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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박물관
#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
-------------------------------------------------------------------------------------------------------------------------- # 소수박물관 기증유물 특별전 :
# 반가사유상
-------------------------------------------------------------------------------------------------------------------------- # 고인돌 : --- 박물관 외부에 설치된...
# 선돌 :
# 바느레고분 : 순흥 내죽리 지네봉 아래에 위치한 돌방무덤(석실고분)으로 이 일대에는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통일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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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 바깥 정원에 있는 죽계별곡 竹溪別曲 시비詩碑 :
---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 죽계별곡 제1장
--- 죽계별곡 제2장
--- 죽계별곡 제3장
--- 죽계별곡 제4장
--- 죽계별곡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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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書院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기관私設機關.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陽 · 석고石鼓 · 악록嶽麓 · 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이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 · 서당書堂 · 정사精舍 · 선현사先賢祠 · 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15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는데, 1542년(중종 37)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구가舊家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와 재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 · 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 · 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 · 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血緣 · 지연地緣 관계나 학벌學閥 · 사제師弟 · 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守令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書院田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徐必遠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 · 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金尙憲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宋時烈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 · 송악서원松嶽書院 · 화양서원華陽書院 · 만동묘萬東廟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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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입니다. 수고....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