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성현 자료제공 및 의견>
능파정공파 세보는 16세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世譜4에 9세 仁良公에 대한 족보보완과 세보5에 10세 언우공(彦祐公) 11세 임진년 순절과 창의시(倡義時) 가동(家僮) 64명, 양미(粮米) 40석(石) 등 구체적인 인원과 양식 등의 숫자가 있으며, 12세 의민공(誼民公)이 병자1636년에 창의함으로써 3대가 창의를 하였다. 또한 세보에 의하면 현재 족보의 오기 및 누락 사실 등이 있다. |
1. 능파정공파 세차약기 의의
광주정씨의 족보는 응교공파 14세 시설(時卨) 가(家)의 세차약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각 집안 마다 내려온 직계의 약기가 모여서 대동보(大同譜)가 이루어지는데, 이 능파정공파 의 약기는 16세 극상(極祥)공 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의 출생년도가 1754년이고, 1797년생이신 아들 17세 이안(履安)공의 기록이 없으므로 1800년 이전에 씌어진듯하다. 소종이 갈리는 8세까지는 큰 차이점은 없다. 다만 9세 이후에 족보에 생략되어 있던 ‘3대에 걸친 창의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족보사적인 가치가 있다.
창의(倡義)는 자발적이고 지도적인 행동이다. 미리 마음이 준비되지 못하면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언우공이 인적 물적자원의 제공뿐만 아니라 부자가 같이 순창지역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여 의병을 모으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은수공이 졸하신 후 24년 만에 아들 3형제가 다시 병자호란의 의병으로 창의하였다. 이렇듯 충과 효에도 ‘장상(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말처럼 가업으로 이어졌다.
이 약기를 살펴보니, 약기가 잘못된 부분도 있고, 현재의 족보에 새로운 기록으로서 고치거나 보완할 사항도 많이 보이는데 후일 족보발간 시 검증한 후 반영되어야겠다.
2. 충절 가문과의 교류
□ 삼대(三代) 절의 가문
창의기록이 읍지인 「금성지(錦城誌)」, 「예조문첩(禮曹文帖)」,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내용이 있는지 찾아서 연구해야겠다. 삼대 오인(三代五人 : 10세 언우, 11세 은수, 12세 안민·의민·현민공)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국난에 혼연히 일어나 창기(倡起)하였다는 충절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국속수문헌록(東國續修文獻錄)」의 부절의(附節義) 편에 보면, 3대 언우, 은수, 의민공이 올라있다. 또한 15세 창후(昌垕)공도 1728년 영조조의 이인좌의 란에 창의하였고 ‘살림이 궁할지라도 효성을 다하여 신도 감동케(窮道誠孝感江神)’하였다 하여 예조문첩에 오른 바 있다. 효와 충은 수레의 두 바퀴이듯 이 가문의 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3대가 집안의 가동(家僮)과 양미(糧米)를 의병 자원으로 징출하고 생업을 떠나니 집안 살림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병란 이후에도 순절하시거나 둔적(遁迹)하여 생활의 의욕을 잃으니 그 당시의 고충이 얼마나 컸는지 19세 세진(世鎭)공의 사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언우(彦佑)공의 가문이 번성하지 못하고 매우 한미(寒微)해 진 것도 그 여파이다.
□ 장택고씨 하천 고운(高雲) 가문
장택고씨(長澤高氏, 長興高氏)는 같은 고을의 향족으로, 능파정공 집안과는 도의와 절의로 교우한 충절의 가문이다. 하천(霞川) 고운(高雲, 1479~1530) 의령현감공은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공과 교류하셨고, 8도 관찰사이신 조계(棗溪) 정만종(鄭萬鍾, ?~1549) 공의 스승이시다. 졸 후 조계공이 쓰신 만사가 1986년 공의 묘소 발굴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집안의 세거지가 압보촌(鴨保村)인데 요즘의 압촌(鴨村)이다. 8세 지평공이신 휘 서(犀, 1488~?)공의 배위이신 숙인(淑人) 장택고씨(?~1566)는 고운공과 남매이시다. 지평공의 넷째 아드님이신 사헌부장령(掌令) 인녕(仁寧, 1516~?)공도 어려서 고운공에게 배웠다. 고운공의 손자 되시는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임진왜란의 유명한 의병장이시고 이 집안은 창의가문이다.
□ 광산김씨 극념재 김광운(金光運) 가문
10세 둔암 언우공이 모친상을 당하시자, 광산김씨 극념재(剋念齋) 김광운공도 같이 거려(居庐:시묘살이)하였다. 둔암공의 배위와 사촌인 응춘(應春)공, 청송부사를 지내신 6촌 인수(仁壽)공과 정유재란에 창의하신 6촌 인영(仁榮)공의 배위가 각각 광산김씨로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인 듯하다. 극념재공은 11세 은수(訔秀)공과 같이 율곡선생에게 배웠는데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강화도에서 순절하셨다. 또한 모친으로부터 아내 며느리로 이어지는 4대에 걸쳐 다섯 분이 효열로 절명하시니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아 사대오정(四代五旌)의 충절가문으로 이름났는데 모두 전란으로 인한 피해였다.
□ 임진왜란 의병장 수은 강항(姜沆)
능파정 가문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던 분으로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공이 계신다. 강항공은 임진왜란 시 관직에 계시다 고향 땅에 내려와 의병활동을 펼치셨는데 가족과 함께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도해(渡海)하게 되었다. 포로생활 중 그 곳 지식인에 예법, 성리학 등 많은 지식을 전수하여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조정의 출사 요구를 모두 뿌리치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평생을 바치셨다.
우리 광주정씨 집안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10세 추원당(追遠堂) 정준(鄭浚, 1564 ~1625)공,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둔암 양산해(梁山海)공과 같이 사계(沙溪) 김희원(金希元, 1548~1631) 선생에게서 수업하고, 제자간에 도의(道義)로서 교류하였다. 또한 능파정공파 의병장 정언우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주셨고, 정인량(鄭仁良, 1535~1573), 자의공파 정인근(鄭仁謹, 1532~1591)공, 승지공파 정화(鄭氵禾)공의 만사(輓詞)를 지어주실 만큼 가깝게 교류하셨다.
□ 병자호란 의병장 정홍명(鄭弘溟)
정홍명(1582~1650)공은 송강 정철(鄭澈)의 넷째 아들로 우계 성혼과 김장생공의 문인이다. 부제학, 대사성을 역임한 후 고향에 머물러 있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다시 함양군수를 지내고,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정공은 정은수공의 행장을 지었으며, 병자호란을 당하여, 정안민, 정의민, 정희민 삼형제가 창의하였을 때 의병장으로 같이 방략을 세우고 진격하였으나 청주에서 청국과 화의(삼전도 굴욕)가 성사되었다는 소식에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학문과 충절의 중심이 되었던 지역의 현자(賢者)들과 교유하며 광주정씨의 위상도 높아졌다.
< 능파정공파 언우가 세차약기(凌波亭公派 彦佑家 世次略記) >
□ 약기 직계도
시조(始祖) 신호(臣扈) 문하찬성사 – 2세 윤부(允孚) 개성부윤 – 3세 인진(麟晋) 전라감사(완백) - 4세 존(存) 사헌부감찰 – 5세 이충(以忠) 운봉현감 – 6세 질(晊) 병조좌랑 – 7세 응종(應鍾) 예조판서 – 8세 능파정 휴(貅) 사헌부지평 – 9세 고옥 인량(仁良) 생원 – 10세 둔암 언우(彦佑) 창의 의병장 – 11세 미능재 은수(訔秀) 참봉, 군자감정 불취 – 12세 지헌 의민(誼民) 창의 – 13세 익세(翊世) - 14세 득교(得僑) - 15세 창수(昌壽) - 16세 극상(極祥) - 17세 이안(履安) - 18세 서(墅) - 19세 세진(世鎭)
□ 족보와 다르거나 신규 기록 주요사항
1) 6세 절(晣)
- 여(女) 김희윤(金希尹), 강진인 감사(監司) → 광주훈도(光州訓導) : 향교에서 교육담당 9품관
ㅇ 도강김씨 족보자료(참고자료), 묘비석
* 절공의 관직은 군수이신데, 국조방목에 의하면 승지(承旨)로 기록되어 있다
2) 9세 인량(仁良)공에 대한 강항(姜沆)공의 만사(輓詞) 내용
3) 9세 인온(仁溫)
- 진사(進士) : 족보에 없음
4) 9세 인검(仁儉)
- 진사(進士) : 족보에 없음
5) 10세 언우(彦佑)
- 모친상에 광산 극념재 김광운(임진왜란 순절)공과 같이 시묘
- 창의내용 : 가동(家童:노비 등) 64명, 군량미 40석 징출, 순창(淳昌)에 의병청(義兵廳) 설치
6) 10세 언종(彦宗)
- 언우공 아우, 무후(无后) : 족보기록 없음
7) 11세 은수(訔秀)
- 약년(弱年)에 부친과 함께 할머니 묘소 시묘(侍墓)
- 창의내용 : 적병 수백 급 참(斬)
- 배위 평택임씨 → 장택임씨(장흥임씨)
8) 12세 안민(安民)
- 창의내용 상세
9) 12세 의민(誼民)
- 창의내용 상세
10) 12세 희민(凞民)
창의내용
- 여 정재술(鄭在述) 고성인(固城人) : 족보에 없음
- 서자(庶子) 여구(汝龜) : 족보에 없음
11) 13세 익세(翊世)
- 졸년 : 1714년
- 족보 4남 3녀(덕교, 득교, 윤교, 재교, 임성구, 김후, 채응기) → 5남 7녀(덕교, 득교, 김이주, 이봉회, 장익신, 양중록, 윤교, 재교, 은교, 임성구, 김후, 채응기
ㅇ 배 제주양씨 소생 : 덕교, 득교, 김이주, 이봉회, 장익신, 양중록
ㅇ 계비 이천서씨 소생 : 윤교, 재교, 은교, 임성구, 김후, 채응기
世次 | 諱 | 약기(略記) |
始祖 시조 | 鄭 臣扈 신호 | 當高麗忠肅忠宣之際祭官 (三重大匡)門下贊成事 判版圖司事 上護軍云 高麗奉恩寺眞殿直 追封三重大匡門下贊成事 申企齋光漢주1)文集其夫人外姑鄭氏誌文曰 鄭大族高麗贊成諱臣扈之後也 鄭夫人卽郡守晣之女 墓光州東距十里許鷹鳴洞巽坐云 配咸陽朴氏 父祭器都監判官淳 吏部尙書臣蕤曾孫 禮部尙書善七世孫 墓 羅州西門外興龍洞云 二男二女
고려 충숙왕 충선왕 때 제관, 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 상호군이라고도 하며, 고려조의 봉은사 진전직, 추봉 삼중대광문하찬성사이다. 기재 신광한공(주1)의 문집 중 그 부인의 장모 정씨에 관한 기록문에 “정씨는 대족이며, 고려 찬성 휘 신호공의 후손이시다. 정부인은 군수 ‘절’의 따님이시다.” 하였다. 묘 광주 동쪽 십리 거리의 응명동 손좌.
배 함양박씨, 부 제기도감 판관 순, 이부상서 신유 증손, 예부상서 ‘선’ 7세손 묘 나주 서문 밖 흥룡동이라고 함 2남 2녀 (주1) 신광한(1484~1555) : 고령인(高靈人), 호 기재, 대제학, 신숙주공 손자. 시조공의 둘째 사위가 고령 신덕린(판서)이시고 기재공은 5세손이다. |
2세 | 允孚 윤부 | 奉翊大夫 開城府尹 麗末辛禑元年乙卯七月八日以軆副使留鎭羅州案籍 尙存名見陽村權近榮山倉記 配 金海金氏父義盈庫副事君年 一云羅州金氏 一云安東金氏 墓或云在興龍洞 或云在鷹鳴洞 或云楊州泉川 二男一女
봉익대부 개성부윤, 고려 말 우왕 원년(1374년) 을묘 칠월 팔일에 체찰사의 부사로 군진에 머물러 나주에 정착하였다. 이름이 아직도 양촌 권근의 「영산창기」에 남아있다. 배 김해김씨, 부 의영고부사 군년 혹은 , 혹은 안동김씨라고도 한다. 묘소는 흥룡동에 있다고도 하며, 혹은 응명동, 또는 양주 천천에 있다고도 한다. 2남 1녀 |
次子 차자
允亨 윤형 | 刑曹參議 贈刑曹判書 配靑松沈氏 父戶曹參判日 墓在楊州 子九塘監司贈判書 配光山金氏 父判尹德潤 女潘珍縣監 孫禮從文科監司以全羅按撫使居南平德谷
형조참의 증형조판서 배 청송심씨, 부 호조참판 일 묘 양주 자 구당, 감사 증판서 배 광산김씨, 부 한성판윤 덕윤, 여 반진현감 손 예종 문과 감사 전라안무사로서 남평 덕곡에 거주 | |
女여 | 安文彦 女 鄭義 漢城判尹 안문언, 여 정의 한성판윤 * 시조공의 사위 안문언의 따님 즉, 외손녀가 정의공에 출가하였다. 아들(외증손자)이 정안도(鄭安道), 정안지(鄭安止)인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학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의 문과급제자에 광주정씨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가까운 혈연이 동성동본 간 결혼이 가능한지? 우리 족보 밖의 또 다른 광주정씨가 있었는지? 연구의 여지는 있다. * 시조공의 외증손자 정안도의 장모가 2세 부윤공의 사위 검교정승 박가흥(朴可興)이다. | |
女여 | 申德隣 高麗人 號醇隱 判書, 子申包翅 號巖軒 參判, 子申檣 大提學, 曾孫 申孟舟 申仲舟 中叔舟院君주2) 신덕린 고려인 호 순은 판서, 자 신포시 호 암헌 참판, 자 신장 대제학, 증손 신맹주 신중주 가운데 아들 숙주(1417~1475)주2) 원군(院君)
주2) 신숙주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참판이라는 벼슬이 보여주듯 신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사장(詞章) 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死因)이 되었다(세종 15년 2월 8일).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이하 생략 | |
3세
부 允孚 윤부 | 인진 麟晋 | 入我朝文監察內侍左右衛保勝別將주3)至全羅監司 配羅州鄭氏父中顯大夫書雲正奮 墓在羅州元井面栢洞坤坐合祔 二男一女
조선왕조에 들어 문과, 감찰, 좌우시위 보승별장주1), 전라감사에 이름 배 나주정씨 서운관정 분 묘소 나주 원정면 백동 존과 합부, 2남 1녀 주3) 보승별장(保勝別將)은 고려시대의 무장(武將) 시위직(侍衛職:왕 호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없다. 족보에는 고려조에 보승별장을 하시고,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신 후 사헌감찰울 역임하시고 가의대부(嘉義大夫) 전라감사에 이르셨다고 기록되었다. |
次子 龜晋 차자 구진 | 太宗朝生員進士 丁亥歷東佰未樂 甲午歷吏曹(參議) 大司成 贈判書大提學 配東萊鄭氏 子之唐司憲府掌令无子 之夏以學行累徵不就官司憲掌令 世宗朝佐理原從功臣 贈參議 子祖禹司直 次宗禹白川守 次繼禹進士 季纘禹淸道守
태종조 생원 진사, 정해(1425년) 강원감사, 갑오(1426년) 이조참의, 대사성, 증판서 대제학 배 동래정씨 자 지당 사헌부장령 무자(无子) 지하 학행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불취하였다. 관직은 사헌장령. 세종 조 좌리원종공신 증참의, 자 조우 사직, 차자 종우 백천군수, 차 계우 진사, 계자 찬우 청도군수 | |
4세
부 인진 麟晋 | 存 존 | 文監察御史淸白敎化見玉果去思碑 주4) 配河東鄭氏 父嘉善大夫順天府使 漬주5) 祖判典客司事之祥 墓 羅州興龍洞 酉坐合祔 二男五女 문과, 사헌부감찰, 어사, 청렴하여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었다. 옥과현에 거사비(주4)가 있다. 배 하동정씨 부 가선대부 순천부사 지(주5), 조 판전객사사 지상 묘 나주 흥룡동 유좌 합부 2남5 녀 주4) 거사비 : 선정(善政)을 사모(思慕)하여 고을 주민(住民)들이 세운 비석(碑石) 주5) 사위 윤처관의 비문에도 순천부사로 기록되었다. |
次子 在재 | 文監司 문과 감사 * 왕조실록에 재(在)공의 기록이 없다. | |
여女 | 卓愼주6) 光州人 號竹亭 四宰, 父 判書 光茂 탁신주6) 광주인 호 죽정 4재, 부 판서 광무 주6) 탁신(1367~1426) 광주인 4재(의정부참찬, 정2품), 부 판서 광무 * 1990년 광주 첨단지구가 개설되면서 월계리의 탁송정 아래 내촌마을 뒤쪽 언덕에 있던 탁신의 둘째 부인 광주정씨의 묘소도 미륵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회격묘(灰隔墓)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 |
5세
부 존存 | 以忠 이충 | 文殿中御史雲峯縣監 配幸州奇氏 父靈光郡守進德 祖三重大匡僉議政丞顯 曾孫女 墓 羅州 北勇珍山 石牙洞 子坐 合祔 三男 문과 전중어사 운봉현감 배 행주기씨 부 영광군수 진덕, 조 삼중대광 첨의정승 현 증손녀 묘 나주 북쪽 용진산 석아동 자좌 합부 3남 |
次子 以孝 이효 | 光州敎授 女朴而溫주7) 仲女徐祐주8) 광주교수, 여(女) 박이온주7), 차녀 서우주8) 주7) 박이온(朴而溫, 1461~15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박숙선(朴叔善)의 아들로 1496년(연산 2)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고, 관직이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별제(別提)로서 참여하여 정국사등공신(靖國四等功臣)이 되었고, 이후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승평군(昇平君)의 훈작을 받았고 사당에 배향되었다. 주8) 서우 :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 숙인 광주정씨, 묘소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각동리 마동 선영 내 백호 : 이천서씨 자료, 족보에는 이조판서로 기록 | |
여女 | 尹處寬 南原人 郡守 子 尹孝孫주9) 四宰 文孝公 尹末孫 奉事 尹終孫 別侍衛 윤처관 남원인 군수, 자 윤효손주9) 사재(좌참찬, 종1품 숭정대부) 문효공, 윤말손 봉사, 윤종손 별시위
주9)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일화 : 세조 때 윤처관이 의정부 녹사(錄事)가 돼 추운 날 이른 새벽에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의 집에 가서 명함을 내놓고 뵙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하고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 말을 들은 효손은 아비 명함 끝에 시문을 써 뒀다.
상국감면일정고 문전자지이생모(相國酣眠日正高 門前刺紙已生毛) 몽중약견주공성 수문당년토악로(夢中若見周公聖 須問當年吐握勞) 정승의 단잠 깊어 햇발이 올랐는데 앞에선 명함 종이 피도록 만지면서 꿈속에 밥을 토하고 주공 만남 말하리
이튿날 아침 그 정승을 만나러 가는데 어제 가지고 갔던 명함을 그대로 내놓았다. 명함을 들여다본 상공은 자초지종을 물어 사실을 안 후 효손을 불러 크게 칭찬했다. 상공은 “내 둘째딸이 15세인데 나와 사돈 맺읍시다” 하였다. 효손은 상공의 사위가 된 후, 과거에 급제해 판서와 사재에 이르렀다 | |
여女 | 李伯源 咸平人 正言 子 李泌 察訪 이백원 함평인 정언, 자 이필 찰방 | |
여女 | 梁處恭 濟州人 校理 子 梁顯民 典翰 子 梁義民 正郎 양처공 제주인 교리, 자 양현민 전한, 자 양의민 정랑 | |
여女 | 李蘅 陽城人 參奉 子 李守仁 修義校尉 李守禮 縣令 李守智 武水使 이형 양성인 참봉, 자 이수인 수의교위, 이수례 현령, 이수지 무과 수군절도사 | |
여女 | 房季文 溫陽人 兵曹正郎, 子 房貴溫 正言 방계문 온양인 병조정랑, 자 방귀온 정언 | |
6세
부 以忠 이충 | 철 㬚 | 司宰監主簿 配廣州李氏 父 察訪 庇 祖 判書 斗信 墓羅州伽倻山五神寺舊基 子參仝 司猛 二男 子 仁仝 无后 孫 虎 僉節制使 都事 仲孫 熊 歷牧使至執義 請伸濯纓之寃주)
사재감 주부 배 광주이씨 부 찰방 비 조 판서 두신 묘 나주 가야산 오신사 옛터 자 참동 사맹 2남, 자 인동 무후, 손 호 첨절제사 도사, 중손 웅 목사를 거쳐 집의, 탁영 김일손의 신원(원통한 일을 풀어 줌)주10)을 상소함
주10) 김일손(1464~1498) :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파의 비리와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올린것이 문제가 되어, 연산군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
절 晣 | 文 郡守주11) 配英陽南氏 女林萬根주12) 平澤人郡守贈參判 女 金希尹주13)康津人監司 女 金雍 光山人主簿 문과 군수주11) 배 영양남씨 여 임만근주12) 평택인 군수 증참판 여 김희윤주13) 강진인 감사 여 김옹 광산인 주부 * 외손봉사로 알려졌다. 주11)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의 문과급제 국조방목(國朝榜目) 언보이미지에 의하면, 직책이 승지(承旨)로 기록되었다.(붙임 참조) 주12) 평택임씨 자료에는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되어있다. 주13) 강진김씨는 도강김씨라고도 부른다. 도강김씨 족보 및 역대인물종합시스템 자료에 의하면 김희윤공(7세 훈도공파 중시조)은 생원에 합격하여 광주목교수를 지내셨다. 우리족보도 관직을 감사에서 ‘光州訓導’로 바꾸어야겠다(참고자료 1513년 교지) | |
질 晊 | 兵曹正郎 贈左贊成 配文化柳氏, 父 自㐕 墓 羅州北 獐本面 橫山 同德城 乾坐 雙柎 一男 병조정랑 증좌찬성 배 문화류씨, 부 자 율 묘 나주북 장본면(본량면) 횡산 동덕성 건좌 쌍부 1남 | |
7세
부 질晊
| 응종 應鍾 | 禮曹判書 進香使 墓上同 配牙山李氏 父僉正 貴男 妃坡平尹氏 貞熙王后弟 祖 仁寧府院君 原恒 墓湧珍山 雲峯公墓上 子坐 配 綾城朱氏 父嘉善玉 墓贊成公墓右 子坐雙墳 六男三女
예조판서 진향사 묘 상동 배 아산이씨 부 첨정 귀남, 비 파평윤씨 정희왕후(세조의 비) 제, 조 인녕부원군 원항, 묘 용진산 운봉공묘 상 자좌 배 능성주씨 부 가산 옥 묘 찬성공묘우 자좌 쌍분 6남 3녀 |
8세
부 응종 應鍾 | 서 犀 | 字 斐然 生員 中宗 丙子文科, 通訓 竝兼司憲府持平春秋館記注官 配長澤高氏 父 靖社原從功臣自儉주14) 墓光州西 柳等谷鴨保村 齊峯山西 卯坐 子仁壽 參奉 府使 子仁富 參奉 子仁康 進士 子仁寧 校理 子仁德 以文行有儒望薦 長興敎授奉訓大夫 子仁祐 生員 子仁貴 靑松 順天府使 禮曹參議
자(字) 비연, 생원, 중종 병자(1516) 문과, 통훈대부 겸사헌부지평 춘추관기주관 배 장택고씨(장흥고씨) 부 정사원종공신(인조반정 증공조참의) 자검주14) 묘 광주서 류등곡 압보촌 제봉산 서쪽 묘좌 자 인수 참봉 부사, 자 인부 참봉, 자 인강 진사, 자 인영 교리, 자 인덕 문장과 경전으로 유림이 천거하여 장흥교수 봉훈대부, 자 인우 생원, 자 인귀 청송부사 순천부사 예조참의
주14) 고자검(高自儉) :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증공조참의, 고운(高雲)공의 부친, 증손이 의병장 고경명이다. 1986년 발굴된 고운공(형조좌랑, 의령현감)의 묘소출토유물은 국가민속문화제 제239호로 지정되었고, 8도 관찰사 조계 정만종공이 지으신 만사(輓詞)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집안도 압보촌에 세거하였고 조계공은 고운공의 제자이다. |
해 獬 | 諮議 配光山金氏 墓 羅州伏岩山 子仁訥 參奉 子仁誠 參奉주15) 子仁謹 郡守 參奉 號遯軒 子仁諶 進士 號 古玉 子仁誠 進士주15) 자의 배 광산김씨 묘 나주 복암산 자 인눌 참봉, 자 인성 진사 참봉, 자 인근 참봉 덕천군수(德川郡守) 호 둔헌, 자 인심 진사 호 고옥 주15) 인성(仁誠)공께서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종9품)을 지내셨다. 합쳐 써야 함 : 오기 | |
휴 貅 | 號凌波亭 貹學淵源以遺造持平 配光山李氏 父 修撰 司成 烈 曾祖 吏議 調元 墓羅州 古玉洞壬坐雙祔 四男二女
호 능파정, 학문이 깊어 사헌부 지평(과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배 광산이씨 부 (홍문관) 수찬, (성균관) 사성 렬, 증조 이조참의 조원 묘 나주 고옥동 임좌 쌍부 4남 2녀 | |
표 彪 | 南承旨 配驪興閔氏 墓羅州北 王山 店洞 辛坐 子仁寬 號玉川 長興密陽府使 子仁洪進士 음직으로 천거 받아 승지 배 여흥민씨 묘 나주 북쪽 왕산 점동 신좌 자 인관 호 옥천 장흥·밀양부사 (부제학, 이조참의), 자 인홍 진사 (학문으로 강원감사 불취) | |
추 貙 | 進士 女柳濱 子柳思仁 子柳思義 진사 여(女) 류빈, 자 류사인, 자 류사의 | |
사 獅 | 進士 從仕郎 配靈光丁氏 子仁方 進士 子 仁榮 子 仁發 女崔弘立 全州人 女羅曾元 錦城人 진사 종사랑 배 영광정씨 자 인방 진사, 자 인영, 자 인발, 여 최홍립 전주인 여 나조원 금성인 | |
여女 | 蘇希軾 晉州人 子蘇公恕 蘇忠恕 女郭基晋 소희식 진주인, 자 소공서, 소충서, 여 곽기진 | |
여女 | 金廷秀 慶州人 直長 子金鴻運 子金鴻進 김정수 경주인 직장, 자김홍운 자김홍진 | |
여女 | 韓忠翊 子韓榮祖 한충익 자한영조 | |
9세
부 휴貅 | 인온 仁溫 | 進士주16) 配靑松沈氏 女 宋之遠 新平人 진사주16) 배청송심씨 여 송지원 신평인 주16) 1977년 정사보(丁巳譜), 2001년 신사보(辛巳譜)에 진사 기록이 없다. 광주정씨 문무생진(文武生進) 기록에 추가 반영이 필요하다. |
인량 仁良 | 字元弼 生員 號古玉 姜睡隱沆주17)撫輓曰 古玉鄭先生 詩嘆息 神仙表平生夢想中大名詩價重浮世 酒垆空天欲窮 吾輩人誰惜義翁一哀無限淚回首向西風 配南平文氏尙紋 墓上同 一男
자(字) 원필, 생원, 호 고옥, 수은 강항주17)선생이 만사에 쓰기를, “고옥 정선생이 탄식하기를 신선이 겉으로 평생 동안 꿈에라도 마음에 담는 것은 대단한 명시(名詩)의 가치를 중히 여기지만 부질없는 일이며, 술에 빠지는 것은 공허하고 가난에 찌들게 한다 하였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의로운 노인을 아쉬워하니 오로지 슬픔에 잠겨 서풍에 머리 돌려 무한정 눈물만 쏟고 있다.” 하였다. 배 남평문씨 상문 묘 상동(선고묘하) 1남
주17) 강항(1567~1618) :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에서 의병 수백인을 모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를 거쳐 교토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 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 |
인공 仁恭 | 生員 進士 配 全州李氏 墓扶安 子應春 孫華震 생원 진사 배 전주이씨 묘 부안 자 응춘 손 화진 | |
인검 仁儉 | 進士주18) 女吳允仁 女金俊秀 진사주18) 여 오윤인, 여 김준수 주18) 1977년 정사보(丁巳譜), 2001년 신사보(辛巳譜)에 진사 기록이 없다. 광주정씨 문무생진(文武生進) 기록에 추가 반영이 필요하다. | |
여女 | 高需 長澤人 進士 子高士英 고수 장택인 진사 자 고사영 | |
여女 | 李晟 子李弘濟 이성, 자 이홍제 | |
10세
부 인량 仁良 | 언우 彦佑 | 字宗彦 號遯庵 考妃喪居庐與剋念齋金光運주19) 睡隱姜沆爲道義交 當壬辰白衣倡義家童六十四糧米四十石設義兵廳於淳昌衆推公爲將揭標曰激勵將至淸州戰亡在陣時有獨赴南樓心北戰之殉 睡隱撰狀道薦事載禮曹文帖 配光山金氏 父 主簿 洞 墓羅州下亍峙甲坐雙柎 一男
자(字) 종언, 호 둔암(遯庵), 모친상을 당해 여막에 극념재 김광운주19)공과 같이 기거하였다. 수은 강항과 도의로서 사귀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백의창의하고 가동 64명과 군량미 40석을 내고 순창에서 의병청을 설치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장수로 추대하므로 표문을 높이 세우고 격려하였다. 장군이 청주에 이르러 진중에서 전쟁의 승패가 기울어갈 때 홀로 남아 남루에 나아가 심북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수은 강항이 행장을 짓고 도에 공의 충절을 천거하니 행록과 공로가 「예조문첩」에 기록되었다. 배 광산김씨 부 주부 동 묘 나주 하마치 갑좌 쌍부 1남
주19) 극념재(剋念齋) 김광운공은 광산인으로 선비로부터 4대에 걸쳐 5분이 정려(旌閭)를 받으신 ‘광산김씨사세오정(光山金氏四世五㫌)’으로 유명한 충효열부 가문 사람이다. 김공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서 김건재(金健齋) 장군의 진영에 합류하여 강화도에서 순절하시고 공조참의에 추증되셨다. 배위이신 제주양씨는 부군의 전몰소식을 듣고 아들 두남(斗南)에게 명하여 김건재 장군을 배종하도록 하여 적을 참하고 행패를 그치게(斬敵無弄)하여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중추(中樞)를 제수 받았다.
< 청주상당산성 남문 >
|
언종 彦宗 | 无后 무후 * 족보기록에 없다. | |
11세
부 언우 彦佑 | 은수 訔秀 | 字景獻 號未能齋 參奉 弱年陪親共居祖妣墓庐(려)一依古禮 受業栗谷先生 當昏朝抗章呌閽 壬辰陪從事轉戰淸州多有斬賊時父義將戰歿淸州 代領父兵揭標繼義將直到京城斬賊數百級 除軍資監正주20)不就 時賊漸退南下罷兵 返葬羅州西水口谷卞峙居廬墓側 以四未能自處泣血墓累見神虎守幕之感官爲之㯙樂工주21)鄕人稱其庐前松曰忠孝亭丁卯生壬子卒 贈吏曹判書 鄭弘溟撰狀事載邑乘(기록)禮曹文帖湖南節義錄 配長澤林氏주22)父參奉蓀 墓羅州新村面投水洞村後壬坐雙兆 三男 자(字) 경헌, 호 미능재 참봉, 약년에 부친을 모시고 옛 예절에 따라 할머니 묘의 여막에 기거하였다. 율곡선생에게 배웠다. 혼란스런 조정을 구하고자 궁궐에 부르짖었다. 임진왜란에 배종하여 전쟁을 전전하면서 청주에서 많은 적을 베었다. 이 때 부친께서 청주에서 의병장으로서 전사하시므로 부친이 거느린 병졸을 대신 통솔하고 의병장을 이어받아 기치를 세우고 경성에 이르러 적병 수백 급을 베었다. 군자감정주20)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이 때 적들이 점차 남쪽으로 퇴각하므로 병을 해산한 후 부친을 반장하여 나주 서쪽 수구곡 마치에 모시고 묘 옆에 거려하였다. 네 가지 능력이 부족하다 하여 ‘사미능’이라 자처하며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는데 묘에서 여러 번 신령스런 호랑이를 보고 막을 지키는 느낌이 들었다. 관아에서는 이를 ‘철악공(㯙樂工)주21)이라 하고, 마을 사람들은 묘 앞의 소나무를 ‘충효정’이라 불렀다. 정묘년(1567년)에 태어나 임자년(1612년)에 돌아가셨다. 증이조판서 정홍명이 행장을 짓고 공의 공로가 「읍지」와 「예조문첩」,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배 장택임씨주22) 부 참봉 채 묘 나주 신촌면 투수동 마을 뒤 임좌 쌍조 3남
주20) 군자감정(軍資監正) : 조선시대 초에 설치되어 군량미 등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정(正)은 정삼품 당하관으로 실질적인 으뜸 벼슬(기관장)이었다. 주2) 철악공(㯙樂工) : '대추나무 악공'인데 호랑이의 포효소리(어흥)를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로 보았다. 주3) 족보에는 배위를 평택임씨로 기록하였다. |
12세
부 은수 訔秀 | 안민 安民 | 字樂天 號太和堂 當丙子亂與二弟倡義從鄭弘溟陣 糾畵方略多有設伏之議大將見許曰君之兄弟義陳之智束也 行至淸州聞和事成 慟哭南下杜門謝世自處大明逸民 號悔亭參議金如鎰狀 事載義錄禮曹文帖 无后 配麗興閔氏 舍人 閔鳳德后
자(字) 낙천, 호 태화당, 병자호란에 두 아우와 함께 창의하여 정홍명 의병 진영에 합류하였다. 방략을 세우고 모두 복병을 운영하자는 의견에 대장이 보고 허락하며 말하기를 “자네 형제들은 의병진영의 지혜주머니일세”하였다. 의병이 청주에 이르렀을 때 청국과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두문하고 세상일을 끊었다. 스스로 ‘대명일민(大明逸民)’이라 칭하였다. 참의 회정 김여일이 행장을 썼다. 그 행적과 공적이 「(절)의록」과 「예조문첩」에 기록되었다. 무후 배 여흥민씨 사인 봉덕후 |
의민 誼民 | 字公甫 號遲軒 孝友名於世 當丙子亂倡義從鄭弘溟陣 糾畵方略多出諸君之右至 淸州聞和事成 慟哭南下屛迹溪陽琴書漁樵逍遙以終 壬寅生癸未卒 事載禮曹文帖 湖南節義錄 墓投水洞案山大路上甲坐 配錦城羅氏 父中樞經歷 尙潔 墓羅州北錦城山來麓蓮花防築上 漆田長登乙坐湧珍山向 三男一女
자(字) 공보, 호 지헌,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정홍명 군진에 합류했다. 방략을 많이 세우고 우익을 맡아 청주에 이르렀는데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한 후 계양에 내려와 세상일을 끊고 살며 풍류와 독서를 즐기고 고기 잡고 나무하고 소일하며 일생을 마쳤다. 임인년(1602)에 태어나 계미년(1643)에 졸하였다. 행적과 공로가 「예조문첩」과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었다. 묘 투수동 안산 대로 윗기슭의 갑좌 배 금성나씨, 부 중추경력 상결 묘 나주 북쪽 금성산 오는 산기슭 연화방축 위쪽 칠전장등 을좌 용진산 방향 3남 1녀 | |
희민 凞民 | 字弼仲行副護軍丙子亂從二兄倡義從鄭弘溟陳任軍餉有司 配錦城羅氏 子倬世 无后 子卿世 女鄭在述 固城人 庶子 汝龜
자 필중, 행부호군, 병자란에 두 형을 따라 창의하여 정홍명 군진에 합류하여 군량미를 관장하는 유사를 맡았다. 배 금성나씨 자 탁세 무후, 자 경세, 여(女) 정재술 고성인, 서자 여구 | |
13세
부 의민 誼民 | 명세 命世 | 字君任 行副護軍 羅州羅氏 子台僑 子相僑 號 訥亭 子遇僑 자(字) 군임, 행부호군 배 나주나씨 자 태교, 자 상교 호 눌정, 자 우교 |
익세 翊世 | 字奉瑞 己卯生 甲午十一月 二十三日 卒, 配 濟州梁氏 父時顯, 墓 求禮 文尺面 免顧尾 仙壇洞 辰坐 合兆, 繼配 利川徐氏 父永發, 墓 羅州 道林面 房洞 故雉登 甲坐 四男 七女
자(字) 봉서, 기묘생(1639) 갑오(1714) 11월 23일 졸 배 제주양씨 부 시현, 묘 구례 문척면 만고미 선단동 진좌 합조 계배 이천서씨 부 영발, 묘 나주 도림면 방동 고치등 갑좌 4남 7녀 | |
위세 緯世 | 字經邦 癸未生 墓 羅州 投水洞 村中 壬坐 配天安金氏, 子謹 子諧 子詮 자(字) 경방 계미생(1643), 묘 나주 투수동 마을 내 임좌 배 천안김씨 자 근, 자 해, 자 전 | |
여女 | 羅孝曾 錦城人 參奉 나효증 금성인 참봉 | |
14세
부 익세 翊世 | 덕교 德僑 |
|
득교 得僑 | 字良甫 墓求禮 文尺面 外川洞 坤坐, 配光山金氏 父萬齡 墓 順天 黃田面 霅峙 山幕洞 未坐 二男 자(字) 양보, 묘 구례 문척면 외천동 곤좌 배 광산김씨 부 만령 묘 순천 황전면 삽치 산막동 미좌 2남 | |
여女 | 金履柱 昇平人 | |
여女 | 李鳳會 仁川人 | |
여女 | 張翼臣 興德人 | |
여女 | 梁重祿 濟州人 | |
윤교 潤僑 | 字 敏甫 癸未 자(字) 민보, 계미생(1703) 배 서산류씨 부 백안, 묘 나주 방동 웅치 자 창석, 손 유상 손 휘상 | |
재교 再僑 | 字奇哉 墓 南平德之洞, 配利川徐氏 父 萬恒 墓 長興, 子昌乾 孫 猉祥 자(字) 기재 묘 남평 덕지동 배 이천서씨 부 만항, 묘 장흥 자 창건 손 기상 | |
은교 誾僑 | 字誾㢤, 配密陽朴氏 墓投水洞 子 天撻 子 三撻 자(字) 윤재 배 밀양박씨 묘 투수동 자 천달, 자 삼달 | |
여女 | 任聖矩 冠山君 光世后 임성구 관산군 광세후 | |
여女 | 金鍭 김후 | |
여女 | 蔡應耆 채응기 | |
15세
부 득교 得僑 | 창수 昌壽 | 字義守 墓妃幕同原 配金海金氏 父萬寶 墓霅峙 長登 巳坐 以弟子繼后 자(字) 의수 묘 선비(모친) 막동 원 배 김해김씨 부 만보, 묘 삽치 장등 사좌 동생의 자식으로 계후 |
창복 昌福 | 字雲章 墓 求禮 放光面 鴻頭洞 艮坐, 配光山金氏 父淳澤 墓山幕洞 庚坐, 二男 자(字) 운장, 묘 구례 방광면 홍두동 간좌 배 광산김씨 부 순택, 묘 산명동 경좌 2남 * 극상(極祥) 출후, 두상(斗祥) | |
16세
부 창수 昌壽 | 계자 극상 極祥 | 字道益 甲戌生忌七月初二日 墓大山幕洞坤坐 配淳昌趙氏 墓山幕洞丙坐 配宜寧南氏 父㙉發 忌九月十九日 墓考位墓原庚坐 一女 자(字) 도일, 갑술생(1754) 기일 7월 2일 묘 대산막동 곤좌 배 순창조씨, 묘 산막동 병좌 배 의령남씨 부 전발, 기일 9월 19일 묘 고위묘 동원 경좌 1녀 |
17세 | 이안 履安 | 1797~? |
18세 부 이안 履安 | 서墅 | 1819~1880, 자 세진(世鎭) 1852~? |
지址 | 1829~1913, 자 찬진(燦鎭) 1854~1890 |
< 참고자료 >
6세 정절공 국조방목 : 관직 승지(承旨)
도강김씨 족보 : 김희윤
호남절의록
동국속수문헌록 절의편(정언우, 정은수, 정의민)
ㅇ 참고 1. 6세 정절(鄭晣) 공 국조방목 : 관직 승지(承旨)
ㅇ 참고 2. 도강김씨 족보 : 김희윤(金希尹)
ㅇ 김윤손(金潤孫) 자 김희윤(金希尹) 도강김씨 장파(長派) – 훈도공파 파조
김희윤 배위는 광주정씨 정이충의 손녀이다. 정이충(1399~?)은 정극인(1401~1481)과 동방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이충의 큰 아들은 정철(鄭㬚)이며, 둘째 아들 정절(鄭晣)은 1468년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광주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2대에 걸쳐 문과 급제한, 지방에서는 명문가라 할 수 있다. 김윤손이 정절의 따님과 혼사한 것은 정이충과 정극인 선생 사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나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김윤손은 광주(광산) 처갓집에서 살면서 광주정씨로부터 학문도 이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ㅇ 김일손의 배위는 영광정씨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따님이시다.
ㅇ 참고3. 호남절의록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은 조선 후기 국난(國難) 때 창의 활동을 한 진안 지역을 포함한 호남 사람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서 임진왜란에서부터 1728년 무신란(戊申亂)까지의 국가 위기에 입절(立節)한 1,457명의 호남 사람의 사적을 수록한 것으로 해당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호남절의록』 편찬자에 대한 내용이 전하지 않고 다만 수권에 당대의 달학이라고 하는 유광천(柳匡天)과 고정헌(高廷憲)의 서가 있어 이들이 편찬자로 추정되고 있다. 유광천은 광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김천일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진주에서 순절한 유희진(柳彙進)의 6대손이다. 고정헌은 고경명의 7대손이다. 유희진과 고정헌은 둘 다 광주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호남절의록』은 1799년에 간행되었다.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7대손 고정헌과 유희진의 후손 유광천이 서문을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선현들의 위국순절(爲國殉節)한 업적을 기리고 충절을 장려하기 위하여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편찬 과정이나 경위에 대하여는 알져진 바가 없다.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임진왜란⋅갑자란(甲子亂)⋅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무신란(戊申亂) 등 5개의 난(亂)에 참여한 호남의 충의열사(忠義烈士)만을 가려 엮은 『호남절의록』은 맨 앞에 1799년(정조 23년)을 나타내는 ‘숭정 기원(崇禎紀元) 172년’이라고 적힌 고정헌의 기(記)가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홍양호(洪良浩)의 서문과 범례(凡例)가 있고, 범례 다음에는 ‘총서(總敍)’라는 제목 아래에 임진기사(壬辰記事)⋅갑자기사(甲子記事)⋅정묘기사(丁卯記事)⋅병자기사(丙子記事)⋅무신기사(戊申記事)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각 사건의 개요를 기술하였다.
본문에서는 각 권별로 1권의 상(上)은 「임진의적(壬辰義蹟)」이라는 제목 아래에 송상현(宋象賢, 1551~1592)과 고경명 등 46명, 하(下)에는 김천일(金千鎰)과 김상건(金象乾) 등 122명의 의적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2권의 상에는 김덕령(金德齡, 1567~1596)과 최응회(崔應會) 등 95명, 하에는 백광언(白光彦, ?~1592)과 윤신(尹紳, ?~1597) 등 243명의 기록이 실려 있으며, 3권의 상에는 정민수(鄭民秀)와 조여관(趙汝寬, 1557~1592) 등 257명, 하에는 기효련(奇孝練)과 백진백(白振伯) 등 151명, 4권의 상에는 임발영(任發英)과 오희길(吳希吉, 1556~1623) 등 21명, 중에는 임회(林檜, 1562~1624)와 신유일(辛惟一) 등 59명, 하에는 김준(金浚, 1582~1627)과 김상의(金尙毅) 등 32명에 대하여 적고 있다. 마지막으로 5권의 상에는 이흥발(李興浡, 1600~1673)과 김지수(金地粹, 1585~1639) 등 101명, 하에는 정봉징(鄭鳳徵) 외 100명의 의적이 수록되어 있고, 끝에는 을묘의적(乙卯義蹟)과 정사의적(丁巳義蹟)에 관한 12명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호남절의록』은 국난의 시기에 형성된 의병의 규모 및 의병을 주도하던 이들 등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의병 활동에서 호남 지방이 차지하는 비중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호남 의향론(義鄕論)의 핵심 자료 중의 하나로 널리 이용된다. 또한 기존에 연구가 부진했던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의 의병 연구에도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서,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도 활용 가치가 높다. |
ㅇ 참고 4. 동국속수문헌록(東國續修文獻錄) 부절의(附節義)
1912년 김성은이 펴낸 목판활자본으로 조선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부터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때까지의 고관을 역임하거나 이름난 인물들의 호와 출생지역 및 직위를 수록한 책이다. 덕흥사적연구회에 소장되어 있다.
(功臣篇附節義)
附節義
壬辰節義
宋象賢[주:德求泉谷礪山人文府使贈左贊成忠烈公旌]李舜臣[주:見功臣]
申砬[주:立之平山人武判尹贈領相忠莊公旌]盧蓋邦[주:維翰豐川人東萊敎授殉於校宮旌]
趙憲[주:見儒林]高敬命[주:而順霽峯長興人文修撰贈贊成忠烈公旌]
金千鎰[주:見儒林]金德齡[주:光州人贈贊成忠莊公旌]
尹暹[주:汝進果齋南原人文校理贈吏判文烈公]金汝岉[주:順天人文獻納贈領相]
郭再祐[주:忘憂忘玄風人紅衣將軍憂忠翼公]黃進[주:明甫長水人武兵使贈贊成武愍公]
~~~~~~~~~~~~~~ 중략 ~~~~~~~~~~~~~~~~~~~~~~~~~
黃大中[주:兩蹇長水人贈承旨]宋純禮[주:礪山人牧使忠襄公]
林逗春[주:茂時水翁長興人訓鍊正旌]林華震[주:暢遠竹軒長興人主簿享院]
金光鋏[주:明叔金寧人贈參議]尹鵬[주:坡平人]
蔣彥起[주:聖贊拙窩牙山人守門將]宋元吉[주:善長南陽人守門將]
金彥恭[주:孝則金寧人武府使]柳忠恕[주:推中高興人贈參判]
崔興壽[주:希元朗州人部將]孫應祿[주:綏之蘆川密陽人贈戶判]
吳玭[주:樂安人文都事]金光運[주:希健剋念齋光山人贈參議]
金秀河[주:眞直軒晉州人佐郞]馬成龍[주:竹牕長興人從仕郞]
程得雲[주:雲羽翁韓山人贈兵判]李忠立[주:明叔咸平人府使]
郭期壽[주:眉壽寒碧堂玄風人贈佐郞]金汝重[주:子任靈光人贈贊成]
~~~~~~~~~~~~~~~~~ 중략 ~~~~~~~~~~~~~~~~~~~~~
片碣頌[주:景修慕軒浙江人以皇朝總將奉命東援]宋元吉[주:善長南陽人守門將]
張宇翰[주:敬齋仁同人監正]吳得隣[주:弼邦羅州人樂正]
申鳳聖[주:希慶鍾山平山人贈持平]廉世應[주:伯起板橋坡州人贈禮判]
朴璟[주:子□竹山人直長]金大春[주:和叔忠齋慶州人武訓鍊]
鄭忠良[주:松溪晉州人忠烈公]朴應鰲[주:草庵昌原人判官]
鄭撥[주:慶州人僉使]孟季元[주:德軒新昌人]
全慶元[주:伯休雲庵天安人參奉享祠]徐河遂[주:後亭利川人嘉善]
鄭得良[주:竹圃晉州人部將]孫希哲[주:薰光月波密陽人嘉善]
金彥良[주:國幹金寧人承旨]鄭彥祐[주:宗彥菴光山人]
李義精[주:宜仲江華人贈兵議晉州殉]鄭繪[주:南坡河東人贈吏判殉]
吳應男[주:時彥平海人縣監]鄭訔秀[주:景獻]
李秠[주:積城人]吳慶男[주:昌淑文波平海人]
廉世慶[주:由善梁山世應弟贈兵判]吳俊男[주:君彥建義平海人]
趙允男[주:豐壤人司果]金壽淵[주:汝深錦隱光山人執義]
宋廷吉[주:南陽人守門將]廉珶立[주:汝誼竹林世慶子僉正]
朴安東[주:弼元杏村密陽人參奉]
丙子節義[주:仁祖虜亂擧義殉節]
洪命耇[주:懶齋南陽人文監司忠烈旌]尹棨[주:信伯薪谷南原人贈兵參忠簡公旌]
尹柔[주:聾啞棨弟進士]李義培[주:韓山人穆父武兵使韓川君忠莊旌]
金弘翼[주:慶州人贈判書忠愍公旌]池如海[주:受之忠州人武府使贈兵參旌]
黃一皓[주:翼就芝所昌原人灣尹被害虜使諡忠烈]申曼[주:曼淸舟村平山人爲明皇帝終身戴平壤笠]
金汝俊[주:金海人水使陪孝廟入瀋陽不屈]張士貞[주:連山知印其妻亦殉旌]
~~~~~~~~~~~~~~~~~~~ 중략 ~~~~~~~~~~~~~~~~~
奇義獻[주:士直棄隱幸州人司果]李興浡[주:油然雲巖韓山人]
宣世綱[주:士擧梅谷寶城人贈兵判旌]金東準[주:而式鳳谷光山人監察]
張南驥[주:林隱仁同人左尹]文仁克[주:榮叔南平人主簿]
趙平[주:衡中雪壑咸安人洗馬]玄績[주:公懋皤翁星州人進士]
吳俊獻[주:余定羅州人縣監]康起宗[주:子述湖隱信川人贈戶議]
鄭誼民[주:公甫遲軒光山人]吳仲男[주:時仲平海人參奉]
片成大[주:亨福大明逸士碣頌孫贈史參]鄭大鳴[주:芝谷晉州人直長]
柳涵[주:子淨百泉齋文化人大明處士]鄭瀾[주:揚彥竹友堂羅州人]
林天芘[주:幽隱兆陽人]許暹[주:明遠竹軒詩山人進士]
文弘賢[주:南平人判官]金允福[주:桐溪淸風人守門將]
첫댓글 여기에 실린 세차약기의 몇가지 사항은 '문무생진', '충의록' 등에 보완할 예정입니다. 이로서 진사는 71명에서 73명(사마방목 42명, 족보 31명)으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