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금. 은빛숲, 다차원 생태장, 까치살모사 부부
봉수대에 차를 세워두고 능선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째 계속 되는 강풍에 숲은 온통 어지럽다. 떨어진 이파리들과 찢긴 가지들이 마구 널려 있다. 바람은 여전히 초속 5~10미터 정도로 부는 것 같다. 여기저기 찢긴 숲은 간벌한 듯 쌩쌩하고 약간은 쏘는 듯한 냄새가 난다. 하기야 저를 보호하고 치유하기 위해 부지런히 화학물질을 내놓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밑엔 가지는 물론 새로 돋은 솔잎들이 융처럼 깔려 있다. 강풍에 버티지 못하고 애채로부터 쏙쏙 빠져 나온 것이다. 어린 솔방울도 많다. 때죽나무나 노린재나무 같은 것들의 열매들도 그렇다. 매년 되풀이 되는 일이다. 봄이 되고 오뉴월을 지내고 여름이 되면 식물들은 한껏 자라 무성해진다. 하지만 이 맘 때쯤이면 꼭 강풍이 지나가고 웃자라고 연약한 것들은 꺾여버린다. 산뿐 아니라 밭도 마찬가지다. 지주대와 줄을 매주지 않으면 옥수수든 고추든 일제히 넘어지기 일쑤다. 그러면서 자연은 식물들도 단련을 시킨다. 보다 단단하게 더 큰 시련에 대비할 수 있도록. 상처 한 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상처 입은 나무들이 내뿜은 것은 일종의 소독약이고 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공기는 정화되고 살균되기도 하리라.
바람 부는 언덕도 좋지만 숲 속 오솔길도 좋다. 강풍이 불 때마다 일제히 나무들은 하얀 잎을 뒤집으며 나부낀다. 파도치듯 울면서 하얗게 나부낀다. 바람이 아니었던들 저들이 감추어진 은빛노래를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물푸레나무 하얀 잎이 뒤집힐 때 바다를 향한 그리움도 나부낀다. 숲은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네가 모르는 아득한 시간과 이야기들을 가졌다고. 나부끼는 걸 나부끼는 걸 그저 바라보며 걷노라면 나는 정말 엄청난 섭리 안에서 거인의 손금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이들이 함께 있어서 든든해진다.
어제 오늘 간간히 하늘말나리가 보였다. 자연복원되고 있는 봉수대 구 임도의 한 모퉁이 꿩고비 군락 아래에는 노란 물레나물꽃 군락도 있다. 이런 서식장소를 하나 둘 알게 되면 왠지 모를 행복감에 뿌듯해진다. 일종의 작은 부족들이 여기저기 모여 사는 것 같다. 어제에 이어 새롭게 눈에 띄는 버섯 사진을 찍었다. 영지버섯, 긴골광대버섯아재비, 끈적쓴맛그물버섯, 마귀광대버섯, 흰무당버섯아재비, 모래꽃만가닥버섯, 밤자자갈버섯, 푸른끈적버섯 등이다. 하지만 이름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저기 다양한 버섯들의 모습에 버섯의 세상이 또한 펼쳐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삶과 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무관한 듯 하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다차원우주론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숲에 와서 각 생명이 살아가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라. 개미와 거미와 나비와 진퍼리새와 그늘사초와 신갈나무와 구름버섯과 물과 구름과 바위와 바람 등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삶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약간의 상상력과 감정이입을 통해 그들이 되어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세계는 무한히 많이 중첩된 세계 중 하나이고, 무한히 많은 세계는 다시 다차원적으로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연의 인드라망도 우주의 인드라망처럼 한 곳이 울리면 공명하며 다른 곳이 울리게 되어 있다. 그것을 다차원 생태, 다차원 생태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조금만 더 세심하여 자연의 이러한 다차원 생태와 생태장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이들을 함부로 파괴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4대강이나 골프장 등 스포츠 공간을 위해 이 모든 생태장과 생태계를 밀어버린다는 것은 야만도 이만저만의 야만이 아닌 것이다. 야만이란 문명과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감각을 잃은 문명이 야만이기 때문이다.
자연 앞에 서 보라.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 할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와 같이 놀고, 바람 같이 한 시절을 왔다가 갈 뿐이다. 바람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모든 말을 하며 지나간다.
초소 뒤편 언덕 돌무더기 부근엔 까치살모사 부부가 산다. 두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쉬는 장소가 있다. 늘 같은 장소에 두 마리다. 그래서 나는 그냥 부부 까치살모사라고 부른다. 인기척을 느끼면 늘 똑같다. 한 놈이 먼저 잽싸게 돌틈으로 사라지고 다른 놈은 좀 더 천천히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까치살모사 부부를 찍으려고 작정을 한 터라 또아리 튼 까치살모사 한 마리를 찍을 수 있었다.
한편 내려오는 길바닥엔 살모사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무엇을 잡아먹었는지 뒤쪽이 두툼하다. 가까이 가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배가 불러 만사가 귀찮은가보다. 죽었나 살았나 궁금할 정도다. 나뭇가지를 던지니 그제야 움직였다. 발을 꿍 구르는 금새 또아리를 틀고 꼬리를 방울뱀처럼 흔들면서 공격 자세를 취한다. 나도 더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 조용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