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래 글은 어제 2월 3일 실시한 필자의 월례 웰빙교양강좌 강의안의 일부입니다 . 최익제(敎博)
------------------------------------------------------------------------------------------------
한국인의 행복 메뉴얼; 일곱가지 웰빙 스펙트럼(5)/ 지혜
인생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노력하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전혀 뜻하지 않은 실패, 고난, 좌절, 고독, 심지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뭘까요?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웰니스의 다섯 번째 모듈인 지혜를 메인 주제로 다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혜란 무엇일까요? 책을 많이 읽는다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지혜가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이지 지혜는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에서 풀어내야 할 문제들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풀어야 할 게 더 많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혜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능력이라기보다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지혜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여전한 듯 보입니다. 어느 해 미국에서 대학생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했더니 예수, 부처, 간디, 공자, 소크라테스, 솔로몬, 교황, 윈스턴 처칠, 달라이 라마, 만델라, 엘리자베스 2세 등등이 나왔습니다. 대부분 종교인, 성인이나 철학자, 정치가들입니다. 지혜를 종교, 철학, 정치와 관련 지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지혜를 실생활과 동떨어진 고차원적이고 개념적인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자의 일상에서 지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웰빙의 중요한 요소로 현실의 삶 속으로 가져오려면 먼저 지혜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과연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는가?’입니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의, 즉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에 지혜의 측정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 결과 지능에 대한 객관적인 검사법은 있어도 지혜에 대한 객관적인 검사법이 없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인간 발달에 관한 8단계 이론’으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E.H.Erikson)은 지혜를 ‘특정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평온하게 분리된 삶을 사는 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면의 자아가 이끄는 대로 잘 맞추어 사는 게 지혜’라는 뜻입니다. 또 독일의 심리학자 파울 발테스(P.B.Baltes)는 ‘삶의 기본적인 실천방식을 제시하는 전문적 지식이 축적된 결과물’이라 했고 미국의 심리학자 모니카 아델트(M.Ardelt)는 ‘인간 내부에서 실제로 발달한 총체적 특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정의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을 좀 더 간단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면 ‘지혜는 자기의 삶을 운용하는 능력이자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에는 어차피 풀 수 없는 문제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이란 본시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늘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일까요. 만일 지혜가 없다면 상황에 떠밀려 자기다운 삶을 잃을 수도 있고 자칫 근시안적 관점으로 다가서면서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위대한 사상가나 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 필요한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만이 취할 수 있는 최적의 행동 형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매 순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 결정적 의미는 그 이상입니다. 즉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역경이나 문제들을 마주했을 때 우리의 삶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지혜가 필요한 순간은 부지기수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의 대부분이 문제대처 능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힘든 문제에 부딪쳤을 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문제 상황과 일단은 심리적 거리를 두는 여유나 기존의 관점과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지혜는 이미 앞 강의에서 다루었던 행복 매뉴얼, 즉 수용, 변화, 연결이란 묘듈이 잘 돌아가게 하고 강점을 잘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일상 가운데 언제나 어디서나 지혜를 풀가동할 수 있는 훈련법은 있을까요? 먼저 충분한 지식 쌓기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다르지만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더욱 지혜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면장은 시골의 면장, 이장할 때의 그 면장이 아닙니다. 면면장(免面牆)을 줄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담은 면장(面牆), 즉 담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면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가운데 지식을 끝없이 업데이트하는 것은 면장을 벗어나기 위한 필수 코스입니다. 요컨대 누구든 지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독서를 포함해 일상의 경험등 다양합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다.’라고 할 때는 지식과 경험이 업데이트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이거 내가 해봐서 잘 알아.’ 같은 지나친 경험 의존적 판단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는 맥락적인 것입니다. 맥락이란 말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맥락을 파악해야만 더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나라를 일컬어 ‘고 맥락 사회’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 제시한 내용 자체보다 맥락이나 배경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문화를 말합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지혜로운 처신을 위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같은 고맥락 사회에서는 ‘눈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눈치는 말에 담기지 아니한 상대의 감정이나 의도를 짐작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맥락을 잘 파악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른바 ‘눈치밥’이라는 말 때문에 눈치를 부정적으로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눈치는 상황적 맥락을 잘 파악해 지혜로운 선택이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실 눈치도 경쟁력입니다. 미국 언론인이자 작가인 유니 홍은 <눈치, 한국인의 비밀무기>라는 책에서 눈치를 일컬어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고 서로 화합하며 관계를 맺기 위해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살피는 섬세한 기술’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똑같은 행동이나 사건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가령 모처럼 비가 내리면 농부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야유회를 계획한 모임에서는 하루를 망치는 일이 됩니다. 예컨대 내일 종합검진을 받아야 하는 데 오늘 업무상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할까요? 종합검진과 술 마시는 것 그 자체가 다 그릇된 행동은 아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 즉 맥락에 따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행동과 사건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 서로 다른 역할을 해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어떤 ‘나’로 행동해야 할지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가령 시위에 나선 대학생일 때와 시위를 진압하는 기동 경찰일 때의 역할과 임무가 전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상황과 역할이 달라졌다면 이전의 나를 떠올리며 갈등하는 것은 비 맥락적 판단이고 지혜로움에서 멀어질 확률이 더욱 높아집니다. 맥락에 따른 합당한 역할에 충실하는 게 바로 지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맥락적 지혜입니다. 즉 은퇴 이후를 대비해 기술을 배운다거나 노후의 근력 부족을 대비해 미리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맥락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법을 제시합니다. 먼저 ‘배역주기’입니다. 예컨대 카페 같은 데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할 것 같은지를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몸짓, 눈빛, 말투 같은 분위기를 통해 내 경험지식과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맥락 추정하기’입니다. 영화를 중간부터 본다거나 소설을 중간부터 읽으면서 그 앞부분을 상상하고 추정해 보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상맥락 체험하기’입니다. 일종의 입장 바꿔 보기입니다. 가령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식당에 손님으로 가보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이나 주문 후 음식이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 같은 서비스를 평가해 봅니다. 같은 조건과 상황일지라도 입장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맥락의 대가가 되기’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복잡한 추리과정을 통해 풀어보는 것입니다. 추리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탐정의 역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눈치 잘 보기’입니다. 눈치를 잘 본다는 말은 소심하게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비언어적 신호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가려내는 능력은 상대를 공감하고 배려하는 데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세상을 살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가 없고 비밀이 없고 정답이 없다.’입니다. 먼저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미국 알링톤 국립묘지에 가보면 ‘Freedom is no free.’ 즉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나라에 살 수 있는 것도 공짜가 아닙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고통을 감수하고 싸워 그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또 온갖 사기 범죄의 바탕에는 인간의 공짜 심리를 교묘하게 노린 전략으로 가득합니다. 그다음은 ‘비밀이 없다.’입니다.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너만 알고 있어.’같은 말입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그게 무엇이든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비밀일 수 없습니다. 이번 탄핵 사태에서 보듯 배신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는 법’이고 ‘소한테 한 말은 괜찮아도 심지어 엄마에게 한 말은 탈이 날 수 있다.’라는 말 역시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끝으로 ‘정답이 없다.’입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사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끝없이 증명해 나간 이야기기의 모음이라고 정의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답을 규정하고 판단할 능력 자체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내 입장에서 정답처럼 보일 뿐이고 내 입장에서 정답으로 보고 싶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이든 글이든 지나친 일반화는 늘 허망한 결말로 끝나곤 합니다.
물론 생명의 존엄성처럼 절대적 진리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런 진리는 극히 예 외적인 것이고 여전히 세상은 상대적인 것으로 가득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매년 봄마다 고생하는 황사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황사는 중국과 몽골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한반도 전역에 엄청난 흙먼지를 쏟아 놓습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이미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영향도 있습니다. 한 번에 쏟아 놓는 흙 먼지양이 약 8만 톤, 15톤 덤프트럭으로 5,000대 분량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이 흙먼지가 산성화하는 우리나라 표토층을 중화해 주고 바다의 적조현상도 줄여 줍니다. 이 둘을 합한 경제적 가치만도 연간 수천억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상대성에 민감한 것입니다. 돌아보면 나에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이고 나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한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사람이고 어떤 사회에서 예의바른 행동인데 다른 곳에서는 무례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게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칠 때 균형잡힌 시각으로 접근해야 가장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결코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兩是論)을 강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선택의 필수적 전 단계로서 충돌하는 두 조건과 상황을 균형 잡힌 관점으로 판단하자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올바른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화적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엄청난 문화충격, 이른바 ‘컬쳐쇼크(culture shock)까지 겪어야 합니다. 성지 순례차 이스라엘에 가면 호텔 엘리베이터가 두 종류라고 합니다. 일반 엘리베이터와 ‘사바스(sabbath), 즉 안식 엘리베이터’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 엘리베이터 버튼조차 누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유대인 손님들을 위해 사바스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층마다 30초간 자동으로 멈춥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사바스 엘리베이터를 탔던 사람들은 행여 공항 버스를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을 것이고 입에서 욕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관광객들은 신경질을 내며 마구 버튼을 눌러댔을 것이고 이를 본 현지인들에게는 얼마나 한심스러운 모습이었겠습니까. 문화적 상대성이 초래한 해프닝이지만 이것 역시 지혜로운 삶과 문화적 상대성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돌아보면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이나 고통도 상대성 이해의 부족에서 초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상사와 후배 직원, 친구와 연인 사이 등에서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럴 수 있나?’ 같은 말이 종종 나옵니다. 자신이 상대에게 쏟은 관심과 애정의 크기를 상대는 다만 간섭이나 잔소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성장배경, 추구하는 삶의 가치, 목표가 다르고 성격과 강점도 다르고 좋아하는 일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따라서 친밀감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같은 무수한 다름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설령 부모, 자식의 관계일지라도 별개의 인격체인 이상 나와 다른 타인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상대성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리더 되어보기’가 있습니다. 모든 리더는 크고 작은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지혜로 해결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최종 책임자라면’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그다음은 ‘다양성 관찰하기’입니다. 지하철, 병원 등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관찰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대성 언어 사용하기’입니다. 상대성 언어란 상대의 언어가 맞을 수도 있으므로 상대의 감정을 판단하기 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관점으로 일단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이 바뀌면 생각도 바뀝니다. 상대성 언어로는 관심갖기(무슨 일 있어요?), 들어주기(그래서 그랬군요.), 존중하기(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지지하기(아, 그 방법도 좋네요), 격려하기(잘하실 거예요), 덮어주기(실망하지 말고 잘해봅시다)
또 다른 지혜 훈련법으로는 ‘불확실성 견디기’가 있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란 말을 합니다. 언젠가는 누구든 다 죽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네 인생은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불확실성은 곧 실패의 위험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인지하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지를 고민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는 인간은 불확실성을 창의적으로 견디는 능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피해 가는 지혜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미래를 위한 도전과 용기로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하늘 아래에서 돈이 제일 많다는 일론 머스크는 창업하기 오래전 욕구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 1달러로 살아가기입니다. 창업했다 망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다가 이런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한 달에 30달러만 벌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업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입니다. 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하다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용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길은 완벽한 해결책보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능한 여러 변수들을 고려한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할 때 더욱 수월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확실한 상태에서만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 다 위험하게 보일 뿐이고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게 됩니다. 요컨대 지혜는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현재로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불확실해도 괜찮다고 수용하면서 최선의 결정을 하겠다는 용기라고 하겠습니다.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법으로는 우선 ‘예정에 없던 일 하기’입니다. 아무 계획없이 여행을 떠나거나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한번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매일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본다거나 매일 자동차로 다녔다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본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런 것을 반복해도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경험이 쌓이면 그게 어느새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가상창업하기’도 한 방법입니다. 실제로 투자하는 게 아니라 상상으로 창업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끝내지 않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늘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미종결 상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나중에 일을 마무리하고 의사결정을 내려야겠지만 이런 훈련은 적어도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현실을 단순화시키고 싶은 욕구 때문에 어떻게든 답을 빨리 내려버리는 충동을 자제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지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한 사람이 훗날 사업에 성공한 경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인생은 시소와 같아서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힘든 일 하나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한 사람도 있고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행복과 불행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 앞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게 바로 지혜입니다. 인생을 긴 숨으로 내다보면 지금의 모든 것은 다만 찰나의 순간일 뿐입니다. 본시 인생이란 순간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좌절과 실수는 현재의 변화로 나타나고 현재의 끈기와 인내는 미래의 투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삶은 정해진 공식이나 인과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식이 있긴 하나 상황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인과성보다는 오히려 연관성이 더 많다고 봐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의 전체성을 이해한다면 때를 기다리는 느긋함의 관점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같은 자세는 자포자기나 패배가 아니라 기다릴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가려서 삶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지혜일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죽은 자들은 때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다린다는 것도 살아 있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긴 숨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기다려야 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기다림을 고통이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지혜의 힘입니다. 장기적 안목을 갖추는 훈련법으로는 ‘인생그래프 그려보기’입니다. 즉 세로축은 상황, 가로축은 나이로 하고 안 좋았을 때와 좋았을 때를 점을 찍고 그걸 선으로 이어보면 시소처럼 오르내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은 ‘경험 배우기’입니다. 자서전 쓰기가 좋은 사례입니다. 셋째는 ‘충분히 미루기’입니다. 긴 숨으로 사는 연습입니다.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고 상황을 더 지켜보는 것입니다. 물론 적시를 놓쳐서는 안되지만 즉각반응은 지혜로운 처신이 아닙니다. 즉각반응을 경계한 명언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면 화낼 필요가 없고 내가 잘못했다면 화낼 자격이 없다.’ 끝으로 ‘시간벌기’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활동으로 여유를 찾는 것입니다. 자판기 커피보다는 차를 끓여 마신다거나 무단횡단보다는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은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지혜는 겸손함과 고요함과 마음챙김의 태도를 갖추며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올라서서 그동안 숲속에서 바라 본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힘입니다. 겸손은 존재감 없는 루저의 덕목이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읽는 사람의 특성일 뿐입니다. 삶의 지혜로서의 겸손은 세상의 서로 다름과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동시에 자기의 존재감도 존중하는 힘입니다. 겸손을 키우는 훈련법으로는 첫째, ‘마음챙김 명상’입니다. 마음에 집중해서 자신과 세상을 보는 의식을 맑고 밝게 깨우며 화두를 중심으로 주의 집중함으로써 평소에는 의식으로 자각하지 못했던 깊은 차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 ‘다른 사람의 장점 찾기’나 ‘더 큰 힘 인정하기’도 있습니다.
끝으로 지혜는 공감하고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공감은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는 능력,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 타인에게 감성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판단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공감이 가능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C.G.Rogers)는 공감이란 ‘타인의 내면세계를 체험하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감정도 없고 이상한 감정도 없습니다. 감정이란 없애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감정이란 표현할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공감을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편견부터 없애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공감은 그게 무엇이든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미러링(mirroring)은 대표적인 공감 행위입니다. 타인의 가벼운 행동, 말투, 표정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의 표정과 반응, 즉 아기의 대화로 감정을 함께하는 것이 대표적 미러링입니다. 이때에 아기는 미러링을 통해 자신을 독립적 주체로 인식합니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은 공감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미러링, 즉 고통 공감행위로는 조선시대 단종애사에 나오는 ‘동정곡(同情哭)’이 있습니다. 서울 창신골 아낙네들이 쫒겨난 어린 왕비가 동망봉에 올라가 통곡할 때마다 함께 울면서 아픔을 나누었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형식적이지만 문상객이 상주와 함께 곡을 하는 우리의 전통 장례풍속도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공감이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만일 공감이 어렵다면 수용만 해도 됩니다.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공감, 수용을 더 잘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말 그대로 ‘꼰대’가 되는 경우입니다. 심지어 중국집에서 짜장면 안 먹으면 바보같은 짓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인원수대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제 3자의 불편한 눈치를 알아채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수용은 존중과도 같은 것입니다. 영어의 존중, ‘respect’에서 ‘spect’는 ‘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다시 ‘re’가 붙었으니 ‘다시 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동안 상대의 성격, 능력, 취향 등등의 시시비비를 내 기준으로만 보았는데 이제 그런 걸 내려놓고 ‘다시 한번 새롭게 봐준다.’입니다. 이게 바로 존중입니다. 그래서 존중은 수용의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감과 수용능력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첫째, ‘타인의 감정 인식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그 줄거리에 감정이입하는 경우도 좋은 사례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 어떤 친구는 교실에서 일어나 책을 읽다가 감동적이거나 슬픈 내용이 나오면 엉엉 울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둘째, ‘공감언어 사용하기’입니다. 그런데 공감 언어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말이고 인정하는 말이지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양비론 혹은 양시론, 충고, 비난, 무시, 회피는 공감을 방해하는 언어입니다. 셋째, ‘협조하기’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와주고 싶어’같은 말입니다. 넷째, ‘사랑하기’입니다. 상투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사랑은 공감과 수용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언어입니다. 그 결과 동서고금에 걸쳐 ‘사랑’이란 말이 넘쳐흘렀으며 가장 사용량이 많은 언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웰니스의 다섯 번째 모듈인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지혜’하면 ‘솔로몬의 지혜’를 떠올립니다. 성경 구약 열왕기상 3장에 가면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불후의 스토리텔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지혜의 경지에 이를 수야 없겠지만 구약성경 잠언에 나오는 지혜의 경구들은 다릅니다. 우리 모두의 지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언은 한자로 ‘箴言’입니다. 즉 ‘바늘로 내 영혼을 찌르듯 일깨우는 말’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종교를 떠나서 누구든 읽고 간직해야 할 교훈으로 일컬어집니다. 게다가 잠언의 모든 기록은 표현만 다를 뿐 다 지혜에 바탕을 둔 내용들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일찍이 법정스님은 그의 명상 에세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의 서문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두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명상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자비의 실현이다. 그것은 곧 지혜의 길이요 헌신의 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지혜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었기를 기대하면서 강의를 마칩니다.
첫댓글 나를 다시 뒤돌아보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박사 좋은글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