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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50년 -
그 격세지감과 온고이지신 /
50년전 봄 그리고 2004년 가을, 부산 나드리 -
천리길 부산, 봄바람에 하루종일 달려 가야만 했던
그 부산을 가을나들이 당일치기로 다녀 왔다 -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봄바람에 천리를 가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50여년 전의 일이다. 지금 70의 나이인 세대가 6. 25 전
중학교를 다니며 읽었던 글이다.
독립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安在弘) 선생의 작품이다.
봄바람에 달려간 그 기찻길 천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아침에 서울을 떠난 기차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부산에 닿았다.
기차 차창 밖으로는 당시의 봄 풍경들이 소상하게 담겨져 있다.
이 글을 읽으며 공부했던 중학생들이 이제는 70의 나이를 넘겨고
이제는 KTX라는 이름의 고속열차를 탄다.
2004년 가을 어느 날 아침, 8시에 서울역을 떠나는 KTX 5번
열차를 타기 위해 70나이의 숙년(熟年) 20여명이 서울역에 모였다.
당일치기로 부산 나드리를 떠나는 길이다. 일행의 한사람이 되어
동행길에 올랐다.
만 50년 전인 1954년, 그 때도 서울역에서는 '급행객차'라는 뜻의
'급객 3호열차'가 아침 8시면 서울역을 출발했다.
SCENE 1
* 2004년 가을 -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함께 승차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국건회(國建會. 회장 서해량)라는 이름의 모임 사람들이다.
기차가 출발하자 서문호총무가 우유와 빵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 사이, 열차는 첫 번째 정차역 천안아산역에 도착했다.
8시34분.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하던가.
* 50년전 봄 - 마차말처럼 바쁨에 쫓기는 생애는 이름 높은
서울의 봄빛도 즐길 겨를이 없었다...
봄 바람에 천리를 가면서 남쪽나라 꽃소식을 전하게 된 것은
나의 분수에 넘치는 한사(閑事)라 할까!
* KTX가 아산에 도착한 시간, 급객3호열차는 용산 노량진 영등포
역을 지나 시흥역으로 들어 가고 있다. 시흥역 도착이 8시37분이다.
SCENE 2.
* 2004년 가을 - 1960년 4.19 후 민주당 정권은 국토건설사업을
펼치기 위해 추진요원 2,066명을 선발했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군대를 정식으로 다녀 온 사람들이 선발될
수 있었던 자격기준이었다.
여기에 선발된 요원들은 1961년 3월부터 3개월간 전국 각지,
면 단위에 배치되어 국토건설사업에 투신했다.
이 기간 중 5.16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군사정권은
이들을 그대로 수용, 정규직 공무원으로 임용하고 그
해 6월1일자로 정부 각 부처에서 근무토록 발령한다.
20여명 숙년들이 자신들이 모이게 된 사연들을 잠시 회상하는 사이,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소요시간 57분,
이 열차노선은 기존의 열차노선과는 달리 새로 건설된 노선이다.
이 모임의 70대 사람들은 자신들을 '늙었다'는 뜻을 지닌
'노인' '노년'이라는 말 대신 '완숙'했다는 뜻인 '숙년'으로 쓰고 있다.
* 50년전 봄 - 경부선 차중의 사람이 되니 자꾸자꾸 다가 오는
남쪽나라의 봄빛은 앉아서 산과 들의 경치를 맛보게 하여 준다.
성환역 부근에서는 벌써 새 싹이 파릇파릇한 능수버들을 보았고
부강에 오니 황량한 촌락에 살구꽃이 한창이며 개나리도 필대로 피었다.
대전역을 지나...선뜻 눈앞을 스쳐가는 또 한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철뚝옆에서 쉬고 있는 나무꾼 부자였다.
지게에는 마른 풀이 한 짐이오. 옆에는 진달래꽃이 한 묶음이었다.
활짝 핀 진달래는 예서 처음 보았다.
나는 꽃을 사랑하되, 그러나 꺾기를 즐기지 않는다.
(KTX 5번 열차가 대전에 도착한 시각, 3호열차는
군포를 지나 부곡역에 도착하고 대전역에는 11시 45분에 도착한다).
SCENE 3
* 2004년 가을 - 10시50분에 KTX 5번열차는 부산역에 도착했다.
대전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여러개의 교량과 터널을 지나 금방이었다.
차속의 전광판에 나타나는 기차의 속력은 시속 300km 안팍이다.
1분동안 정차하는 동대구역에서 이호훈동우가 승차하고 일행에 합류했다.
차속에서는 길게 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부산역에는 부산모임의 차정호회장과 부산에 거주하는
동우 여러분이 마중을 나와 일행은 30여명으로 불어 났다.
렌트카로 광안리 바닷가에 있는 횟집으로 이동. 넓은 통유리 밖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식탁에 앉아 공식 행사가 거행 되었다.
이 모임의 공식 행사는 늘 별나다. 태극기와 국건회기를 벽에 붙혀 두고
애국가와 '거치른 이 강산이 우릴 부른다'로 시작되는
국토건설대의 노래를 부른다. 이 시각이 정오때였다.
* 50년전 봄 - 급객 3호열차는 10시 57분 조치원역에 도착했고
부산을 향해 대전역을 떠나는 시간은 12시,
당시로서는 가장 빨랐던 열차가 서울역에서 대전역까지 4시간이 걸렸다.
SCENE 4
* 50년전 봄 - 꽃은 봄의 중심이오 목숨의 표식이라....
무릇 목숨을 가지고 목숨을 예찬하는 자, 누구든지 꽃을 좋아할 것이다....
추풍령을 넘는다. 퍽 많은 산들이 포개어 놓이고 겹겹이 여며져 놓였는데
북쪽으로 흘러가는 골짜기 시냇물은 철철철 벅차 넘치면서
경부선 길머리로는 가장 높은 지점을 이루었다......
한국의 기후가 추풍령을 갈피로 남북이 다르거니와
모든 물이 추풍 이북에서는 북쪽으로 흐르고 추풍 이남에서는 남쪽으로
흐른다는 것도 바라보아 또한 재미 있는 현상이다.
* 2004년 가을 - 광안리 바닷가 횟집 밀래니엄식당에서 싱싱한 횟감을
안주 삼고 술 한잔까지 걸친데다 점심까지 해결한
숙년 30여명은 해운대 바닷가로 이동했다.
60년대 수영에는 비행장이 있었고 교통부로 발령을 받았던
문오철동우는 이곳 비행장에서 근무했던 일들을 회고했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그 때 그 시절의 바닷가는 아니었다.
모래 사장의 폭은 좁아졌고 광활했던 주변 경치는 사라졌다.
마치 바다가 빌딩의 숲속으로 들어온 듯 했다.
광안대교를 건너고 태종대로 가는 도중, 부산문화회관 건너편에는
UN군 묘지가 있다. 그 앞을 지나면서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머나 먼 이국땅에 와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친 영혼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자유와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 왔는가를 새삼 되뇌어 본다.
SCENE 5
* 50년전 봄 - 추풍령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직지사라는
산속의 작은 정거장이 개나리꽃 속에 파묻혀 있다.
총총한 나그네 길이 이 산골 속의 깨끗한 땅, 직지사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섭섭한 일이었다.
김천역에 다달으니 비로소 벚꽃이 눈에 띈다....
떠나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 천변(川邊) 높은 돌담 밑에서는 흰 옷에 흰
수건을 동여맨 빨래꾼 아낙네들의 방망이 소리가 한창이오,
맞은편 넓은 모래벌에는 깨끗이 빨은 빨래가 흰 눈을 헤쳐
놓은 것처럼 산뜻하게 보인다.
대신역을 지나니 공부를 마친 학교 아이들이 즐거운 듯이 지껄이면서
돌아가는 모양이 매우 마음을 기쁘게 하여 준다.
* 2004년 가을 - 태종대에서는 오륙도가 눈앞으로 다가 온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던
'오륙도 다섯 섬이/ 어찌 보면 여섯 섬이/...' 노산선생의 시
'오륙도'를 읊어 본다.
부산 풍광의 상징 같은 오륙도는 시(詩)의 소재만이 아니라
노래의 소재도 되어 우리들에게 친밀하게 다가 온다.
오륙도를 눈앞에 두고 불러보는 '돌아와요 부산항'은 별난 감흥이었다.
태종대에서 잠시 머문 숙년의 신사들은 영도다리를 건너
용두산 공원으로 향했다.
SCENE 6
* 50년전 봄 - 추풍령을 넘은 기차는 약목, 왜관 등의 정거장을 지나
대구까지 왔다. 왜관은 낙동강의 중류가 굽이 지어 흘러가는 곳이라,
즐번한 흐린 물이 과연 큰 가람의 맛이 있었다.
내가 열몇 해 앞서 왜관에 내려서 마부들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필마로 바람티를 넘어 성주까지 간 적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달성공원의 듯드는 봄빛을 가리키고
왼쪽으로 금호강의 주름지는 물길을 바라보며 추억많은 대구역에 왔을
적에는 벌써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다만 기미(己未), 임술(壬戌)의
깊고 깊던 옥중생활의 인상만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십분 동안의 정차를 다행 삼아 역 앞 마당에 나서니
동으로 팔공산, 서로 남산의 푸른 모습이 더욱 예를 생각하는 나의 감회를 돕는다.
북풍이 살을 에이는 듯 한 옥성(獄城) 속의 운동장에서 흰 눈에 덮인
팔공산의 줄기찬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떨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같은 팔공산이 그저.......
* 2004년 가을 - 영도다리를 건넌다. 6.25의 참상, 흥남철수,
미군 LST를 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부산에 집결한 피난민들의 쓰라린
생활전선이 펼쳐 졌던 항도 부산. 당시를 가장 잘 묘사했던 노래
'굳세여라 금순아'를 렌트카 속에서 읊조려 본다.
SCENE 7
* 50년전 봄 - 남쪽으로 경산을 지낸다. 경산은 경부선 가운데서 평택역과
함께 쌀이 많이 나는 곳인데 올해는 봄 가물에 쪼들려
들판에는 한 방울의 물도 볼 수 가 없었다.
생현굴을 지나 청도를 거쳐 밀양역에 다달았다. 밀양강 일대에
물과 돌이 군데군데 꿰매여졌고 용두와 종남의 산들이 우뚝우뚝
구름가에 솟았는데, 날개 같은 영남루가 강 기슭에 번 듯이 서서 넓은
들, 아득한 경치를 마시고 토하는 듯 하다.
* 2004년 가을 - 용두산 공원으로 갔다. 부산타워를 올랐다.
부산시가지 조망이 아름답고 부산항이 내려다 보인다. 실로 격세지감이다.
전쟁의 상흔으로 산비탈은 '하꼬방'으로 꽉 들어 찼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일행들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지 않았던, 만 40년 전인
1964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불에 불과했다.
SCENE 8
* 50년전 봄 - 삼량진에 이르니 벚꽃이 구름 같았다.
그 속에 몇 포기의 복숭아 나무가 사이사이에 끼어
있어 점점홍(點點紅)의 아양이 견줄 데 없었다.
천류, 밀양 언저리의 산과 물이 서로 어울린 곳에는 대밭이 보이어
맑은 남국 정조를 일으키더니, 삼량진에서 부터 남쪽으로는 갈수록
더욱 많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 2004년 가을 - 그 무렵 정부는 우리 국민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수출'임을 강조했고 '수출입국'을 큰 구호로 내세웠다.
건설과 수출!! 국건회 회원들은 이 기치아래
젊음을 불사르며 묵묵히 일했다.
그리고 이제는 먼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모습으로 뒤를 한번 돌아 본다.
불과 100불이던 국민 소득이 1만불을 넘어 섰다.
SCENE 9
* 50년전 봄 - 물금, 구포 등의 역을 지나 부산진까지 왔다.
그 동안 삼량진 근방부터는 용용한 낙동강의
하류가 거의 기차와 나란히 흘러간다.
작년 여름, 낙동강 하류의 큰 물로 말미암아 대저면 도래의 백성들이
모두 자라와 메기가 되었다고 하더니, 이제도 강가의 마을은
그 쓸쓸한 몰골이 마치 전란 치른 거리를 보는 것과 비슷하였다.
이 곳은 작년 팔월에 부산까지 오고 가는 길에, 기차로 지나가면서
재해지(災害地) 아낙네들의 슬픈 울음 소리를 듣고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더니, 이제 다시 황량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 2004년 가을 - 부산타워에서 부산항을 내려다 보며 40년 전,
초라했던 1억불 수출시대를 도리켜 봤다.
그 후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가 되었던
일들도 떠 올려 본다. 정부는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던 그 싯점을
'수출의 날'로 제정하기까지 했다.
SCENE 10
* 50년전 봄 - 대구 근방에서 부터 기온이 갑자기 높아 져서 텀지근한
마음씨더니, 부산진에 내려서 멀고 아득한 오륙도 근방의 바닷물빛을
바라보니, 심기(心氣)가 활짝 바뀌어 자못, 맑고 산뜻하고
즐거움을 깨닫게 하였다.
(급객 3호열차가 부산진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20분. 기차는
초량역과 부산역까지 계속 더 달려 간다.
부산역이 종착역이었고 도착시간은 6시30분, 서울역을 출발한 경부선상의
가장 빠른 열차가 부산역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10시간30분이었다.
* 2004년 가을 - 용두산 공원에서 남포동 거리로 내려 왔다.
생기가 넘치는 거리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63개국에서 262편의 작품을 출품한 이 영화제는 세계 10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을 했다.
내년에는 열 번째가 되는 해로 아주 특별한 행사가 계획되고 있다고 한다.
자갈치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물에서 금방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생기가 펄떡이는 거리다.
부산나드리 하루의 일정을 마감하는 시각이다.
SCENE 11
* 50년전 봄 - 역 앞에서 뜻밖에 옛친구를 한사람 만났고
또 동래가는 전차 속에서도 한 아는 사람을 만났었으나,
이번 길은 가만히 혼자 가서 하루 저녁, 고요의 나라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추억 많은 좌수영(左水營) 남문(南門) 등의 지점을 지나,
동래성을 남쪽으로 두고, 온천 속에 푹 파묻혀 버렸다.
* 2004년 가을 - 국민소득 100불에서 1만불, 1억불 수출에서
2,000억불 수출시대를 살아 온 한 세대. 그 한 세대는 실로 격세지감이다.
길위로 달리던 전차는 사라지고 부산진역에서 오후 7시에 떠나는
KTX 28 귀환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일행 모두가 65세를 넘긴 바, 지하철은 요금을 내지 않고 탄다.
28열차는 서울역에 밤 9시 52분에 도착한다.
참으로 빠르고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귀환열차를 타고 하루 나드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행 모두는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긴다.
부산나드리 소감과 사진을 모임의 카페(cafe.daum.net/Gukto60)에다가
띄우는 일이다.
참여하지 못한 전국 각지의 동우들도 다음날 낮에는 자신의 집 거실에서
열어볼 수 있게 된다.
비단 국내의 동우들만이 아니다. 미국과 카나다에 체류중인 동우들도
국내에 있는 동우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버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만 했던가.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처럼
대한민국 역사 역시,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가.
잊어서는 안 된다.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첫댓글 추석 날, 홈 페이지 (www.sanchonmirak.com)를 뒤지기다가
9년 전에 어느 매체에다 실었던 글을 보게 되어 이 곳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대단히 소중한 자료로 생각되어 일독을 권유드립니다. 謝謝.
잘 읽고 갑니다.
백록담/백철기 님!!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