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천주교회사 약사
한국 천주 교회는 비록 역사는 짧지만 그 초창기 교회시작에 있어 신도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외국으로부터의 한국에 대한 선교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된 것은 한국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애정과 헌신에 의해서 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이 싹트게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한문으로 쓰여진 교리서들이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되고, 그것을 읽고 비판하고 묵상함으로써 신앙이 싹트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외국선교사들의 교리서적을 통한 전교노력과 그 종교서적을 읽고 연구하고 받아들이려 한 한국인들의 노력이 합쳐서 이루어진 기이한 교회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세계역사상 선교사들의 직접선교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간접선교의 영향을 받고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교회임을 보여준다. 이 교회는 신앙공동체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100여년에 걸친 모진 박해 가운데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바쳐 순교로서 교회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 후예들이 순교정신으로 지켜온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종교자유를 획득한 후에도 일본의 식민통치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조국의 해방 후에는 남북으로 갈라져, 공산치하의 북한에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겨 교회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파괴되었으나, 자유진영의 남한에서는 사회의 여러 격변을 겪으면서도 계속적인 성장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그 성립에 있어서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외국 선교사들의 동양선교에 대한 관심이 특히 16세기 西勢東漸의 역사적 조류에 따라 수행되어가고 있을 때,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은 외국 선교사들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나, 우리나라는 외국선교사의 직접 선교의 영향은 받지 못했다. 1534년 예수회가 창설되고 당시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예수회를 1540년에 전교 수도회로서 인준했는데, 예수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동양선교에 뜻을 두고 1541년에는 일본의 카고지마(鹿兒島)에 상륙하여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동양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국을 향하여 선교하러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그후 그의 뒤를 이어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과 중국에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중국에서 활약한 선교사 중에는 마태오 릿치 (Matteo RICCI)가 유명하다. 마태오 릿치는 1583년에 중국에 입국하여 유교경전을 두루 공부하며 마침내 1601년 명나라 신종 때에는 북경에 교회를 설립하고 많은 신도들을 얻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儒敎를 중심으로 국민정신이 지도되고 있었는데, 위정자들은 거듭된 당쟁과 사화로 파벌이 생겨, 마침내 1575년에는 동서 분당이 생기고 사상적으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전후하여 北京을 왕래하던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에 전해진 서양문물을 여러 호기심을 가지고 접하였으며, 그중 서양의 종교에 대해서도 기이한 흥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과학문명기구들과 서양종교에 대해 기술된 책들을 조선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마태오 릿치 신부가 저술한 「天主實義」라는 일종의 교리책과 판토하 신부가 저술한 「七克」은 조선에 유입되어 가장 많이 읽히고 비판된 책이였으며, 조선의 유학자들은 서양종교의 신앙체계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서양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대체로 光海君때부터이며, 부연사 사신들에 의해 유입된 천주교 서적들에 대해 국내의 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데 대략 숙종까지 서학접촉시대를 갖게 된다. 이때에 천주교와 관계있는 인물로는 허균과 이수광이 유명하다. 허균은 1575년경 북경에 가서 세계지도와 '게 12장'(偈 十二章)을 가져오고 연구한 끝에 그 가르침을 혼자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西學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당시 유학자들 간에 진지하게 연구되었다. 서학에 관심을 표명하고 비판을 가한 유학자들은 당대에 저명한 인사들로서, 이수광(1563 - 1627)을 비롯하여, 이익(1682 - 1763)과 그의 제자 안정복(1712-1791), 이 가환 등을 들 수 있는데, 학파로 보아선 당시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던 남인계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서학 연구가 성행해지자 국가에서는 당시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받들고 있었으므로 정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서학이 탄압을 받게 된다. 기록상으로 숙종 12년(1686년)에는 국왕에게 대책을 요청하며 서학의 성행을 막고자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영조 34년(1758)에는 황해도, 강원도 지방 관찰사로 하여금 서학의 연구와 실천을 엄금하라는 명이 있었고, 정조 때에는 북으로부터의 서학 서적의 구입을 엄금한 일이 있다. 하지만 허균과 홍유한은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천주의 존재를 알고 실천한 인물들로 알려져 있는데, 홍유한은 13년동안이나 소백산 근처에서 숨어 살면서 신앙을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이나 홍유한은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하였으나, 그후 남인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서학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서학을 더 깊이 연구하는 모임이 있게 되는데, 이것을 天眞菴 走魚史 講學會 (1777 혹은 1779)라고 한다. 이때 참석한 인물들 가운데에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이총억, 이승훈 등 10여인 이었다. 이들은 서학에 관계된 책들 '天主實義', '七克' 등을 연구하고, 宇宙의 原理, 하늘, 世界, 人性 등을 깊이 연구하다가 天主敎 眞理에 승복되어 매 칠일마다 안식일을 지키고 묵상하면서 조직적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모임에서 李檗이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그들의 교리지식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승훈의 아버지가 북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 벽은 그 모임에 참석했던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여 교리서적을 구하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도록 요청하게 된 것이다.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1784년 봄에 불란서 출신 예수회의 그라몽(Grammont)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조선교회의 최초의 세례자가 된다. 그후 이승훈은 조선에 돌아와 수포동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벽과 이승훈은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모였던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은 여러 곳으로 나아가 전교하게 된다. 이로써 한국에 信仰共同體가 이벽의 집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또한 이들은 이벽과 이승훈을 중심으로 때를 정하여 정기적으로 종교모임을 갖던 중 1785년 을사년에 추조에 의해 적발되어 문초를 받았고, 그 참석자들중 양반출신은 풀려났으나 중인 출신의 역관이었던 김범우(토마)는 귀양을 가서 옥고 끝에 숨을 거두게 되어 최초로 순교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훈은 교회활동에서 멀어졌고, 이벽은 부친의 반대로 결국 집안에서 유폐되어 지내던 중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교우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이승훈을 중심으로 다시 교회조직을 구성하여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을 '假聖職制度', 혹은 準聖職 制度 또는 '自治的 朝鮮敎會'라고 한다. 이승훈은 권일신, 정약종 등과 의논하여 성직제도를 구성하고,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이 신부가 되어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미사를 드리는 성무집행을 2년 남짓 행사한다. 물론 이것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전교하기 위해 자치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현천'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일에 의문을 품고 이승훈에게 편지를 내어 그 합법성에 의의를 제기하자, 이승훈은 북경에 있는 불란서 성직자에게 편지를 내어 그에 대한 것을 알아보고자 했다. 이승훈의 편지를 윤유일이 부연사신 일행에 끼어 북경의 성직자에게 전달하여 알아본 결과 합법적으로 서품받지 않은 이들에 의해 성무가 집행되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시하자 곧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교우들은 합법적으로 서품받은 성직자를 조선에 보내주도록 북경에 편지를 내고 이때부터 성직자 영입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북경의 주교였던 구베아 (Guvea)는 조선교우들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중국인 레메디오스(Johanne Dos Remedios) 신부를 파견하였으나, 1791년 국내의 신해박해 (1791) 사건으로 신자들과의 연락이 안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다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어 1794년에 조선에 입국하게 되는데,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여 당시 4,000명의 조선교우들을 지도하게 된다. 이 4,000명의 교우숫자는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전교된 결과로서, 비합법적이긴 했지만 자치적 성직제도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자생적으로 생겼으나 조정에서는 여러 차레에 걸쳐 천주교를 금하고 박해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100여년에 걸쳐 수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그 박해의 도화선은 각 사건마다 다르지만, 천주교를 말살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박해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천주교인들의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제사를 거부했다는 점과, 정치적인 파벌, 혹은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시간관계상 자세한 언급은 피하며 박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씀드릴까 한다.
번호 |
박해사건 |
결과 |
1 |
을사추조적발사건 (정조 9년, 1785) |
이벽의 가택감금, 김범우의 유배생활과 그 여파로 사망 |
2 |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 |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
3 |
신유박해(순교 1년, 1801) |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
4 |
을해박해(순조 1년, 1815) |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
5 |
정해박해(순조 1년, 1827) |
전라도 교우 240여명을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명 체포당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
6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명 순교 |
7 |
병오박해(헌종 12년, 1846) |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
8 |
병인박해(고종 3년, 1866) |
대원군에 의해 8,000 - 2만 여명 순교 |
9 |
제주도 교난(고종 3년,1901) |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
迫害의 원인은 儒敎 傳統的 兩班體制에 도전하는 그리스도교의 平等思想과의 갈등, 祖上典禮問題에 대한 견해차이, 당 파벌에 의한 정치적 상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도 조선 교우들은 35년동안 즉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후 1836년 불란서 성직자들이 입국하기까지 성직자 없는 조선 교회를 이끌어 왔으며, 신앙을 전파하고 교회를 지켜왔다. 조선교우들은 북경주교와 교황청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은 요청하였고, 이러한 서한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모진 매를 맞고 순교까지 하게 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조선교우들은 1811년, 1825년 두 차례의 서한을 교황께 보냈는데 교황께서는 조선교우들의 딱한 사정을 받아들여 1831년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파리외방선교 회원이었던 브뤼기에르 (B. Bruguière, 蘇) 主敎를 임명하였다. 이 조선교구의 설정은 그동안 조선교회가 북경 교구 주교의 관할에 들어간 1792년이래 만 40년 만에 독립하게 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天主敎會의 敎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명을 받고 조선을 향해 가던 중 조선에 입국은 못하고 여행중 과로에 의해 병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선교회는 계속해서 성직자를 조선교구에 보내 주었는데, 1836년 모방 (Pierre P. Maubant)신부가 입국하고 이어서 샤스탕 (Jacques H. Chastan) 신부 그리고 제 2대 조선교구장이 된 앵베르 (Laurant M.J. 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여 주교와 사제, 신도들이 있는 교회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모방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소년들은 마카오에 1837년 6월 7일 도착하여 사제 수업을 받았으며, 그 후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Ferréol) 주교로부터 司祭敍品을 받아 한국 교회의 최초의 방인 성직자가 되었다. 한편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 (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아 두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조선 교회를 위해 그 후 12년 동안 많은 사목 활동을 하였다.
세세동점은 19세기 말 조선에도 밀려와 1882년부터 미국을 필두로 하여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유럽의 열강들과 조약이 체결되었다. 특히 1886년은 불란서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 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신교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전까지는 숨어 살며 어렵게 전교하던 불란서 성직자들이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本堂이 설정되고 성당 안에서 종교 집회를 자유롭게 갖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최초의 본당이, 1784년 혹은 1785년 김범우의 집으로서 종교집회를 위해 기증했던 곳인 명례방터에, 종현(지금의 명동) 본당이라는 명칭으로 1882년에 설정되었고, 10여년 동안의 건축공사 끝에 1898년 5월 29일 대성당이 완공되어 '원죄없으신 잉태 마리아'께 봉헌되어 축성되었다. 그동안 1892년에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본당이 종현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서울의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 수녀원, 인쇄소 등의 부속 시설도 갖추고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설립되고, 갓등이, 평양, 등 주요도시에 교우촌이 형성되고 본당이 신설되어 갔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개설하고 신학교 건물도 용산에 세움으로써 서양교육과 성직자 양성교육 및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언론과 교육을 통해 문맹자를 퇴치하고 국민개화운동은 전개하였으며, 천주교에서 발간한 '경향신문'은 1906년에 창간되어 국민계몽에 힘썼으나 일체의 탄압으로 4년만에 중단되었다.
일제치하에 들어간 한국의 천주교는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대 규모적인 독립운동을 펼수는 없었으나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찾기 위해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였다. 천주교 신자로서 이러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여럿이 있다.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국채 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았던 안명근, 105인 사건의 한 사람이었던 이기당 등이 천주교인 이었다. 그리고 1919년 3. 1 만세 운동때에는 서울과 대구 신학교의 신학생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해 퇴학당한 학생도 있고, 서품식이 연기된 학생도 있었다. 또한 이때 강화나 광주(廣州) 등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여러 곳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고 옥고를 치른 천주교인도 많았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은 한국의 천주교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사범교육기관이었던 '숭신학교'(崇信學校)도 폐교시켰고, 종교교육까지도 제한시켰다. 그뿐 아니라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종교적 갈등을 일으키게 했다. 천주교 당국은 처음엔 神社參拜를 異端으로 규정하였으나, 1930년에 가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해명한 일본측 주장을 받아들여 교황청이 이를 허용하자, 한국의 천주교 당국도 이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된 신자들도 많았다. 1940년에 가서는 서양인 교구장들이 일본사람으로 대치되었고,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거나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교회는 계속 발전하여 9개 교구가 성립되었고, 메리놀회, 골롬바노회 등과 같은 선교단체도 진출하여 교회발전을 가져왔다.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기남 신부가 주교가 되어 서울 교구장을 맡게 되었다.
한국은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美蘇兩國에 의한 신탁통치 결정에 의해 南北으로 분단되어, 北韓은 공산치하에 들어가고 南韓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들어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남한에서, 천주교는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경향신문, 경향잡지, 가톨릭 신문이 다시 속간되고 중 고등학교들이 개설되어 교육사업을 활발히 벌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공산치하의 북한은 종교말살정책에 의해 성당, 수도원 등이 몰수되거나 폐쇄되었고, 성직자들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또 북한은 1950년 6. 25사변을 일으켜 동족간에 서로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국민을 학살하였다. 1953년 휴전이 되어 오늘까지 남한,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마주하며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격동기에도 한국의 천주교는 교육과 사회사업, 복음화에 노력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휴전 당시 16만명의 신도 수에 불과했으나, 1962년에는 53만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이해에 한국에 처음으로 敎階制度가 성립한 해였다. 1969년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김수환 대주교가 樞機卿으로 서임되었다.
1970년에 들어와서 한국의 천주교는 특히 人權運動과 社會正義具現運動을 통해 社會福音化에 힘써 한국 사회의 경제 발전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들 즉 물질만능주의, 인간경시풍조 등 각종 사회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상실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며 그리스도교 가치를 실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신도수도 증가하는 한편 한국사회내에 빛을 던져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 천주교회는 각종 기념행사를 치른 시기로 특징 지어지는데, 1981년에는 조선교구창설 150주년을 「평화가 우리와 함께」라는 표어와 함께 기념했다. 그리고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에 걸친 한국방문을 계기로 교세가 많이 확장하였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이 땅에 빛을」이라는 표어와 함께 다채로운 기념 행사를 벌이고, 또한 한국의 순교 복자 103위가 서울의 여의도 광장에서 장엄하게 시성됨으로써, 유럽의 오래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국가들처럼 많은 성인을 모신 나라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교회의 쇄신과 내실화를 기하고 있다. 1990년에는 신자개개인의 신앙쇄신과 성숙을 통해 개인의 성화와 사회복음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특히 「한 마음 한 몸 운동」의 지속적 전개와 「내 탓이오」운동, 그리고 「環境保護 運動」을 통해 人間性 回復, 信賴回復, 自然秩序 回復을 지향하는 인류공동체의 발전 속에 교회가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사회구원의 표지와 도구가 되려 하고 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1991년 초 신자총수는 275만명으로 남한전체인구 4천3백50만명 중 6. 3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 성직자수는 추기경 1명, 대주교 2명, 주교 17명, 몬시뇰 11명을 포함하여 1528명이며, 외국인 성직자수는 204명이다. 그리고 수도자 수는 모두 7069명으로 이중 수사 347명, 수녀 5399명이다. 그리고 본당수는 855개소, 공소수는 1568개를 헤아리고 있다. 신학교는 서울, 광주, 대구, 수원, 부산, 대전에 각 한개씩 여섯개의 신학교가 있으며 인천에도 설립할 계획으로 있다. 교구수는 군종교구를 포함하여 15개 교구가 남한에 있으며, 북한 지역에 있는 세 교구인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면속구는 서울대교구에 소속되어 있다.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힙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당신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쳤사오니,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상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가톨릭 기도서], 33-3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