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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삶의 도량에서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 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나는 귀천(貴賤)이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과 일상생활을 즐기고 생활을 나누며 삽니다. 저녁으로는 대체로 박주일배(薄酒一杯)를 나누는 형편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걷는 방축(防築)길은 나의 도량(道場)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녁밥과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좋은 이야기와 못마땅했던 이야기를 반추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다가 문득 걸어가는 발 밑의 풀들을 접하게 되는 순간 나는 큰 희열을 맛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아서 풀잎에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은 의연하게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상처와 먼지에 찌들린 풀잎이 하늘의 달과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형편없는 나의 그날의 생활이 떠오릅니다.
그 밥자리에서 술 한 잔에 거나해 가지고 제대로 생활화하지 못하고 다만 머리에 기억만 남아있는 좋은 글귀를 동학(同學) 또는 후배들에게 어른처럼 말했던 몇 시간 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창피하기 이를 데 없음을 누가 짐작하겠습니까. 정말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가의 짓밟힌 풀들이 말없는 나의 위대한 스승님들이라는 사실을 취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을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맛본 후로는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이 미약한 사람의 도인(道人)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길 걷는 동안 참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고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침에 일찌감치 손님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이나 고속버스터미날에 가는 때가 있습니다. 오신 손님을 전송하고 나서는 가끔 근처에 있는 젊은 친구를 만납니다. 젊은 친구들은 오래간만이라고 차 한잔이나 대포 한잔을 권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개는 아침이라 사양하지만 같은 이에게 번번이 사양하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여러 번의 권고가 되는 경우에는 부득이 사양을 하지 못하고 응합니다.
아침부터 대폿집에 들어가서 두 홉들이 소주를 각기 한 병씩 나누면 오전 중에 이미 거나해서 노상(路上)에 나옵니다. 나는 술을 마시면 주로 걷습니다. 술도 깨고 운동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70대가 놈은 노선배님들을 노상에서 만나 뵈옵게 됩니다. “청강(제 아호임)께서 백주에 이렇게 대취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라고 노선배는 걱정 반 애정 반으로 물으십니다. 나는 그렇게 걱정하시는 선배님께 “치악산 밑에서 이 청강이 백주에 취하지 않으면 누가 취하겠습니까?”하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건 그래! 그러나 청강이 건강해야 되지 않아?”
노선배께서는 웃으시며 애정어린 말씀을 주십니다.
역 앞에서 대포를 한잔 하자고 권하는 젊은 친구의 대접도 애정이고 노선배님의 말씀도 애정입니다.
언젠가 원주에 있는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상가를 거쳐 필방(筆房) 앞을 지나자니까 필방 주인 박형이 “선생님 잠깐만 저 좀 보고 가세요”하기에 필방에 들렀습니다. 그는 옛날 편지 하나를 내놓고 초서(草書)로 써서 도무지 알 수 없는데 편지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들여다보니 친구가 병환 중에 있는 벗에게 약재와 그 처방을 자세히 일러주고 복용법까지 어떻게 하라는 사연의 편지였습니다. 원체 나도 단문(短文)하고 무식한 사람이라 그 편지에서 다섯 글자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다섯 글자를 초서에서 해서(楷書)로 고쳐 써주면서 옥편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필방 주인은 고맙다고 하였는데 느닷없이 고등학생이 그 편지를 필방 주인인 박형한테서 받아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옆에 있는 소파에 나를 앉으라 하더니 그 편지를 다시 풀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박형에게 일러준 대로 다시 풀어서 일러주고는 다섯 글자를 모르니 옥편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학생은 “그것도 모르면서 서예가예요. 에잇”하고는 횡하니 필방을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필방 주인은 무안해서 미안하다고 두 번 세 번 인사를 하는데 나는 멍한 순간이 지나자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저런 젊은 학생이 아니면 누가 이 바닥에서 시원하게 나를 혼낼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지하상가를 나와 대로를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것이 노소(老小)가 없을진대 아까 그 학생이 선생님이고, 이 못난 사람이 학생 중에서도 덜 떨어진 학생이로구나 하는 것을 선연히 느끼게 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예수 탄생
로마서 8장 19-25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는 것으로 말미암음이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산도는 인간외의 창조물들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자연의 모든 것들이 무참하게 이용당하고 짓밟히는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을 비롯한 자연만물이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파괴되어 신음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1장 27~28절에 “하느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말씀은 자연이 단순한 피조물로서 하느님이 내재한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연은 소위 탈신성화((脫神聖化)되었고 인간의 자의대로 이용되고, 자연과학의 추구대상이 되어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위기상황의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신앙의 관점, 탈신성화된 자연에 대한 이해가 자연은 지배와 점유의 대상물로서만 이해되고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공업에 있어서의 노동이 신성시되는 것과 비례해서 자연은 그만큼 인간의 소유대상, 독점할 수 있는 목적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근대 서양철학과 사상들은 철두철미하게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중심론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자연세계란 오직 주체를 통한 객체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주체와 객체(자연) 사이에 이원적 뿌리가 깊게 내려진 것입니다. 자연은 상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끝을 모르는 자연지배의 관심은 근대 기술과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근대 서양사상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생태학적 위기와 기계와 기술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상실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집착에 빠져 자연이 인간과 한 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멸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선진제국과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보다 많은 생산, 보다 많은 소비, 보다 많은 소유, 소위 성장을 기저로 하는 현행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이든 사회주의이든 지구의 자원을 거의 고갈시키고 있으며, 환경과 생태계가 생존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멸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에 즈음해서 예수님의 모범을 돌아보며 더욱 동양사상의 맥락에서 특히 우리 한국의 슬기로운 사상들이 이 험악한 죽음의 우주적 상황에서 좋은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거룩한 밥상
제가 오늘 여기에 붙잡혀온 기분이에요. 여러분들을 뵙고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찻간에 오면서도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고 그러고 있던 중인데 이제 세상이 하도 병이 철골(徹骨)이 돼서- 병이 뼈까지 스몄다 말씀이에요- 그래 세상도 죽게 되고 사람도 죽게 되니까 어떻게 좀 살 수 없을까 해서 이제 이런 운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죽어가는 거리를 자꾸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살아야 되겠다. 자연보호해야겠다 이런 얘기한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그러저러한 것을 먼저 살아가는 데서 헤아려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사는 꼬라지는 병 그대로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 뭐냐면 장생하려 들고 제대로 살려 들고 자꾸 이렇게 얘길 하는데, 매일의 생활의 모습은 병을 주면서 오래 실고 좋은 건 저만 뭐 어떻게 하겠다 그런 요새 세상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병이 나지 않게끔 되는 원 바탕이 뭐냐, 그런 얘기가 좀 돼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어요.
옛날에 여러분들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중국에 잘 알려져 있는 분인데, 장자 말씀이 “귀로 듣지 말아라 맘으로 들어라, 맘으로 듣지 말아라 호흡으로 들어라” 그런 말씀이 있어요. 옛날에는 그 글을 보고서 이 무슨 얘기를 이 따위로 했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근자에 와서 이렇게 가만 보니까 그 얘기가 굉장히 근리(近理)하구나. 저도 아직 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길 안해요. 근리하다고 하지요.
요 몇해 전에 일본 갔다온 분인데 후지산에 올라갔다가 보니까 그 후지산 위에서 공기를 갖다가 봉투에 넣어서 팔더래요. 후지산 공기라고, 이건 공해가 없는 공기라고, 그러니까 도시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공기를 파는 거라. 우리가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한강 물 사먹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일본에서 이제 얘기한 대로 여러해 전부터 후지산에 올라가서 공기를 그 무슨 봉툰지 모르지만 봉투에 넣어서 팔더라 이 말이에요. 이렇게 살다 보면 말이뇨, 우리가 공기도 사먹게 되겠지요. 먹게 되는 건간 뭐 마시게 되는 건가요. 꼬라지가 거기까지 갔다 말씀이야.
그런데 뭐 제백사(除百事)하고 코 입 다 막고서 5분간 이상 넘어가면 말이지, 우리 죽습니까 삽니까? 그러니까 명이 호흡 경각에 달려있다 이 말이야. 호흡 그 경각에 달려있어요. 그럼 그 단번에 얘기가 뭐냐. “호흡으로 들어라. 저 빈곳을 봐라. 저 빈곳을 봐라. 저 빈곳에서 빛이 나지 않느냐. 길하고 길한 것이다.” 그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은 일상생활속에서 전부 눈에 보이는 거 듣는 거 또 만질 수 있는 거 감각으로써 느끼는 거 속에서만 산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그런 그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가 터득해서 할 것이 있느니라 그런 얘길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얘기는 뭐냐. 욕심을 버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 문명이 욕심에 의해서 서로 승강이를 한단 말이에요. 서로 그렇게 승강이를 하게 되니까 한이 없어. 한이 없고 끝도 없고 내가 듣는 바에 의하면 앞으로 20년 안이면 저기 적도지대에 있는 나무가 거의 깎아먹혀 없어진다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 지금 쓰고 있는 펄프를 자체 내에서 해결을 하면, 일본이 지금 그렇게 산이 푸르르고 울창하다고 하는데 일 년이면 산이 다 빨개진다는 얘기예요. 저 일본만 쓰는 것도 그렇다고 하는데 미국 구라파 소련 동구라파 뭐 전세계 우리나라 등등해서 종이 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적도지대에 생태계가 파괴돼가고 있는 거죠. 대기권에 산소가 줄어들고 있는 거라. 나무가 있어야 산소동화작용을 해서 대기권의 산소도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거를 넉넉히 지닐 수가 있는데 없어져가고 있는 거죠. 여러분이 보는 신문에 매일 간지 들어오지 않아요? 그거 일일이 보십니까? 큰 자만 쏙 보고 이거로구나 하고 폐기해버리지. 그렇게 해서 한없이 낭비해요. 그런데 그 간지를 넣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겠으니까 또 집어 넣는거라 이 말이에요. 서로 엇물려 돌아가는, 그러니까 결국은 경쟁 속에 처지게 되면 이 문명 속에서는 탈락이 되고 패배가 되니까 자꾸 그렇게 엇물려 돌아가는 거라.
그런데 지금 이제 주부님들께서는 이런 마당에 모이셨는데 엄청난 용기를 내고 나오시는 거란 말이에요. 다시 얘기해서 현실세계의 싸움에 있어서는, 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산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거예요. 저 집이 이태리 가구를 들여놓았으니까 우리도 들여놓아야 하겠다, 저 집이 미국에서 타이루를 갖다가 아주 좋은 돌로 해서 깔았으니까 우리도 깔아야 되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오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운동은 초장서부터 갈지자로 가는 거지요.
아주 우스운 얘기지만 어려서 서울을 하도 올라와보고 싶어 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른네들이 서울을 데리고 왔어요. 우리 삼촌댁에 갔더니 수돗물이 쫘악 하고 나오더라고요. “여긴 대장균이 없다, 너, 시골물은 대장균이 많아.” 야, 서울 사람들은 대장균 없는 물을 마시는구나, 좋은 물 먹는구나 그랬는데 50년이 지난 뒤에 보니까 서울 양반들이 전부 샘물 사먹더라구. 바뀌지 않아요, 예?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진짜 모습이 뭐냐, 전부 오늘의 세계는 뭐냐,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간에, 공산주의 세계든간에 전부 상혼이 깃들어 있어요. 그러니까 팔아먹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팔아먹어야 되니까 어떻게 되느냐, 좋다고 얘기를 해야 된다 말이에요. 좋다고 얘기를 하는데 또 이것은 뭐냐 하면 상하지 말아야 돼. 비근한 예로, 아까 여러분들이 다 안 오셔서 어디 가서 잠깐 지체를 하료고 하니까 찻집이 없어서 빵집엘 갔어요. 거기 아마 방부제가 들어갔을 거예요. 옛날에는 떡을 해놓으면 사흘 가기가 바쁘지 않아요? 여름에는 큰일을 치르면 떡이나 모든 음식이 하루만이면 쉬지 않아요? 상해야지요. 상해야 한단 말이야. 우리가 오늘날 먹고사는 건 벌레도 안 먹는 걸 먹는단 말이야.
제일 잘난 척하지만, 사람이 제일 머리가 좋다고 하지마는 벌레도 안 먹는 걸 우린 참 잘 먹고산다구.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 아마 우리가 죽으면 미이라 꼴이 되지 않을까요? 방부젤 맨날 먹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이 달라서, 그렇게 변화해간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얘긴 뭐냐. 원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 거기에 많은 손이 가지 않는 거 그런 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거란 말야.
지금 우리가 자녀를 키우는데 고등학교도 가야 되고 대학도 가야 되고 뭐 대학원도 가야 되고 뭐도 돼야 되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데 얼마나 노력을 들입니까? 그런데 그것은 세상 경쟁 속에서 이기라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렇죠? 이기지 못하면 축에서 빠지니까. 이 톱니바퀴에서 우리가 지금 이제 못 견뎌나고 있는 거지. 근데 이것을 옛날에 이천 약 오백년, 뭐 이천년 전이라고 합시다. 노자 선생은 아주 잘 얘기했어요. “말은 달려서 사냥을 하게 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미치게 한다” 이거야. 그렇죠? 그래요 안 그래요? 말이 편안하게 있는데 저기 노루새끼 한 마리 나타나게 되면 말을 벼랑인지 어딘지 모르고 몰고 뛸 거 아니예요. 미치는 거지. 천하에 얻기 어려운 보화를 얻고자 하면 사람의 행동이 제대로 갈 수가 없다 이 말이야. 그것에 사로잡혀서 방해가 된다 이 말이지 뭡니까,
아이들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명문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뭐 이런 거 때문에 정상적으로 자게 하고 정상적으로 움직거리게 하고 정상적으로 인간관계를 갖게 할 수가 없잖아요. 완전히 그리 몰아가기 때문에, 부귀 명예 권세 그런 거에 가치의 중심을 두기 때문에 전부 그리 달려 뛰는 거라. 그러니까 결국은 이 사람이 일등을 하게 되면은 내가 메달을 못 따니까 이 사람이 못 따기를 바란다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악착같이 따라오면 그 다음번에는 어떻게 돼요? 밉지요? 이제 미운 것이 지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죽여야지요? 이치가 그렇잖아요? 예수께서 “미워하지 말아라. 마음에서 이미 미워하면 살인한 거와 같으니라” 그런 말씀 했죠? 그러니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권총이 있으면 다 쏴 죽이지. 이게 눈에 보이니까 난사를 못하는 거죠. 근데 더 결딜 수 없는 건 말이지, 북받치니까 그냥 쏴버리는 거지. 이게 전부 우리 스스로가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금 오는 거죠.
한가지 재미난 얘기 또 하나 하십시다. 장자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어요 한 영감태긴데 아주 풍신도 좋고, 좋은 분인데, 젊은 친구가 보니까 움푹하게 들어간 샘 있는 데에 가 가지고 동이에다가 물을 떠다가 일일이 한참 가서 밭에다 뿌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젊은 친구가 잇다가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그러지 말고 물이 떨어져서 모이게 되면 엎으러지게끔 해서 나무에다가 홈을 파서 밭까지 끌어다가 웅덩이를 해놓으면 말이지. 물을 그냥 거기서 퍼서 쓰실 수 있지 않느냐고. 그 먼 거리를 왜 일일이 왔다 갔다 하시느냐고, 수채를 만들어서 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이 영감 말씀이 있어요. “자네 얘기 내 모르는 바 아니요. 모르는 바 아닌데 왜 내가 일일이 동이에다 하는가 하면은 자네처럼 하게 되면 말이야 내 마음에 기심(機心)이 생겨.” 기심은 거, 기계란 기자 말이야. “그렇게 되면은 하늘과 땅과 모든 도리를 다 망각하게 돼. 그러니까 하늘이 두렵고 땅이 두려워서 모든 것이 두려워서 내가 그 수채를 만들어서 그렇게 안 하는 거야. 일일이 떠다 하지.”
이 얘기는 어찌 보면 초라한 얘기요 우스꽝스런 얘기요 옛날 얘기처럼 여러분들은 들으실는지 모르지만, 가령 저 아주머니가 세계에서 유명한 회사를 가지고 계셔. 근데 이 아주머니도 거의 같은 상품을 연구해 또 내 놓고 있어요. 이것들이 같은 시장에서 싸우다가 이 양반의 회사에서 나온 것이 조금 더 편리한 것이 거기 붙어서 나와. 그러면 저 양반네 회사가 수천억불을 들여서 만든 공장이라고 하더라도 그 물건은 안 산다 이 말이야. 이거 사지. 그러니까 이제 그 회사는 어떻게 됩니까, 예? 망하죠? 거 망한다고 바로 그 얘깁니다. 그럼 수천억불에 달하는 그 회사를 이룩하기까지 거저 된 겁니까?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쓰고 일하고 노력한 축적이 그렇게 된 건데. 한군데서 뭐냐면 경쟁 속에서 부속품 하나 조금 달라지니까 수천억불이 하루 아침에 물이 되어버리는 거라. 그 경쟁 아니예요? 서로서로 잡아먹고 가는 거라. 그러면 그 시초는 어디에 있느냐, 고대 애기한 대로 그런 거야.
지금 이런 얘기를 해서 저도 죄받을 얘깁니다마는 사람이 많아도 탈이니까 요새는 전부 산아제한 하잖아요? 그러나 일단은 옛날에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사셨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이거예요. 아이를 가졌다가 그게 자연낙태가 돼도 옛날의 어머니들은 벼락이 떨어지거나, 이러면 자지러진다고. 왜 자지러지느냐, 거룩한 생명을 내가 제대로 보존 못하고 보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중에서 천지를 거역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뭐냐면 벼락이, 하늘이 나를 치는 게 아닌가 이래서 자지러지는 거라고. 그걸 우리 잘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요건 잇속이 있다 요건 편안하다, 요렇게 하면 잇속이 더 있고 요렇게 하면 편안하고, 요렇게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데 그런 차원에서만 맴돌다 보니까 스스로 자살행위를 지금 해가고 있는 거지요. 다른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앞으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돼야 할 거냐. 천지의도리, 하늘과 땅이 살 수가 있겠느냐. 근데 이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뭣이 중요하냐. 적어도 그 쌀, 뭐냐하면 농약 많이 안 들은 것 먹어야 되겠어. 배추, 농약 안 친 거 먹어야지 좋다 이 말이야. 그게 얄밉더라도 좋다 이 말이야. 왜 얄밉더라도 좋으냐. 그렇게 해서 땅이 살아야 한다 이 말이야. 땅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말이야. 땅이 돼지면 사람 살 수 있어요? 흙이 죽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고요. 가령 예를 들어서, 이건 뭐 유치원 애들하고 얘기해도 맞는 얘긴데 우리가 잊고 사니가, 태양이 없으면 말이요, 이 땅위에 살 존재들이 있습니까? 없지요 아주머니, 없다고 그러니까 이 땅이 없으면 이 만물이 존재할 수가 있어요? 없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하늘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만물이 없어도 살 수가 있냐. 살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 어떤 것하고도 떠나서 살 수가 없어. 그런데 떠나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지금 꼬라지가 전부 그런 거지요. 너 아니면 내가 못살 줄 아니, 맨 이 식이거든. 천만에 말씀이다 이거야.
심지어 이 한반도에 지금 사는 꼬라지도 뭐 군사독재 정권이니 뭐 이승만이니 어쨌느니 해도, 이북이 있으니까 이승만 독재도 한 거고 군사독재도 한 거야. 안 그래요? 이북에서 빨갱이가 쳐들어오니까 이래야 돼 하고 국민 누르면서 그 덕택에 해처먹은 거지. 김일성이 또 뭐냐. 미국놈 등대고 정치한 놈들 이거 쳐들어올 테니까 우리 이래야 돼 하구 김일성이 정치해먹은 거지. 그런 거 다 뭐냐 하면 거저는 안되는 거라. 핑계가 있어야지. 또 관계가 있어야지.
기본적으로 산다는 그 자체도 하늘과 땅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벌레 하나도 하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살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화랑정신에선 ‘살생유택’이라, 함부로 죽이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꼭 필요할 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지, 아무 때나 죽이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옛말에 도승들은 몸에 이가 꼬이면 이걸 잡아서 딱딱 죽이질 않고 옷을 털잖아. 요 밖에 나가서 턴다 이 말이야. 모기 하나도 맘대로 못해. 그 모기 하나라는 존재도 우주가 뒷받침해주고, 우주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라 이 말이에요. 생명이 그렇기 거룩하고 엄청난 거예요.
그런데 가정주부들은 아 우리 애아빠가 이제 몇 해 됐는데 부장이 돼야 될 텐데, 아 이제 이사진에 올라가야 할 텐데, 또 여러분 중에 누가 남편되시는 분이 관청에 계시면 아 청와대에 들어가면 좋을 텐데 뭐 그런 생각들 하시죠. 그것을 뭐냐면 인작(人爵)이라 그래. 사람이 만든 벼들이란 말이지.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말이지 저 큰 천작(天爵)이 있어요. 하늘이 벌레고 천옥(天獄)이고 사람이고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다 빛을 비춰주세요. 비가 오면 다 축여져요. 그러니까 풀 하나도 태양이 없으면 안 되고, 맑은 공기가 없으면 안 되고, 맑은 물이 없으면 안 되고, 흙이 없으면 안 되고 다 지닐 걸 지녀야 돼. 풀 하나도 우주가 뒷받침해주시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선생께서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이랬어, 그 풀 하나에, 낟알 하나에 우주가 다 있는 거라. 먹는 게 별 볼일 없다 이게 아니야. 그런 걸 우리가 먹고 지내는 거요. ‘이천식천’이라.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비교해서 저 집에는 뭐 갈비도 먹고 돼지도 먹고 하는데 우리는 일년 내내 갈비도 못 먹고 돼지도 못 먹고 이게 뭐냐, 그런 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이거야. 벌서 밥 한 사발 안에 우리가 우주를 영(迎)하는 거다. 하늘을 영하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그런 것에 대한 기본적인 것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뭐냐 하면 메이커에서 나오는 조미품이나 뭐나 제대로 쳐야 맛있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병이 피까지 살까지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뼈 속까지 들어가고 있어요. 이치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게 뭐냐. 이 물 한 컵 밥 한 사발 김치 한보시기 이것은 제왕이나 다름이 없는 거룩한 밥상이란 말이에요. 그 자세가 그 깨달음이 없으면 언제나 남의 호화로운 거에 자기 나름대로 도취해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최면 걸려서, 자기 나름대로 오늘날의 문명 속에서 오는, 매스컴을 통해서 오는 그 환각 때문에 맨날 겉돌다가 말게 된다구. 그러니까 다시 얘기해서 이게 뭐를 이야기하는 거냐 하면, 우리가 컴퓨터에 입력을 한 것도 잘못 되면은 답이 잘못 나온다 이 말이야. 주판을 잘못 놓은 거도 아무리 많이 놨어도 잘못 됐으면 영 틀려버린다 이 말이야. 오늘날 문명이 우리 인간에게 이 자연에게 제대로 갈 수 없게끔 한다고 했을 적에는 여러분이 문명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벗어나는 정성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야.
또 한 가지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교회 다니시는 분들 계세요? 예? 녜? 그럼 기도하시죠? 기도하시는 분들 있을 거야. 뭐 다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화장장에 가보면 사람죽고 나서 다 뼈까지 빻고 나면 재가 한 움큼밖에 안 남는다, 그럼 어디 갔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실한 ‘자기’라는 ‘나’라는 것이 뭐냐, 그걸 이제 따져 들어갔을 때 진실한 ‘나’라는 것은 보이질 않아. ‘나’라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아(大我)의 ‘나’밖에 존재칠 않아. 너‘나가 없는 거라. 그러면,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하느님, 불교 다니는 사람은 부처님, 뭐 여러 가지 종교마다 다 있어요. 그것은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이야. 만져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뭐냐 하면 고맙다고 하는 것. 또 가까이 그러한 하느님, 그러한 부처님은 풀 아나, 돌 하나 어디나 안 계신 데가 없어. 함께 하셔. 우리도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과 땅과 만물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예배를 해야 한단 얘기죠.
오늘날 세상이 경쟁사회가 되니까 그 예(禮)를 몰라요. 애새끼들 키워 보지만 일등하면 제 대가리가 좋아서 큰 줄 안단 말이야. 그렇잖아요? 또 우리가 자식새끼 키워서 이제 깨닫지마는 자기가 또 어렸을 때 자라온 거 생각해보면 어머니 아버지께 제대로 한 거 없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근간이 망가졌을 때에 세상이 잘못 된다구. 그러니까 요즘 시집들을 보내려면 말이지, 그 집이 맏아들이야? 맏아들이면 안 돼, 둘째 이하라야지. 또는 그 집이 잘 산대? 뭐 이런 것이 기준이 되는 거라. 그러니까 돈 수입이 많으냐 그런 얘기겠지. 응? 기준을 그렇게 해놓고, 자기 배짱속이 벌써 그런데, 이게 전부 뒤틀려 있다고. 그러면서 뭐냐면 제 집안 식구만 무공해식품을 먹겠다. 그건 꼭 말이지 요강에다 똥 싸가지고 문밖에다 내놓는 거나 같다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공해의 원인이 어디 있느냐, 전체의 사람 사는 세상 꼬라지가 왜 이렇게 되느냐 살피는 게 아니고 아, 똥 싸고 오줌 싸서 문밖에만 내놓으면 되느냐 이 말이야.
물을 갖다가 말이지, 흙을 넣거나 여러 가지 자꾸 휘저어 가만히 재워 놔두면 어떻게 되느냐, 맑아지고 못 돼먹은 건 가라앉잖아요?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해야 한단 말야. 떠들썩하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 떠들썩하다고 뭐 돼? 뭐 조직을 갖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야. 우리가 각자 있는 자리에서,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이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예수님 말씀이 뭐냐면 이렇게 누룩을 담궈 놓으면 술이 되는 식으로 해라 이 말이야. 자연스럽게 해라 이 말이야. 극성스럽게 들어가 이거 해야 돼, 이러지 말구, 소도 물가에 가서 물을 먹이려면 제가 먹고 싶어야 입을 여는 거예요. 쇠뿔을 끌어다 뒤에서 엉덩이를 패도 입을 벌리고 이러 안 먹어요. 가령 먹는 체한다고 해도 계속 제대로 하자면 자기 마음이 결심을 해야 되는 거 아녜요? 안 되면 이거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사람을 죽인다든가 도둑질을 한다든가 음란한 행위를 한다든가 남을 속인다든가 이것은 어디서 오는 거냐, 전부 마음에서 오는 거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예수 좀 잡아치려고 해서, 걸기 위해서 “저 여인이 남편이 있는 여인인데 샛서방질 했습니다. 돌로 때릴까요?” 샛서방질하면 그때 돌로 때렸거든. 그런데 돌로 때려라 하면 예수 또 뒤집어 씌워 가지고 잡을 테니까, 예수가 현명하지요. “느이 마음에서 간음한 적이 없으면, 자신 있으면 돌로 때려봐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 얘기가 아주 기찬 말씀이에요. 그렇게 슬기롭다구요. 그런데 이제 그 얘긴 뭐냐, 매사가, 마음에서 작정을 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요새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이 공해 세상에 대해 하는 얘긴데, 뭐 일본놈들이 ‘민나 도로보데스’ 그랬다고, 도둑놈 아닌 놈이 없어. 남자는 놈이고 여자는 년이지, 년놈이 다 도둑놈이야. 그 왜 그러냐, 그 반에서 내 자식이 꼭 일등해야 되겠다고, 그럼 남의 자식은 다 뒤로 처지란 얘기 아니오. 그러니까 자식을 가르치되 “너 일등해라”하고 가르치거든. 사회적으로 이게 얼마나 공햅니까/ 금메달 못 딴 놈은 다 사람으로 안 봐요.
운동 선수로 안 봐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공해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만 무공해 먹으려 들거든. 옷만 피부에 염증이 안 생기게끔 무공해로 꼭 입으려 든단 말이지. 그런데 생각이 공해가 왔을 때에는 세상이 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게 다 공해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을 무시하면 자기도 무시를 당해. 공자 얘기가 사람이 스스로 업심여김을 당하게끔 하면 남이 업신여긴다 했어요. 이치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옛날 어머니들은 말이에요, 요새 어머니들하고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 내가 어려서 클 때 경험이에요. “엄마” 우리반에 쉰 명 있어요. 쉰 명. “내가 쉰찌했어”하고 통신부 갖다 준다고 그러면 “어휴 이놈이 쉰찌했어, 어구 장해라 이 귀염둥아”하고, 우리 아들이 쉰찌했다구 하며 동네 가서 자랑한다고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어요? 그러나 오늘날의 주부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냐. “아유 답답해라. 지 자식이 공부 못해서 병신인 것 모르구 남한테 그 얘기 자랑한다”고 이렇게 얘기할 거란 말야.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되죠. 아시겠어요?
오늘 제가 두어 시간 차를 타고 오는데 고속버스에 제일 앞에 탄 사람이 몸을 제대로 못 쓰고 말은 겨우 반벙어리도 안돼. 그런데 옆에는 아마 교회 다니는 집사 정도 되는가봐요. 열심히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끙끙거리며 뭐라고 답변도 하고 그러는데 난 뭔 얘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 젊은 집사의 열정과 또 그걸 열심히 듣는 그 사람을 딱 보면서 말이지, 그 장애자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말 한마디라도 틔어서 얘길 하는게 태양이 밝은 빛 비춰주는 것 같을 게 아니냐 이 말이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거를 느끼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말이지, 그런 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비인데, 이 사랑 자(慈)자는 뭐냐? 즐거움을 남에게 주는 거예요. 또 슬플 비(悲)자는 남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의 고통을 함께 해주는 거지. 그럼 그게 뭘 얘기하느냐, 엄청난 얘기죠. 한 살림을 얘기하는 거얘요.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하고, 남의 고통을 함께 해서 없애주려고 하고, 그럼 한 몸이라는 얘기 아녜요? 제 아픈 것처럼 생각하고 남의 즐거움을 같이 즐거워하고 그런 거죠.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야 할 것은,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그런 얘기가 있거든. 그걸 내가 소싯적에는 도대체 이해가 잘 가지 않더라구요. 노자 선생의 말씀인데 이게 뭔가 했더니, 교회 다니다가도 자기 아들이 공부 꽤 잘했는데 대학에 가서 합격이 안 되니까 “에이 빌어먹을, 천준지 뭔지 하느님인지 난 안 믿어”하고 나가버리더라고. 그러니까 사사로운 자기 욕심을 갖다 챙기려고 해서 해결해주는 하늘과 땅은 아니다 이 말이야. 하늘과 땅은 한없이 우리에게 주지만, 한없이 줘. 한없이 주는 걸 고맙게 받을 줄을 모르고 제가 계산하는 것만 달라고 한단 말이야. 그러면 줄 턱이 없죠. 줄 턱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농산품을 갖다가 무공해식품을 먹어야 하는데 “벌레도 안 먹고 싱싱하구 멋지게 된 것만 가져와.” 이거 미치는 거지. 농사짓는 사람 별수 있어요? 도리가 없는 거다 이 말이야. 저 아주머니, 이거 벌레가 먹고 꾀죄죄해 뵈도 벌레먹은 게 좋은 겁니다. ‘벌레가 안 먹은 건 공해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잖아요? 이거 세상을 이치에 맞게 살아야지. 제눈 가리고 먹고 제 자리만 보려 든단 이 말이에요. 그러니 안 된다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제대로 해도 돌아가게끔 되는 그 속에서 자기도 적응해야죠. 자기도 그 속에 맞춰 살아야죠.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지금 세계가, 땅이 죽어가고 있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이 일에 함께 한다는 것은 자기를 살림과 동시에, 자기 사는 게 뭐냐, 땅을 살려야지. 땅을 살리게 되면 유익한 모든 미물이, 여러분들 들으셨겠지요. 개구리들 메뚜기들 거미들 모든 유충들이 거기서 우글거리고 살게 돼. 그러면서 벼를 더 건실하게 자라게 하고 땅을 비옥하게 해줘. 그래서 서로 환원이 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 노자 말씀이 그런 게 있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생선지지듯이 하라“ 이 말이야. 생선을 자꾸 뒤적거리면 다 풀어져서 먹을 게 없잖아요.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 작은 고기를 다루듯이 요렇게 살살 해라 이 말이에요. 이 얘기는 뭐를 얘기하느냐. 우리가 모두 해나가는 일을 제 모습대로 있게끔 해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이 모임속에서도, 여기 우리 대신 역할을 해주는 회장이름이 뭐더라, 김여사던가 박여사던가 그 정도면 좋다 이 말이에요. 아, 그 이름은 뭐고 어느 대학 나오고 학벌은 어떻고 그이 남편은 뭐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국민이 대통령 이름이 뭔지도 몰라야 돼. 대통령 이름 알면 어쩔 거야. 저도 밥 세끼 먹고 나도 밥 세끼 먹는데. 그리고 도 하나는 대통령이 부리는 권한이 세상에 불쌍하고 딱한 사람들 해결해주고 세상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일만 하면 된다 이 말이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밥 한사발을 먹는 것도 우주가 함께 하시니까, 그 수많은 농부의 피땀과, 땅과 하늘이 함께 해주시니까, 식사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적엔 말이지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빽이 뭐냐하면 천상천하가 다 자기 빽인데.
그래서 옛말에 우리 한 인간을 소우주라고 얘기하는데 소우주는 사람이 만든 소우주가 아니야. 풀 하나도 소우주라 이 말이야. 저 땅, 지구가 없으면 태양이 없으면 별이 없으면 안되는 거라. 그래서 이제 못난 건 우리지요. 풀에 대해서 화초에 대해서 나온 글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보니까 화초를 이렇게 분을 만들어 뜰에 놔두는데 주인이 가서 물도 주고 사랑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러면 화초의 감도가 벌써 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친구한테는 “너, 들어가거든 저 분을 갖다가 막 주물럭거리고 거칠게 좀 대해라”라고 시켜요. 그러고 나서 전류를 넣어서 장치를 해서 조사를 해보면 내가 들어갈 제 기뻐하던 그 화초들이, 그이가 들어 갈 제는 몹시 떠는 거지. 겁이 나서. 이게 이미 검증이 돼 있어요. 그러고 그 주인이 예를 들어 부산 밖에 갔을 때, 일본쯤 갔을 때 그 화초를 생각해라, 그걸 몇 시쯤 해라, 그럼 내가 전류를 넣어서 계산해볼게. 그러면 천리 밖에서 주인이 원하는 그 화초를 생각했을 적에 여기서 깊은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벽 밖에서 권총을 가지고 나 잡으러, 쏘러오는 놈이 있어도 몰라. 그런 멍텅구리가 여러분을 데리고 얘기를 하고 있어 지금. 그런데 저 풀은 말이지, 그렇더라 이 말이야. 그럼 못난 건 우리가 못났지. 그럼 왜 이렇게 병이 들었느냐. 하도 좋다는 거, 뭐 이래라 하는 것 때문에 길들여지고 망가져 가지고 병이 철골을 해서 그래, 뼈까지 스며서. 자연 그대로 하면 천리 밖에 앉아서도 알겠지만 만 리 밖의 것도 안 보고 알고. 원체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한살림운동이란 게 뭐냐. 다 살리겠다는 얘기 아녜요. 그렇게 해야 모두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말씀이고 말이지.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얘기 중언부언 자꾸 해봐도 한도 끝도 없는데, 자연으로 복귀하는 거다 이 말이지. 부지런히 뛰어봤자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라고 그러잖아요. 뛰어봐야 그거거든. 대통령 해봤자지. 어때요? 잘못하면 연희궁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못하잖아요.(웃음)
그러고 보니까 천상천하가 매일 자기를 보호해서 먹게 해주고 살게 해주는데 그렇다면 당당하게 살 것이지, 뭘 이렇게 이것저것 잡된 것을 집어넣느냐 말이지. 제 속이 제대로 되어있고 편안한 걸 가리고 가야지. 욕심을 내면 말이지, 이게 들끓어. 욕심을 내지 말라 이 말이야. 기도해요? 욕심내지 말아달라고 기도해요? 그건 넌센스예요. 이걸 편히 가지면, 이걸 비우면 철따라 채소가 나면 반가워. 햇살이 나면 은혜를 알아야 돼요. 은혜를 알면 생활이 기뻐. 은혜를 모르면 맨날 일등만 하려고 맨날 미쳐 돌아가는 거지. 무공해식품만 먹으려고 해서 될 게 아니라 보는 시각이 전체에 가 돌아갔을 대, 전부 편안해지고 맑아지고 머리가 아프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고, 첫째 공해병에 걸리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갑시다, 그거지. 그만 얘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