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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악보는 자유로운 영혼, 나는 오늘도 연주를 해야 산다.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
깊어지려는 밤, 까만 칠흑의 공간에 달빛이 차오르면 목마른 사람들이 하나둘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나이든 연주자들이 한사람씩 무대에 오른다. 그들은 여전히 무대에 대한 엄숙함을 가지고 있다. 콘트라베이스, 드럼, 트럼본, 트럼펫, 섹서폰, 퍼크션, 그들이 자리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건반에 앉은 한 사내가 문글로우(MoonGlow)를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가 바로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이다. 예순일곱의 나이에도 또렷한 눈빛과 열정 거기에 더해 여유가 묻어나온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끌어들인다. 피곤과 분노와 짜증을 알고 있다는 듯, 이제 이곳에서 그것들을 릴렉스하게 몰아내라고 부드럽게 종용한다. 그 옛날 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노예들의 사랑과 한을 캄캄한 밤, 달빛에 의지해 풀었던 것처럼 당신들이 원치 않았던 낮의 혼곤을 풀어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피아노의 선율이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격하게 건반을 오가면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재즈에는 그렇듯 슬픔을 풀어내는 힘이 있다.
1950년대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한 소년이 살금살금 풍금 앞으로 다가간다.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노래에 화음을 넣어주던 악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얀 건반을 눌러보고 까만 건반을 눌러보다가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떤다. TV도 라디오도 없었던 시절, 소년에게 음악은 더구나 악기는 매우 생경했고 놀라웠다. 틈만 나면 소년은 풍금 앞으로 갔다. 교장선생이었던 아버지 덕에 그나마 선생님들의 야단을 맞지 않은 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년은 더 풍금에 매달렸다.
"옛날에는 부모가 살아계시건 아니건 다 자식들이 저들끼리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먹고 살기가 힘들 때였지. 그런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더 그럴밖에. 나한테는 풍금이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전기도 촛불도 변변하지 않았던 그때, 소년은 달빛에 의지해 풍금을 치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띵똥 거리며 쳤고 나중에는 바이엘과 체르니로 혼자 공부를 했다. 선생도 책도 흔치 않던 시골에서 소년은 꾸준히 피아노를 친다.
"처음에는 피아노 교본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었어요. 선생님한테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이엘을 선물 받고 악보 보는 법만 대충 배웠지. 선생님도 그 시절에 뭐 제대로 아나, 그냥 애들 노래책 반주나 해주는 정도지."
비록 88건반도 아닌 베이비 피아노이지만 소년은 중학교에 가서야 풍금이 아닌 피아노를 보게 된다.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교에 가서는 피아노를 쉽게 대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늘 잠가두고 다니셨기 때문이다. 소년은 조마조마하며 도둑 피아노를 친다. 건반 소리와 야단치러 올지 모르는 발소리를 숨죽여 들어야 했지만 피아노 앞에만 서면 행복했다.
"요즘은 모든 게 참 흔해요. 음반도 흔하고 책도 많아 게다가 유학도 갈 수 있고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지 뭐."
그는 음악에 대해 늘 허기졌던 지난 시간들이 거꾸로 자신을 피아노에서 더 떠나게 하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만약 우리 집이 잘 살아서 피아노가 집안에 있었다고 생각해봐요. 아마 진력이 나서 더 안쳤을 거야."
그에게 결핍은 갈구로 나왔다. 그는 어쩌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서너 시간은 거뜬하게 연습을 했다. 언제 피아노 앞에 앉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만큼 절박했다. 여름에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는 지도 모르고 피아노를 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 내 기분을 표현한다는 것, 내성적인 소년이 자신을 내보이는 길은 피아노의 선율, 하나였다.
그런 소년도 결국 집안 형편 때문에 예고에 가는 것은 포기하게 된다.
"특채로 갈 수는 있었는데 선생도 교재도 제대로 없이 배운 내가 무슨 수로 특채에 붙겠어요. 장학금을 받아야 갈 형편이어서 결국 포기했어요. 아버지도 많이 편찮으셨고."
청소년이 될 때까지 오로지 소원이라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다짐했던 소년에게 예고를 갈 수 없던 가정 형편과 뒤이은 음대 진학의 실패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피아노를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재수를 하던 때, 피아노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간 미8군의 클럽, <김치카바나>는 미군들로 북적였다. 짙은 담배연기로 홀은 꽉 차 있고 늘씬하고 예쁜 여성들의 모습과 넘쳐나는 술잔, 그 한구석에서 홀로 피아노를 치던 사내의 연주가 그를 휘어잡았다. 무슨 곡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부모 말씀 잘 듣고 얌전하게 살던 청년의 영혼이 단박에 흔들렸다.
'그래, 나는 이제부터 저 음악을 할 거야.'
사람들은 그 음악이 재즈(Jazz)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클래식을 하지 않은 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클래식은 내 음악이 아니고 작곡자의 음악이에요. 작곡자의 의도대로 쳐야해. 하나라도 틀리면 실격이 되지. 그런데 재즈는 연주자의 음악이야. 연주자 마음대로 애드리브를 넣어서 연주할 수 있어요. 그게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어."
재즈(Jazz)음악은 그에게 곧바로 영혼의 자유를 알려주었다. 무대에 올라가서 연주를 할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재즈의 마력을 그는 마음껏 누렸다. 같은 곡이어도 슬프면 슬픈 음악이, 즐거우면 즐거운 음악이 되어 나오는 재즈에 그는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재즈는 철학을 담는 음악이라는 것을.
"즉흥 연주를 하려면 자신 안에 자료들이 모두 축적되어 있어야 가능해요. 그냥 단순하게 음계를 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재즈는 학력이나 스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연주자 자신이 있어야 해."
자신의 생각이 음악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은 바로 그 음악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즈의 난해함은 어쩌면 인간사의 난해함일지도 모른다. 재즈는 매순간 창작을 요구한다. 무언가 다른 상상력과 마음이 없으면 밋밋한 음악일 뿐이다.
그는 아방가르드적인 프리재즈도 즐겼지만 대부분은 테두리나 테마가 있는 음악을 해왔다.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운 음악을 할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을 하려 애쓰고 좋은 사상을 가지려 애쓰는 성정 탓에 그는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의 거장인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 이 세분들 모두를 다 모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처음 그는 이봉조 선생을 만났다. 가수 정훈희 현미 등을 키운 이봉조 선생은 그에게 한없이 높은 존재였다. TBC TV 악단장이기도 했던 선생의 봉조클럽에서 피아니스트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미8군에서 섹서폰을 연주했던 선생은 대중음악계를 거머쥐고 있었다.
스물넷 어린 나이에 이동기악단의 일개 피아니스트에서 방송국 악단원이 되는 행운을 가지기도 했다. 선생은 그를 매우 귀여워하셨다고 한다. 그는 정통 재즈를 그만두고 대중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당시 결혼을 한 몸이어서 먹고 사는 일도 그에게 책임져야하는 부분이었다.
그에게 재즈의 허기를 채워준 것은 박성연 씨가 운영한 야누스였다. 그러다 일본에서 귀국한 길옥윤을 만난다. 선생과는 부인과 지낸 시간을 빼면 제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81년 길선생의 재즈바<웨어하우스>에서 연주를 했다. 낮에는 이봉조 악단장을 모시고 밤에는 길옥윤 선생과 일을 했다. 그러다 TBC가 KBS와 통폐합하면서 김강섭 악단장도 만나게 된다. 그는 이봉조 악단파로 분류가 됐지만 김강섭 악단장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보통 시기나 질투가 있을 법한데 모나지 않은 그의 성격 탓에 악단장들이 모두 그를 자신의 악단원으로 받아들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모신 순서대로 돌아가셨네요. 이봉조 선생님, 길옥윤 선생님, 아직 김강섭 악단장님은 정정하세요. KBS악단 모임을 한 달에 한 번 하는데 지금도 만나면 낼모레 내 나이가 칠십이 되는데도 옆에 앉으라고 해서 귀여워하고 격려해 주신다니까."
그래서 그는 노장의 뮤지션들을 불러 모아 십이년 전부터 문글로우(MoonGlow)를 열었다. 사람들은 문글로우를 쿠바의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에 비유한다. 흩어진 음악인들을 불러모아 다시 열정적으로 연주를 하게 해서 자신의 삶을 더 가치 있게 한 실제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부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처럼 유명한 다큐가 되지는 못했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아쉽다면 오랜 시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불모지의 재즈 판에서 함께 했던 뮤지션들이 한분두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트렘펫의 홍덕표, 드럼의 최세진 선생은 이미 작고하셨다. 트럼펫의 강대관 선생은 이가 성치 않아서 목관악기를 불수가 없어 경북 봉화에 내려가 있다.
그는 재즈 1세대인 최선배(트럼펫), 이동기(클라리넷), 김수열(색소폰), 조성국(드럼), 류복성(퍼크션)과 연주할 때면 그동안 지나온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서서히 흘러가는 감회에 젖고는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연주할 수 있을까?'
다행히 웅산이나 말로 같은 가수가 있어 재즈의 명맥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엊그제 웅산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한데요. 그래서 내가 직접 화관을 들고 가서 축하해 줬어요. 너무 고마워 눈물을 글썽이더라고. 그런데 내가 더 고맙지. 대중적이지 않은 재즈를 부르느라 애쓰니, 돈도 안 되고 무대도 많이 없는 재즈 판에 남아있는 후배들을 보면 고마워요."
지지난해 서교동 사거리 보보호텔 뒤편의 문글로우(MoonGlow)도 문을 닫을 뻔 했다. 재즈를 배울 수 있는 대학의 학과들은 늘어나지만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곳은 점점 줄어든다.
"내가 만약 국악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쯤 무형문화재가 됐을지 몰라요. 이만큼 헌 신을 하고 매달렸다면 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쉽게도 재즈는 미국음악이래요. 그래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해요. 이건 미국음악이 아니에요. 재즈는 우리와 같은 한(恨)을 지닌 흑인 음악이고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연주하면 우리 음악이 되는 거에요. 클래식도 그렇게 따지면 남의 나라 음악이잖아요."
그가 처음 낸 음반도 그래서 아리랑 블루스다. 물론 가요를 어설프게 연주했다는 자책도 있지만 그에게 재즈는 단순한 외국 음악이 아닌 것이다.
매주 목요일 밤, 재즈 1세대가 모이는 날이 아니면 문글로우는 너무 한산하다. 다른 젊은 친구들이 연주를 하지만 별도의 입장료나 공연비를 받지 않기에 재정은 늘 적자다. 지난번 문을 닫을 뻔 했을 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이들이 모여 문글로우를 사랑하는 사람들(문사모)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영업이 재기됐지만 그도 잠깐, 임대료는 다시 인상이 되려 하고 손님들의 주문은 적다.
"하루라도 연주를 하지 않으면 몸의 일부가 정지가 되는 것 같아요. 재즈는 내 삶 자체지요."
그에게 문글로우(MoonGlow)는 그의 삶을 풀어 놓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이 언제 닫힐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사십여 년이 넘게 그가 음악을 하도록 도와준 아내 전계숙씨는 그게 늘 안타깝다. 한때 실업농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그녀가 음악인을 만나 운동을 접고 뒷바라지한 댓가치고는 너무 잔인하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남편을 위해 주방 일을 돕고 카운터를 지키는 초로의 아내를 위해서라도 그의 음악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그는 카톨릭 성가 음악에 빠져 있다. 음악으로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연주를 할 때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하는 외경심과 함께 음악 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들어 이 작업에 더 애착이 간다고 한다. 현재 8집까지 나왔는데 10집까지 만들고 BIG BAND 18명이 참여하는 재즈의 기념비적인 음반을 만들려고 기획하고 있다. 얼마 전 그래서 사단법인 재즈협회도 만들었다.
"단순히 문글로우(MoonGlow)의 문이 닫히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재즈가 영원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유로운 음악의 장을 열어갔으면 좋겠어요. 재즈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거든, 그건 마음을 보고 연주하는 거에요."
그의 바램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자유롭게 가장 따뜻한 위로로 재즈가 존재하기를, 문글로우(MoonGlow)의 달빛이 멈추지 않기를, 나또한 기도한다.
글 신희지
사진 신희지
차와문화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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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일밤 지리산학우인 여러분만을 모시고 번개콘서트를 합니다.
이번 공연은 즉흥 공연이고 번개처럼 게릴라처럼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이번 공연은 한국의 부에나비스타쇼셜클럽처럼 노장의 음악인들이 모여 연주를 하는 공연이 되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런 공연은 아무데서나 접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장소가 비좁아서 여러분을 모시지 못합니다.
이번 공연은 마음이 빠른 몇분만을 모셔야하기에 지리리산학교 교사와 학우 30여분만을 선착순으로 모십니다.
공연 관람은 30분, 숙박은 20분으로 한정합니다.
숙박은 선녀님네 집 방한칸, 여성 6명,
마을회관 2층 남녀 상관없이 14명
*침낭 가져오셔야 합니다.
숙박자는 1인당 1만원입니다.
저녁안주, 아침식사 하실 분도 1인당 1만원입니다.
술은 별도. (본인이 드실 술은 본인이 가져오세요)
자고 먹고 하면 1인당 2만원입니다.
계좌는 곧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인이 마실 술과 안주는 본인이 가져오시면 됩니다.^^
초대일시: 4월 6일 오후 9시(야밤에 연주 시작합니다.) 10분전에 오세요~
장소: 선녀와나뭇꾼(우리집 밑)중기마을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210-2
전화로 묻지 마시고 댓글로 물어주세요.
댓글로 신청 마감합니다.
30명입니다.
장소가 좁아 많이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토요일 일정은 없습니다.
이준익감독은 여수엑스포 음악감독 일로 일정을 빼기 어려워 다음 날로 미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5월 전에는 온답니다.^^
댓글 요령.
신희지/동반1인/공연관람(숙박인 경우에는 숙박신청)
첫댓글 산자야(유승연)/숙박신청.
새벽바다(최영민)/ 두사람 추가 / 공연관람.
이헌(김선관)/ 딸내미한사람 추가 / 숙박신청.
권진근 / 숙박 신청.
오치근, 박나리 교사 /공연관람
텐트 가져오실 분, 우리집 마당에 선착순 5-6인용 기준 세개 칠 수 있습니다.
박경애 / 숙박신청
추한식 / 공연관람
미소/숙박신청
요로분, 전화로 신청 이제 안받습니다. 직접 좀...
공무원분들은 인터넷이 안열려 직접 받습니다.
이슬비, 여울비 / 공연관람
이원규 순천대 제자 2명(여) 숙박신청합니다.
윤경희/동반 어린이 2명/공연 숙박 신청합니다.
일단 관람,숙박 신청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못갈수 있습니다^^
수수꽃다리(배소영)/ 친구추가1명 / 공연관람=> 죄송합니다. 친구가 몸이 안좋아서...혼자 가지 못해서 취소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대신 다른 사람이 참석하길 바랍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3명/ 공연관람
한우물(김현대) / 추가 1명 / 숙박 신청.
현재 22명입니다.
공연관람입니다.천안에서 내려갑니다.
남자 추가 1인 숙박 관람
수고 많으십니다 공연 관람
하고 싶어요^^
안녕 하세요 저도 신청 합니다. 어른 2인 입니다.
숙박은 어찌 하시는지요?
김선관님 갑자기 서울 출장 잡혀서 못오시고
현재 26명 접수했습니다.
무위도식 조미연 김종출 공연관람
관람신청합니다~전주에서가는분함께가요^^
정효순 동반 1인 공연관람 가능한지요?
네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시인 제자들 토요일 화전놀이에 온답니다. ㅎㅎ
처장님~ 남자 어른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 못가시고 저희는 어른하나 아이하나 갑니다.^^
공연관람 신청합니다.^^
공연관람 신청합니다. 와이프와 같이갑니다. 부탁드립니다.
네 오세요^^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
중요한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