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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사학년 때던가, 어느 추운 겨울날 아버지는 방패연을 만들며 옆에 앉은 내게 이야기했다.
내 나이 열 네 살 때 돌아가신 니 할부지는 젊은 한 시절을 방물장사로 떠돌아댕겼제. 저 울산땅 마실마실 골짝골짝을 바늘 실 참빗 얼레빗에다 연지 곤지를 등짐지고 떠돌다 보이 늘 허리가 꼬부장했어. 남도 육자배기 한 가락은 구성지게 잘도 뽑아제꼈고 술 또한 대주가라 팔자에 매인 역마살에 임종 때까지 손씻지 몬해, 어느 해 겨울인가 고주망태가 되어 눈밭에서 객사하고 말았잖능가베. 역마살이 낀 집안은 원채 손이 귀한 법이라 슬하엔 내 하나를 남겼고, 니 할무이도 내가 채 장성하기 전 전쟁통에 굶어 그만 별세를 했능기라. 지금도 아부지 모습은 눈에 삼하누만. 낡은 맥고모자에 무명적삼을 입고 그 시절 한창 유명하던 당꼬바 지에 짚신을 꿴 채 깐죽깐죽 뱁새 걸음을 걷던 키 작은 장돌뱅이를 말이다. 부산서 물건을 받아다가 그걸 다 팔 동안 달포나 집을 비았다 돌아 오모 한 이틀이나 사나흘 정도 집에서 머물곤 했지러. 겨울철이면 집에 쉴 동안 내게 꼭 큰 방패연을 만들어 줏제. 분가루같이 곱게 빻은 사금 파리를 명주실에 먹이고 연줄 또한 아주 참하게 만드셨니라. 그 연줄이 잠긴 자새와 연을 내게 쥐주고 집을 나설 때 섭섭해 울라카는 나를 보고 아부지는 노상 이런 말씀을 하셨능기라. 아부지가 보고 싶으모 이 연을 훨훨 띠아라, 저 하늘 높이게 연이 나르는 곳이 바로 아부지가 기시는 곳이거덩, 하고 말이다.
나는 엄동 석달만이 아니고 봄가실에도 연을 날리며 연맨쿠로 멀리멀리 떠 댕기는 아부지를 그리며 컸어. 연이 작은 새가 돼서 아주 멀리멀리로 날아가모 나도 연이 돼서 그렇게 하늘 꼭대리고 떠돌아댕겼제. 내가 니 나이만 했을 때 바람 쌩쌩한 어느 겨울이었어. 내가 날린 연과 마실 아이의 연이 쌈을 붙잖았능가베. 연줄이 서로 섞갈리자 나는 자새로 실이 다 풀리도록 연을 멀리로 띄아보냈거덩. 낯짝만 하던 연이 손가락맨큼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바둑돌맨큼 작아져서 가물거릴 때까지 연줄을 죄 풀어주었제. 둘러선 마실 아이들이 하늘 저 멀리로 콩알만해 진 연 두 개를 조마조마하게 쳐다 보았어. 서로 섞갈린 연줄은 풀라캐도 이미 때가 늦었고 어느 쪽이든 간에 한쪽 연줄이 끊기야 쌈이 끝을 보게 되었지러. 그런데 내 자새에 연줄이 먼첨 동이 나고 말아뿌지 않은가베. 인자 더 풀어줄 연줄이 없으니까 꼽다시 내 연줄의한 부분을 다른 아이의 연줄이 외골로 파고들 참이었능기라. 나는 급한 김에 실 없는 빈 자새를 든 채 앞쪽으로 쫑아가기 시작했거덩. 그러나 쪼매밖에 몬쫓아가 남의 집 담베락에 마주치고 말았제. 고만 내 연줄이 끊기고 만기라.
저 하늘 멀리로 콩알만한 연이 너풀너풀 떨어져 날아가더만. 아이들의 함성이 터지고, 나는 부끄러움과 분함에 쥐구녕에라도 숨고 싶었어.
나는 자새를 내던지뿌고 가물가물 멀어지는 내 연을 따라 들길로 쫑아가기 시작했제. 내 연이 어데까지 날아가든 꼭 찾아오고 말겠다. 이렇게 앙심을 묵고 숨질차게 쫑아갔지러. 겨울바람이 찹은 줄도 모르고 들을 질러 마실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으로 산으로 쫑아갈 적에, 그 연은 내가 그적까지 올라가 본 적도 없는 큰 산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제. 한 마장은 좋게 끊겨나간 연줄만 찾아내모 그 연줄을 따라가서 내 연을 찾겠다, 하고 생각고는 그 높은 산으로 올라안갔나. 아부지가 돌아오모 새로 연을 만들어 달라칼수도 있었지마는, 그때는 와 그렇게 잃가뿐 연을 꼭 찾겠다 캤는지..... 돌부리에 채여 넘어져도 아푼줄을 모르고 산을 열심히 오를 동안 어느새 해가 꼽박 지고 산 아랫마실은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파랗게 피어오르더라. 산꼭대리까지 올라가니까 솔바람소리가 굉장했어. 바람이 우째 심하게 불어쌌는지 소나무를 꼭 붙잡고 있었지러. 내가 연처럼 날아갈 것만 같애서 말이다. 그런데도 온몸은 땀으로 쫄딱 젖어 있었지러. 제우 정신을 차리고 산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까, 가게는 아주 별세계라.
어둠살이 내리는 속에 마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꽁꽁 언 실개천이 하얗게 내려다보이고, 작은 멧등도 있고..... 아, 나는 그만 딴 세상에 정신이 팔려 연 찾을 생각도 잊아뿌릿제. 마실 밖을 몬 나가 본 나는 첨으로 세상이란 이렇게 넓구나, 하고 탄복했지러. 아부지가 타지서 집으로 돌아와 다른 마실 이바구를 해줄 적엔, 그저 그렇구나 했는데 실제 내 눈으로 사방 천지를 보이까 그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안 나능기라.
그래서 인자 내가 연이 돼서 그 딴 시상으로 훨훨 내려갔제. 밤만 되몬 무서바서 통시도 몬 가는 내가 그때는 웬지 무섬증도 없더라. 그러부터 나는 꼬박 닷새 동안 걸뱅이짓을 하며 이 마실 저 마실로 돌아 댕겼어.
그렇게 정신없이 딴 세상을 구경하다가 어떤 착한 장돌뱅이를 만나서 재 우 집으로 돌아왔능기라.....
오랜 가뭄 끝에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물꼬를 깊이 트고 논둑을 다둑거렸다. 허술 한 담장도 손질을 하고 집 둘레 수채의 물길도 다시 한번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낮동안은 날씨가 무덥게 찌기만 했을 뿐 해가 진 뒤에도 올듯올듯한 비는 끝내 쏟아지지 않았다. 그것으로 밥을 짓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그렇다고 밤 여덟 시는 넘어야 장에서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엄마도 오늘 저녁쯤은 양식 이 떨어질 줄을 모른 채 어제 아침에 집을 나섰을 것이다. 아니, 어쩜 알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인자 쪼매 있으몬 개학이 될낀데 일 우니 월사금을 우짤꼬, 엄마는 어제 아침에도 이렇게 걱정을 하며 간고기를 담은 무거운 플라스틱 함지박을 이고 삽짝을 나섰던 것이다. 한 끼를 굶어 어디 죽기야 하겠나. 엄마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긴 여름 해가 지고, 순희는 배가 고르다고 자꾸 보채었다. 나도 또한 한창 식성이 좋을 중학교 이 학년생이라 더 이상 배를 주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뱃속에서는 개구리울음 소리가 연신 들렸고 군침이 맹물처럼 자꾸만 입안에 고였다. 그래서 신작로 안 장씨네 가게에서 라면 두 봉지를 외상으로 가져왔다. 엄마의 꾸중을 듣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찬으로는 아침에 먹다 남은 신 물김치를 놓고 순희와 내가 쪽마루에 앉아 삶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마침 돌배산 위에 번개가 한 차례 깨어지고 난 뒤였다. 삽짝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주니 지팡이를 짚은 키가 큰 남자가 꺼부정히 서서 저 읍내 쪽 신작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밀짚모자를 삐뚜름히 눌러썼고 반소매 회색 남방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루 위에 삼십 촉 백열등이 내걸려 있긴 했으나 남자가 머리를 돌리고 있는 데다 불빛의 반사로 나는 그가 누구임을 순간적으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낚싯군일 테지, 하고 생각하다가 곧 나는 당신이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마당귀의 목련꽃이 봉오리를 맺을 때니, 두달 전에 집을 나간 아버지 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집을 떠날 때와는 달리 어디를 다쳤는지 지팡이까지 짚고 있었다.
"아버지, 아부지 아입니껴?"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버지는 비로소 얼굴을 집 쪽으로 돌리더니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천천히 삽짝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쪽 다리도 절름거리지는 않았으나 예전보다 더욱 힘없는 걸음걸이여서 당신은 마치 달이 구름을 가르고 다가오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구, 참마로 아부지네. 우짜다가 짝대기까지 다 짚고....." 순희가 맨발로 아버지께 달려갔다. 순희는 아버지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울먹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숫대처럼 넋을 놓고 멀뚱히 서 있었다.
"어데를 많이 다쳤읍니껴?" 아버지가 짚고 있는 지팡이를 보며 내가 물었다.
"머, 쪼매. 그래도 마 괜찮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예의 낮고 둥근 아버지 특유의 목소리였다.
"마루로 올라가입시더." 하며 내가 아버지의 한 팔을 끌었을 때, 다시 한 차례 천둥이 맞부딪혀 우뢰소리를 내지르며 깨어졌다. 번개가 섬광으로 뻗고, 그 번개 빛에 돌베산의 완만한 능선이 일시에 하얗게 드러났다. 우리 남매는 자지러지게 놀라 엉겁결에 아버지의 허리에 매달렸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마굿간으로 들어갔을 때의 퀴퀴한 쉰내와 마른 볏짚 냄새가 났다.
"큰 비가 올 모양이다." 아버지가 한 팔로 누이의 등을 두르며 말했다.
"아버지는 어데 갔다가 인자 이래 집에 옵니껴?" 순희가 짜증스레 물었으나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저녁 진지 드셨어예?" 내가 물었다.
"읍내서 묵고 왔다. 근데 엄마는 안죽 안온 모양이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곤 지팡이를 상기둥에 붙여 세우고는 마루 끝에 주저앉았다. 남방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더니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목께의 땀을 손으로 닦았다.
"어제 아침에 나갔는데, 오늘 덕산장 보고 올낍니더. 인자쭘 오실 때가 돼 가는데....." 내가 말했다.
나는 쪽마루에 놓인 찢어져 대까치가 보이는 부채를 집어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울 너머 어두운 신작로 쪽에 멍한 시선을 풀어놓았다. 힘없이 벌어진 입과 코에서 남빛 자연이 색실처럼 풀어져 나와 부채 바람이 날려 시름없이 사라졌다.
순간, 돌베산과 국민학교 쪽 동관계못의 방죽을 가로지르며 뇌성이 쳤다. 우뢰소리는 연이어 번개를 튀기곤 딱총 소리를 내다가 잦아들었다. 마치 이마를 쪼갤 듯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하자 마루에 걸린 전등이 꺼져 버렸다. 천지가 암흑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래 무서븐데 어무이는 우째 올꼬?" 깜깜한 속에서 순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가 없지러?" 아버지가 물었다. 순희와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아버지는, "순자 소식은 자주 있나?" 하고 누나를 두고 물었다.
"공장이 청계천에서 부천인가 어덴가로 옮겼다 카면서 편지가 한 장 왔어예. 돈도 삼만원 부쳐오고예, 그거 하매 보름은 됐을 낍니더." 내가 말했다.
누나는 올해 열 아홉 살이었다. 누나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방구리댁 딸 두남이의 편지를 받고 작년 봄에 홀홀히 상경 하여 처음에는 완구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일한다는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작년 추석때 시골을 한번 다녀가곤 몇 달 소식이 끊겼다가 봉제공장으로 옮겼다는 편지가 오고부터는 매달 편지와 함께 돈이 부쳐 왔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그것을 햇빛에 잘 말려선, 장두칼로 잘 다듬고, 한지에다 바람구멍을 뚫어 거기에 다섯 개의 댓가치를 붙여 방패연을 만 드는 솜씨는 아마도 아버지가 지닌 유일한 기술 같아 보였다. 천정 가운데 태극 무늬나 붉은 원을 오려 붙여 만든 연이 큰 것은 신문지만 했고 작은 것은 교과서 만한 것도 있었다. "겨울도 아닌데 그 연을 어데다 팔라캅니껴."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머 꼭 돈이 목적이 라서 맨드나. 쓸모가 없어도 맨들제. 풀이 만약 키 자랑할라카몬 나무만큼 클 끼다. 그러나 제 키만큼 적당히 자라고 말제." 하고 아버지가 쓸데없이 비유까지 곁들여 말했다. "그라몬 돌아가신 할아부지가 생각혀서 만들어예?" 내가 재처 묻자, 아버지는 뚱한 얼굴로 "사람은 꼭 어데 갈 목적이 없어도 누구나 다 연맨쿠로 그냥 날아 댕기고 싶은 기라. 내가 대표적인 그런 사람일란가 몰라도....." 하고 말끝을 죽이며 벙긋 어설픈 미소를 띠어 보였다. 아버지는 어떤 날은 며칠 동안 댓가치를 멀리 두고 지내기도 했지만, 신이 받칠 때면 하루에 두개 또는 세 개까지 연을 만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아버지는 열 개 남짓한 방패연에 일 미터쯤 실을 달아 그것을 들고 동관계못으로 나갔다. 나도 아버지를 뒤따랐다.
엄동 한철을 제외하고 주말이면 동관계못가에 언제나 먼 도회지로부터 원정을 나온 낚싯군들이 백 명 가까이나 점점이 흩어져 있게 마련이었다. 수문 앞 술과 밥을 파는 여인숙 겸용의 여각이 있었고, 공터에는 자가용들이 너댓 대 늘어서 있게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그 연들을 여각 앞 공터에다 늘어놓았다. 지나다니는 낚싯군들이 뻔히 알면서도 이 못가에 아이들도 없는데 웬 방패연이냔듯, "그거 뭐요?"하고 싱겁게 묻곤 했다. 아버지가 잠자코 있으면, "그것 파는 거요?" 하고 되물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마지못해 "예"하고 대답을 흘렸다. "예끼, 이사람아, 겨울도 아닌데 무슨 연을 날려. 더욱 도회지 아파트촌에 연날릴 데가 어데 있다고." 낚싯군이 이렇게 핀잔을 놓으면 "이건 날리는 연이 아니라 민속품으로 집에다 걸어 두는 거요. 예부터 연을 걸어두몬 비상하는 기상이 있어 집안에 길조가 있다는 말도 몬 들었어요?" 아버지는 이렇게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만하군."하며 연을 사가는 낚싯군도 더러 있었다. 아버지는 큰 연은 삼백 원, 작은 연 은 이백 원에 팔았다. 낚싯군들은 그 연을 자가용 뒷자리 선반에 얹어 가기도 했고 등에 맨 낚시 가방에 달고 떠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 여섯 개의 연이 팔렸고, 남은 연은 내가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죽 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허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맨들긴 내가 맨들테니 일요일에 팔기는 니가 팔아라." 그러나 그것이 신통한 장사 거리가 될 리 없었다. 다음 일요일에 순희와 나는 스무 개의 연을 들고 못가로 나갔지만 판 연은 겨우 네 개에 불과했다. 미끼로 지렁이나 떡밥을 파는 장사보다 오히려 못했고, 또 낚싯군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연을 판다는 것이 웬지 부끄러웠다. 그때도 아버지는 집에 머문 지 두 달을 못 채워 들판의 벼들을 거두어들일 무렵, 또 집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해도 저문, 세모가 임박하여 예의 초라한 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또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저건 증말 무신 놈의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하고 아버지를 원망했으나, 아버지가 연을 만드는데 방해를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한푼의 돈도 벌어들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늘 그 정도의 잔소리에서 그쳤던 것이다.
뇌성이 치고 전기까지 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엄마의 귀가가 적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순희의 나직한 한숨이 들려 왔다. 순희가 혼잣소리로 하는 말이 어금니 사이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래 깜깜한데 증말 어무이가 우예 올꼬." "아무래도 내가 마중을 나가 봐야 되겠데이."하며 나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어둠 속의 허공을 조심조심 건너 나는 뒤꼍으로 돌아갔다. 자전거를 끌고 앞마당으로 나오자 아버지가 "내 하고 같이 갈까?" 하고 물었다.
"편찮은데 그냥 쉬시이소."하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삽짝을 나섰다.
곧 소나기가 정수리를 파며 쏟아질 것 같았다. 지면이 고르지 못한 샛길 을 빠져나가자 읍내로 통하는 포장 안된 신작로가 나섰다. 길옆의 포플라들이 마치 벌받는 학생들처럼 늘어서 어둠중에 짙은 어둠으로 판화처럼 찍혀 있었다. 희미하게 트인 신작로에는 팽팽한 긴장만이 느껴졌다. 불을 켜지 않아도 익숙한 길이라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를 만나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습기 머금은 눅진한 맛 바람이 얼굴을 핥았다. 내가 타고 가는 이 자전거는 올 봄, 내가 중학교 이 학년으로 진급하자 누나가 사준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밤일을 끝내고 돌아와 라면 끓일 물을 연탄불에 넣어 놓고 이 편지를 쓴다. 베니아판으로 칸칸이 막아 놓은 창문 한짝 없는 다락방에서 14시간을 미싱과 씨름을 하다 돌아오니 몸이 햇솜같이 풀어진다. 새벽부터 밤 9시까지를 뽀얀 실밥 먼지를 미싱 소리 틈새에서 쉴 틈 없이 일을 해도 한 달에 채 6만원도 내 손에 들러오지 않는다. 그래도 누나는 일류 미싱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을 믿으며 참고 일한 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 우리도 남보란 듯 살자는 꿈은 버린 지가 이미 오래고, 내게 큰 희망이 하나 있다면 일우야,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가난의 때를 벗고 우리 집안이 펴이는 길은 이제 네 성공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일우 네가 일 학년 전체에서 수석을 했다니! 나는 네 편지를 받고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래서 네게 무슨 선물을 사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자전거가 떠올랐다. 읍내 중학교까지는 십리길, 걸어서 통학을 하자면 아무래도 한 시간가까이 걸리겠지. 중고품이나마 자전거를 타고 가면 이십 분이면 족할 텐데. 내가 자전거를 사준다면 절약한 사십 분으로 공부를 더 할 수도 있고, 엄마 장사하는데 물건도 더러 실어 날라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 처리조 보나 또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과분하지만 자전거를 사주기로 마음먹었단다. 보내는 돈으로 읍내 자전거 방에 가서 쓸만한 중고품 한 대를 사기 바란다....
좌흔 마을까지 나오자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도 전기가 나가 촛불이나 석유 등잔불을 켜 놓고 있었다. 나는 마을 회관 앞에서 갈라지는 읍내 쪽 포장된 큰길로 내처 자전거를 몰았다. 그 길은 마산과 부산으로 연결된 국도였다. 어두운 한길에는 소를 몰고 돌아오는 농부 한 사람 외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거기서 다시 한참을 달려갔을 때야 살진 포플라 사이의 희끄무레한 길로 머리에 큰 함지박을 인 키 작은 아낙의 자태를 나는 볼 수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함지박 속에 든 간고기를 다 팔고도 그것을 머리에 이고 올적이 많았다. 장거리에서 쌀과 보리쌀 몇 됫박을 양식으로 사서 이고 왔던 것이다. 읍내서 동관계못까지는 십리 가 늘어진 길인데 엄마는 버스비 칠십 원을 아끼기 위하여 어두운 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무이, 아부지가 방금 돌아왔어예." 엄마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말했다. "그래애?" 하고 반문하며 엄마는 나를 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잠시 머무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무심히 나를 보는 듯도 했다.
"병은 안 든 것 같고, 행색은 어떻더노?"
"지팽이를 짚고 돌아왔어예. 힘 하나 없이 쓰러질 듯이 말임더." 나는 엄마의 머리에 얹힌 함지박을 받아 짐받침에 실으며 말했다. 아니다 다를까. 함지박 속에는 팔다 남은 간전쟁이 몇 마리와 한 말 남짓한 쌀부대가 들어 있었다.
뇌성이 다시 한번 하늘 복판에서 쪼개졌다. 엄마는 흠칫 어깨를 떨었고, 나는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놀람으로 무심결에 자전거의 핸들을 꽉 눌러 잡았다.
"지팽이를? 그라몬 어데를 다쳤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은 거 같고....."
"늘 배창자가 아프다더니 속병이 곯아 터진 게로구나. 객지로 돌아댕기며 굶기도 오지기 굶었을 끼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어둠 속에 흰동만 빤하게 드러 났다. "참, 양석이 떨어졌을 낀데 너그들은 저녁밥을 우쨌노?"
"장씨 집에서라면 두 봉지를 꿔다 먹었지예."
"아부지는?"
"읍내서 묵고 왔다캅디더."
자전거 짐받침에 얹힌 함지박을 고무줄로 묶자 나는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함지박 쪽에서 비린내가 코끝에 따라왔다. 그것은 이미 후각에 익은 엄마의 냄새이기도 했다.
"엄마, 자전거에 타예. 그라몬 퍼뜩 갈 수 있을 낀데." 내가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사양하던 엄마가 오늘따라 아무 말 없이 안장 앞쪽 파이프에 머리 수건을 깔고 올라앉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 역시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힘주어 페달을 밟자 엄마의 전신에서 풍겨 나는 비린내가 정답게 내쪽으로 옮아 왔다.
"쯔쯔, 그래도 숨질이 붙었으몬 더러 처자슥은 보고 싶은지 집구석이 라고 찾아 드니. 원쑤야, 원쑤야. 우째 안죽 객사를 몬하는고....." 엄마는 목쉰 한숨 끝에 아버지를 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뙤약볕 아래 장처마다 싸다니느라 까맣게 그을린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는 공연히 코허리가 찡하게 쓰라렸다. 엄마는 키가 작고 몸매가 깡마른데다 살결이 검어, 엄마를 볼 때마다 안스럽고 축은한 느낌이 늘 내 마음 한 귀퉁이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아버지에 대한 원망 또한 반사적으로 내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체의 단단 한 증오라기보다 외로움으로 용해된 썰물이 되어 당신을 내 옆에서 멀리로 밀어내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런 마음은 엄마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여겨졌다. 다만 순환의 법칙을 좇아 한때의 미움도 시간이 흐르면 연민으로 녹아서, 끝내는 밀물이 되어 엄마의 여윈 마음을 다시 넉넉히 채워 준다는 점만이 다를 뿐.
우리가 읍내서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해 온 초여름, 아버지가 집을 떠나 한 달째 소식이 없을 즈음이었다. 마루에 앉아 엄마와 민씨 부인이 아버지를 두고 나누던 이야기를 나는 방에서 새겨들을 수 있었다.
"전생에 무신 놈의 액이 끼었는지. 서방복이 없다없다 캐도 이런 팔자 는 드물낌더. 첫서방은 어장 배를 탔는데 시집간 지 한 달이 채 못가 물귀신이 되고 말아뿟지예. 그리고 삼 년 뒤에 장사를 하다가 만난 남자가 애들 애빈데, 이 사람은 여지껏 단돈 십 원 한 장 집에 들더논 적이 없담더. 무신 걸뱅이(거지) 흔기가 붙었는지 늘 이래 밖으로만 싸돌아댕기는 기 아니겠읍니껴. 샛계집을 둘 위인이 못 되는 줄은 뻔히 알지만서도, 참마로 그 걸뱅이 혼귀는 시상의 명약도 소용이 없는 병인기라예....."
엄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경전남부선 완행 기찻간이라 했다.
해질 무렵의 통근차라 찻간을 출입구까지 승객들로 들어차 발디딜 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산 부둣거리 어시장에서 젓거리 멸치를 네 상자 나 받아다 그걸 머리에 이고 비좁은 승강구를 막 올라섰을 때였다. 통학생들이 승강구 입구에까지 빼곡이 들어서 멸치 상자를 미처 내려놓을 틈새를 못 찾고 있을 때, "새댁, 그거 이리 주소."하며 멸치 상자를 덥석 받은 것이 아버지였다. 팔소매를 둥둥 걷은 풀색 작업복에 땟국이 흐르는 벙거지를 눌러쓴 아버지는 그때도 역시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멸치 상자를 내려 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고, 엄마는 고맙다는 인삿말로 귓불이 약간 달았을 뿐, 찻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했다. "우짜다 그쪽으로 눈이 가서 힐끔 쳐다보니까 맥놓고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읍디다. 차가 읍내에 도착해서 나는 그만 내리고 말았는데, 이튿날 진영읍내장에서 말입니더....." 엄마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던 것이다.
오후 두시가 넘어 전을 잠시 옆의 장삿군에게 맡기고 길가에 포장에 없이 벌인 조판의 막국수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옆자리 가마니에 털석 주저앉은 사람이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엄마를 좇아 기차에서 내린 것도 아니었고, 엄마 또한 아버지를 찾아 그 막국수 좌판을 찾지도 않았는데, 그 점은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뒤에 들어 안 이바구지만 그때는 저 문경 쪽에서 반년간 탄광일을 해서 춤지에 돈푼깨나 들어 있었답니다. 그러니깐 또 마음에 바람이 찬기지예. 그 양반은 차비만 쥐몬 앉아서 배겨내지를 몬하니까예. 없으몬 굶고 정 굶어 뭐든지 묵어야겠다고 맘 묵으면 날품도 팔고 하며 시상 천지를 떠 댕기는기 아니겠읍니껴. 그랄쭘에 진영장바닥까지 우째 흘러들어온 기지예. 막걸리 한사발을 시키놓고 멍청히 앉아 좌판 뒤쪽 토담 너머를 넋놓고 쳐다보는 꼬라 지가 우째 처량해 뵈던지. 담너머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머 그래 새삼스럽다꼬. 그래서 내가 이 읍내에 누굴 찾아왔어예 하고 말을 붙였지예. 그라니깐 그제서야 내 쪽을 보더니, 새댁이구먼예 하며 알은 체 합디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멀쭉히 웃는 얼굴은 그래도 세상 물정에 닳지 않은 착해 뵈는 티가 있어서....." 그로부터 엄마는 아버지와 짝이 된 모양이었다. 이튿날 엄마가 수산장으로 길을 떠날 때, 아버지가 엄마를 동행했다. 사진 한장 없는 것으로 보아 예식도 올리지 않은듯 한데, 이듬해 누나가 태어났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 신작로에 순희가 엄마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 포플라 밑이라 순희가 서 있는 것을 미처 보지를 못했으나, 순희가 엄마와 나를 먼저 맞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카더마는 마루에 누버 있어예. 그라더마는 동전 세 개를 주며 초하고 활명수를 한 병 사오라 캐서 내가 갔다 왔어예." 골목길로 들어가며 순희가 아버지를 두고 말했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목침을 베고 쪽마루에 누워 있었다.
머리맡 기둥 옆에는 초 한 자루가 뽀욤하니 타고 있었다.
"그래, 방구석에 기어 들어갈 심도 없는 양반이 또 어데까지 싸질러 댕기다가...." 하다가 엄마는 말을 끊고 "어데가 아파요?"하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멀 잘못 묵었는지 사흘 전부터 명치가 콱 멕히더니마는 계속 하혈이 심해서 통 묵지를 몬하누만." 아버지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앉은 걸음새로 비적비적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써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는 끝났다.
후두둑, 마치 키로 콩을 가불듯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어 세찬 소낙비가 서정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당에 금세 뽀얀 물보라가 일고, 마루끝에 켜놓은 촛불이 비바람에 까물거리며 죽었다 살아났다 했다. 한참 뒤, 담장 밖 도람물이 콸콸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순희와 나는 마루큰에 다리를 드리우고 앉아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습기 머금은 시원한 냉기가 기분 좋게 얼굴에 닿았다. 부엌에서 목물을 하고 나오며 엄마가 우리 형제를 보고 말했다. "너그들도 인자 마 자거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에 공부해야 효과가 있지러."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을 때는 엄마와 순희가 큰방에서 함께 자고 나 혼자 골방을 썼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왔기 때문에 순희와 내가 건넌방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운 삼베 홑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순희가 건넌방으로 넘어왔다. 싸늘한 맨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웠으나 나는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기는 순희도 마찬 가지인 모양이었다. 귓전을 치는 줄기찬 빗소리를 새겨듣고 있자, 깜깜 한 속에 순희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야, 우리 아부지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그자? 와 집에 안 붙어 있고 그래 돌아만 댕기는공. 돈을 벌어 오는 거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상한 거는 세상에 참 많지러. 이 넓은 세상에 이 많은 사람중에 니하고 내가 우째 성제간으로 태어났능공? 그런 것도 다 이상한 이치지러. 또 저런 아부지와 한평생을 같이 살면서 죽을동 살동 열심히 돈벌 이를 하는 어무이 마음도 이상하지러."
"어무이가 아부지를 보고 사나, 우리들 크는 거 보고 살제." 순희는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렇기도 하지마는, 그래도 엄마가 아부지 하고 쌈하는 거를 봤나?" "아부지가 말대답을 안하니까 싸움이 안되는 기제." "아니다. 그래도 어무이는 마음 속으로 아부지를 좋아하는 기라. 나 는 어무이 맘을 안다. 어무이가 우리보다 더 아부지를 좋아하는 거를 말이다."
"내 짝 경자 아부지는 참 좋은 아부지라. 과수원도 크게 하고, 읍내 갔다오모 과자랑 책이랑 꼭 선물을 사오고, 옛날 이바구도 잘해주제. 그런데 울아부지는 우리도 어무이도 다 싫은 모양이라. 몇 달만에 집에 와도 우리가 하나 안 반가분지 웃지도 않으니깐."
"그라모 니는 아부지가 이 세상에서 머를 젤로 좋아하는 거 같으노?" 순희는 잠시를 생각하더니 "몰라, 오빠는?" 하고 되물었다.
"나도 그걸 생각해보모, 아보지는 하고 싶은 일도, 좋아하는 일도, 아무것도 없는 기라. 지난달에 성구형한테 내가 물었지러. 우리 아부지 같은 사람은 무신 직업이 젤로 어울릴꼬, 하고 말이다." 성구형은 마산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새마을 지도자 종식씨의 맏아들이었다.
"그랑께 머라 카더노?"
"너거 아부지가 공부를 많이 했으모 예술가가 될 사람이다 카더라." "예술가라?"
"음악가 미술가 문학가 같은 사람 말이다."
"공부 많이 한 예술가들은 다 저래 걸뱅이맨쿠로 돈도 없이 떠돌아 댕기는가?"
"그렇지는 않겠제. 아부지는 돈에 욕심이 없응께. 또 잘 묵고, 잘 살고, 옷 잘 입은 그런데는 신경을 안 쓰이까 하는 소리겠제. 선생님 말처럼 사람은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가리고 매진해야 되는데 아부지는 천연스레 그쪽과 담을 싼 사람이거덩."
"와 그랄꼬. 정말 경아 말맨쿠로 아부지는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미친 사람이사 아니제."
"수수께끼 같은 아부지." 하더니 순희는 졸리운 목소리로 앓듯 중얼거렸다. "아부지가 돌아오니까 인자 누우야가 보고싶다. 서울서 고생하는 누우야만 생각하모 늘 목이 안메이나. 이븐 추석에도 내리올란지....." 작년 추석때, 누나는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큰 가방에 가득 넣어온 선물들을 다 풀어놓고 집을 나설 때 나는 마당귀에 선 석류나무의 가지 하나를 꺾어 누나에게 주었다. 익어 터져 상큼 한 분홍 알을 촘촘히 내보인 석류가 많이 달린 가지였다. "집 생각이 날 때 이 석류나 보며 마음을 달래야지." 누나는 함박 웃으며 그 석류 가지를 들고 신작로 길을 나섰다. 순희와 나는 읍내까지 누나를 배웅했다. 벼를 거두어들인 뒤라 황량한 들에는 따가운 햇살만이 맑게 쏟아지고 있었고, 종달새 두 마리가 깨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
빗발이 좀 가늘어지더니 어느 사이 순희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큰방 쪽에서 엄마의 말소리가 여리게 들려 왔다.
"묵질 몬해서 빈속이라 커더마는 당신 그래도 안죽 그 힘은 쪼매 남았구랴." 엄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으나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내참, 오늘 덕산장에서 당신과 닮은 늙은이 하나를 만냈구마." "내 닮은 늙은이라니?" 아버지가 시무룩히 물었다.
"나이가 환갑은 다 됐읍디다그려. 쪼매는 빽 하나를 들고 어물전을 어슬렁거리다가 내하고 눈이 마주쳤지예. 그러더니 그 영감이 내 쪽을 걸어옵디다. 옷맴무시가 꾀죄죄하고 고무신이 흙고물이라 아매도 길 나선 지가 오래 된 행색 같아서예. 그런데 그 노인이 내 앞에 쪼그리고 앉더마는 손때 탄 모자를 들썩해 보이는기 아닙니껴. 내사 알지도 몬하는데 말입니더. 그라더니 그 영감이 춤지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하나를 내놉디다. 여기 적힌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고 하면서예. 나이는 서른 다섯 살인데 왼손등에 불에 덴 흉터가 있는 남자로 이름이 박 뭐더라. 그런 사람을 찾는다꼬예. 사연을 들어보니까, 고향이 황해도 송화로 일사후퇴때 마누라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피난을 내리 왔다지 멉니까. 그런데 그만 천안 근방에서 아들을 잃아뿌링다 앙캅니껴. 그러부터 스물 아홉 해가 지낸 지금까지 그 아들을 찾아 댕긴다니, 그 정성이 보통입니껴. 그 동안 고아원, 미군 부대, 어데 안 알아본 데가 없답디더. 묵고 살 만하게 되고부터는 아들을 찾을라고 신문에도 여러분 내고예. 그런데 작년에 마누라가 죽고 나자 장사하던 냉면집도 이남서 낳은 아들한테 물리주고, 인자는 일년 열 두달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아들 찾아 헤맨다 안캅니껴. 그 사정을 들어보니까 얼매나 안됐던지. 마누라가 살았을 적에도 일년이모 너댓 달은 장사도 마누라한테 맺기고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고 댕긴다 캅니더. 그 이바구를 들으니까 문득 당신 생각이 나서. 증말 당신도 머 그런 샛자슥을 찾아 댕기는 거는 아닝교? 참말 한 분 해보소."
"허허, 임자가 내 하고 한두 해를 살았나. 내라는 사람을 임자가 모르모 누가 알꼬." 아버지가 계면쩍게 웃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참말로 당신은 죽어서도 땅에 몬 있을낌더. 어데로 훨훨 떠 댕기야 직성이 풀링께."
"글씨러. 내 속에 무신 그런 바람 잽이 귀기가 끼였는지..... 난도 나를 잘 모르겠구마." 아버지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다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추석이었다. 누나가 집으로 내려 왔다 이틀을 쉬고 상경했을 때, 읍내 역까지 배웅을 나간다고 따라나선 아버지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누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별세했다는 속달 전보를 날아온 것은 그해 막바지 첫 강추위가 시작되어, 기온이 영하 십도까지 떨어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 아니면 무엇을 찾아 그곳까지 흘러 들어갔는지, 저 전라남도 땅끝 진도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원히 마감했던 것이다.
그로써 아버지는 예술가도 되지 못했고 끝내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 기억할 만한 못 하나 못박은 채 이름 없이 사라졌다. 마침 나는 방학이 시작되었던 참이라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엄마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그곳 면내 보건소의 시체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그곳에서 화장으로 치러졌고, 척추뼈 몇 조각을 보자기에 싸서 우리 모자는 홀홀히 섬을 떠났다.
발동선이 다도해를 빠져 목포가 가까울 즈음, 어마는 무슨 생각에선지 싸온 뼈를 바다에 흩뿌렸다.
"당신, 인자 처자가 보고 싶어도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응께 이 넓은 바다로나 마음놓고 떠돌아 댕기소. 떠돌아댕기며 괴기 구경 물구경이나 실컨 하소."
엄마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매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엄마는 넓은 바다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죽은 아버지를 물이랑 속에서 찾듯 한동안 젖은 눈을 풀어놓더니 갑자기 움켜쥐고 있던 벼를 턴 보자기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어금니 사이에서 깨어져 나오는 오열 속에 쉿조각 같은 단단한 한 음절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구, 나는 인자 누굴 믿고 우예 살꼬....."
김원일
경남 김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에 아버지가 월북하였다. 대구농림고교를 거쳐 196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63년 영남대학 국문학과 3년에 편입하여 1968년 졸업하였고, 1984년 단국대학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1961.알제리아》가 당선되고, 1967년 《현대문학》에 장편 《어둠의 축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68년 단편 《소설적 사내》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시작된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실존적 경향의 소설로부터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다룬 《늘푸른 소나무》(1993)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보였음에도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파헤쳐 대표적인 '분단작가'로 불린다. 작가의 어린 시절과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주제로 한 대표 작품으로 《어둠의 혼》(1973) 《노을》(1977) 《연》(1979) 《미망》(1982) 등이 있다. 특히 《어둠의 혼》은 당시 비평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장편 《노을》에서는 6?25전쟁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적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작가의 분단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본 아버지의 이야기인 《연》과 고부간의 갈등을 분단의 비극적 상황과 관련시켜 파악한 《미망》으로 이어지며, 장편 《불의 제전》(1983)과 《겨울골짜기》(1986)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밖에 작가의 문학적 영역을 넓힌 작품으로 《오늘 부는 바람》(1975)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 《마음의 감옥》(1990) 등이 있다. 《오늘 부는 바람》은 도시 하층민 젊은이들을 통해 삶의 좌절과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도요새에 관한 명상》은 우리시대의 삶의 유형을 대변하는 네 명의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로 공해와 환경문제, 학생운동, 실향민의 망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마음의 감옥》은 소시민적 지식인인 형을 관찰자로 하여, 빈민운동가인 동생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분단상황과 현실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1968년부터 1985년까지 도서출판 국민서관 주간, 상무이사, 전무이사를 지냈고, 198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강사로 출강,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서라벌예술대학 총동문회장을 지냈다. 1991년부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계원학원 상임이사와 한국문학번역금고 이사이다. 1974년 《바라암》과 《잠시 눕는 풀》로 현대문학상, 1978년 《노을》로 한국소설문학상과 대한민국문학상 대통령상, 1979년 《도요새에 관한 명상》으로 한국창작문학상, 1984년 《환멸을 찾아서》로 동인문학상, 1990년 《마음의 감옥》으로 이상문학상, 1992년 《늘푸른 소나무》로 우경예술문화상, 1998년 《아우라지로 가는 길》로 한무숙문학상, 1999년 기독교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소설집 《어둠의 혼》(1973) 《어둠의 축제》(1975) 《오늘 부는 바람》(1976) 《노을》(1978) 《도요새에 관한 명상》(1979) 《환멸을 찾아서》(1984) 《바람과 강》(1985) 《겨울골짜기》(1987) 《마당 깊은 집》(1988) 《그곳에 이르는 먼 길》(1992) 《늘푸른 소나무》(1993) 등이 있고, 산문집 《사랑하는 자는 괴로움을 안다》(1991) 《삶의 결, 살림의 질》(1993)이 있으며, 다수의 평론이 있다. 장편 《마당 깊은 집》과 《겨울골짜기》는 1996년 각각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진단평가>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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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 집안은 일찍부터 한 마지기의 논이나 밭뙈기 한 평도 지녀 본 적이 없음으로써 아버지는 호미 자루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일 년을 따져 평균 아홉 달은 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돌아다녔고, ㉠집에 붙어 있는 나머지 달은 낚시로 소일했다. 이태 전 봄까지만도 우리는 읍내 거리 장터에 살았었다. 그러나 새마을 도로가 확장되는 통에 우리가 세든 읍내 장터거리의 집이 헐리게 되자 아버지는 엄마를 졸라 동관개못 옆 민씨 별채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엄마는 그쪽으로 이사를 하면 당신의 장사 다니는 길이 먼 줄을 뻔히 알지만, 어떻게 집발이나 좀 붙어 눌러있을까 싶었던지 그 말에 쉽게 동의했다. ㉡그러나 이사를 와서 보름을 채 못 넘겨 아버지는 또 슬그머니 집을 떠나고 말았었다.
(나) 아버지는 그로부터 두 달 뒤, 여름이 끝날 무렵에서야 돌아왔다. 그리곤 그 행려 끝에 무슨 결심을 얻어 왔는지 돌배산 자락을 덮은 민씨네 대나무 밭의 굵은 몇 그루를 져와 방패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내게 더러 방패연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한 번도 없던 짓거리였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그것을 햇빛에 잘 말려선, 장두칼로 잘 다듬고, 한지에다 바람구멍을 뚫어 거기에 다섯 개의 댓가치를 붙여 방패연을 만드는 솜씨는 아마도 아버지가 지닌 유일한 기술 같아 보였다. 천정 가운데 태극 무늬나 붉은 원을 오려 붙여 만든 연이 큰 것은 신문지 만했고, 작은 것은 교과서 만한 것도 있었다. “겨울도 아닌데 그 연을 어데다 팔라캅니껴.” 하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머 꼭 돈이 목적이라서 맨드나. 쓸모가 없어도 맨들제. 풀이 만약 키 자랑할라카몬 나무만큼 클 끼다. 그러나 제 키만큼 적당히 자라고 말제.” 하고 ㉣아버지가 쓸데없이 비유까지 곁들여 말했다. “그라몬 돌아가신 할아부지 생각혀서 만들어예?” 내가 재차 묻자, 아버지는 뚱한 얼굴로 “사람은 꼭 어데 갈 목적이 없어도 누구나 다 연맨쿠로 그냥 날아 댕기고 싶은 기라.”
(다) 뇌성이 치고 전기까지 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큰비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엄마의 귀가가 적이 걱정되었다. 어둠 속에서 동생 순희의 나직한 한숨이 들려 왔다. 나는 마루에서 내려섰다. 어둠 속의 허공을 조심조심 건너 나는 뒤꼍으로 돌아갔다. 자전거를 끌고 앞마당으로 나오자 아버지가 “내하고 같이 갈까?” 하고 물었다. “편찮은데 그냥 쉬시이소.” 하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삽짝을 나섰다.
곧 소나기가 정수리를 파며 쏟아질 것 같았다. 지면이 고르지 못한 샛길을 빠져나가자 읍내로 통하는 포장 안 된 신작로가 나섰다. 길옆의 포플라들이 마치 벌받는 학생들처럼 늘어서 어둠 중에 짙은 어둠으로 판화처럼 찍혀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익숙한 길이라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를 만나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습기 머금은 눅진한 맞바람이 얼굴을 핥았다.
(라) “어무이, 아부지가 방금 돌아왔어예.” 엄마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말했다. “그래애?” 하고 반문하며 엄마는 나를 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잠시 머무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무심히 나를 보는 듯도 했다.
“병은 안 든 것 같고, 행색은 어떻더노?”
“지팽이를 짚고 돌아왔어예. 힘 하나 없이 쓰러질 듯이 말임더.”
나는 엄마의 머리에 얹힌 함지박을 받아 짐받침에 실으며 말했다. 함지박 속에는 팔다 남은 생선 몇 마리와 한 말 남짓한 쌀부대가 들어 있었다. 뇌성이 다시 한 번 하늘 복판에서 쪼개졌다. 엄마는 흠칫 어깨를 떨었고, 나는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놀람으로 무심결에 자전거의 핸들을 꽉 눌러 잡았다.
“지팽이를? 그라몬 어데를 다쳤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은 거 같고…….”
(마) 아버지가 위암으로 별세했다는 속달 전보가 날아온 것은 그 해 막바지 첫 강추위가 시작되어, 기온이 영하 십 도까지 떨어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러, 아니면 무엇을 찾아 그곳까지 흘러 들어갔는지, 저 전라남도 땅끝 진도에서 떠돌이 생활을 영원히 마감했던 것이다. 그로써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 기억할 만한 못 하나 못 박은 채 이름 없이 사라졌다. 마침 나는 방학이 시작되었던 참이라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엄마와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그곳 면내 보건소의 시체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그곳에서 화장으로 치러졌고, 척추 뼈 몇 조각을 보자기에 싸서 우리 모자는 홀홀히 섬을 떠났다. 발동선이 다도해를 빠져 목포가 가까워질 즈음, 엄마는 무슨 생각에선지 싸온 뼈를 바다에 흩뿌렸다.
“당신, 인자 처자가 보고 싶어도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응께 이 넓은 바다로나 마음놓고 떠돌아 댕기소. 떠돌아 댕기며 괴기 구경, 물 구경이나 실컨 하소.”
엄마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매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엄마는 넓은 바다를 두리번거리며, 마치 죽은 아버지를 물이랑 속에서 찾듯 한동안 젖은 눈을 풀어놓더니 갑자기 움켜쥐고 있던 뼈를 턴 보자기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어금니 사이에서 깨어져 나오는 오열 속에 쇳조각 같은 단단한 한 음절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구, 나는 인자 누굴 믿고 우예 살꼬…….”
- 김원일, 「연(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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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마)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 ①
① (가)의 ‘장터’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삶의 공간이라면, ‘별채’는 아버지가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망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② (나)의 ‘대나무’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의지를 나타내고, ‘풀’은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아버지의 의식을 드러낸다.
③ (다)의 ‘뇌성’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좌절되었음을 나타내고, ‘신작로’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나’의 태도를 드러낸다.
④ (라)의 ‘자전거’가 유년 시절 ‘나’의 소망을 드러내는 소재라면, ‘함지박’은 미래에 대한 어머니의 소망을 상징하는 소재이다.
⑤ (마)의 ‘속달 전보’는 어머니의 희망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에게는 아버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2. 위 글을 읽고 감상의 과정에 따라 ‘아버지’의 삶을 중심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③
감상의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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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초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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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초점에 따른 글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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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설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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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현실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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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현실과의 부조화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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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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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현실 인식 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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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적 노력 없이 떠돌이 삶을 반복하는 아버지의 행동을 서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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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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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현실인식이 갖는 문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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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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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탐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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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삶의 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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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삶에 충실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서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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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삶은 가치가 없다는 점을 서술한다.
②현실에 타협하는 삶이 이상을 실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서술한다.
③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 없이 떠돌기만 하는 삶은 현실과의 괴리감을 심화시킨다는 점을 서술한다.
④현실 세계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태도가 부족하다는 점을 서술한다.
⑤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기 만족감에 집착하여 현실에 적응하려는 능동적 자세가 부족하다는 점을 서술한다.
3. <보기>와 같이 ‘연’이 제시된 장면을 정리하여 ‘연’의 의미와 기능에 관해 심화 학습을 전개하였다. <보기>에 대한 해석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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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 내 나이 열 네 살 때 돌아가신 니 할부지는 젊은 한 시절을 방물장사로 떠돌아댕겼제. 부산서 물건을 받아다가 그걸 다 팔 동안 달포나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한 이틀이나 사나흘 정도 집에서 머물곤 했지러. 겨울철이면 집에 쉴 동안 내게 꼭 큰 방패연을 만들어 줬제. 그 연줄이 감긴 자새와 연을 내게 쥐어주고 집을 나설 때, 섭섭해 울라카는 나를 보고 아부지는 노상 이런 말씀을 하셨능기라. 아부지가 보고 싶으모 이 연을 훨훨 띄아라, 저 하늘 높이 연이 나르는 곳이 바로 아부지가 기시는 곳이거덩, 하고 말이다.
※ 어느 일요일, 아버지는 열 개 남짓한 방패연에 일 미터쯤 실을 달아 그것을 들고 동관개못으로 나갔다. 나도 아버지를 뒤따랐다. 아버지는 그 연들을 여각 앞 공터에다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큰 연은 삼백 원, 작은 연은 이백 원에 팔았다. 방죽 길을 걸으며 아버지가 허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맨들긴 내가 맨들 테니 일요일에 팔기는 니가 팔아라.” 다음 일요일에 순희와 나는 스무 개의 연을 들고 못가로 나갔지만 판 연은 겨우 네 개에 불과했다. 그때도 아버지는 집에 머문 지 두 달을 못 채워 또 집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해도 저문, 세모가 임박하여 예의 초라한 꼴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또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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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연’은 얽매이지 않고 살고자 하는 아버지의 삶의 태도를 나타낸다.
② ‘연’은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을 드러낸다.
③ ‘연’은 세상을 유연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④ ‘연’의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속성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방랑하는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⑤ ‘연(鳶)’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친 ‘연(緣)’의 연결 고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4. 위 글의 내용으로 보아 ㉮의 이유로 가장 적절한 것은? ▶ ⑤
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애걸복걸(哀乞伏乞)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② 어머니가 아버지를 애지중지(愛之重之)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③ 아버지가 수구초심(首邱初心)하며 어머니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④ 어머니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⑤ 어머니가 아버지를 항구여일(恒久如一)하게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5.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가 다른 하나는? ▶ ⑤
① ㉠ ② ㉡ ③ ㉢ ④ ㉣ 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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