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기계는 하루가 다르게 그 성능이 진보하고 있으며, 유전공학은 머지 않아 인간복제를 성공시킬 듯이 보인다. 과학기술 시대에 성큼 발을 들여놓은 지금, 테크놀로지와 미래세계는 오늘날의 예술에서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가인 황규태(黃圭泰, 1938- )는 자유로운 실험정신과 상상력을 펼쳐 과학이 제공하는 첨단의 시대를 매혹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는 차용이나 콜라주, 몽타주 등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기법들을 이미 1970년대초부터 자유롭게 다루어 왔는데, 이는 세계 사진사적으로도 매우 이른 시기에 행해진 것이어서 주목되는 대목이며, 한국 현대미술계에서도 최전선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진가로서는 최민식, 정범태, 강운구, 구본창에 이어 다섯번째로 선보이는 ‘열화당 사진문고’ 『황규태』는 1970년대초부터 최근까지 이어 온 그의 다채로운 작품 중에서 그 정수를 엿볼 수 있다.
과학기술 시대를 산책하는 사진가 ● 황규태의 작품세계에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이는 동시에 작가가 가장 집요하게 일관하고 있는 모티브이자 주제이며, 과학의 감각을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그의 작품은 한국의 사진계에서 늘 신선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필름을 태우거나 합성하고, 포토샵과 스캐너를 이용해 조합하는 것처럼, 이러한 반사진적 방법과 디지털 프로세스는 그가 다루는 일련의 주제들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를테면, 우주공간에 떠 있는 듯한 태아의 형상, 작열하는 태양, 화석화된 생명체, 비행하는 유에프오와 사이보그 등은 ‘멋진 신세계’의 재현 혹은 미래세계의 묵시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소재이다. 황규태를 일컬어 ‘과학이 가져올 미래를 대비하는 과학기술 시대의 산보자(散步者)’라고 표현한 이미지 비평가 이영준의 말처럼, 그는 과학의 정원을 정처없이 거닐며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물의 단편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에 열중한다.
문명의 종말을 암시하는 미래세계의 묵시록 ● 그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초현실적 소재뿐만이 아니라 과학과 인류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는 첨단과학이 가져올 미래의 암울한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산물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변종의 생명체나 복제된 아기, 알록달록한 DNA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섬뜩하고 암울한 미래의 한 단면이지만 황규태는 이를 절망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유머와 키치, 장난스러움으로 대신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은, 우주공간과 인류의 미래,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담은 대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또한 고도로 세련된 색채와 빛에 대한 감각은 그가 다루는 키치적인 주제를 범상치 않은 미학적 산물로 빛나게 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사진가 ● 황규태는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현대사진연구회’를 통해 예술사진에 입문했으며, 『경향신문』 사진기자를 거쳐 196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 컬러 현상소에서 암실 기사로 근무하며 컬러 사진의 테크닉을 연마하여 『파퓰러 포토그래피』 『컬러 포토그래피』에 작품이 실리게 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도쿄 펜탁스갤러리(1973), 로스앤젤레스의 시노갤러리(1975), 워커힐미술관(1994)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사진―새로운 시각」(국립현대미술관, 1996), 「삶의 경계」(광주비엔날레, 1997), 「여섯 사진작가―여섯 개의 코드 읽어 보기」(성곡미술관, 200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 사진으로 개인전 「황규태 1960년을 만나다」전이 진행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pp.142-143의 연보를 참조하십시오.) ■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