,번역 일을 돕기위한 절과 탑(대안탑)을 마련해 주었다. 당태종이 현장스님의 법력과 혜안이 뛰어남을 보고서는 환속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쓸모가 없었다. 특히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갈 때 현장스님에게 같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현장스님은 자신은 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부처님 계율에 승려는 군대의 전투를 봐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처음 도교를 크게 숭상했던 당태종은 현장스님을 자주 만나면서 점점 바뀌어갔다. 전국 각지의 군단위까지 도첩을 내려서 사찰을 건립케하고 승려들을 출가시켜 승단을 크게 확장시켰다. 특히 현장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유가사지론 100권을 읽어 본 당태종은 " 짐이 불경을 보건데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구려. 유가나 도가는 이에 비하면 작은 연못에 불과하오.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삼교의 뜻이 일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망령된 말이로다." 649년 고구려 원정으로 건강이 악화된 당태종은 현장스님을 자주 초청하였다. 현장스님은 황제의 쓸쓸함과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알았다. 그는 황제에게 인연법이나, 인과응보와 관련됟 설화에서 부터 심오한 불교사상까지 알기 쉽게 들려주었다. 감동을 받은 당태종은 현장스님에게 " 짐은 법사와의 만남이 늦었기에 불사를 일으키지 못했구려 " 라는 말을 남기고 얼마터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