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혜를 통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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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 선정을 통한 지혜를 밝혔고,
여기에선, 그 반대로 지혜로 통한 선정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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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삼매)을 이루지 못한 수행자는, 이해만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는가?
아니다! 이해만으로도 얼마든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지혜로 통한 “찰나삼매”가 필요하다.(지혜가 먼저 오고, 선정이 뒤에 오는 방법)
지혜로 통한 삼매란, 이해가 100% 완벽함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열려, 무지로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순간삼매 속으로 들어간다.
▶책 “조론”의 물불천론(사물은 움직이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 [어느 노인이 고향에 돌아갔더니 동네 노인들이 “그 노인”에게 말하기를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있네!”]라고 한 것을 읽고, 감산스님은 홀연히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라고 했다.
깨닫고 나서 바깥에 나갔더니,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에,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고,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물불천론)”라는 의미를, 몸소 체험했다고 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완벽해지는 순간, 평소에는 이해되지 않던 것이, 그날은 온몸으로 체험되면서 열린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그 중간의 시간은 전부 생략하고, 노인에서 직통으로, 일곱 살 아이로 돌아가면,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기억은 잠겨지고)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만 보인다.
즉 공간과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보라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내가 만들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보면, 단지 정지된 나뭇잎만 보일 뿐이다.
마치 푸라스틱 긴 관을 눈에 대고, 풀밭 속에 있는 개미를 봤을 때와 같다. 관으로 보지 않았을 땐, 갖가지 수많은 풀이 주위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개미 하나에만 집중할 수 없었지만, 관을 대고 보면, 풀잎 위에 앉아있는 개미만 보인다. 이것처럼, 주위와 비교하지 말고 보란 뜻.
즉 몇십 년 세월 속에 섞여 있는 수많은 사연 들은 무시하고, 직통으로 일곱 살 아이의 눈빛을 또렷이 보듯이, 그렇게 기억을 되돌린다면,
그땐 나뭇잎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 주위에 비교 대상이 전혀 없고, 오직 나뭇잎 하나만, 좁은 관 끝에 또렷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소에는 비교하면서 사물을 보는데, 어느 날 “사물은 움직임이 없다”라는 이해력이, 이해를 넘어서, 100퍼센트 실제 체험이 됐을 때, 낙엽에 움직이는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는 나” 없이 낙엽을 보면,
즉 머리에 저장된 정보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보면, (다른 대상과 비교하지 않게 되어) 낙엽 하나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온 우주에 낙엽 하나만 있는 것처럼 되니까, 낙엽에 움직이는 모습이 없는 것이다.
사물이 움직이는 것은,
“나와 너”라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서로 비교하면서 보게 되지만, 특출난 지혜로 보면 상대성이 사라진다.
특출남이란, 상대성 없이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나” 없이 보게 되면, 시각이 사물 쪽에만 꽂혀있게 된다는 뜻이다.
예로 들어,
미국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조각배를 볼 때, 사진기로 찰깍! 하고 찍으면 떨어지는 조각배가 멈춰있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이땐, “보는 내”가 배제되기 때문에, 나에게 분산되던 의식이, “나”는 빠지고(나는 제외 되고), 오로지 조각배에만 꽂혀있게 된다. 이것이 “찰나삼매”다.
이것이 지혜가 먼저 발동되고 뒤에 삼매가 따라오는 형식인 정혜쌍수다.
“찰나삼매”란, 순간적으로 보는 내가 없는 상태,
즉 보는 주관이 배제된 상태에서, 바깥 사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이런 형식은, 지혜에 100퍼센트 몰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소의 지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결론]
이론의 극치인 지혜를 통해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物不遷論)까지만 오면,
그다음 텅 빔은 저절로 성취된다.
즉 삼매가 저절로 나타난다. “텅 빔”과 “삼매”는 같은 의미다.
그다음 현실로 돌아와서 모든 것이 가짜(연기)인줄 알았으면,
이제는
삶을 즐겨라!
죽으면 이 꿈 또한 꾸지 못한다.
꿈인줄 알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즐길 수 있다.
살아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혜는 이 꿈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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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언]
부처님은 육체적인 늙음의 고통에서 편안했을까? 아니면 괴로웠을까?
부처님도 80세까지 사셨다. 80세의 나이에 신체적 고통 없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늙음이란, 삶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인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삶을 유지하셨을까? 부처님의 수행력으로는 얼마든지 삼매 집중을 통해서 목숨을 편안히 끊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구태여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참으면서 사셨을까?
그리고 수많은 늙은 장로들은 몸이 불편하면, 스스로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하여, 한 군인 출신 젊은 스님이, 100명의 장로의 목숨을 끊어드렸다고 자랑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정도로 늙은 제자들은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최고의 어른인 부처님은 왜 그렇게 늙음의 고통 속에 오랫동안 사셨을까?
이것이 최근 나에게 부닥치는 의문이다.
그래서
결론을 얻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철저히 아셨기 때문이다.
고통 또한 뇌가 만든 호로몬의 장난이다.
고통이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주의하라고, 예비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신호의 약물은, 독극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몸속에 있는 건강한 물질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몸서리칠 정도로 고통스럽게 느껴질까?
이것이 우리 뇌가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기술이다.
즉 속임수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행과 알아차림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호로몬이 장난친 속임수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것을 명확히 깨닫고 나서 대자유를 얻은 것이다.
무슨 자유냐 하면,
고통을 즐기라는 것이다.
기쁨만 즐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속임수인데도, 고통은 괴로워한다면, 이것은 속임수에 당한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모든 것이 속임수라면, 속임수인 고통 또한 가짜니, 즐기라는 것이다.
왜 그 가짜에 묶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속임수의 장난질을 싱긋이 웃으면서, 아무것도 관여하지 말고,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사기 치고 노는지, 그 꼴을 즐기라는 것이다.
나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 아닌가 말이다.
이 극심한 고통을 마주 바라보면서, 싱긋하게 미소 지을 수 있어야, 수행의 마지막 언덕을 넘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80세의 노령에 몸이 매우 고달팠을 텐데도 노쇠한 몸을 끌고 오랫동안 사신 것은, 삶에 미련이 있어서, 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고통도 즐기고, 늙음도 즐기고, 죽음도 즐겨라.
모두가 가짜인줄 알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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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스님처럼,
1. 절할 때 허리를 굽혀도 굽힘이 없다
2. 낙엽 한 개를 보면 떨어짐이 없다.
3. 소변을 보는데 소변의 움직임이 없다. = 마치 폭포수 물의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따라 내려가면서 보면, 물 속도에 맞춰, 눈도 같이 내려가기 때문에, 물의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또 폭포수에 떨어지는 조각배를 사진으로 찍으면, 정지된 장면이 보이듯이, 그렇게 움직임이 없다.
인간이 보기 전에는, 물에는, 떨어지는 속도가 없다.
떨어지는 현상은 내가 만든 것이다.
이것을 찰나삼매라고 한다.
찰나삼매란 순간적으로 아~! 하는 순간 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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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통은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기능이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수행자에겐 이 문제가 오랜 숙제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