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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56. 결론
(3) 하나님 경륜의 완성(다 이루어 짐)
- 하나님, 사람, 동산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계21:6)
오늘은 ‘이루었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말씀드리겠다. 맨 처음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간단하게 하나님과 지음 받은 사람과 동산 셋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있는 것이 사탄이다. 그렇게 아주 간단하다. 오늘날처럼 사회가 넓어지고 세상이 복잡하다 해도 이 근본은 그대로 지금도 똑같다. 단지 이것이 확장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근본은 넷이니까 인생이나 세상이나 우주에 대해 생각할 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이 넷만 확실히 알면 다 아는 것이다. 하나님, 사람, 사회, 그리고 사탄 그렇게 넷이다.
1.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완전하게 도달하시는가?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숫자적으로도 하나라는 뜻이지만 이것은 꼭 숫자적으로 하나라기 보다는 절대적으로 다른 類가 없다, 비교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Only라는 말이다.
A. ELOHim (창1:1, 26)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시작한다. 여기의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이다. 세상의 여러 가지 신화들이나 민족들 속의 널리 퍼져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하늘님 식으로 모든 민족마다 자기들의 어떤 근본을 이야기할 때 창조를 이야기할 때 알라라 하든지 엘로힘이라 하든지 다 이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복수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들이라고 하니까 다신교적인 영향이 들어와 있지 않나 하는 말도 있고, 원래 다신교였는데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원시시대의 모든 종교는 다신교인데 통일왕국이 생기면서 절대군주제도가 도입될 때 하나님도 유일하신 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도올 김용욱 선생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것도 다 일리가 말이다. 여기서 엘로힘이 복수적으로 사용된 것은 어떤 것이 너무너무 장엄할 때 복수적으로 쓴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을 강조하려고 할 때 복수형을 쓰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성경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쪽에서는 이 복수적인 명칭을 다신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장엄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복수적인 용어를 썼다고 해석한다.
이 엘로힘이라는 말은 큰 능력(힘)을 표시한다. ‘엘’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엘’이라는 말이 능력, 큰 힘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처음 직관적으로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자기 존재보다 엄청나게 큰 대상을 만났을 때 ‘엘(힘)’을 느낀다는 말이다. 여기서 모든 종교가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다. 나보다 큰 힘. 어린아이도 처음에 태어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좀 크면서 점점 큰 것을 느끼지 시작하고 두려움도 생긴다. 인형을 자기보다 작은 인형을 주면 괜찮은데 자기보다 큰 인형을 주면 두려워한다. 사람도 자기보다 크면 두려워한다. 애기들을 보면 여자들은 덜 두려워하는데 남자는 더 두려워한다. 우리 영관이도 지금은 친해져서 그렇지 않지만 남자인 나를 더 두려워했다. 자기보다 큰 어떤 것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유치원에 가면 자기보다 힘센 아이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모두 ‘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인들은 달이나 해나 큰물이나 산이나 하늘을 보면서 ‘엘’을 느꼈다. 여기서 엘로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 대해 엘로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창세기 1장 1절을 그대로 읽으면 “태초에 엘로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엘로힘은 너무나 일반적이기 때문에 구체성이 없다. 또 어느 민족이나 공통적으로 그런 개념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어느 하나님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B. 야웨(여호와) (창2:4,7,9,18,21, 3:1~)
그런데 성경에 야훼, 여호와라고 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창세기 2장 4절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여호와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냥 엘로힘이라는 하나님보다 대부분 여호와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다. 여호와는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다. 엘로힘할 때는 다른 민족도 그렇게 부르는데, 야훼, 여호와할 때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하나님의 명사가 되었다.
이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에 와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신약에서는 전부 그냥 하나님이라고 사용하고 있지 여호와라고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이 여호와는 ‘하바(havah)’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이 ‘~이 되게 하다, 되다, 있다’는 말의 축어형이다. 영어로 to be의 의미이다. 이 말은 맨 처음에 모세가 호렙산에서 당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할 때 받았던 그 이름이다. 이 이름이 창세기 2장 4절을 기록할 때부터 쓰여지고 있다. 구체적인 하나님이다.
1) 사람을 지으심(2:4,7,9)
창세기 2장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을 지으신 분과 관계된다. 엘로힘은 우주를 창조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분으로 함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만이 아니고 들짐승도 지으셨다는 말이 3장 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는 말이 나온다. 들짐승도 결국 여호와께서 지었다는 말이 된다. 들짐승은 영적으로 말하면 사탄이나 천사와 같은 영물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뱀을 상징적인 의미로 사탄을 표현하기 위해 끌여들여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사람을 지으신 분이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2)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나온다.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신 하나님(창6:8)도 여호와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이(창12:1)도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삭을 주신 이(창17:1,21:1)도 여호와 하나님이다. 또 이삭을 다시 주신 분(창22:1~12)도 여호와 하나님이다. 야곱을 택하시고 다루시고 인도하신 분(창25:21~)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다.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출3:1~)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고정되게 된 것이다. 자기들과 관계된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서 왕국을 세우게 했던 그 하나님(삼상16:6~13)도 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모든 것을 말할 때마다 이 여호와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들의 구원을 말할 때도 이 여호와와 관계되지 않을 수가 없고, 자기들의 현재적인 삶도 이 여호와와 관계되지 않을 수가 없고, 자기들의 율법도 이 여호와가 주신 율법이고, 모든 것이 여호와와 관계된다. 여호와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가 불가능한 것이다. 십계명 처음에 보면 “나는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말한다.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없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관계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름 여호와 하나님! 이분을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상대적으로 부르는 이름이고, 전체적인 이름은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포로로 잡혀갔다온 후로는 너무 신성시하다 보니까 함부로 입에 붙이기가 어려워서 일부러 부르지 않고 자음만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때 야훼라고 불렀는지 여호와라고 불렀는지 그 음 자체를 상실해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여호와나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문자를 보고 해독한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는 어떻게 불렀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만큼 여호와의 이름은 신성시되게 되었다.
C. 독생자(독생하신 하나님)
이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오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지지만 이 ‘데오스’라는 말은 희랍사람들의 신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표현된다고 할 수는 없다. 데오스라는 말 속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개념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빌려썼다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희랍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데오스라는 것을 물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라고 부른 이름과는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그 말밖에는 없기 때문에 데오스라는 말을 쓴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했다. 그와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하나님이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등장을 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1:1)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말하고, 아담의 오실 자(눅3:23~38)로도 말하는데 아담은 하나의 형상이고 이분이 실제, 즉 오실 자로 말하기도 한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눅3:38)이다. 또 성령으로 잉태되어 났다. 하나님의 아들(막 1:1)이다. 마지막에 요한복음에 가면 말씀이 육신이 된 독생자(요1:1~14)로 표현하였다. 이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히브리서에는 본체의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히1:3)이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하나님과 하나인 어린양을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빛이고 어린양은 등이시다. 그분과 어린양은 한 보좌를 이루고 있다. 이런 말들이 나오고 성전도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시라는 말이 나온다. 그 하나님은 어린양하고 하나가 되는 형태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게 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사실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도 천지가 없으면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개념도 없다. 하늘과 땅이 있으니까 이것을 지으신 분을 생각하는 것이지 만일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는가. 알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사에 있어서 그런 기구한 역사와 은혜를 입은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여호와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계시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도달하느냐에 따라서 도달한 것만큼 아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모르고 단지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온 만큼의 다가오신 그분을 아는 것뿐이다.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우리에게 보여준 부분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았다고 하는데, 어떤 장님은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어떤 장님은 귀를 만져보고 어떤 사람은 엉덩이를 만져본 것이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세 사람이 말하면 한 사람은 기둥 같다고 하고 한 사람은 부채같다고 하고 한 사람은 동산같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본 것은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코끼리 전체가 어떠한지는 셋 다 모른다. 단지 자기가 만져본 것만 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만큼만 안다.
그래서 엘로힘으로 보여졌을 때, 여호와로 보여졌을 때, 그러나 가장 구체적으로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에 있는 대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이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말은 인격화되었다는 말이다. 인격화되었다는 말은 가장 구체적인 접촉이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알고 보면 먼 것이다. 굉장히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인격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신약으로 들어올수록 점점점점 그 하나님의 범위가 좁아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더욱더 구체적이게 된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를 생각한다면 말이 안 된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볼 때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인간 중에서 시골뜨기 젊은 청년으로 밖에 안 된다. 제사장이나 왕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 시골의 30세 먹은 청년 밖에 안 된다. 이 사람을 보고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말하는가?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오신 구체적으로 나와 만나진 부분이 독생하신 하나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부 다 아니다로 논하여질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온 것만큼 밖에는 모른다. 그러므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있었던 그 하나님 전부이냐, 아니냐는 의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내게 인격적으로 다가온 인격적으로 만나진 한 분을 보고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게 되고, 독생자이다, 본체의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독생자까지 왔다. 엘로힘 하나님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여호와 하나님에서 예수, 독생자 하나님까지 왔다는 말이다. 왜? 인격화되기 위해서이다. 계시록에 가면 독생자라는 말이 빠지고 없고 모두 어린양으로 나온다. 독생자라고 했을 때도 괜찮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도 말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어린양하면 너무나 작아져 버린다. 너무나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갓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다. 이것을 말할 때는 구속하신 어린양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하신 하나님이 되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할 때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속하신 것이니까 어린양할 때는 목장에 있는 어린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속하신 어린양이다. 나를 대신 한 어린양이다. 나를 대신 한 어린양이므로 어디에서 나를 대신했는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대신 하였다. 여기서 어린양할 때는 그냥 어린양이 아니다. 순하니까 저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분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
거창한 하나님이 복수적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고 너무나 웅장하여 엘로힘 복수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의 입으로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그 신성함, 절대적인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유태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이것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그럭저럭 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로힘과 여호와가 너무나 분명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30세 먹은 한 사람을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십자가에서 죽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렵다. 자기들이 죽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기들의 전 역사와 경험과 관념과 사상과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을 다 내려놓으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니고데모가 왜 예수를 만났다가 그냥 갔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저 사람으로 인해 거듭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어린양! 구속하신 하나님! 구속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우리를 구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린양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이다. 이 어린양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둘 모두에게 만족을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서 만족을 주었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진실을 바침으로서 만족이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진실만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의 어떤 가식도 꾸민 것도 더한 것도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조용해지고 사람도 조용해졌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 가면 조용해진다.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내 입술을 지져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만나면 전혀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져버린다. 내가 잘했니 네가 잘했니 나는 이만한 공로가 있느니 나는 이런데 너는 왜 이러냐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소용 없어져버린다. 오직 하나님과 사람이 조용히 만날 뿐이다. 아주 고요히. 그 고요히 만나는 자리를 묘사해 놓은 것이 지성소이다. 거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빛도 없고 바람도 없고 추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고요하게 조용하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이다. 그것이 지성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이기 때문에 그런 지성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를 만났을 때 모세는 어떤 것을 느꼈을까? 지성소를 느꼈다.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리를 느꼈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할 말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잠잠해 있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곳에 계시는구나로 생각하게 되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은 화평 중에 계신다고 말했다.
<표현을 위한 하나님>
어린양 하나님! 구속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불도 사용하고 바람도 사용하고 구름도 사용하고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와서는 무엇을 사용하였는가? 어린양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아주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다.
왜 그 하나님이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으로 자기를 표현하려고 했을까? 우리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아니면 나를 정상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거기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읍니까를 하는 그 사람으로서가 아니면 나를 표현할 수가 없다. 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그 사람을 표현하여야 한다. 그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은 뭔가 덧칠을 해놓은 것이다. 더해놓고 보태놓은 것이다. 자기를 아무리 진실하게 표현하려고 해도 표현이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표현하면 자기가 시원해진다. 진짜 자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우리 사람을 표현하려면 꼭 그 어린양이 필요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어린양이 필요하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면 역시 그 자리 밖에는 없다는 뜻이다. 불로 표현하면 사람이 놀래고 바람으로 표현하면 사람이 흔들리고 천둥소리로 표현을 하니까 사람들이 난리가 난다. “다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광경을 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로 되었다.
<분배 및 통치를 위한 하나님>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자리를 택하실 수밖에 없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배와 통치를 위해서이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려면, 나누어준다는 말은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강하게 접촉하려면 완전하게 접촉하려면, 접촉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가져야 되고 어떤 성질을 가져야 되는데, 엘로힘에서 나타났던 어떤 것에서도 사람과 접촉이 안 되고, 여호와에게서 나타났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만나질 수 없고 다 거리가 생긴다. 엘로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하늘과 땅처럼 거리가 멀었고, 여호와를 만났던 사람들은 공의롭고 두려운 분으로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와서 같이 살고 싶어도 같이 있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다. 같이 살고 함께 있고 아니면 내 생명이 되려면 그분은 어떤 방법을 취해야 되는데, 이 방법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취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면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로 비교해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되려고 왔다. 친구가 되려고 왔다. 한 몸이 되려고 왔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하면 할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물 위를 걸어가니까 저가 누구이길래 물 위를 걸어가는가 하고, 바람을 잠잠케 하니까 저가 누구이길래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고 한다. 이 말은 놀라운 믿음을 표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분과 우리의 거리가 너무너무 멀다는 뜻이다. 저분이 누구이길래 바람을 잠잠케 하느냐는 것은 엘로힘이 아니냐는 뜻이다. 이적을 행함으로써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분배하고 싶은데 이적을 행하면 행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그래서 후반부에 가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기적이 다 없어져버린다. 나는 이적을 행하셔도 안되기 때문에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이적을 중단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끝까지 따라 오면서 십자가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까지 생각했다. 제자들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까지라도 거기서 무엇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기적을 포기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포기하시고 하나님이 포기하셨다. 왜? 만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지기 위해서는 그는 결국 십자가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물 위를 걸어갈 때나 바람을 잔잔케 할 때나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때 우리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엎드려서 경배할 수밖에 없었다. 엎드려 경배하는 관계로서는 부부관계가 될 수 없다. 아내와 남편이 될 수 없다. 생명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자기를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더 경배만 하기 때문에 그분은 참 안타까울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분을 만나니까 우리가 경배할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것이 보였다. 그랬으면 저것이 나구나 했어야 되는데 왜 달아났을까? 아담은 처음에 그것이 싫어서 그것이 두려워서 생명나무를 먹지 않고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었던 것이다.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 나무는 퀵실론이니까 나무이다. 그 나무가 싫어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보고 싫어서 갔다. 제자들이 싫어서 가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만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가 그분과 만날 곳이 없다.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과 시골 어떤 대학에 꼴찌로 들어가서 꼴찌로 졸업한 사람하고는 도저히 만날래야 만날 방법이 없다. 어찌해도 만날 방법이 없다. 십자가에서 밖에는 둘이 만날 수가 없다. 옛날에 어떤 친구가 총무처에 취직을 했는데 이 사람이 배짱이 보통 두둑한 사람이 아니다. 대학을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는데 그 직장이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도저히 견디다 견디다 못 견뎌서 할 수 없이 다른 부처로 옮겼다. 종무과하면 종교를 담당하는 곳으로 옮겼다. 종무과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가는 한직이다. 총무처라는 좋은 자리에 있다가 그쪽으로 옮길 때는 오죽하면 옮기겠는가. 그 친구가 자기도 어지간히 배짱이 좋은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 무시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같이 있을 수가 없다. 자기들끼리 뭉쳐서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한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1등 들어가서 1등으로 졸업한 사람과 지방대학 꼴찌로 들어가서 꼴찌로 졸업한 사람과는 십자가에서 밖에는 만날 곳이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격차가 있다. 많은 차이가 있다. 어디서 만나겠는가? 예수와 우리가 만나려면 하늘에서 오신 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무엇으로 보아도 흠이 없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그분과 죄인이 우리가 어떻게 만나지겠는가? 만날 방법이 없다. 그분이 죽으신 자리가 드러나지 않은 한은 만나질 수가 없다. 하나님 자신의 분배와 통치를 위해서 하나님은 어린양 안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만나기를 어린양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만난 것은 어린양 하나님을 만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분으로서 우리를 구속한다는 말은 나를 대신한다는 말이다.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옛날의 대속한다는 말은 나대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린양으로 대속하고, 나귀는 무엇으로 대속하고 소는 무엇으로 대속하고 이렇게 값이 정해졌다. 사람은 어린양으로 대속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대속하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으로 나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가 없고, 나와 예수님이 만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르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려고 밤낮으로 그 생각을 하다보면 꿈에도 나타나고 환상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사람 눈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이고, 미국 사람 눈에는 파란 눈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고 예수님 그림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꿈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자기가 늘 평소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는 예수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이 투사된 것이다.
예수를 만나려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자리에서 밖에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그 자리에서만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 거기서 우리가 만나진다면 우리와 그분이 동업할 수 있다. 하나일 수 있다. 하나인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분배되게 된다.
분배를 위해 그는 어린양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분배의 보좌! 계시록에 오니 보좌가 나온다. 처음에는 하늘에 있는 보좌가 있었다. 그것이 차차 변화되어 어디로 오는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보좌가 변화된 것을 본다.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정도를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한 보좌라는 말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어린양을 통해서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냥 이론이 아닌 것은 오늘 우리 교회를 보면 예를 들어 간증도 있고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엇이 우리 교회를 통치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 교회에서 분배를 하고 있는가?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격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공급해준다. 세상에 속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것은 세상에 가야 공급 받는다. 여기서는 그것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공급받는 데는 이 어린양이 아니고서는 통로가 없다. 어린양을 하늘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연합을 위한 하나님으로 최종 계시됨>
여기서 연합이 이루어지고 연합이 이루어지니까 보좌가 되게 되고, 보좌가 이루어지니까 생명 강물이 흐르게 되고, 생명 강물이 흐르니까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게 되고, 다시는 목마름이나 배고픔이나 저주나 어둠이 다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이다. 어떤 사람이 들으면 참 불경하다. 장엄한 하나님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다. 모든 성경의 결론이다. 여기서 마지막에 ‘그 영과 신부’로 계시될 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그 영과 신부로 바꾸어진다. 그 영과 신부했을 때는 사실상은 신부이다. 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영과 신부할 때는 신부만 보이지 영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 교회 안에 그 영과 신부하면 교회만 보이지 그 영은 보이지 않는다. 그 영은 영향력은 주고 있고 생명이 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본다면 하나님 보좌가 하나님이 따로 있고 어린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어린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흘러들어오는구나. 다 분배가 되는구나. 옛날에 불로 분배될 때 바람으로 분배될 때 구름으로 분배될 때 박살이 나고 죽고 난리가 났다. 그 중에 산 사람은 몇 사람되지 않고 깨지고 부숴지고 태풍이 불듯이 했다. 그런 하나님이었다. 거기서 살아남을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어린양을 통해서 분배되신 하나님 앞에는 누구나 값없이 목마를 자는 생명수를 받으라가 되었다. 지금 통로가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로가 바꾸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이 바꾸어졌다고 하면 어폐가 있고, 하나님 통로가 바꾸어진 것이다. 하나님 오신 길이 있지 않은가. 오시는 방법이 있고 오시는 모양이 있었는데 그 모양과 통로와 방법이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어린양 그리스도에게로 통로가 바꾸어졌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인식을 가져야 된다. 높은 하늘에 있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꾸 헷갈려서 하나님은 어디 있고 어린양은 어디 있는가, 독생자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하고 헷갈리게 된다. 헷갈릴 필요가 없다.
엘로힘은 여호와로,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양으로, 어린양은 그 영으로, 이렇게 하나님은 이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것은 이 어린양을 통해서 만나고 누리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 구약시대하고 다르다. 옛 구약시대 같으면 이렇게 와서 이런 식으로 있으면 안 된다. 다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되고 보통 마음을 먹고 왔다가는 당장 벼락 맞아 죽는다. 그때는 성전 문만 잘못 잡아도 당장에 죽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왕이라고 향을 피우다가 당장에 쫓겨나서 문둥병에 걸려서 죽었다. 그때 같으면 지금 같은 모습은 어림도 없다. 여호와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잘 못했다가는 큰일 나니까 함부로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통로가 바꾸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하다.
청와대에서 바꾸어진 정책이 동사무소에 와서 시행된다. 우리가 청와대 가려고 해도 운전면허증 같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갈 수가 없다. 이런 것 가지고 청와대에 제출하면 누가 도와주겠는가. 거기 들어가려면 보통 사람은 못 들어간다.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동사무소를 갈 때는 그냥 잠바 입은 채로 가도 되더라. 인감 증명 때러 갈 때 그냥 잠바 차림으로 가도 누가 왜 그러냐고 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면 실장이 나를 아니까 오셨냐면서 인사를 하더라. 그러니 하나님을 청와대에서 만날 것이 아니고 동사무소에서 만나면 되는 것이다. 인감증명 하나 때려고 청와대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사무소에서 때면 되니까 서로가 번거롭지 않고 좋은 일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이런 동사무소의 자리까지 온 것이다.
2. 창조된 인간
A. 아담-하나님의 목적
두 번째는 창조된 인간이 있다. 인간인 사람을 아담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방법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최종적인 피조물이었다. 이 피조물은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기 위해서 지어졌다. 거기서 그 분을 번식하고 산출하려면 하와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하와를 산출하고 하와와 한 몸을 이루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을 번식케 할 사명을 가지고 만들어진 사람이 아담이었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자. 이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사람이 바로 피조물이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무엇인가 노력을 하긴 하는데 헛된 노력을 하게 되었다. 위치를 이탈해 버렸으니 딴 데로 가 버린 것이다.
논에서 벼를 심으면 쉽다. 그런데 산에 가서 벼를 심는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헛되이 노력하고 소득은 없게 된다. 제주도에 가면 논이 없기 때문에 밭에다가 벼를 심는다. 밭벼인데 그것은 맛이 없다. 쌀이 찰지고 기름져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 벼는 물이 많아야 되는데 마른 땅에서 키우게 되면 벼가 되기는 되는데 쌀처럼 찰지게 되지는 않는다. 아담은 결국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자리에 있으려고 하니까 헛되게 노력하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된 곳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해 아래에서 사람들이 수고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왜 말했는가? 엉뚱한데 가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다.
B. X-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고
이 사람들을 대치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택하셨다.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고는 그것을 대신해서라는 말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대신해서 하나님을 살아내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담을 또 짓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대치할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모세가 되기도 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되기도 하고, 다윗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선자자들이 되기도 하고 했다. 이것은 모두 완전치 않고 일부분만 그리스도였다. 일부분만 이런 면모를 갖추고 있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방의 왕인 고레스 왕까지도 어느 면에서는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다든가 성전을 짓게 한다든가하는 면에서 그는 어느 정도 성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종 고레스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나의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나의 그리스도 고레스라는 말이 된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성령으로 나셨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말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 되신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죽으심으로 옛 인류를 처분했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새 인류를 이끌어왔다. 이것이 신약의 주된 논리다. 그래서 우리 주가 되시고 씨가 되시고 신랑이 되셨다. 이것이 결론이다. 신랑이 되었다는 말이 마지막 결론이다.
옛 인류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 분은 죽으심이 필요했다. 죽으심이 아니고는 옛 인류를 처리할 수가 없다. 다 다르고 위치가 이탈되어 있는 인류를 처리할 방법이 없다. 죽으심 안에서밖에 처리가 안 된다. 오늘 우리도 옛 인류인 나를 옛 사람인 나를 처리하려면 그 분의 십자가 앞에서 밖에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내가 노력으로나 무엇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 앞에서 나를 발견함으로서 밖에는 처리가 안 된다. 저것이 나구나 라고 모든 것이 명백하여 질 때 나의 옛 사람은 명백하게 처리된다. 사람은 이상하다. 한 번 더 크고 진실한 것을 만나면 이전 것은 없어지게 마련이다. 봤는데도 안 없어지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없어지게 된다.
향기도 더 짙은 향기를 맡으면 그 전 향기는 없어져 버린다. 있긴 있는데 냄새는 안 난다. 방아 잎이라는 것이 있다. 대구에서는 잘 모르는데 부산 지방 쪽으로 가면 많이 있다. 보신탕이나 생선 같은데 많이 쓴다. 냄새가 굉장히 짙다. 처음에 입에 대면 너무 냄새가 짙어서 좀 이상하다. 그러나 한 번 입맛이 들면 그 이하의 냄새는 냄새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개 냄새도 안 나고 생선 비린내도 안 나는 것이다. 그 냄새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있긴 있는데 안 나는 것이다. 그렇게 안 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리할 때 그것을 쓴다. 더 짙은 것을 만나면 그 전 것은 묻혀져 버리고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정말 참 죽음을 만나면 살았다고 했던 모든 것이 다 없어져 버린다. 오직 죽음만 우리 앞에 역력하게 보일 뿐이다. 참으로 산 사람을 만나면 내가 살았다고 했던 모든 것이 다 끝나게 된다. 저것이 산 것이란 진짜를 보고서는 더 이상 가짜를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된다. 없을 때는 할 수 없이 그냥 갔지만 진짜를 보고서 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씀을 자꾸 들어야 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 보는 것 같고 다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들어야 할 필요가 있고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수능시험 보듯이, OX 하듯이 해서 이렇게 하면 맞고 저렇게 하면 틀리는구나 하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그렇게 공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꾸 듣다보면 들을 때마다 다른 것이 들린다. 냄새란 것도 자꾸 맡다 보면 더 깊은 냄새가 나는 것이다. OX 공부하는 것이랑은 아주 다른 것이다. OX 공부해서 공부 잘한다는 사람이 우리 교회 와서 말씀 들을 때 굉장히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다 OX로 해버리기 때문이다. 아 이것은 맞았어, 저것은 틀렸어 하는 식으로 OX만 하고 만다. 4지 선다형으로 이것은 맞는 것이구나 하고 있으면 전혀 자기 생명이 안 된다. 자기가 처리가 되지 않는다. 죽으심을 우리가 깊이 봐야 된다. 깊이 인식해야 된다.
C. 새사람-X의 부활안에서 태어남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도 우리가 깊이 봐야 된다. 어느 날 하늘에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면서 부활해서 올 것이라는 공상가들의 생각을 버리고 실제적으로 죽었다가 산 사람을 봐야 된다. 죽고 산 사람을 봐야 된다. 우리의 주가 되시고 씨가 되고 신랑이 되신 한 인격을 우리가 만나야 된다. 이 사람으로 아담을 대치하는 것이다. 나를 그 사람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대치한다는 말이다. 이 대치된 사람을 보고 새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점점 자라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꾸자꾸 영으로 변화가 된다. 마침내는 신부가 된다. 그 영의 신부가 되게끔 된다.
이 사람이 창조된 사람이다. 창조된 사람에서 새 사람까지, 창조된 사람, 기름부음 받은 사람, 새사람이 있다. 이 새 사람이 건축된 새 인류가 될 것이다. 동산이 된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동산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그냥 아담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고 아담은 아담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로 통해서 어린양까지 왔다. 우리도 아담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사람까지 왔다. 거기서 우리가 합해지게 된다. 이 합해진 사람, 이 사람이 건축이 되는 사람이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고 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이 참 새 사람이다. 이것을 성경은 한 새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새 인류를 얘기한다. 교회를 얘기하고 새 인류를 얘기한다.
3. 건축된 새 인류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자라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연합되어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건축이라고 한다. 새 예루살렘 성은 각색 보석으로 쌓여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하나의 성이다. 성을 보면 돌이 막 쌓여가지고 성이 되어 있다. 오늘 우리도 사람들이 막 쌓여져 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하나의 성이다. 성이 바로 사회를 의미한다. 홀리 씨티, 거룩한 도시란 말이다. 거룩한 도시란 말은 사회란 말이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해서 비추고 흐르고 열매 맺는다. 새 인류도 역시 새 예루살렘을 통해서 비추고 흐르고 열매 맺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함으로서 하나님은 빛이 되고 사람은 등이 된다. 하나님은 보좌가 되고 사람은 구름이 된다. 열매 맺음이 된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가면 성령과 심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원래부터 자기들의 신성이 있었다. 그런데 단지 그 업보에 가려서, 양파껍질처럼 껍데기에 가려서 안 나오고 있는 것이니까 그것만 딱 제치면 하나님이 되고 부처가 되고 신이 된다고 한다. 부처가 되는 것은 내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까도 까도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내 속에 신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그것이 증명되는가.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것이 증명된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보니 신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재단에서 재물이 탈 때 보니까 재만 남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람은 자기 속에 신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흙으로 지음 받아서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산 혼이 된 것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양파 껍질 까듯이 까고만 있다.
원숭이는 양파를 보면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계속 깐다고 한다. 계속 까보니 마지막에 아무것도 없어서 허망해진다. 그러면 또 다른 양파 가져다가 또 깐다. 왜 그런가. 생각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 있겠지. 여기에 없었지만 거기엔 있겠지. 이번엔 없었지만 다음엔 있겠지 하다 보니까 십년이 간다. 그러다 보니 일생이 간다. 그러다 보니 산 속에 앉아서 도를 닦아 보겠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계발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계발이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이 그런 것을 좋아한다. 자아계발이라고 하니까 좋아한다. 왜 예수를 싫어하는가. 예수님은 재니까 싫어한다. 자아계발이 아니고 이것은 계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까 자존심 상해서 싫어한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에 이르느냐. 그것은 다른데서 와서 이른다. 씨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딴 데서 와서 부활에 이른다. 우리가 사람이 될 때도 사람 속에 뭔가 있어서 저절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와서 사람이 되었다. 생기가 들어와서 사람이 되었다. 밭에 저절로 풀이 나고 곡식이 났는가. 씨가 날라 와서 밭에 풀이 나고 밭이 된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이치다. 원래부터 흙 속에 씨를 가지고 있는 흙은 없다. 그것은 흙이 아니다. 만일 흙 속에 씨가 있는 흙이 있다면 그것은 흙이 아니다. 사람 속에 만일 신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다. 밭을 봐도 맞고 흙을 봐도 맞고 너를 봐도 맞다. 모든 것을 보아도 맞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축된 새 인류는 처음부터 신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신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신성이 올 수 있도록, 들어올 수 있도록 되어진 존재다. 그것이 바로 재이고 흙이다. 흙이기 때문에 생기가 들어갔다. 재니까 하나님 생명이 들어가서 부활이 된다. 우리는 원래부터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와서 무엇이 될 자다.
우리가 원래부터 한국말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한국말을 할지 영어를 할 지 몰랐다. 다만 언어를 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말을 많이 받아들였다. 한국말이라는 씨가 떨어졌다. 계속 떨어져서 결국 우리가 한국말을 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미국에 태어났더라면 미국말 씨가 계속 떨어져서 우리는 미국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던지 원하지 않던지 미국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어디를 봐도 그렇게 생긴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미국말을 가지고 태어난 애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흙이 씨를 포함한 흙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명백하게 우리의 길을 보여줬다. 사람은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줬다. 하나님과 사람이 성경의 중심이다. 우주의 중심이다. 또한 우리 인생의 중심이다. 이것이 하와를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 생명나무를 거기에 두시고, 그것을 지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둘이 한 육체가 될 지니라.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이것이 전 성경의 계시의 전체적인 통제다. 창세기 1장과 2장이 계시록에 와서 완성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 영과 신부. 이제는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동산으로 더 실제적인 동산으로 그렇게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과정을 거치시는 분. 하나님도 과정을 거쳐서 오시고 우리도 과정을 거쳐서 와서 한 자리에서 만나서 새 인류가 되게끔 되고 새로운 우주가 되게끔 되는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머나먼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도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우리 자신마저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인데, 당신이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셔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까지를 완전하게 폭로하심으로서 우리가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고 당신을 우리의 생명으로 영접해서 우리 안에서 당신을 자라게 하고 우리 안에서 당신을 표현하게 하고 우리 안에서 당신을 건축하게 하는 이런 신비로운 세계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인도하신 이 은혜로운 길을 따라서 축복의 길을 따라서 여기 온 모든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의 빛나는 보석으로 구성원으로 그렇게 완성되어지기를 원하고 이 새 예루살렘을 통해서 흐르는 물이 온 만류에게 은혜와 축복으로 분배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