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으로 왼쪽엔 출판사와 제법 큰집(신아일보 기자집) 이 있었고 그 옆으로
석공 사택들이 길게 서너줄 있었다.
중간중간 공동 화장실이 있었던것 같다.
철암역 아래 있는 석공 사택인 이 마을을 지으면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일인 (日人)들이 남동이라
임의대로 불렀다고 한다.
신작로 오른편옆이 강가 였는데 그곳엔 공동 화장실 기피자들이 어지럽게 분사한 둘둘말린 물건들이
즐비하여 동네 미관을 혼탁하게 하기도 했다.
간혹 실수로 헛딛어 미끄럽게 밟히는 그 물건들로 인해 그런 날이면 상당히 불쾌한 하루다.
조금 올라 가다가 왼쪽으로 고물상 하나가 있었는데 친구의 집이다.(우영구)
초딩 6학년때였는가...?
몇놈이 작당하여 꼭두 새벽에 돌구지 큰 운동장 밑에있는 스팀공장 이모노뭉치 (쇠를 녹여 만들어놓은
덩어리) 를 들고 기차가 지나갈때를 기다려 지나가는 기차와 함께 강원산업 정문을 정신없이 달려 경비실 경비원의
눈길을 따돌리고 그 새벽에 고물상에서 검은 거래를 했던 어두운 기억이 있다.
그것도 초딩들이...
그 고물상위로 여인숙이 있었고 그 옆이 넓게 연탄을 이겨놓은 뻘판이 있었다.
그 건너편엔 철암극장 후문 출렁다리가 있었고 조금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고급 빵집하나와 삼일당, 고바우빵집, 이 있었고
그 건너편엔 감일당빵집(김일관집) 이 있는 빵집 골목이다.
감일당 옆으로 철암극장 입구 출렁다리가 있고 출렁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여인숙과 오른쪽으로 철암극장이 있었다.
그주변 동네 이름은 신설동 이다.
고바우 빵집뒤로 쌀가게 (이상봉집) 와 그 옆으로 뻥튀기 집이며 과일 가게가 즐비하였고 그옆이 철암역 광장 이었다.
철암역 왼편으로 파출소와 그옆으로 신발 때우는 땜빵가게와 신문 보급소가 있었다.
철암역 건너편으로 호남상회와 다방이 몇곳 있었고 다방 옆으로 철암문구사와 라디오, TV,수리 판매 전자상회며, 금은방
중국집 술집골목과 조금더 올라가면 철암 시장 입구이다.
시장 입구는 삼거리였는데 왼쪽 신작로를 따라가면 철암교회가 나오고 곧바로가 철암 시장이다.
시장엔 입구에서부터 늘 붐볐고 장날과 월급날이면 발 딛일 틈조차 없이 번잡했었다.
비가오는날이면 검은 바닦이 질퍽거려 장화 없인 도저히 다니기 힘들어 오죽하면 여자없인 살아도 장화없인 못산다는
요상한 말 까지 생겨 낳었다.
철암에서 유일하게 빨,주,노,초,파,남,보, 오색 찬란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철암 뿐만 아니라 인근 동네에서 가장 볼거리 많고 유쾌하고 살맛나는 생동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입구에서부터 비단천이며, 이불가게, 과일가게, 그릇,식품점, 건어물집,옷가게,튀김집,할것없이 없는것이 없다.
모든것이 그 안에 있다.
시장입구 오른쪽 깊숙히 태권도 도장이 있었고 시장 중앙으로 좌판을 마루처럼 펼처 그 길이가 꽤나 길었던것 같다.
그시장 깊숙히 들어가면 동진이 어머님이 판을벌려 장사하시는 곳도 있어 자주 고개숙여 인사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안 골목에 고마웠던 놈의 집이있어 예민했던 학창시절 기타치며 노래하였며 교회 일들과 어설픈 문학잡지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처음 녀석의집에 갔을때 가장 탄복을 한 것은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는 책들을 보고 부러움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인가 어린 나이에도 모르는 것이 없는놈 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지금은 강원도 강릉 방면에 장학사로 있고 내년이면 교장으로 나올 계획이란다.
시장입구 왼쪽길을따라 올라 가다보면 음악사,라디오,TV수리점,무슨라사 인가와, 서울라사,등이 있었고
건물이 끝나는지점 에서부터 철암역의 거미줄 같은 레일들이 보이고 광 내 에서부터 탄을 날라다주는
장엄한 선탄장이며 검은 탄가루를 날리며 엄청나게 쌓여가는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으로 인재병원과 친구집인 당구장이 보인다.(박원일)
-글 사진 20기 정하준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