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 김민환, 2021>를 읽고 - 장흥신문
작가 김민환, 장흥 용산 원등 태생(1945)이다. 영광김씨 집안으로 목포 해양고와 고려대 신방과를 거쳐 고려대 교수로 은퇴했다. 신춘문예 경력의 전업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3번째 소설로 ‘제14회 이병주 국제문학상(2021)’을 수상했다. 이병주(1921~1992) 문학세계에 걸 맞는 역사적 인물을 그려낸 정치적 세태소설로 그 문학적 흥취가 솔솔 하다. 소설 제목에 나온 ‘큰 새’는 보성 회천의 ‘봉강 정해룡(1913~1969)’ 선생이다. 그 개인적 생애를 소재로 삼았지만, 여러 층위로 쪼개볼 수 있는 장편소설이다. 애초 2권 분량이 1권으로 축약되었음은 아쉽다. 소설 ‘태백산맥, 토지, 삼대, 광장, 지리산’ 등이 연상된다는 일부 언급도 있는데, ‘큰 새~’의 소설적 정체성은 따로 분명해 보인다.
시대적 억압 앞에서 인간존재의 유장함과 이념갈등의 무상함과 역사적 허무 등이 엇비슷하게 느껴졌을지는 모르겠다. 먼저 개인사 층위로 보면, ‘3천석 백구가(百口家)’ 대지주 정해룡은 해방 전에도 교육문화 사업을 지원했지만, 해방 후 자발적 농지분배, 머슴해방,회천서초교 지원을 하였고, ‘몽양 여운형(1886~1947)’을 추종하며 ‘건준,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 등에 가입하였으며, ‘우(右)도 좌(左)도 아닌, 중도(中道) 통합노선’을 걷다가 실패하고 만다.
패배하는 영웅의 시련담이다. 형제사 층위로 보면, 兄 정해룡과 동생 정해진(1915~ )의 인생행로사이기도 하다. 한학(漢學)에 독학을 하며 고향과 선영을 지키던 兄과 장흥소학교, 광주고보, 경성제대를 나와 동경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사회주의자 동생이 빚어내는 형제갈등사이다, ‘남쪽에 있는 兄 정해룡’과 ‘북쪽으로 간 동생 정해진’의 자식들 역시 여러 고초를 겪는다. 집안 문중사 층위로 보면, 회천면 봉강리 일대에 사는 영광정(丁)씨 집안이야기이다.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합 8명 사형에 수십명 처벌로 연좌되었다. 임진난 때 선산부사와 이충무공 종사관을 역임한, 장흥 장동 출신의 ‘반곡 정경달’ 선생이 집안 현조이며, 그 동생 ‘팔계 정경영’의 후손으로 ‘동애 정각수(봉강의 조부)’가 정비한 ‘봉강재, 거북정, 삼의당’ 등 정씨고택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영광(영성)정씨 후손들의 동족마을 봉강3리 봉서동을 두고 <보성군사>는 ‘보성좌파 모스크바’로 지칭했다, 그러나 회천 봉서동은 보성의 북쪽 율어면 해방구 또는 동쪽 벌교지역과 구별되는 서남부 해변으로 문화적 정체성이 퍽 달랐다. 소설 ’태백산맥’엔 전혀 없는 판소리가 소설 ‘큰 새~’에는 작자 의도일지언정 자주 등장한다. 그들 회천 정씨들의 빨치산 행태는 회천 일림산 지역에 주로 한정되었다. 건준 시절과 6,25 전쟁 때에 회천면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던 봉강은 좌우이념에 따른 보복행위를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봉강의 인덕(仁德)과 지도력은 좌우 대립공간에서 주민들 희생을 최소화시켰다. 돌이켜, 조선시대 내내 장흥 땅에 속하던 회천 지역은 1914년에야 보성 관할로 이속되었다. 소설에 등장한 ‘영광정씨, 수원백씨, 남평문씨, 장흥마씨, 장흥위씨’ 인물들은 장흥 쪽에서 분파한 후손들이다. 봉강 정해룡은 ‘몽양 여운형‘이 암살된 후에도 중도 통합노선을 계속 견지하였다. 1948년 제헌선거에 불출마를, 2대 선거에선 무소속 낙선을 한다. (1959년에 ’죽산 조봉암‘이 사형되었다.)
1960년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낙선하고, 1961년 ‘통일사회당’에 참여하였고, 1961년 5,16쿠데타 직후에 ‘전남 통사당 사건’으로 형사처벌을 받는다. (1961년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가 사형되었다) 봉강은 ‘민주당’의 신,구파에 합류하지 아니하고 1967년경 ‘월파 서민호(1903~1974)’가 창당한 ‘대중당’에 입당하여 1967년 7대 선거에서 서민호를 지원한다. 1969년에는 ‘대중당’의 훈련원장으로 ‘박정희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선다. 그런데 1969,8경 조카 정훈상(동생 정해진의 장남)의 일본밀항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재판 받은 정훈상은 1970,12월경 모스크바를 거쳐 부친 정해진이 있는 이북으로 갔다.)
1969, 9월에는 ‘삼선개헌’이 이루어졌다, 수차 정치적 좌절 속에 주변가족들 고난과 정씨문중의 쇠락에 직면하던 ‘봉강 정해룡’은 조부 정각수의 제사를 지내고서 1969,10.25에 타계하였다. 작가는 “입에 거품을 남기고 쓰러져있더라고 했다”고 전했다.
작가의 서술태도는 중립적이다. 작가는 가족사의 명암을 선택적으로 은폐하지 아니하며, 소설의 말미에서 그 ‘입거품’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반전(反轉)이다. 다시 세월을 거슬러, 1965년 8월경 어느 밤이었다. 6,25때 자진하여 월북했던 ‘동생 정해진’이 남파되어 兄 정해룡 집을 찾아왔다. 동생은 다음날 兄의 큰아들 정춘상을 대동하고 월북한다. 회천과 안양의 경계지 ‘돗지기’를 통해 오갔다했다.
원래는 兄 정해룡을 대동 월북할 작정이었을 것이지만, 소설에서는 兄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 정춘상을 보내는 것으로 처리된다. 물론 아들 정춘상이 부친을 대신할 것을 스스로 원했을 수도 있겠는데, 여하튼 형제(兄弟)의 다리는 그때 끊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10여일 후에 남쪽으로 귀환한 아들 정춘상은 북쪽의 지시대로 활동하지 아니한 데서, 1967,5월경 정해진이 2차 남파되어 정춘상을 재교육하였지만, 이번에도 정춘상은 그 뜻대로 움직이지 아니한다.
다시 정리하면, 소설 내용에 따르더라도 兄 정해룡은 동생 정해진과 1965년 1차 접선의 당사자이고, 또한 1967년경 2차 접선 역시 알았던 입장인데, 사회와 가족 앞에서 인간적 번민은 오죽했을까? 어느 누구인들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 1,2차 남파사건은 박정희가 1979년에 유고된 후 1980년경에 뒤늦게 발각되었으며, 1985년경에 아들 정춘상은 ‘정춘상 가족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집행이 되었다. 연루된 가족들도 처벌되었다. 우리들 독자들 역시 개인사와 가족사, 정치사에 얽힌 갈등이 회오리치던, 그 시절 수상한 시대적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작가 김민환은, 이른바 ‘가족간첩단 사건’에도 불구하고, 봉강 정해룡의 고난에 찬 인생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이면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패거리 싸움이 아닌, 포용과 타협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비극적 뒤틀림은 좌우통합을 우직하게 고수했던 봉강의 처신에서 초래된 것일 수 있다지만, 개인 봉강의 삶은 평생 성실(誠實)과 대의(大義)를 추구하였다.
봉강 사후에 ‘우국지사 봉강’을 기리는 추모 비석이 두 번 시도되었다가 세 번째 1995년경에 세워졌다. 그곳 봉서동 정씨고택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도 예사롭지 않다. 자주 보이는 홍(紅)백일홍이 아닌, ‘백(白)백일홍’, 아래 다리쪽이 먼저 굽었다가 곧추 올라간, ‘고목 소나무’, 사당 앞에 심은 ‘500년 동백나무’가 정씨집안이 겪은 온갖 풍상을 대변하는 듯 하다. 올 여름에 다시 마주친 정씨고택의 풍경을 차지한, 그 인근 밭에는 ‘키가 큰 참깨, 키 작은 들깨, 땅바닥에 엎드린 생강’이 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풍속적 세태도 흥미롭다. 장흥 출신 작가의 직간접적 목격담도 될 것. 작가는 ‘봉강 정해룡’의 조카 정훈상과 목포 해양고 동기생이라서 그들 가족사의 비극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소설의 등장인물로 중립적 화자(話者) 역할도 하는 ‘지수’가 마침 작가의 고향, 용산 원등에서 출가를 해온 원등할머니의 친정 서출로 설정되어 있는데, 영광김씨 원등할머니는 실제로 봉강의 고조모가 된다. ‘화사(畵師)’와 ‘사진사(寫眞師)’를 겸했던 ‘지수’에게, ‘봉강’은 “사진은 죽었는디, 그림은 살아 숨 쉬구먼. 초상화가 있으니 이제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구마.”라고 말하고서 그 얼마 후에 죽었다. 그는 ‘초상화’ 시대의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회천 율포에서 열린 5일 난장 씨름대회에서 “장흥 놈들 앉은 자리에는 3년 동안 풀이 안 나고, 보성 놈들은 고추가리 서말을 묵고 물 속 삼십리를 간다.”는 우스개 소리도 퍽 재미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새납(태평소,날라리)소리’는 장흥과 회천 사람들의 흥(興)도 될 것이다. 두 소감을 덧붙인다. 첫째, 고수(鼓手)와 창자(唱者) 관계이다. 홀로 분투하던 ‘동강 정해룡’을 끌어주고 받쳐주는 북채잡이 고수(鼓手)가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소설 속 명창 정응민을 받쳐주던 고수가 누구였을지 궁금해진다.) 둘째, 그 무렵 장흥사정으로 해방정국, 미군61중대, 6,25정국이 궁금해진다.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했던 장흥 제헌의원 김중기(1901~1959?)는 2대 선거에 무소속 낙선하고 월북하였다. ‘무계 고영완(1914~1991)’은 미군정 장흥군수에 제2,5대 선거에 당선되었다. 마침 봉강 정해룡의 고모가 고영완의 숙모였고, 고영완의 누이가 ‘인촌 김성수(1891~1955)’의 며느리이다. 고영완의 경쟁자, 손석두(1911~1976)는 미군정 장흥서장이었고, 제3,4대 자유당 의원이었다. 해방정국 장흥사정과 장흥인물들 자취를 알려주는, 또 다른 역사적 세태소설의 등장도 기대해본다.
첫댓글 수준 높은 글이네요.
역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