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아들
최용현(수필가)
어린 김두한(박상민 扮)은 청계천 수표교 밑에서 거지처럼 살아가다가 쌍칼(김승우 扮)의 도움으로 종로에 있는 극장 우미관에 취직한다. 거기서 종로패의 두목 김기환과 맞장을 뜨러 전라도에서 올라온 망치를 제압하면서 주먹실력을 선보인다. 그러다가 오치아이라는 일본학생이 조선학생들을 마구잡이로 메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간 김두한은 그 자리에서 오치아이를 때려눕히고 환호하는 구경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김두한 싸움 잘합니다. 나 김두한 비록 소학교 2학년에 거지 패로 돌았지만, 나 김두한 의리 빼면 시체입니다.”
한편 명동에서 활약하던 일본계 야쿠자 두목 하야시(신현준 扮)는 장안에서 싸움꾼으로 유명한 김동회(이일재 扮)를 앞세워 왕십리 패를 손아귀에 넣고,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종로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그러자 우미관 사장은 하야시도 두려워하는 칼잡이 무사시를 데려온다.
종로패의 얼굴마담이 된 무사시는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며 쌍칼의 야시장까지 넘보자, 무사시와 쌍칼의 혈전이 벌어지고, 여기서 패배한 쌍칼은 김두한에게 부하들을 넘겨주고 종로를 떠난다. 무사시가 이번에는 김두한이 총애하는 기생 화자(방은희 扮)에게 수청을 들라며 찝쩍거리자, 분노한 김두한이 무사시를 때려눕힌다. 무사시도 종로를 떠난다.
김두한은 일본 유도계의 챔피언 마루오카가 서울에 와서 각 지역 두목들을 제압하며 위세를 떨친다는 얘기를 듣고, 우미관 앞 공터에서 그와 대결을 펼친다. 그의 특기를 알아낸 김두한은 자신의 장기(長技)인 두발차기와 박치기로 마루오카를 제압하고 운집한 관중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그 무렵, 종로패의 두목 김기환이 일본인 형사를 때려눕힌 죄로 감옥에 들어간다. 김기환은 면회 온 김두한에게 ‘이제 너의 시대가 왔다.’며 종로를 그에게 넘겨준다. 서울의 심장인 종로패의 두목에 취임한(?) 김두한은 대강당에서 일장 연설을 한다.
“동지들! 나 김두한이 비록 일자무식이고 가진 거라곤 불알 두 쪽 뿐이지만, 배짱도 좋고 힘도 좋소. 동지들! 나 김두한을 밀어주시오.”
그 후, 신마적이라 불리는 엄동욱이 이끄는 경성제대 학생들이 하야시패에게 당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김두한은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가 김동회를 때려눕히고 하야시패를 제압한다. 입원한 신마적을 찾아간 김두한은 자신이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고 뿌듯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오는데, 뒤에서 친일파 형사가 ‘킨토깡!’ 하고 김두한을 불러 세우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장군의 아들’(1990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계 야쿠자에 맞서 종로를 지킨 김두한의 활약상을 그린 홍성유의 소설 ‘인생극장’(뒤에 ‘장군의 아들’로 개칭)을 거장 임권택 감독이 3부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깡패를 미화했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명멸(明滅)하는 주먹계 고수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현란한 액션장면은 박진감이 넘친다. 우리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6개월간 상영하면서 서울관객 68만 명을 돌파하여 최고기록을 수립하였고, 전국관객은 200만 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해 청룡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비롯하여 최다관객상을 받았다. 신인남우상을 받은 박상민과 하야시 역을 맡은 신현준 등주요 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장군의 아들’ 2편(1991년)에서 김두한은 하야시의 오른팔 김동회와 다시 싸워 이기지만 사랑하는 여인 송채환(송채환 扮)은 김동회에게 뺏긴다. 일본장교를 구타한 김두한이 헌병대에 잡혀가자, 송채환은 헌병대장의 숙소를 찾아가 김두한을 빼내고 잠적한다. 한편, 김두한을 짝사랑하던 일본기녀는 하야시파의 습격계획을 김두한에게 알려주는데….
‘장군의 아들’ 3편(1992년)에서 쫓기던 김두한은 원산에서 가수 장은실(오연수 扮)을 알게 되고, 다시 만주에 가서 쌍칼과 김동회를 만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는다. 김두한은 자신이 있을 곳은 종로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종로로 돌아와 와해된 조직을 재건한다. 한편 가수로 성공한 장은실은 쫓기던 김두한을 숨겨주다가 경찰에 체포되는데….
주인공 김두한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김두한은 1918년에 태어나 8살 때 어머니를 잃고 도박중독에 빠진 외삼촌댁에서 살다가 13살 때 도망쳐 나왔다. 서울 수표교 밑에서 거지생활을 했는데, 소년시절부터 청계천, 파고다공원 등지에 싸움꾼으로 명성을 얻었다. 우미관에 들어간 후 주먹실력을 발휘하여 영화에서처럼 조선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서울 종로의 상권을 굳게 지켜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청년전위대에 가입했다가 부친이 41세 때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한 것을 알고 탈퇴하여 이승만과 김구 등이 조직한 대한민청의 별동대장이 되어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시도, 친일파 재산압류 등에 앞장섰다. 그 무렵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이 살해되자, 미군정은 김두한을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1948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에서 석방했다.
6.25전쟁 때, 김두한은 낙동강전투에서 학도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무부장관과 국민방위군 사령관 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1954년, 김두한은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이 자행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표를 던져 제명되었고,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다.
1966년, 김두한은 당시 군사정권과 삼성그룹이 야합하여 일으킨 사카린밀수사건 때 국회에서 오물투척을 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의 비판대열에 섰고, 1972년 11월 19일, 귀갓길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틀 후 서울 정릉동 자택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두한의 딸은 국회의원을 지낸 탤런트 김을동이고, 그녀의 아들은 탤런트 송일국이다. 연전에 TV 오락프로에 나온 송일국의 어린 세쌍둥이 아들 대한, 민국, 만세가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장군의 세 증손자들은 지금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리라.
첫댓글 부천에 야인시대 쎄트장에서
머물럿던 기억들 더듬어가며
장군의 아들
참 시대적인 파란만장
애린 마음으로 가슴 아파 했습니다
네, 깡패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김두한의 활약상은 우리 국민들에게
가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같아요.
3번 보았습니다.
요즘도 케이블에서 방영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