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만 보면 생각나는 여자아이
심현섭
칠월 초에 접어드니 서서히 무더위가 다가오고 있다. 특히 더위를 몹시 타고 땀을 많이 흘리는 아내는 여름만 되면 걱정이다.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니 집 근방의 디어레이크 세볼트 센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저녁 무렵이라 아예 맛있는 하와이안 피자를 작은 것으로 한 판 사서 들고 갔다.
아스라이 멀리 호수물이 보이는 언덕바지 위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물가의 수련들이 매년 늘어나는 것 같다. 오후 늦게 저녁에는 꽃잎을 접고 잠을 청한다는 물의 백합이다. 물위를 휘돌아 온 바람이 휘-익 지나가면서 목덜미 땀을 씻어준다. 모짜렐라 치즈와 파인애플이 적당히 어우러진 피자가 입맛을 돋우며 한가한 여름날 저녁이 다가온다.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에 아이들 놀이터에 그네를 타는 어린아이가 눈에 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신이 나서 웃으며 그네를 잘도 타고 있다. 내게는 그네 타는 아이만 보면 생각나는 여자아이가 있다.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그네를 타려고 놀이터를 찾아갔다. 먼저 온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내리려니 여기고 옆에 서서 기다렸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웃음이 얼굴 가득 한 채 영 내릴 엄두를 내지 않는다.
“야! 그만 내려. 나도 타야지.”
참다가 결국은 명령하듯 말했다. 그 여자 아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나를 힐끔 처다 보고는 계속 그네를 탔다. ‘저렇게 그네 타는 걸 좋아하니까 잘 타는 모양이구나’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내릴 만도 한데 완전 무시하고 계속 그네를 탔다. ‘기다리는 사람은 계속 기다리세요‘라는 듯이 어깃장을 부리는 듯이 보였다. ‘나도 탔다 하면 저 정도는 탈 수도 있는데‘하며 웅얼거렸다. 나는 점점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야! 언제까지 탈거야. 이제 그만 내려!”
내가 참기 힘들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치는데도 여자 아이는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심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나는 주위에 뭐가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빈 깡통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막 날아오르려는 그 아이에게 깡통을 집어 던졌다. 날아간 깡통은 그 아이의 종아리에 가서 맞았고 순간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였다.
그네는 서서히 멈춰 섰고 아이의 왼쪽 다리 종아리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신음 소리를 내며 종아리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보였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몰라서 서성대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차마 입에서 맴돌 뿐 나오질 않았다.
“우리 엄마한테 가서 이를거야!” 야무진 목소리로 나를 원망했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힐끔 바라보고 걸어갔다. 그네 탈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감을 안고 나도 집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는 그 뒤 어찌 되었을까?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피는 곧 멈추고 상처는 곪지 않고 잘 나았을까. 상처에 보기 싫게 흉터가 생긴 건 아닐까. 평생 나를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아이도 내 또래였으니 지금쯤 칠십 중반을 넘어서는 노인이 되었겠지. 나는 지금도 그네만 보면 그 생각이 나는데 그 아이도 나를 나쁜 놈으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뒤로 그 아이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더욱 내 상심은 지워지지 않은 채 내 나이처럼 이끼가 끼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지금은 흉터가 안 생기는 약도 많지만- 보기 싫은 흉터가 생겼다면 짧은 치마도 못 입고 흉터만 보면 얼마나 속 상해 했을까 미안하기만 하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나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곱상하게 나이든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그네를 태우고 있었다. 그네 줄을 붙잡고 그네를 밀어주는 할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깔깔대며 좋아라 그네를 타는 손녀는 언제까지나 그네 위에서 놀고 싶은 표정이다. 한참 만에 할머니가 말했다.
“이제 그만 타자. 할머니가 힘들다.” 손녀는 더 타겠다고 칭얼대고 있었다.
“욕심쟁이야, 다른 아이들도 타야지 너만 혼자 타면 어쩌니. 그러면 너도 할머니처럼 다리에 흉터가 생길 수도 있어!”
“흉터!?” 나는 무심코 앉아 있다가 귀가 번쩍 뛰어 그네 있는 쪽의 할머니 왼쪽 종아리를 보았다. 거기 희미하기 나마 흉터가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