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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
고고학의 주요한 역할은 출애굽의 연대, 가나안 정복, 왕조 시대의 정치 등 주요한 사건을 파헤치거나 재구성하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의 자료들이 많아질수록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삶과 문화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건 위주의 해석에서 벗어나 성서에 충분한 분량으로 기록되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가정, 삶의 수단, 문화, 관습, 환경 등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고지대에 정착하여 살았던 정착민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성서 연구와 고고학 연구를 이용하여 당시의 생활을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지형과 기후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성경 시대 이후 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농경 사회인 이스라엘에게 강우량과 강우 시기는 매우 중요했습니다(렘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히브리어에 ‘비’를 뜻하는 낱말이 여러 개 있다는 것은 농업 사회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일반 적인 비는 ‘마타르’, 이른 비는 ‘요레’, 늦은 비는 ‘말코쉬’, 겨울의 폭우는 ‘게쉡’, 새벽 이슬은 ‘탈’ 등입니다.
풍부한 비에도 불구하고 곡식들은 가뭄, 질병, 메뚜기 떼 등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모스(7:1)와 요엘(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 2:5)은 메뚜기 피해로 인해 황폐한 상황을 말합니다.
팥중이는 히브리어로 ‘가잠’, 메뚜기는 ‘아르베’, 느치는 ‘얄레크’, 황충은 ‘하실’입니다. 성경에서 메뚜기에 해당하는 낱말이 수십 가지로 대부분 아르베가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이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기원전 10세기 이후 시대로 추정되는 길이 10㎝밖에 안 되는 작은 석회석 조각인 ‘게셀 달력’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돌판은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비문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는 일곱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게셀 달력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10세기 중반 이후 솔로몬 시대에 이집트 파라오가 게셀을 솔로몬에게 주었고 이곳에 이스라엘의 요새와 함께 히브리어가 발견됐다는 것은 성서적 역사(왕상 9:16-17)와 일맥상통합니다.
그의 두 달은 (올리브) 추수를 위함이며
그의 두 달은 (곡물을) 심기 위함이며
그의 두 달은 철늦은 곡식을 심기 위함이며
그의 한 달은 아마 섬유를 괭이로 파고
그의 한 달은 보리를 추수하고
그의 한 달은 추수와 축제를 열고
그의 두 달은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그의 한 달은 여름 과일을 딴다
‘그의 달’은 혹자가 어떤 특정한 일에 종사 할 때의 달을 뜻하는 히브리어 숙어로 추정됩니다.
건축 자재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돌, 나무, 갈대, 진흙이 가장 흔한 건축 자재였습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과 나무를 대강 자른 것은 일반인들의 집에, 다듬어진 돌과 조각된 나무는 궁전과 지도층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나무나 진흙벽돌보다는 돌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칼슘과 탄산을 함유하고 있는 침전석인 석회석이 풍부하였는데, 이것은 가장 흔한 건축 재료였습니다. 예루살렘 동쪽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나리’(nari)라고 불리는 돌은 연하고 작은 구멍이 많아 흡수성이 강하고 부서지기 쉬운 석회석입니다. 그것은 쉽게 채석할 수 있고 다듬을 수 있어 건축용으로 네모나게 다듬어서 주요한 건물들을 지을 때 대추야자나무 문양의 기둥머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우아함을 지녔기에 상류층의 건축물에 쓰였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지배층들이 힘없는 자를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기 때문에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책망합니다(암 5:11).
이 다듬은 돌 양식은 남유다보다 북이스라엘에서 더 많이 쓰였는데 하솔, 사마리아, 므깃도, 게셀, 단, 다아낙, 벧산 등입니다.
목재로는 아카시아, 상수리나무, 알레포 소나무 등이 쓰였습니다.
백향목(에레즈)은 사철나무로서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으며 높이가 35미터까지 자라는데 제1성전 시대와 제2성전 시대까지 널리 쓰였습니다. 궁전을 짓는데 쓰였으며(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배를 만드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겔 27:5).
진흙은 벽돌과 회반죽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져진 짚을 진흙과 모래와 섞었는데 진흙을 좀 더 점착력이 있도록 할뿐 아니라 이 진흙을 사각형의 벽돌로 만들기 위해 거푸집에 넣었을 때 들러붙지 않게 했습니다.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노동을 좀 더 힘들게 하기 위해 파라오는 공사감독에게 짚을 주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출 5:7). 벽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거푸집에 부어 만들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미 증거가 발견되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초기 로마 시대 이전에 가마에 구운 진흙벽돌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기둥이 있는 집
철기 시대의 전형적인 집의 형태는 직렬로 둘, 셋, 또는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된 집으로 바깥들에서 나무로 만든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붕이 없는 뜰에는 빵을 굽고 요리할 수 있는 진흙벽돌로 만든 화로가 있었으며 돌로 만든 기둥들이 서 있어 가운데의 큰 방과 양쪽에 나란히 놓이게 된 측면 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장소와 문화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이 전형적인 집은 태양열로 굳힌 진흙벽돌로 지어졌고 벽의 손상을 막기 위해 바깥 면을 회칠했습니다. 여호수아 2:15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은 라합의 집 창문으로 밧줄을 드리웠습니다. 창문들은 벽에 있는 단순한 틈새일 뿐이며 창문을 작게 낸 이유는 안전과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궁전과 귀족들의 창문은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궁전, 신전, 곡식 저장고, 일반 가정들은 문 안쪽에 나무로 만든 빗장과 자물쇠의 날림쇠로 문을 잠갔습니다(삿 3:25; 사 22:22; 대하 9:27). 현대의 열쇠와 비슷한 열쇠는 로마 시대에 가서야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 여는 장치를 말하고 있습니다(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 커다란 열쇠들은 이집트식 자물쇠로 알려져 있는데 어깨에 둘러메고 다닙니다. 어떤 것은 길이가 25-50센티미터 정도이며 열쇠가 맞물리는 곳인 끝부분이 굽어져 있어 마치 커다란 칫솔처럼 생겼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 써진 것으로 보이는 아가서에도 이런 열쇠 구멍이 시적 표현으로 쓰여 있습니다(아 5:4-6).
때때로 집안의 방에도 화덕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요리는 일반적으로 문밖 뜰에 있는 화덕에서 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가운데 방에서 요리용 그릇들과 화덕을 발견했는데, 가운데 방은 음식을 준비하는 역학을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바닥에 단순하게 만들어진 구멍이 요리나 난방을 위한 화로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의 경우 따로 화로가 있었습니다(렘 36:22).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가족과 친족
아간이 죄를 지었을 때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사회 단위를 알 수 있습니다(수 7:14).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지파(쉬베트), 그 족속(미쉬파하), 가족(바이트), 남자들(그바림)은 이스라엘 사회의 구성단위를 보여줍니다.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입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명령인데 이스라엘 가족의 개념을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곧 아내, 종들, 가축 등을 포함한 가부장적 권위가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출 20:17).
고대 이스라엘의 평균 연령과 결혼 적령기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추측해보면, 평균 20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26세에 후계자가 태어났습니다. 24년을 통치하고 46세에 죽었는데 삶의 조건이 힘들었던 평민들은 40세가 되기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여자는 10세 전후로 결혼을 했으며 남자는 20대에 심지어 30대 초반에 가서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소년들은 14-20세, 소녀들은 12-14세 사이에 결혼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의 상당히 늦은 결혼은 결혼 첫해에 왜 군복무가 면제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신 24:5). 농경 사회에서 자녀의 생산은 군인의 역할보다 더 가치 있는 국가 방위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바알’, 곧 주인이나 지배자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가족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동시에 그 자녀와 아내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신의 이름을 따거나(신의 요소를 포함하거나) 조상의 이름을 따기도 했습니다. 여인이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은 한나가 그의 아들을 사무엘로 부르는 장면(삼상 1:20), 룻의 이웃 여인들이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부르는 장면(룻 4:17)입니다.
할례는 고대에 상당히 널리 행해졌던 관습이었지만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진바가 없습니다. 기원전 3000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부조품들은 이집인들이 이 관습을 행했음을 증명합니다. 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모압, 암만, 에돔이 속하는 서부 셈족들은 할례를 했으나 아카드, 앗수르, 바벨론 같은 동부 셈족들은 하지 않았으며 블레셋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들을 ‘할례 받지 않은 자’라고 무시했습니다(삿 14:3).
가나안 사람들은 할례를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겜 사람과의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딸들을 세겜인들에게 배우자로 주기 전에 그들이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창 34:25).
만약 ‘피 남편’이 될 것이 할례를 인함이라는 해석이 맞는다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그의 아들의 양피를 베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미디안 사람들도 할례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맥상 아들의 양피를 벤 것인지 모세의 것을 벤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할례와 이와 연관된 피의 의식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중요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창 17:12; 레 12:3), 부싯돌이나 돌칼(출 4:25; 수 5:2-3), 제사장이 아닌 아버지가 행했으며(창 21:4), 할례가 매우 중요함에도 한 번도 거룩한 장소에서 행해진 적은 없습니다.
이방인들과 노예도 할례를 받아야했으며 할례 받은 남자들만 유월절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출 12:48-4).
하지만 외부적 할례는 내적 회심이 뒤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신명기 10:16은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멸망 받게 됩니다(렘 9:25-26).
여성
족장 사회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성서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남성에 비해 축소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과 관습에서 여성의 주요 활동 분야는 가정으로 어머니의 역할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는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았는데 아브라함은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창 21:10). 리브가는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할 장자의 축복을 야곱이 받도록 꾀하였습니다(창 27:11-17). 여성은 아이를 키우거나 음식, 의복을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다말은 밀가루로 과자를 구웠으며(삼하 13:8), 미디안 제사장에게는 양 무리에게 먹일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던 일곱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출 2:16). 전통적으로 여인들은 집과 가축을 위해 물을 길어왔습니다(창 24:11). 이들은 밭에서 일하기도 했고(룻 2:21-23), 양을 치거나(창 29:9), 전문적으로 애곡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렘 9:17). 잠언(31:10-29)에 언급되어 있는 ‘이상적인 아내’에 대한 표현을 보면 여성이 집안에서 다양한 역학을 했으며 특별히 경제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거나(출 15:20; 삿 21:12), 포도를 발로 밟으며 축제에 참가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 올 때,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었습니다(삼하 6:19).
하늘 여왕을 위해 제사하는 장면에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집니다(렘 7: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과자(카바님)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쉬타르를 섬기는 제사에 사용된 과자입니다.
어떤 여성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보라는 사사였으며(삿 4-5장), 훌다는 선지자였고(왕하 22:14-15), 엔돌에는 신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삼상 28:7-25).
남성이 늦게 결혼하거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과부’(알마나)가 가난한 상태로 방치될 수 있었습니다. 남성의 보호 없이 사는 과부는 연명하는 것조차 힘들었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는 미약했습니다. 과부임을 보여주는 구별된 옷이 있었던 것 같은데(창 38: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과부는 재혼할 수 있었고 고인이된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아가 된 딸은 과부보다 더 비참했기에 왕과 공동체는 이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었습니다(신 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성서는 과부를 특별하게 보호하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사 10: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과부, 고아는 성서에서 특별한 관심이 대상으로 야웨이즘의 핵심이 됩니다(사 1:17; 렘 22:3)
야웨는 이들이 의지하는 분으로 그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선포합니다(신 10:18; 렘 49:11).
접대
손님 접대는 친족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체류자, 거류민, 손님으로 번역되는 ‘게르’는 친족 밖이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손님에 대한 환대는 그들이 이집트에서의 포로 생활을 기억하는 행동이었습니다(레 19:33-34).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사 58:6-7).
시편 23편은 손님 접대의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은혜가 풍성한 주인입니다. 목자와 주인은 음식, 음료, 보호를 양에게 제공하고 또한 손님을 위한 상을 베풀어 줍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살렘 왕이자 엘 엘리온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맞이합니다(창 14:17-20). 이와 같이 식사는 우정을 강화시켰으며 반대의 경우 처벌이 따르기도 했습니다(신 23:3-4).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창세기 18장의 이야기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헤브론에서 대낮에 그들을 찾아온 손님을 환대함으로써 복을 받는 장면입니다. 발 씻을 물을 제공하고 떡과 요리한 송아지, 버터와 우유를 겸비한 고기와 야채를 준비합니다.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은 그의 딸들이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도와준 낯선 사람 모세를 대접하지 않은 것에 놀라며 그를 대접하기를 청합니다(출 2:20).
욥은 자신이 손님 접대를 잘하는 것을 자랑했으며(욥 31:32), 사르밧 과부는 적은 음식이었음에도 엘리야를 대접합니다(왕상 17:10-11).
질병과 치유
성경에 몇몇 전염병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집트에서 가축을 공격한 다섯 번째 재앙(출 9:3-7),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 겪은 질병(왕하 19:35; 사 37:36)이 있습니다.
약을 처방하는 것은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와 이집트에서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치유의 여신 굴라(Gula)가 있었는데 이 여신은 개를 상징으로 했으며 신전마저 ‘개 집’이라 불렸습니다.
고고학을 통해 발견된 의학 관련 건물이나 유물 등은 적습니다. 대부분의 치명적인 질병은 뼈나 두개골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절염, 결핵, 부패성 전염병, 악성 종양 등은 검증되곤 합니다. 두개골은 나이와 성별, 질병의 상태, 식사와 영양의 상태, 외상에 대한 정보를 보여줍니다. 질병이라는 가장 흔한 히브리어는 아픔(홀리)와 쇠약해짐(할라)이며 반대로 좋은 상태는 평화(샬롬)입니다.
위생
레위기에는 종교적 의례에 따른 위생을 강조합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 아론은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었습니다(레 16:24). 군대는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위생에 더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신 23:13-14).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므깃도와 게셀 같은 도시의 철기 시대 성문들에서는 하수구가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집에는 하수구가 드물었습니다.
종교적인 정결에는 목욕이 필수적이었고(신 23:11), 여성들은 특별히 목욕에 신경을 썼습니다(룻 3:3). 종교적 정결과 무관하게 목욕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다윗은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삼하 11:2). 지중해변 악고 북쪽에 위치한 아크집 유적지의 에르라스(er-Ras) 묘지의 한 무덤에서 여인이 타원형의 욕조에서 목욕하고 있는 장면의 8-7세기의 점토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상당히 강조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므깃도, 라기스 등의 여러 유적지에서 발을 씻는 도구가 발견되었는데 토기로 만들어진 수반으로 발을 올려놓을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바닥에 주둥이가 달려 있어 더러워진 물이 흘러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맨발에 발가락이 드러나는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었기에 손님을 환대하는데 발을 씻게 해주어야 했습니다(창 18:4; 19:2; 24:32).
건강
뜨거운 기후와 비위생적인 환경, 오염된 물이 기생충을 발생시켰습니다. 다윗 성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느부갓네살이 이 도시를 파괴하기 바로 이전에 사용했던 재래식 화장실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변기는 석회로 칠을 한 구덩이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큰 것은 대변, 작은 것은 소변을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에 여성과 남성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인들은 집에 화장실 같은 시설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화석화된 배설물에서 발견된 기생충은 고대의 질병, 음식물, 영양 상태를 알려줍니다. 분석결과 촌충과 편충이 있었습니다. 촌충은 미처리 하수로 논밭을 개간하는 비위생적인 관습과 관련이 있는데 아마도 다윗 성에서 주변의 골짜기로 흘러가게 둔 하수가 문제였을 것을 추측합니다. 편충은 배설물로 더러워진 음식을 먹거나 비위생적인 주변 환경으로 발생하였습니다. 다윗 성에서 발견된 배설물은 화장실을 소독하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재와 뒤섞여 있었습니다.
건강을 점검하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레위기 13-14장의 ‘나병’(짜라아트)는 오늘날 문둥병이라고 진단되는 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병입니다. 헬라 시기 이전의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 병이 없었습니다. 성경 시대로 연대가 추정 되는 두개골의 분석 결과 기술적인 측변에서 볼 때 문둥병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짜라아트는 아마도 ‘피부가 벗겨지는 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짜라아트로 고생하는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일곱 번 씻음으로써 치유하게 합니다(왕하 5:10). 선지자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처’(쉐힌)로 고통 받는 히스기야 왕을 고치기 위해 무화과 반죽을 사용합니다(왕하 20:1-7).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정신적인 고통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수금 연주는 사울을 상쾌하게 하여 악령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삼상 16:23).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행
팔레스타인에서의 도보 여행은 험한 지세 때문에 어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업상 상거래, 군사적 의무, 연례 명절, 가족 방문, 가뭄으로 인한 도피 등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당시에 하루 여행 가능 거리는 평균 27-37킬로미터였습니다. 하루에 32킬로미터를 행진한 앗수르의 군대는 701년 니느웨에서 라기스까지 두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여행수단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메리바알, 므림바알)에게 왜 그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 도망갈 때 함께하지 않았는가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삼하 19:26).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나귀는 운송과 여행용 동물로 사용되었는데 이스라엘의 기밧타임 유적지에 있는 동물에 두 개의 광주리를 등에 메고 있는 나귀 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노새를 타는 것은 특별한 경우로 한 시간에 5킬로미터를 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왕상 1:33).
레반트 지역에서 낙타는 철기 시대 이전에는 사육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낙타를 언급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의 흔적은 2000년 초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은 짐을 나르는데 사용되지도 않았고 더구나 농사를 위해서는 전혀 사용된바 없이 오로지 군사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말의 사육은 왕에게 있어서는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백성들에게는 착취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었기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습니다(신 17: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근동 지역에서 기마는 1000년경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앗수르인들의 기마는 앗수르바르시팔2세(883-859)에 시작되었습니다. 성서는 솔로몬 시대에 많은 말을 사육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0:26). 므깃도에서 발굴된 10-9세기 마구간 흔적이 있습니다.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450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마구간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더 많습니다.
화장품
욥의 딸 가운데 게렌합북(눈화장용 뿔)이라는 이름으로 보아(욥 42:14) 눈 화장(히브리어 ‘푸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화장은 아마도 방연광(회색 납성분)이나 공작석(녹색 구리 성분)같은 광물질 가루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화장이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예후를 맞이하였으나 죽임을 당합니다(왕하 9:30).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눈 화장을 한 창녀로 비유합니다(렘 4:30). 에스겔 또한 믿음이 없는 예루살렘을 음행한 여인 오홀리바로 언급합니다(겔 23:40). 오홀리바는 목욕하며 눈썹을 그려 스스로 단장하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로 추정되는 상아로 만든 화장먹용 숟가락이 하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당근 모양으로 생긴 향수를 담았던 병과 둥근 모양의 용기들은 모두 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로 추정되며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에서 발견된 무덤들에서 나왔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을 때 그는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부었고(삼상 10:1),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말하길 사울을 버렸으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고 말하는 장면(삼상 16:1)에서 보듯이 화장품 용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해 서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 광야의 오아시스인 엔게디의 뜨거운 날씨는 열대성 식물이 잘 자라는 날씨입니다. 히브리어 ‘보셈’은 향료를 칭하는 일반적인 낱말로서 스바 여왕이 향품(베사밈, 보셈의 복수형)을 가져옵니다(왕상 10:2).
좋은 냄새가 나는 발삼(히브리어 ‘오포발사뭄’)은 매우 값비싼 것으로 에스겔 27:22에 따르면 발삼은 스바와 라아마(사우디 아라비아 남서쪽에 위치한 현재 나즈란)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음악
창세기에서 육축을 치는자, 기계를 만드는 자와 더불어 중요한 세 가지 직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악가입니다(창 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구약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본문으로 추정되는 출애굽기 15장과 사사기 5장은 모두 ‘노래’입니다.
시편은 세페르 테힐림(‘찬양의 책’)으로 이름 지어졌지만 애가도 실려 있습니다.
시편 29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사하는 노래로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시편으로 기원전 10세기 까지 생각되고 있습니다. 시편의 제목들은 많은 음악적 표현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뜻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150편에는 오케스트라의 모든 파트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합니다(150:3-5).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701년 산헤립이 예루살렘과 전쟁을 일으켰을 때 히스기야 왕이 니느웨에 보낸 공물 가운데 ‘남녀 음악가들’이 있는데 음악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야긴 시대의 바벨론 행정 기록은 전쟁 포로들이 식량으로 사용할 기름을 운반했다고 말하는데 포로들 가운데 ‘아스글론의 노래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음악은 예언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뒤 이렇게 말합니다(삼상 10:5-6).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엘리사 사역에서도 거문고가 예언 사역에 사용되며(왕하 3:15-16), 다윗은 왕이면서 시편을 가장 많이 기록한 음악가였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 수금을 잘 타는 사람으로(삼상 16:16) 사울이 우울할 때 위로와 치유 효과가 있는 수금 연주를 합니다(삼상 16:23).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 뿔 나팔과 피리를 부르며 크게 기뻐합니다(왕상 1:34, 40).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에 음악 연주가 있었지만 공의가 없는 제사는 외면 받았습니다(암 5:23-24, 비교 사 5:12).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기록의 증거
가장 초기의 기록은 상류층의 서기관에 의한 것으로 우룩(한글 성경 ‘에렉’ 창 10:10)에서 발견되었으며 3100년경으로 추정되며 바로 이후 나일 강 골짜기에서는 문자가 나타났습니다. 알파벳은 2000년대 초 가나안 인들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가장 최초의 알파벳 구조는 22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베니게 문자(히브리어-아람어 알파벳의 기준)로 1100년경에 형체가 드러납니다.
2005년, 텔 자이트, 고대 이스라엘의 남서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돌이 발견되었는데 이 돌의 연대는 기원전 10세기 정도로 추정됩니다. 두 줄에 걸쳐 각인돼 있는 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보이는 22개.
고고학자들은 이 돌과 문자들을 정밀 분석한 결과 이들 문자는 그동안 알려진 히브리어 알파벳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언어학 연구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대 언어 전문가들은 이 문자가 써졌을 당시의 히브리어 알파벳은 페키니아어에서 히브리어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지만 히브리어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굴작업을 지휘한 피츠버그 고고학자인 론 타피 교수는 그리스 알파벳을 포함해 고대 세계의 모든 알파벳들은 텔 자이트에서 발견된 문자들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합니다.
학교
기원전 8-7세기부터 유다 왕국에 어떤 형태의 학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포로기 후기에서야 학교가 등장합니다. 시락서(집혜서)에서만 ‘학교’(베트 미드라쉬)를 언급합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너라”(시락서 51:23).
예루살렘에는 왕실과 국가를 위한 서기관(소프림)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미 알파벳에 대한 지식과 쓰고 셈할 수 있는 특별한 훈련을 거친 자들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했습니다. 이 왕실의 서기관들은 국제적인 관계와 국가적 업무 그리고 궁정 행정에 관한 일들을 했습니다. 그마랴는 서기관(소페르)이었던 사반의 아들이었습니다(렘 36:10).
바룩이 여호와의 성전 위뜰 곧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니라
바룩 또한 서기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예레미야 36: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하지만 서기관들은 왕실 내에서만 활동했을 것입니다.
무덤 형태와 매장
적절한 형태의 매장을 받지 못한 것은 몹시 혐오스런 것이었습니다(렘 22:19; 36:30). 악행을 떨쳤던 이세벨은 죽어서 개들의 먹이가 되기도 했습니다(왕상 21:23).
‘매장’(케부라)은 사람이 죽은 그날 행해졌는데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를 지어 나무 위에 달린 시신일 경우에도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해야 했습니다(신 21:23). 요셉은 야곱을 가나안 땅에 가서 장사 지내기 위해 이집트의 관습대로 몸에 향재료를 넣게 하여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매장 관습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거류했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베니게인들은 화장을 이스라엘에 소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1성전 시대 이스라엘의 무덤에는 화장을 한 흔적이 없습니다. 간혹 화장을 한 흔적도 있는데 화장 후의 재는 납골용 단지나 대접을 엎어 마치 뚜껑처럼 씌운 단지들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하였습니다(삼상 31:12-13).
이스라엘 민족은 본 매장과 재 매장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매장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 매장은, 시체를 무덤에 영구적으로 매장하고 부패한 뒤에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본 매장은 분묘나 석관 등에 매장할 경우 주로 한 구의 시신만을 놓습니다.
재 매장은, 시신을 분묘나 무덤에 일시적으로만 두었다가 살이 부패하고 나면 뼈를 모아 구덩이나 저장고로 옮겨 놓습니다. 대 가족의 경우 이 두 가지가 모두 행해졌을 것입니다. 헬라 시대나 로마 시대에는 돌로 된 석관과 유골함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철기 시대의 이스라엘은 이런 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벤치로 둘러싸인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가족 무덤은 여러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연결된 몇 개의 방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방안에는 시신을 일시적으로 놓아 둘 수 있도록 바위벽을 높게 깎아 벤치들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와 잠들다’ 또는 ‘~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다’(창 25:8; 35:29; 49:49; 신 32:50; 삿 2:10; 왕상 2:10) 등은 가족 무덤의 재 매장 습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후 세계
성경에 죽음으로부터 육체적 부활을 설명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평야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겔 37:1-14),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시체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사야(사 26:19)의 내용은 165년경에 쓰인 다니엘 12:1-4보다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영생을 받는 자와 수치를 당하는 자를 묘사한 다니엘서의 해석은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종교적 견해의 발전과 종교 분파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단 12:2-3).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사울에 의해 사무엘이 잠깐 살아나는 장면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삼상 28:15).
엘리야(왕상 17:22)와 엘리사(왕하 4:35)에 의한 치유 또한 부활의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죽음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지만 죽은 자는 음부에서 혹은 가족 무덤에서 천상의 존재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닌 음부에서 존재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중간 단계인 것입니다. ‘음부’(스올)은 셈어에서는 그리스어의 하데스, 곧 황천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자들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세계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60번 등장하는 ‘스올’은 어떤 다른 셈어족 언어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요나서에서 스올은 물의 이미지와도 관련이 있으며 죽은 자가 머무는 곳은 바다 밑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욘 2:3-6). 스올은 먼지와 어둠이 있는 장소, 흐린 불빛의 장소입니다. 이렇기에 철기 시대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유품들 가운데 기름 등잔이 많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입니다.
욥의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자기 집이 스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욥 17:13-14).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조상 제사
이스라엘 사회의 한 특징이기도 했던 죽은 자에 대한 제사는 산 자에 대한 죽은 자의 가족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행해졌습니다. 공식적인 야웨이즘과 달리 대중적 신앙에서 조상 제사는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주의자들과 제사장들은 신접한 자, 박수 등을 믿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마찬가지로 죽은 이를 위한 희생 제물을 거부합니다(신 26:13-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매년제를 드리러 가는데 아마도 조상 제사였을 것입니다(삼상 20: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그런데 왕이 된 이후에는 매년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금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죽은 자의 왕국의 문들을 닫고 고인들과의 어떠한 교류도 금한 것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현상과는 완전히 독특한 예입니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거나 사후 세계의 존재들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생활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의지에 대한 압도적인 체험으로써 야웨의 배타적인 주권에 대한 권리 주장은 이질적인 신들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지하 세계의 권능들도 포함하였기 때문에 금지한 것입니다. 야웨의 주권과 힘은 여타의 신들이건 사후 세계의 존재이건 어떠한 대상에게도 양도되거나 분할될 수 없었습니다. 야웨만이 지존무상하기 때문입니다(개역한글, 이사야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일상생활의 중요성
고대 이스라엘은 목축업과 농업이 병행된 농업사회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같은 도시에 살던 사람들도 농경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고 어디를 가든지 가축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두 곳의 이름은 이 성문에서 매매했던 가축의 이름을 따서 양문(느 3:1)과 어문(대하 33:14)으로 불렸습니다.
이들의 일상생활은 해가 뜨고 지는 것, 비가 내리거나 그치는 것, 날씨와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짓는 것으로 농경 사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특별한 믿음의 관점으로 읽는데 익숙해있어서 독특한 사건, 은혜 가득한 구절,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 위주로 읽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의 주변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믿음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라고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지역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한 보통의 농경사회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농촌에 살거나 하지 않기에 고대 농업 사회의 시각으로 구약 성서를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성서를 읽게 될 때 틀에 박힌 신앙에서 벗어나 성서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때때로 전혀 신앙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장면에서도 굳이 영적인 뜻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도리어 야웨이즘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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