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성심병원에서 퇴원하면서 AFP 수치가 높아져서 간암소견을 확인해 본 결과 수술 전 찍은 CT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의사로부터 간 경변에는 궁극적으로 간이식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이식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과 간이식인협회, 장기이식센터 등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간이식에 대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다.
뇌사자이식 등록을 하기 위해 2003년 3월 11일에 아산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그 나흘 후인 15일에 나온 검사결과는 2cm 정도 크기의 간암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달 이내에 생체이식을 할 기증자를 구하라고 했다. 간암이라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진 나에겐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가 너무나 사무적이고 냉정해 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기들 일에 바빠 보이는 무심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나를 기가 막히게 했다. 나는 지금 절망적인 심정인데 저들에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는 것이 그랬다.
간신히 버스를 타고 와서 집 앞에 내렸으나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남편의 얼굴을 태평스레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다니던 동네병원에 가서 안면 있는 의사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며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 의사야 얼마나 난감했을까마는 어디가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뇌사자이식 등록을 하려고 했었고 이식도 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여서 충격이 컸다.
3월 20일 남편에게 암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남편은 의외로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 아마 자신도 증세가 그리로 발전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말하는 생체이식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뇌사자이식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어느 세월에 그 순서가 오겠냐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자식이든 형제든 자기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 대대로 간이 안 좋은 집안 내력으로 봐서 가족 중에서 기증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마침 시동생 친구 중에 중국에서 간을 이식하고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초청해서 남편과 이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결론은 다른 어떤 방법이 없다면 외국에 나가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월 21일 아산병원에서 내과 진료를 보고 25일 입원하였다. 이식 외에 방법으로 내과에서는 화학색전술을 해보라고 하였다. 우선 암세포의 전이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 준비를 위한 검사를 하고 한편으로는 그 검사자료를 복사하여 중국병원에 펙스로 보내서 이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거기서는 남편의 자료를 보고 이식이 가능하니까 화학색전술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바로 퇴원하여 중국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월 2일 중국 천진 제일중심의원으로 출발했다. 천진공항에는 엠블란스와 의사가 통역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병원은 생각보다 크고 병실도 잘 꾸며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이식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수술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처음에 의사는 수술을 2주 정도 기다려야 할 수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남편은 11일에 다시 식도정맥 출혈이 있었다. 이번엔 위로 토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 흑변을 봤다. 결국 다시 위내시경으로 벤딩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일로 수술날짜가 예상보다 빨리 잡혔다. 처음 수술날짜를 통보받던 순간에 남편은 온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하던 이식수술을 이제 실제로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두렵고 긴장이 되었을까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식할 뇌사자 간이 좋지 않다고 하며 수술은 취소되었다. 그 일은 그리고도 두 번이나 더 일어났다. 두 번째는 수술실까지 들어갔었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4월 24일, 중국 온 지 3주가 지나 드디어 뇌사자로부터 간이식을 받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3번씩 수술준비하면서 그때마다 두렵고 무서워 벌벌 떨고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한 것을 겪고 나니 네 번째 수술 준비할 때는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했다. 오전 11시에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밤 10시에야 수술실을 나왔다. 장장 11시간의 수술을 받은 것이다.
중환자실에 3일 있는 동안 3번 면회했다. 처음 면회할 때 남편은 벌써 말도 하고 눈도 맞추고 웃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남편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물론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중국의 시설과 기술이 형편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은 바꿔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후 1인실에서 3주간 생활했다.
수술 후 1주일 만에 열이 오르며 거부반응이 와서 3일간 집중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크게 통증이 심하지도 않았고 사이코시스(정신착란 종류) 같은 것도 없이 잘 먹고 운동도 잘 하였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회복도 좋은 편이었다. 5월 17일 점심까지 먹고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는 우리를 엠브란스에 태워 천진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인천공항에 내릴 때는 정말 살아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 오늘까지
돌이켜 보면 일 년이라는 시간 안에 남들은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일을 세 번이나 겪었다. 중국으로 들어갈 때는 SAS가 창궐할 때였다. 불짐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갔다. 이 방법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에 와서는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로 하고 지금은 5주에 한번씩 가서 혈액검사하고 헤파빅 주사 맞고 약 처방을 받는다. 이제 7개월이 지나서 내일이면 남편은 복직을 하려고 한다.
남편이 살아난 것은 하늘의 큰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뜻이 무엇인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일에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그 일부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또 이제부터 평생 동안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우리를 걱정해 주고, 기도해 주고, 보살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자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자연의 도움을 받는지 모른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힘든 일을 다 겪어내고 내 곁에 살아 있는 남편이 어떤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고맙다. 2003년 11월 30일 아침에. < 끝 >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부군의 쾌유를 빕니다.
형수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님 복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포 동생
저희와 비슷한 시기에 하셨는데 복직하신다니 감사와 축하드릴 일이네요. 고생 많으셨고요. 하늘의 큰 뜻을 하루하루 이루며 사시는 뜻 깊은 날들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살아난 것에 큰 뜻이 있었을것이란 말씀과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 제 남편도 크게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더욱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영화같습니다^^잘읽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 드림니다! 정말 외국으로 수술 하러 나갔다가 성공하여 귀국하는 모습은 느껴 보지 않은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요. 상상이 갑니다. 얼마나 좋으십니까?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 하시길 빕니다!
감동입니다.. 열심히 살아오셨기에 가능했던 행운같기도 하구요... 부럽네요.. 암튼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아 정말 이렇게 힘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간 어려움 다버리시고 이젠 행복한 시간들만 많이 많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