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리 늪의 결투
이재영
낮 동안 뜨겁게 빛나던 태양이 서쪽 산마루에 붉은 노을을 만들고, 추수를 앞둔 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며 넘실거려요.
논들이 계단처럼 층을 이룬 들판 한가운데로 꽤 넓은 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막아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수중보가 보여요.
넘친 물이 흘러내리는 수중보 둑 위에 하얗고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서 물속을 노려보고 있어요. 긴 목을 빼고 미동도 없이 물고기가 둑 위로 거슬러 오를 때를 기다리는 크고 흰 새는 바로 왜가리여요.
“어제 비가 와서 물은 많아졌는데, 왜 고기가 없지? 흐려서 잘 안 보이나?”
왜가리가 목을 오므려 S(에스)자 형태로 만들며 중얼거렸어요.
키가 1m나 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뒷머리에 검은 댕기도 있고, 배는 흰색이지만 등은 전체가 거의 회색에 가까워요.
왜가리는 동남아시아에서 무더위를 피해 날아오는 여름 철새여요. 그런데, 이 왜가리의 부모는 작년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어요.
“야, 왜갈아! 해도 지는데 그만 집에 가자.”
그때 근처 논에서 왜가리보다 덩치가 약간 작은 중대백로 한 마리가 벼 이삭을 제치며 얼굴을 내밀고 논두렁으로 나왔어요.
“응, 중백아. 너는 논에서 뭐 좀 잡았어?” 왜가리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어요.
“응, 작년보다 논우렁이가 더 많은 것 같아. 미꾸라지도 몇 마리 먹었는걸. 끼룩.” 중대백로가 길고 노란 부리를 벌려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어요.
다리가 검고 온몸이 하얀 이 중대백로는 이미 오래전에 텃새가 된 철새여요.
“그랬어? 나도 논바닥이나 뒤질 걸 그랬나? 개천에는 고기가 영 안 보인다.” 왜가리가 움츠린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목메는 소리를 내었어요.
“그래? 어제 비가 와서 큰 고기가 꽤 올라올 텐데?” 그럴 줄 알고 오늘은 자기도 수중보에서 물고기를 잡고 싶었던 중대백로예요.
그러나 언제나처럼 덩치 큰 왜가리에게 양보했던 터라, 겉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어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해요.
그때 개천 위쪽 저 멀리서 다른 새 한 마리가 날아왔어요.
키가 60cm 정도로 작고 목과 다리도 짧은 해오라기여요. 배는 희고 날개는 회색이며 텃새인 해오라기는 야행성이라 해가 지는 지금부터 먹이 사냥을 나서요.
“왜갈아, 물고기 잡혀? 혹시, 한 마리도 없는 거 아니야?” 왜가리 옆에 날아와 앉은 해오라기가 붉은색 눈을 번득이며 물었어요.
“영 없대. 근데, 해오락 너! 물고기 없는 줄 어찌 알았어?” 듣고 있던 중대백로가 대신 대답하며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해오라기를 노려봤어요.
얘네들은 종은 달라도 서로 친한 사이인가 봐요.
“아, 맞나 보네! 실은 말이야, 어젯밤에 내가 여기서 입이 아주 큰 물고기를 봤거든. 그 녀석이 불어난 물길 따라 올라온 고기들을 모조리 다 잡아먹는 것 같더라고.”
해오라기는 이것저것 잘 먹는 잡식성이라 여기저기 안 가는 데가 없어요. 그러나 이곳 수중보 자리는 중대백로와 마찬가지로 덩치가 제일 큰 왜가리에게 양보하고 자기의 먹이 사냥터로 삼지는 않아요.
이들 조류는 몸의 크기, 즉 덩치에 의한 서열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어요.
이 개천을 따라 상류로 한참 올라가면 소나무가 무성한 산기슭에 커다란 늪이 있어요.
‘우화리’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골짜기의 개울을 막아 큰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바닥에 흙이 차올라 지금은 깊은 데가 겨우 1m도 안 되는 늪지대로 변했어요.
늪에는 연꽃, 마름, 창포, 자라풀, 물억새 등 수백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요.
아울러 붕어, 메기, 피라미, 새우 등 수십 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서 새들에게는 천국이에요.
그래서 ‘우화리 늪’의 소나무 숲에는 왜가리, 중대백로, 중백로, 쇠백로, 황로, 해오라기 등 여러 종류의 백로들이 수십 마리나 날아와 번식하며 집단 서식지를 만들고 있어요.
“뭐? 입이 아주 큰 물고기가 다른 고기를 다 잡아먹더라고? 그 입 큰 고기 이름이 뭔데? 가물치라도 돼?” 중대백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오라기를 다그치며 물었어요.
가물치는 이 개천에서 제일 크고 싸움 잘하는 물고기지요. 드물게 가끔 나타나기는 하지만.
“몸통이 가물치 두 배도 더 돼 보였는데, 나도 처음 봐서 이름은 모르겠어. 끄르륵.” 해오라기가 제 잘못이라도 되는 듯 짧은 목을 움츠렸어요.
“천천히 기억해서 생김새를 얘기해 봐.” 왜가리가 중대백로를 가로막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오라기를 쳐다봤어요.
“얼핏 보면 붕어 제일 큰 것만 하지만, 좀 더 길쭉해. 등 쪽은 어두운 풀잎 색인데, 배 쪽은 약간 노랗고 하얘. 입이 어찌나 큰지 황소개구리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어!” 해오라기가 그 입 큰 물고기를 기억하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어요.
“그런데, 그렇게 큰 녀석이 왜 내 눈에는 안 보인 거지? 혹시, 여기 고기 다 잡아먹고 벌써 늪으로 올라간 거 아니야?” 왜가리가 걱정되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어요.
해오라기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무시무시한 외래종 물고기 ‘큰입배스’가 이곳 개천에 나타난 게 틀림없어요. 거기다 큰입배스는 밤에 수면 근처로 올라와 활발히 먹이를 찾는 야행성 물고기여요.
“이 녀석들도 한두 마리가 아니겠지? 끼룩.” 등의 깃을 곤두세우며 분노를 나타내는 중대백로의 걱정이 몹시 큰 것 같아요.
그 입 큰 물고기가 황소개구리처럼 저 위쪽 ‘우화리 늪’에까지 퍼져서 설치면, 물고기의 씨가 말라 어린 백로 새끼들을 먹여 키우기 아주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 왜가리 부모님이 황소개구리와 전투를 벌일 때, 중대백로와 해오라기 등 덩치 작은 백로들은 황소개구리 올챙이를 부리로 쪼아 죽이며 함께 싸웠어요. 올챙이란 게 크기가 작은 메기만 했어요.
그런데 이 큰 입 물고기는 어디에 알을 낳는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작전을 세워야 할지 정말 난감해지네요. ‘우화리 늪’의 위기가 아닐 수 없어요.
“그 녀석이 저 위쪽으로 어디까지 갔는지 개천을 따라 올라가며 살펴보자.”
백로 대장인 왜가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푸드덕,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라 목을 Z(제트)자로 접고 빠른 비행을 시작했어요.
중대백로와 해오라기는 얼떨결에 서로 쳐다보다가, 약삭빠른 해오라기가 파드닥, 왜가리의 뒤를 따라 먼저 날았어요.
“야, 해오락! 같이 가야지, 인마!”
우물쭈물하던 중대백로도 어쩔 수 없다 싶은지, 해로라기의 뒤를 따라 기우뚱 날아올랐어요.
해가 질 무렵이라 그런지 얼굴에 부딪히는 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져요. 이번 겨울이 조금 일찍 오겠다 싶어요.
“어? 벌써 벼를 베었네!” 한참 날아가자 일찍 수확을 마친 논 몇 마지기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먼저 날아온 왜가리가 개천의 수중보가 아닌, 수확이 끝난 논두렁에 앉아 있어요. 뒤쫓아 날아온 해오라기와 중대백로가 웬일인가 싶어 차례로 왜가리 옆에 내려앉았어요.
“왜갈아, 뭐 해? 논에 뭐 있어?” 중대백로가 두리번거리며 물었어요.
“아니, 저, 저 녀석들!” 왜가리의 눈길을 따라가든 해오라기가 깜짝 놀라, 안 보이게 몸을 낮추려고 짧은 다리를 오므리다가 엉덩방아를 꽝 찧고 말았어요.
“응, 뭐야? 저것들 재두리잖아? 한동안 안 보이더니 왜 또 온 거야? 에이, 재수 없어!” 논에 서성이는 여러 마리의 재두루미를 발견한 중대백로가 긴 목을 움츠리며 투덜거렸어요.
키가 1.2m를 넘는 재두루미는 왜가리보다 훨씬 큰 겨울 철새로 일본에서 월동하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새여요. 어미 새와 어린 새가 가족끼리 큰 무리를 지어 논에 떨어진 벼, 식물의 뿌리, 갯지렁이 등을 먹어요.
그때, 여남은 마리 재두루미 무리 중의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왔어요.
하늘을 뒤덮을 듯 크고 검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는 재두루미는 머리와 목 뒤쪽만 하얗고 몸통이 온통 짙은 회색이에요.
“큐루룻, 쿠쿠. 너희들 여기 왜 왔니? 무슨 구경났어?” 재두루미가 눈 주위로 붉은색 피부가 노출된 큰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어요.
“아, 아니요. 그냥 지나가다가, 반가워서요. 올해는 일찍 오셨네요? 끼룩, 끼룩.” 중대백로가 재두루미 기분 상하지 않게 얼렁뚱땅 둘러댔어요.
“응, 겨울이 빨리 와서. 우리는 며칠만 있다가 갈 거니까 너무 언짢아 말 거라. 너희 개천의 물고기는 안 먹을 테니까 그리 알고. 쿠쿠.” 재두루미가 황록색 부리를 씰룩이며 어른스럽게 말했어요.
“우리 개천에 입이 큰 물고기가 나타나서 다른 물고기 다 잡아먹고 한 마리도 없어요.” 이때다 싶어 왜가리가 얼른 나서며 한마디 했어요.
“응? 입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고? 붕어보다 훨씬 크고 긴 놈 말이지? 그 녀석들 엊그제 저쪽 마을 개천에서 우리가 다 잡아서 잔치 벌였는데? 큐룻, 쿠쿠.” 재두루미가 눈을 더 크게 뜨며 긴 부리를 벌려 입맛을 다셨어요.
“정말요? 그럼 재둘 아저씨가 우리 개천의 그 입 큰 물고기를 잡아 줄 수 있어요?” 해오라기가 짧은 목을 길게 빼면서 아양을 떨었어요.
“살아남은 몇 놈이 강물 따라 이쪽으로 왔나 보네. 염려 말아라. 이따 해지면 우리가 개천 뒤져서 어디 있나 확인하고, 내일 낮에 모조리 없애줄게. 쿠쿠.” 재두루미가 자신 있게 말했어요.
“죄송하지만, 하시는 김에 저 위쪽 늪까지 다 훑어주실래요? 끼룩, 끼룩.” 중대백로도 긴 목을 뻗어 간곡히 부탁 말씀을 드렸어요.
“그래, 알았다. 우리는 다리가 길어서 웬만한 늪에 숨어있는 물고기도 다 잡아낼 수 있다. 우리 식구들 내일 잔치 한 번 더 벌여보지 뭐. 큐룻, 쿠쿠쿠.” 재두루미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자기 식구들 있는 데로 날아갔어요.
“이젠 됐다. 그지? 저 재둘 아저씨 말, 믿어도 되겠지? 끄르륵.” 해오라기가 좋아서 생글생글 웃었어요.
“그러게. 이제 저 재두리 아재들, 밉게 안 보이네. 끼룩.” 중대백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몸을 흔들었어요.
“늪지대의 좁고 얕은 물길은 우리가 더 잘 알잖아? 내일 따라다니면서 구경만 말고, 우리도 직접 한판 붙자!” 우화리 늪의 결투를 앞둔 왜가리가 백로 대장답게 의젓한 자세로 말했어요.
이번 겨울에 먼 남쪽 고향 동남아까지 힘들게 날아가지 않고, 여기서 좋은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겠다 싶은가 봐요.
(2021년 국립생태원 생태문학 공모전 낙선작입니다)
첫댓글 대상은 환경부장관상(상금 300만원)입니다.
“야, 해오락! 같이 가야지, 인마!”
ㅋㅋㅋㅋㅋㅋ~ 재미집니다.
사진들도 너무너무 고맙고요.
네, 난정 작가님. 저 위쪽 세 마리는 분류상 다 '백로'에 속하는 조류랍니다.
@삼일 이재영 옙.
감사합니다 . ㅎㅎ
큐루룻, 쿠쿠.. 압권입니다.
몇번을 소리내어 봤어요. ㅎ
왜가리, 중대백로, 해오라기, 모두 백로에 속하는군요~
뭘 모르니 중대백로만 백로인 줄 알았답니다.
네, 들고은 위연실 님. 댓글 감사합니다. "큐루룻, 쿠쿠"는 실제로 재두루미 우는 소리입니다.
백로들은 함께 소나무 숲에 살아도, 위 본문에 나열한 덩치 순서대로, 위쪽 전망 좋은 자리는 왜가리가 차지하고 황로나 해오라기는 맨 아래 제일 후진 곳에 둥지를 튼답니다. ㅎㅎ
많이 배웠습니다.
나는 황새나 두루미쯤으로 얼핏 알고만 있었습니다.
네, 뱃사공님. 댓글 감사합니다. 철새가 점점 텃새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