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판을 새기면서 군신이 부처에게 기도드리며 고하는 글[大藏刻板君臣祈告文]
국왕은 삼가 태자와 공후백, 재추(宰樞),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허공계 시방세계의 무량제불 보살과 천제석가를 비롯한 33천의 모든 호법하신 영관(靈官)들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달단(達旦:몽고를 말함)의 환란이 심하나이다. 그들의 잔인하고 흉폭한 성질은 이루 말할 수 없나이다. 그들의 유치하고 무식함이 잠승보다 더하니, 어찌 천하가 존경하는 불법을 어찌 알겠나이까?
이러한 까닭에 그들이 지나는 곳은 어디나 불상이 없어지고 범서(梵書)는 불타 없어졌나이다. 이리하여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본도 모조리 없어졌나이다. 아, 오랜 세월동안 쌓은 공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국가의 큰 보물을 잃었나이다.
비록 제불다천의 대자한 마음은 참을 수 있을지라도, 누가 이를 참을 수 있겠나이까. 잠시 생각해보니 저희 제자들이 못난 까닭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아무리 말주변있는 사람일지라도 말로서 없어진 것을 다시 이룰 수는 없으므로 오직 어리석은 자들이 몸둘 곳은 기물(器物)이옵니다.
기물을 이루고 망치는 것은 자연의 운수이라 없으진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것입니다. 하물며 나라와 가정이 불법을 숭봉함에 큰 보물이 없이 옛 습관만 지키며 편히 지낼 수는 없는 즉, 어찌 역사가 거창하다고 염려하고 그것을 다시 만들기를 꺼리고만 있사오리까.
그리하여 오늘 재집(宰執) 및 문무백료와 더불어 이를 발원하고 이미 일을 맡을 관사를 두기로 서명하고 일을 시작하였나이다.
이 일의 처음 시작한 근원을 생각해 보건대, 옛날 현종 2년(1011)에 거란 임금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임금님이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거란은 오히려 송악성에 머물며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크게 발원하여 대장경 판본의 판각을 맹서하자 거란군사들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똑같은 대장경을 똑같이 앞뒤로 새기고 또 왕과 신하가 함께 발원한 것도 같으니 어찌 그때 거란병만 물러가고 이번의 몽고병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여러 부처님과 천인들이 얼마나 보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지성 드리는 것이 전조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엎드려 바라옵건대 제불성현과 33천은 간절하고 절박한 기원을 살피시어 신통한 힘을 주시사, 흉악한 적과 더러운 풍속이 자취를 감추고 멀리 도망가게 하시고 다시는 우리 강토를 밟지 못하게 하시고, 병란이 그치고 안팎이 편안하며 모후와 저군(儲君)이 만수무강하게 하옵시고, 삼한의 국조(國祚)가 오래오래 만세를 누리게 하여 주옵시면, 저희 제자들은 더욱 더 노력하여 법문을 충실히 보호하며,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겠나이다.
저희 제자들은 간절한 기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나이다. 엎드려 비옵나니 밝게 통찰해 주오소서.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 25 잡저
해설: 부처의 힘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려 한 호국불교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