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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권
1)
사대왕중천은 증상(增上)ㆍ광목(廣目)ㆍ지국(持國)ㆍ비사문(毘沙門)의 4천왕이 머무는 하늘이다.
2)
삼십삼천(혹은 忉利天, Trayastriṃśa)은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제석천을 중심으로 사방에 각기 8천이 있어 삼십삼천이다.
3)
지옥ㆍ방생(傍生, 즉 축생)ㆍ아귀ㆍ인간과 6욕천(欲天)의 10처.
4)
이상의 6욕천과 8대지옥ㆍ4대주 등의 유정세간과 기세간(器世間)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에서 다시 상론되고 있다.
5)
이하 색계 17천의 명의(名義)에 대해 해설한다.
6)
공중천(혹은 空居天)이란 욕계의 야마ㆍ도사다ㆍ낙변화ㆍ타화자재천과 색계 17천을 말하는데(이에 반해 수미산의 네 층급과 꼭대기에 머무는 사대왕중천과 삼십삼천은 地居天임), 여기서 ‘그 아래’란 욕계 야마천으로부터 색계 제3정려천을 말한다.
7)
잡수정려란 두 찰나의 무루정려 중간에 유루정려를 닦는 것으로, 이는 능히 5정거천의 과보를 초래한다. 즉 잡수에는 하ㆍ중ㆍ상ㆍ상승(上勝)ㆍ상극품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하품의 잡수는 무루정-유루정-무루정의 세 찰나이며, 중품은 이를 가행으로 삼아 다시 세 찰나의 잡수정려를 닦는 것으로, 다섯 종류의 잡수에 따라 각기 무번천 내지 색구경천에 태어나게 된다.(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65권 ‘정려의 잡수’와 ‘5정거천’을 참조 바람.)
8)
『대비바사론』(제154권, 한글대장경124,p.91)에 따르면, 이는 외국사(外國師)의 설이다. 무상천(혹은 無想有頂天)은 무상정의 이숙과(그래서 無想果라고 함)로서, 카슈미르 대논사들은 초정려의 범보천과 대범천을 하나로 간주하듯이(후술) 무상천과 광과천을 하나로 간주하지만, 외국사는 제4정려에 9천을 세워 무상천을 광과천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하였다.
9)
이 같은 이유에서 유부에서는 앞서 본송에서 언급한 색계 17천설을 부정하고 16천설을 주장한다.(본권 주16참조)
10)
아련야(araṅya)처는 예컨대 숲(vana)과 같은 수행자들이 머무는 고요한 곳, 적정처(寂靜處)를 말하는 것으로, 재가자들이 머무는 마을(grāma)에서 1구로사(krośa,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본론 제32권 ‘공간 즉 길이의 단위’ 참조) 즉 각 정려의 하늘은 상ㆍ중ㆍ하품의 차별이기 때문에 대범천은 다른 초정려의 하늘과 동분(보편성)이 존재하지만, 그럴지라도 그것과 범보천은 마치 숲과 마을의 관계처럼 별도의 처소라는 뜻.
11)
원문은 ‘或應大梵無別有因’이지만 다른 모든 판본(宋元明本)에 의하면 ‘無’는 ‘天’의 오사(誤寫).
12)
원문에서 ‘三十二十’은 ‘三十二千’의 오사(誤寫)이다.
13)
색계에는 밤낮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겁수(劫數)로써 수명을 헤아리며, 신체의 크기 또한 수명의 길이와 동일하다. 색계천의 신장은, 범중천은 반 유선나(踰繕那), 범보천은 1유선나, 대범천은 1유선나 반, 소광천은 2유선나이며, 그 위로는 두 배씩 증가한다. 그리하여 제4정려 제1천인 무운천에 이르면 128유선나가 되지만, 여기서만은 3유선나를 감하여 125유선나가 된다. 그리고 계속 두 배씩 증가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면 1만 6천 유선나(수명은 1만 6천겁)가 된다. 그런데 만약 상좌(上座)처럼 색계 17천(대범천을 범보천에서 독립시킬 경우) 혹은 18천(광과천과는 별도로 무상천을 설정할 경우)을 주장할 경우, 32천(3만 2천), 혹은 64천(6만 4천) 유선나가 되어 기존의 학설은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온갖 유정의 신량(身量) 수량(壽量)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을 참조할 것.
14)
상좌의 주장대로라면, 다시 말해 정려를 닦는 원인에 근거하여 색계천을 설정하였다고 한다고, 초정려의 경우에는 상ㆍ중ㆍ하품과 중간정려에 근거하여 4천을 설정해야 함에도 일반에서는 3천만을 설정하며, 제4정려의 경우 상ㆍ중ㆍ하품에 근거하여 3천을 설정해야 함에도 일반에서는 4천(무운ㆍ복생ㆍ광과ㆍ정거천)을 설정하고 있다는 뜻.
15)
주13) 참조. 즉 색계천의 신장은, 범중천은 반 유선나이고, 범보천은 1유선나, 대범천은 1유선나 반, 소광천은 2유선나이며, 그 위로는 두 배씩 증가한다. 그럴 경우 모두가 두 배씩 증가하는데, 대범천의 경우만은 범보천의 1/2만 증가하기 때문에 범보천과는 독립된 천이 아니다. 만약 이 역시 두 배로 증가하여 2유선나라고 할 경우, 일체의 색계천은 신량(身量)과 수량(壽量) 등이 기존의 학설과 어긋나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16)
이러한 색계 16천설은 바사(婆沙)의 정설로서(『대비바사론』 제193권, 한글대장경125,p.406), 중현(衆賢)은 이에 따라 『현종론』(제12권)에서 ‘욕계 위의 16처를 색계라고 이름하니, 그 중 초정려에 2처, 제2ㆍ제3정려에 3처가 있고, 제4정려에 8처가 있다(此上十六處 名色界於中 初二二三三 第四靜慮八)’고 본송을 개작하고 있다. 참고로 『구사론』 제8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365)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습미라국의 여러 위대한 논사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범보천 처소에 높은 누각이 있어 이를 대범천이라 이름하지만 한 주인이 머무는 곳으로 별도의 경지[地]가 아니니, 마치 세존께서 앉으신 자리를 ‘사중(四衆)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17)
7식주(識住)란 의식이 안주하는 일곱 가지 형태로, 제1식주는 신체도 다르고[身異] 생각도 다른[想異] 욕계 유정, 제2식주는 신체는 다르지만 생각은 동일한[想一] 색계 초정려의 범중천과 같은 유정, 제3식주는 신체는 동일하지만 생각은 다른 제2정려의 극광정천과 같은 유정, 제4식주는 신체와 생각이 동일한 제3정려의 변정천과 같은 유정, 제5ㆍ제6ㆍ제7식주는 무색계의 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의 유정이다.(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2권 참조) 즉 7식주를 설하고 있는 계경에서 극광정천과 같은 가장자리의 하늘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색계16천을 주장하더라도 이는 계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뜻.
18)
즉 범중천은 반 겁, 범보천은 일 겁, 대범천은 일 겁 반으로, 반 겁씩 증가하기 때문에 ‘대범천과 범보천을 각기 개별적인 처소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
19)
주13) 참조.
20)
즉 범중천의 수명은 반 겁이고, 범보천의 수명은 그 배인 1겁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대범천은 범보천보다 1/2만 증가하여 1겁 반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힐난.
21)
욕계나 색계에서 무색정을 획득하고서 명종하면 별도의 무색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색정을 획득한 그곳을 무색계로 삼아 태어나고, 또한 반대로 무색계에서 몰하면 욕계나 색계에서 중유(中有)를 일으키는데, 이는 곧 무색계에 방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무색계에 방처가 있다고 한다면 욕ㆍ색계에서 무색정을 획득하고서 명종한 이는 무색계로 가 그곳에서 태어날 것이고, 몰한 경우에도 그곳에서 중유를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유(antarabhāva)란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로, 본론 제23권~24권에 걸쳐 논증 토론되고 있다.
22)
이에 반해 동분이나 명근 등 불상응행법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부사(經部師)는, 유색계의 심ㆍ심소의 경우 색의 애탐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상속하지만, 색에 대한 애탐을 떠난 무색계의 경우 그 자체로서 상속할 뿐 별도의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구사론』 제8권, 앞의 책,p.368; 본 권 주31 참조)
23)
즉 심ㆍ심소는 서로에 대해 근거가 될지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양자 모두의 동일한 근거가 아니지만, 동분과 명근은 양자 모두에 동일한 근거가 된다는 뜻.
24)
업에는 일생 즉 하나의 동분(무차별동분)을 인기하는 인업(引業)과, 일생을 남녀ㆍ빈부ㆍ귀천 등의 개별적인 동분(유차별동분)을 인기하여 생의 내용을 다양하게 차별 짓는 만업(滿業)이 있다.(본론 제43권 참조)
25)
즉 욕계와 색계 중에서는 동분과 명근과 색신이 각기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색신을 별도로 설한 것이지만, 무색계에는 색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
26)
이에 반해 세친은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67)에서, 무색계의 동분과 명근은 뛰어난 선정[勝定, 즉 無色定]으로써 색상(色想)을 조복시킨 결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뛰어난 작용을 갖지만, 유색계의 그것은 저열하기 때문에 유정의 심ㆍ심소를 상속시킬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이는 다만 색신에 의해 상속된다고 하였다.(후술)
27)
이는, 유색계에서의 동분과 명근은 색에 근거하여 일어나지만, 색이 존재하지 않는 무색계에서 이 두 가지는 무엇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에 대한 해명이다. 참고로 세친은 무색계의 동분과 명근은 무색정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강성하여 서로간에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유색계의 그것은 저열하기 때문에 오로지 색신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후술)
28)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67).
29)
무색정으로써 색상을 조복할 때 생겨난 중동분과 명근은 그렇지 못한 유색계의 그것보다 강성하다는 뜻.
30)
만약 무색계의 동분과 명근이 서로가 서로에 근거하여 상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색계의 심과 심소도 역시 서로를 근거로 하여 상속하므로 별도로 동분 등에 근거하여 상속한다고 설할 필요가 없다. 혹은 동분과 명근이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ㆍ심소도 역시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서로에 근거하여 상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
31)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68). 참고로 본론에서는 경주 세친 자신의 종의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구사론』상에서는 경부사(經部師)의 설로 언급되고 있다.
32)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7중; 한글대장경117,p.140), “欲界云何? 謂欲貪隨增法. 色界云何? 謂色貪隨增法. 無色界云何? 謂無色貪隨增法.”
33)
욕계에 현행하는 제법은 모두 욕계계(繫)가 아니며, 오로지 욕탐에 의해 수증되는 법만이 욕계계라는 뜻. 그럴 경우 번뇌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탐수면(貪隨眠)만으로 3계를 차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후술)
34)
“비록 온갖 번뇌가 다 수증(隨增)할지라도 대개의 경우 탐수면이 현행하기 때문에 하나[의 번뇌]에 치우쳐 [3계의 차별을] 설하게 되었다.”(『현종론』 제12권)
35)
여기서 계경은 『잡아함경』 제19권(대정장2,p.127중)과 동 제28권(p.199상). 이는 『대비바사론』 제173권(한글대장경124,p.521)에도 인용되고 있다.
36)
즉 욕탐의 본질은 미묘한 경계 즉 5경(境)에 있는 것이 아니라(외계는 욕탐과는 관계없이 항상 그 본성대로 머물 뿐이다) 인간의 내심 즉 분별에 따른 탐에 있다는 뜻.
37)
후추[胡椒]가 들어간 음료를 후추음(飮)이라 하고, 금강석이 박힌 반지를 금강환(環)이라고 하듯이 ‘욕’에 의해 계속(繫屬)된 세계[欲所屬界]라는 말에서 중간의 ‘계속된’이라는 말을 생략하고서 ‘욕계’라고 하였다는 뜻.
38)
즉 무색계는 다만 색이 없는 세계일 뿐 아니라, 변애(공간적 점유성)와 시현(눈의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색처)을 본질로 하지 않는 심법이 소속된 세계라는 뜻.
39)
색계에는 단식성(段食性)인 향(香)과 미(味)가 존재하지 않는다.(본론 제4권 ‘3계 계속관계분별’ 참조)
40)
유부에 의하면 유정은 무시(無始)이래 존재하지만, 화지부에서는 새로이 태어나는[始起] 유정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그러한 처음으로 태어나는 유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찍이 어딘가에서 무시이래 생존 윤회하여 왔을 것인데, 무량(無量)의 부처가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였을 것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중생이 존재하므로 그 전부의 양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1)
세계가 안주하고 있는 형태에 대해 『대비바사론』 제193권(한글대장경125,p.409)에서는 상하로 포겐 형태[上下重累]와 옆으로 퍼져있는 형태[隣次傍布] 두 가지를 들고 양자 모두의 난점을 설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그곳의 염오를 두루 떠나는 것을 어떻게 설할 수 있고 어떻게 신통이 거기까지 두루 이를 수 있는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상하의 세계가 끝이 없다’고 한 타라달다(陀羅達多)의 설을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본론에서의 ‘어떤 이의 설’(보광이나 법보에 의하면 법밀부 즉 법장부)은 양자 절충설로서, 옆으로 퍼져있으면서 또한 상하 무한하다. 즉 풍륜 아래로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서 다시 색구경천 내지 풍륜이 있고 그 아래로도 끝없이 그러하며, 또한 색구경천 위로도 허공을 사이에 두고 풍륜 내지 색구경천이 있고 그 위로도 끝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42)
즉 무수한 세계가 있을지라도 그 성질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3계에서 해탈하면 동시에 모든 3계를 해탈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학교가 많이 있을지라도 그 중 하나만을 졸업하면 다른 학교의 교과목도 졸업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43)
여기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한 6취설이 일반에 알려져 있지만, 이는 독자부(犢子部)의 주장이고, 유부나 상좌부의 정설은 5취설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에서도 대개 5취설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아수라가 제6취가 아닌 까닭에 대해서는 후술함.
44)
즉 5취의 본질은 오로지 과거의 업에 의해 초래된 이숙생의 과(果)이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5취는 오로지 유정에 해당될 뿐, 이숙생이 아닌 무정물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중유란 사유(死有)와 생유(生有)의 중간존재로서, 이것이 5취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
45)
『장아함경』 제10권 『법보경(法報經)』(대정장1,p.236중)에서 이러한 7유를 설하고 있다. “當知七有. 一爲不可有, 二爲畜生有, 三爲餓鬼有, 四爲人有, 五爲天有, 六爲行有, 七爲中有.” 여기서 첫 번째 불가(不可)는 불가락(不可樂, 혹은 意)의 뜻으로 지옥을 말한다.
46)
즉 계경에서 5취를 업유의 결과로서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숙생으로 무부무기임이 명백하다는 뜻.
47)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75). 보광에 의하면, 여기서 어떤 이는 대중부이다. 즉『칠유경』 중에서 5취와 업유를 구별하여 설하였을지라도 양자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마치 5탁(劫濁ㆍ命濁ㆍ有情濁ㆍ煩惱濁ㆍ見濁) 중에 ‘번뇌’와 ‘견’을 별도로 설하였을지라도 결국 ‘견’은 번뇌에 포섭되는 것처럼, 업유도 5취 중에 포섭되지만 취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취’에 업유도 포함된다고 한 이상 그것의 성(性)은 선ㆍ불선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8)
“즉 ‘취’란 말하자면 그렇게 ‘가게 된 것[所往]’으로, 중유를 설하여 바로 ‘가게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이것은 바로 죽는 곳[死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구사론』 제8권, 앞의 책,p.376)
49)
『구사론』 제8권, 앞의 책, p.376.
50)
본권 주64) 본문 참조.
51)
다시 말해 5탁의 경우 ‘견’이 바로 번뇌라고 설한 곳은 많지만, 7유의 경우 업이 바로 ‘취’라고 설한 경은 없기 때문에 5탁의 경설은 경증이 될 수 없다는 뜻.
52)
업이 바로 ‘취’라고 한다면, 하나의 소의신 중에는 지옥에서부터 천(天)에 이르는 이숙의 업인(業因)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에 따라 ‘취’ 또한 하나의 소의신 중에 다수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5취의 본질을 오로지 무부무기(無覆無記)로 이해한 것이다.
53)
만약 업이 바로 ‘취’라고 한다면, 예컨대 어떤 사람이 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을 지었을 경우, 업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에 그것의 이숙과(지옥취)가 현전할 때라도 그것을 인취의 지옥과는 다른 별도의 지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
54)
이 계경은 『대비바사론』 제172권(한글대장경124,p.497)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구사론』(제8권, 앞의 책,p.374)에서는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서 외워 전하는 경’이라고 설하고 있다. 경은 미상. 지옥의 과보를 받을 만한 번뇌가 현행함에 따라 그 과보를 받을 업을 조작하게 되고, 그것에 의해 지옥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뜻. 따라서 지옥을 포함한 5취는 다만 이숙생의 무부무기라는 것이다.
55)
『구사론』(앞의 책,p.376). 즉 앞서 사리자가 말한 뜻은 실유의 보특가라(pudgala,人 혹은 我로서 전이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실체)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지, ‘지옥의 5온은 오로지 무부무기이며 그 밖의 선 또는 불선의 5온이 아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경문은 5취가 오로지 무부무기라는 사실의 경증이 될 수 없다는 뜻의 해석.
56)
『구사론』(같은 책).
57)
즉 지옥을 초래할만한 이숙업을 지어 지옥의 이숙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를 성취(成就)의 상태라고 한다면, 일어난 때는 현행(現行)의 상태이다. 따라서 선악의 이숙업 자체는 지옥‘취’가 아니며, 오로지 이숙과만이 지옥취이기 때문에 ‘취’의 본질은 무부무기일 뿐이라는 뜻.
58)
인(人) 등 5취의 생은 전적으로 전생의 이숙업에 의해 낳아진 이숙과라고 한다면 그 본질은 무부무기일 것이고,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선ㆍ불선ㆍ무기의 3성이라 할 수 있다.
59)
지금 바로 지옥을 초래할 만한 번뇌가 현전하기 때문에 지옥취는 소장양과도 통한다고 한다면, 지옥을 초래할 만한 번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즉 “그것은 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을 낳는 것이며, 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은 지옥의 생을 낳는 것이므로 지옥을 초래할 만한 번뇌와 업이 바로 지옥‘취’는 아니다.”(『현종론』 제12권) 따라서 지옥을 초래할 만한 온갖 번뇌가 현전한다고 해서 지옥취를 소장양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
60)
『품류족론』 제9권(대정장26,p.730상;한글대장경117,p.207), “地獄趣十八界十二處五蘊攝……三界一切隨眠隨增. 傍生趣餓鬼趣人趣亦如是.” 즉 이 같은 논의에 따른다면 일체의 수면인 5부(部)의 법이 ‘취’의 자성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약 무부무기만이 ‘취’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논에서는 다만 ‘수소단과 변행수면에 의해서만 수증된다’고 설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61)
즉 『품류족론』에서의 논의는 5취로 태어날 때의 마음 중에 5부의 번뇌가 모두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취’와 더불어 설한 것으로서, 그것은 오로지 ‘취’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 때문에 ‘취’가 무부무기라는 주장은 『품류족론』의 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
62)
4생(生)이란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으로, 중유는 화생에 포섭된다.(본론 제22권 참조)
63)
『법온족론』 제10권(대정장26,p.498중하; 한글대장경115,p.615). 이는 즉 5취 이외 따로 중유를 설한 사실로 볼 때, 중유는 5취와는 별도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논거이다.
64)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76).
65)
‘중유는 두 가지 취 중간에 존재한다’는 말은 이미 중유가 ‘취’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 것으로서, 이는 일반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논증해야 할 문제라는 뜻. ‘중유라고 이름하기 때문에’라는 논거가 불확정적인 까닭에 대해서는 후술함.
66)
경주는, 중유는 두 가지 ‘취’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 그래서 ‘취’가 아니다고 주장하였지만, 동일한 취에서도 사유와 생유의 중간에 존재하는 것을 중유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그럴 경우 중유는 동일한 ‘취’에 속한다. 즉 인취의 사유와 인취의 생유 중간에 존재하는 것은 결국 인취의 중유이다), ‘중유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두 가지 취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라는 논거는 불확정적인 논거[不成因]로서, 그것으로는 ‘중유는 취가 아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그리고 생유와 사유 중간에 존재하는 본유도 의미상으로는 중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태어나자마자 죽는 자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유라고는 하지 않는다.
67)
대중부ㆍ설출세부ㆍ계윤부ㆍ화지부 등에서는 중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그들의 논거와 유부의 비판, 그리고 유부의 중유 실유론은 본론 제23권~24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68)
사유와 생유는 다른 종류의 생(生)이기 때문에 그 중간에 존재하는 업을 중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생유와 사유는 동일한 종류의 생이기 때문에 그 중간을 중유라고 하지 않고 본유(本有)라고 한다는 뜻.
69)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76).
70)
경(經)과 논(論)과 올바른 이치[正理]에 따른 논증.
71)
‘생’이라는 무차별동분은 하나의 업(즉 引業)에 의해 초래된다.(주24 참조)
72)
중반열반이란 5종 불환(不還)의 하나로, 5순하분결을 끊은 불환과(不還果)의 성자가 색계 중유에서 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와 더불어 생반열반(生般涅槃,색계에 태어나 오래지 않아 아라한을 성취하고서 반열반에 드는 불환),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 다시 노력하여 반열반에 드는 불환),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색계에 태어나 어떠한 노력도 없이 오랜 시간을 지나 반열반에 드는 불환), 상류반열반(上流般涅槃,색계에 태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轉生하여 반열반에 드는 불환)의 차별은 일찍이 지은 업과 번뇌와 근기에 따라 결정된다(본론 제65권 참조). 참고로 중반열반은 중유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논거 중의 하나이다.(본론 제23권 참조)
73)
즉 중유 역시 ‘생’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초래하게 된 업은 ‘취’를 초래하게 하는 업과 동일한 업[一業,즉 引業]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중유를 초래하는 업이 ‘취’를 초래하는 업과는 다른 업(즉 滿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업처럼 생의 내용을 장엄하는 것일 뿐 생유를 인기(引起)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74)
이에 반해 인간은 종(縱) 즉 직립의 형태이다.
75)
아귀에는 재물이 없고 적고 많음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재물이 없는 아귀에는 다시 불타는 입과 바늘입과 냄새나는 입을 가진 세 종류의 아귀가 있으며, 재물이 적은 아귀에도 역시 침으로 된 털의 아귀와 냄새나는 털의 아귀와 목에 혹이 난 아귀가, 재물이 많은 아귀에도 희사(希祀)와 희기(希棄)와 대세(大勢)의 세 종류의 아귀가 있다.: 불타는 입의 아귀[炬口鬼]는 항상 입에서 불을 토하는 아귀로, 지극히 인색한 자의 과보이다. 바늘입의 아귀[針口鬼]는 배는 산의 계곡만 하지만 입이 바늘구멍만 하다. 냄새나는 입의 아귀[臭口鬼]는 항상 입에서 악취가 나 음식을 보더라도 먹을 수 없다. 침으로 된 털의 아귀[針毛鬼]는 날카로운 침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남을 찔러 항상 광란하여 달리며, 냄새나는 털의 아귀[臭毛鬼]는 지독한 냄새로 몸을 후려치고 털을 쥐어뜯어 피부가 상하고 째지는 등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목에 혹이 난 아귀[廮鬼]는 악업력에 의해 목구멍에 큰 혹이 나있어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 세 가지 아귀는 때로 부정한 것(이를테면 자신과 타인에게서 나오는 농혈)을 만나 기갈을 면한다. 그리고 희사귀는 항시 제사에 가 제물을 향수하며, 희기귀는 남이 버리거나 토한 것을 먹으며, 대세귀는 약차(藥叉)나 나찰(羅刹)과 같은 것으로, 그의 부귀는 마치 천(天)과도 같다.(본론 제31권)
76)
천(天, deva)은 ‘빛남’ ‘상스러움’ 등의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온갖 천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 ‘제천(諸天)과 그 유정’에서 상론한다.
77)
일반에서는 앞의 5취에 아수라(阿修羅, aśura)를 더하여 6취를 말하기도 하는데(주 43참조), 이하 이에 대해 논설한다.
78)
만약 아수라가 천중과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천취(天趣)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나찰과 다툰 사람도 나찰에 포섭된다고 해야한다는 뜻.
79)
만타다(Mandhātā)왕은 겁초(劫初) 일곱 번째 왕.
80)
대수긴나라(8부 중의 하나) 왕의 여식인 탈의(Manoharā, 혹은 悅意)가 인간 세계에 와 놀다가 사냥꾼에게 잡혔다가 반차라국의 태자인 선재보살의 구애를 받아 비(妃)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유부비나야약사(有部毘奈耶藥事)』 제13권(대정장24,p.61)에 나온다.
81)
설지(設支, Śacī, 원어는 Sujā, Sujatā)는 아수라왕의 딸로 천제석의 처가 되었다. 곧 천제석이 이 같이 ‘아수라의 근본은 바로 천(天)이다’고 말한 것은 사랑에 눈이 멀어 한 말이기 때문에 논거로서의 진실성이 없다는 뜻. 천제석과 아소락왕녀 설지(設芝)에 관한 에피소드는 『대비바사론』 제61권(한글대장경120,p.243)에도 나온다.
82)
난타(nanda) 발난타(upananda) 등은 모두 대용왕으로 방생의 일종임. 대용왕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 주75) 참조.
83)
녹자선인(Migasiṅga, Mṛgasiṅga)은, 암사슴이 어떤 한 도사의 정혈(精血)을 삼키고 낳은 아들로서 후에 도사(tāpasa)가 되었기에 녹자선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84)
암라녀(Ambapālī, Skt. Āmrapālī). 베살리성 교외 암바 숲에 버려져 숲을 지키는 이에 의해 양육되었기 때문에 암바파리로 불리게 되었다. 장성하여 미모 때문에 기녀가 되었다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자신의 소유인 암바 숲(Ambapālīvana)을 승단에 기진하였다.
85)
교답마(Gotama) 종족은 석가 족의 다섯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 일종(日種, Sūryavaṁśa)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정반왕의 6대조 왕이 출가 걸식하면서 산중에 있던 시절에 사냥꾼에게 백조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는데, 그 핏덩이에서 두 줄기 감자(甘蔗)가 나고, 그 감자가 햇빛에 쪼이어 성장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타마 종족을 ‘감차종’이라고도 하며, ‘일종’이라고도 한다.
제22권
1)
설일체유부에 있어 의식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所依]를 가져야 한다. 이에 따라 완성된 유부의 세계관에서 볼 때 3계 5취의 제 유정의 의식이 안주(安住)하는 형태에는 일곱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7식주(識住, vijñānasthiti)라고 한다. 즉 전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욕계의 인간과 천(天), 그리고 색계의 아래 세 정려와 무색계의 아래 세 처가 바로 의식의 7생처(生處)이며, 악취(지옥ㆍ축생ㆍ아귀)와 제4정려, 비상비비상처는 의식이 안주하는 처소가 아니기 때문에 식주가 아니다.
2)
『중아함경』 제24권 제97경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81중); 『증일아함경』 제42권 제46품 제7경; 『장아함경』 제8권 제9경 『중집경(衆集經)』(동p.50상) 등을 참조할 것.
3)
여기서 겁초(劫初)란 성겁(成劫) 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때 유정은 신체가 다르지만 생각이 동일한 제2 식주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4)
극광정천은 신체가 동일[身一]하고 생각이 다른[想異] 제3식주에 포섭된다.(후술)
5)
겁초의 범중천은 신체는 다르지만[身異] 생각은 동일[想一]한 제2식주에 포섭된다.(후술)
6)
이는 앞의 혹자의 설에 대한 대론자의 반론이다.
7)
안(眼)과 색(色)이 안식의 원인이라고 해서 안과 색이 존재하면 반드시 안식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듯이, 색이 신체가 다르게 된 원인이라고 해서 색이 존재하면 결정적으로 신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색이라는 말은 신체가 다르게 된 원인을 나타낸다’는 앞서의 해석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뜻.
8)
이는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설로서, 태초에 단지 대범왕만이 있었는데, 후에 그를 시위(侍衛)해 줄 이를 원하여 발원하였다. 이에 제2정려의 극광정천이 연민하여 스스로 초정려로 내려와 범중천이 되었는데, 대범왕은 이들을 보고 자신이 변화하여 나타난 이라고 생각하고, 범중천도 역시 대범천의 변화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온갖 천이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범왕의 위덕은 중대(重大)하여 범중천과는 다르기 때문에 ‘신체가 다르다’고 일컫게 되었다.
9)
숙주통이란 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의 줄인 말로서, 숙명통을 말한다. 본론 제76권 ‘6통’ 참조.
10)
『장아함경』 제14권 『범동경(梵動經)』(대정장1,p.90중).
11)
『구사론』 제8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379)에서는 “대범을 연(緣)으로 삼아 오히려 계금취견(戒禁取見)을 일으키는 것인가?”로 되어 있다. 즉 대범천에 의해 이미 범중천(즉 초선천)으로 태어난 이상 극광정천(제2정려)에서의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제2정려를 이미 획득하였다고 한다면 초정려의 대범천을 능생자(能生者)로 생각할 리도 없어야 한다는 힐난. 계금취견이란 5견의 하나로, 이를테면 대자재천이나 생주(生主) 등 세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非因計因]하고, 그리하여 그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스 강에 목욕하거나 불로 온몸을 지지는 등 참된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여기는 것[非道計道]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전자의 뜻이다.(본론 제47권 참조)
12)
여기서 중유는 제2정려에서 몰하여 초정려에 태어나는 사이.
13)
“그들(범중천)이 중유 중에 머물 때에는 장시간 머무는 일이 없으니, [제2정려로부터 몰하여 초정려의] 생을 받는 데에는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구사론』 제8권, 앞의 책) 즉 중유에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장수하며 오래 머무는 대범왕을 관찰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14)
범중천은 입태(入胎) 즉 잉태의 괴로움과 목숨이 끊어질 때의 괴로움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이 지속된다는 뜻. 환언하면 전생의 기억은 바로 그 같은 괴로움에 의해 망실된다는 뜻. 여기서 단말마의 말마(末摩, marma, 또는 死穴)는 일종의 급소로서, 지극히 작은 부위이나 몸 가운데 백여 곳이 있다고 한다.
15)
즉 소박한 음식을 싫어하여 기름진 음식을 취하고, 다시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여 소박한 음식을 추구하는 것처럼 제2정려에서는 근본지(根本地)의 희근(喜根)을 싫어하여 근분지(近分地)의 사근(捨根)을 현전시키고, 다시 근분지의 사근을 싫어하여 근본지의 희근을 현전시킨다는 뜻. “마치 부귀한 자가 욕락(欲樂)을 싫어하여 법락(法樂)을 향수하고, 법락을 싫어하여 다시 욕락을 향수하는 것과 같다.”(『구사론』 제8권, 앞의 책,p.380) 이 전설(傳說, kila)은 『대비바사론』 제137권(한글대장경123,p.263)에서 논설되고 있는데, 세친은 이를 불신하여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사론』에서 ‘전설’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중현은 본론에서는 이를 삭제하지 않았지만, 『현종론』(제12권)에서는 삭제하였다.
16)
여기서 경은 『장아함경』 제21권 『세기경(世紀經)』「삼재품(三災品)」(대정장1,p.138중).
17)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80~381). 『구사론』에서는 경부사(經部師)의 설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개요로서 그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부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른 어떤 계경에서는 그러한 천 중에서의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극광정천 중에 새로이 태어난 천중(天衆)이 있었는데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였다. 그는 [괴겁(壞劫) 시에] 하지(下地)에서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른 것을 보고 두려움과 염리(厭離)를 느낀 나머지 ‘저 화염이 범궁(梵宮)을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 계속 올라와 우리의 처소(즉 극광정천)에까지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 때] 이미 오래 전에 극광정천에 태어나 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어떤 천중이 있었는데, 그 놀라고 두려움에 떠는 천중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정선(淨仙)이여! 정선이여!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옛날에도 저 화염은 범궁을 모두 태워 그것들을 모두 허공으로 만들고는 거기서 바로 꺼져 버렸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들(제2정려의 천중)은 [하지의] 화염을 보고서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울러 ‘두렵다’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일컬은 것이지 [유부의 주장처럼] 낙(樂)과 비고비락(非苦非樂)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에(본론 경우 喜受와 捨受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18)
변정천은 제3정려에 포섭되는 천으로, 신체도 동일하고 생각도 동일한 제4식주인데(후술), 만약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에 근거하여 식주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없어야 한다는 힐난.
19)
괴겁(壞劫) 시 화(火)ㆍ수(水)ㆍ풍(風)의 3재(災)가 몰아쳐 기세간이 괴멸하는데, 화재는 제2정려를 정점으로 삼으며, 수재는 제3정려를, 풍재는 제4정려를 정점으로 삼는다.(본론 제32권 ‘大三災’를 참조할 것)
20)
제2식주. 초정려의 모든 천에서는 대범천을 능생자(能生者)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전술)
21)
제3식주.
22)
제4식주.
23)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제5식주이고,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제6식주이며,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제7식주이다.(후술)
24)
여기서 두 식은 비(鼻)ㆍ설식(舌識). 색계에는 단식성(段食性)의 향(香)ㆍ미(味)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
즉 식은 앞에서 설명한 7처(處)에 소속되는 온(욕ㆍ색계의 경우 5온, 무색계의 경우 4온)에 낙주(樂住)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온을 ‘식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26)
색계 제4정려 8천 중 무운(無雲)ㆍ복생(福生)ㆍ광과(廣果) 등의 아래 3천은 범부(이생)와 성자가 동거하는 곳으로서, 범부는 여기서 무상천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성자는 정거(淨居, 위의 5천) 즉 무욕천으로 나아가 성도에 의해 번뇌를 끊어 버리려고 한다. 또한 정거천에 있는 이들은 열반에 들기만을 염원한다.(次項참조)
27)
9유정거(구역에서는 衆生居)란 말 그대로 유정이 머물기를 좋아하는 아홉 곳의 처소를 말하는 것으로, 7식주에 무상천(無想天)과 비상비비상처(즉 유정천)을 더한 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에 반해 식주는 식이 즐거이 머무는 곳이다.
28)
주26) 참조.
29)
앞의 7식주가 식(識)이 안주하는 곳이라면, 여기서의 식주는 ‘식’이 머물게 되는 근거 즉 소의(所依)로서의 식주이다. 즉 유부에 있어 마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를 가져야 하는데, ‘식’은 능히 색ㆍ수ㆍ상ㆍ행의 4온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을 4식주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지[異地]에 존재할 경우 ‘식’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자지(自地)의 4온만이 식주가 된다.
30)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대정장1,p.51상);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상권(대정장1,p.229상).
31)
이를테면 왕은 왕좌에 머무는 자[能住]이고 왕좌는 왕이 머물게 되는 곳[所住]이듯이, 색 등의 4온은 식이 즐거이 머물게 되는 곳[所住]이고 탐착하는 바[所著]이기 때문에 식주가 되는 것이다.(『구사론』 제8권, 앞의 책,p.385 참조)
32)
『잡아함경』 제15권 제378경(대정장2,p.103중하). 즉 식식(識食: 心識을 말함. 일체의 유정을 유지시키는 네 가지 에너지 즉 4食의 하나. 본론 제30권에서 상론) 중에 희(喜, nandī)와 염탐(染貪, rāga)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식의 희탐과 염탐은 식의 소의처이면서 식에 의해 제어[乘御]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온도 식주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난문.
33)
앞의 계경은 5온 전체를 소연으로 하여 희염(喜染)이 낳아졌고, 식이 그것을 제어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지 오로지 식온에 대해서만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 즉 식이 일어날 때, 그 생처(生處)인 5온 전체에 대해 낳아진 희염을 소의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총체적인 입장에서 ‘식주’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희염을 낳은 것은 앞의 4온이지 식온이 아니라는 것이다.
34)
『잡아함경』 제2권 제39경(대정장2,p.9상)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을 설하고 있다. “종자는 취음(取陰)과 함께하는 식[具識]에 비유되고, 지계(地界)는 4식주에 비유되며, 수계(水界)는 탐(貪)ㆍ희(喜)에 비유된다.”
35)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86).
36)
만약 식주를 소의(所依)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식은 그러한 수(受) 등의 법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수 등의 법은 식주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
37)
식주가 식의 근거[依]라고 할 때, 여기에는 소의(所依)로서의 근거, 소연(所緣)으로서의 근거, 상응(相應)하는 근거라는 세 가지 뜻이 있을 수 있지만, 수ㆍ상 등의 심소법은 소의와 소연이 되지 않으며, 색법과 불상응행법에는 상응의 뜻도 없기 때문에 색 등의 4온은 식주가 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무루 역시 식과 상응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식주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식주를 ‘근거[依]’라는 뜻에 근거하여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
38)
상좌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수’ 등의 심소는 마음(즉 식)과 상응 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의 차별상으로서 계기 상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본론 제11권 ‘비유사의 심소 무별체설 비판’ 참조) 식의 찰나에 ‘수’ 등의 심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동일찰나의 ‘수’ 또한 식주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후술)
39)
심과 심소의 상응구기를 인정하지 않는 한 동일 찰나의 식은 수 등에도 머문다고 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동일 찰나의 식은 스스로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다시 말해 이러한 식은 이러한 식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식주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의 논거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40)
본론 제11권 ‘비유사의 심소 무별체설 비판’ 참조.
41)
식(識)도, 색ㆍ수ㆍ상ㆍ행의 식주(識住)도 그 자체 자성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주의 분별도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공화론은 공견(空見)외도, 혹은 대승의 공종(空宗)을 말한다.
42)
만약 ‘이러한 [식]은 마땅히 이러한 [식]에 다시는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 ‘식 자체는 스스로의 소의도 소연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 때문에 어떤 의심을 해소할 만한 논거가 되지 않는다는 뜻.
43)
즉 식은 수(領納)등을 반연하여 증장되는 것이지 식(了別) 자체를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식은 식주가 아니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그래서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논거라는 것이다.
44)
주38) 참조.
45)
『중아함경』 제20권 「일차제경(一嗏帝經)」(대정장1,P.766하).
46)
여기서 세존께서 설한 식주란 본권 주30)의 본문. 즉 “식(識)은 색(色)에 따라 머물며, 식은 수(受)에 따라 머물며, 식은 상(想)에 따라 머물며, 식은 행(行)에 따라 머무니, 이것을 네 종류[의 식주]라고 이름한다”고 한 계경의 설을 말한다.
47)
색의 경우 소의(현재색)와 경계대상(과거ㆍ미래색)이 되며, 수 등의 경우 구유인(현재의 ‘수’ 등)과 경계대상(과거ㆍ미래의 ‘수’ 등)이 된다.(전술)
48)
주31) 본문 참조.
49)
소의신의 색이나 수 등은 다같이 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더러(과거ㆍ미래법의 경우) 식이 일어나는 근거(소의 혹은 구유인)가 되기 때문에(현재법의 경우) 식주로 설정할 수 있지만, 비유정수나 다른 이의 소의신 등은 오로지 대상(소연)이 될 뿐 ‘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조반의 공능을 충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식주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뜻.
50)
『대비바사론』 제137권(대정장27,p.706하; 한글대장경123,p.260).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85)에서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언급되고 있다.
51)
즉 어떤 법으로서 7식주에는 포섭되어도 4식주에는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으며(제1구), 4식주에는 포섭되어도 7식주에는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으며(제2구), 7식주와 4식주 모두에 포섭되는 것이 있으며(제3구), 7식주와 4식주 모두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다.(제4구)
52)
제1구는 7식주이면서 4식주가 아닌 것으로, 7식주 중의 식온이 이에 해당한다. 제2구는 4식주이면서 7식주가 아닌 것. 제3구는 7식주이면서 4식주인 것. 제4구는 7식주도 아니면서 4식주도 아닌 것.
53)
3계ㆍ5취의 모든 유정은 태어나는 형태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를 4생(生)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이란 생류의 뜻으로, 4생의 온갖 유정은 생류로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54)
중유는 5취(趣) 중에 포섭되지 않는다.(본론 제21권 참조)
55)
옛날 남섬부주의 어떤 상인이 바다에서 온 아름다운 학 한 마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 학은 그 후 두 개의 알을 낳았으며, 여기서 두 명의 동자가 태어났다. 그들은 용모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장성한 후 출가하여 함께 아라한과를 얻었는데, 그들 중에 작은 이를 오파세라(Upaśaila)라 이름하고, 큰 이를 세라(Śaila)라고 이름하였다.(『대비바사론』 제120권, 한글대장경122,p.474))
56)
녹모는 비사가(毘舍佉, Vaiśākha, Visākā) 또는 녹자모(鹿子母)로 불린다. 앙가국 출신으로, 5백 명의 시녀와 함께 부처님을 영접하여 설법을 듣고 초과(初果) 즉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후에 사위성의 장자 녹자와 결혼하여 그를 불법으로 인도함에 따라 마치 그의 어머니와 같다하여 녹자모로 불림. 그녀가 서른두 개의 알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대비바사론』 제120권(앞의 책)에 나온다.
57)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친 급고독장자의 여식으로, 『현우경(賢愚經)』(제13권)에서는 소만녀(蘇鬘女)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특차시라(特叉尸羅) 왕자에게 출가하여 열 개의 알을 낳았다.
58)
반차라왕(Pañcāla rāja)의 왕비가 5백 개의 알을 낳자 왕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갠지스강가에 버렸다. 이웃나라 왕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이를 수습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이 태어나 용맹한 전사가 되어 사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반차라왕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왕이 두려움에 떨자 왕비는 ‘그들은 모두 우리의 아들이다. 어미를 보게 되면 악심을 멈출 것이다’ 하고 성 위로 올라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동시에 젖을 먹였다고 한다.
59)
만타라(Māmdhātṛ, 구역은 頂生王)는 포살타(布殺陀, Upoṣadha) 왕의 정수리에 생겨난 수포로부터 태어나, 장성한 후 금륜왕(金輪王)이 되었음. 차로(Cāru)과 오파차로(Upacāru)는 앞의 만타라왕의 양 볼기짝에 생겨난 수포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커서 전륜왕이 되었다고 함. 함만(Kapotamālinī)은 범수(梵授, Brahmadatta)라고 이름하는 왕의 겨드랑이 밑의 수포에서 생겨난 아들로서, 그가 태어날 때 마치 비둘기처럼 날아 나왔으며, 왕이 그를 꽃의 장식같이 중히 여겼으므로 합만(鴿鬘)이라 하였음. 암라위(Āmrapāli)는 불제자로서 비구니. 원래는 창부였는데, 암라나무의 습기, 혹은 가지로부터 태어났다고 전한다.
60)
묘시조(妙翅鳥). 『구사론』(앞의 책,p.389)에서는 게로다(揭路茶, garuda). 이 새는 인도신화에서 비쉬누가 타고 다니는 새. 가루다라는 말은 언어의 날개들(wings of speech)이라는 뜻으로, 베다지식의 인격적 표현으로 상징된다. 구역에서는 금시조(金翅鳥), 혹은 식토비고성(食吐悲苦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용을 잡아먹는다는 신비의 새로서, 머리는 새와 비슷하지만 몸은 사람을 닮았으며, 날개는 금빛, 머리에는 여의주가 박혀있고, 입으로 화염을 내뿜는다고 한다.
61)
아귀가 화생이라는 것은 알기 쉽지만, 태생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송을 논거로 인용한 것이다.
62)
최후신의 보살이란 깨닫기 전의 마지막 생의 보살을 말한다. 여기서는 3아승기 백겁의 수행을 닦은 후 마침내 가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 정각을 성취하는 석가보살을 말한다.
63)
인간으로서 화생인 자는 오로지 겁초의 인간들뿐이지만, 모든 부처님은 인간의 수명이 8만 세에서 점차 감소하여 백세에 이르게 되는 주겁(住劫)시에 출현한다.(본론 제32권 ‘부처와 독각이 출현하는 시기’ 참조)
64)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91). 지원통은 원하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신통, 즉 신경지증통(神境知證通)을 말한다. 곧 부처의 이러한 신통을 믿는 불교도에게 있어 ‘화생의 경우 신계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최후신은 보살은 태생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
65)
10력이나 4무외 등은 오로지 불타만이 갖는 공덕(즉 不共德)으로, 그 소의는 일체지(一切智)이다. 바로 이 같은 공덕이 훈습된 신계 즉 사리(舍利)라면 그것은 세간을 요익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생은 신계를 남길 수 없으며, 설혹 남기고자 한다면 신통으로 몸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신통은 범부와도 공통되는 공덕으로, 그에 따른 신계는 세간을 크게 요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 10력 등의 18불공덕에 대해서는 본론 제75권, 범부와 공통되는 공덕인 6통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을 참조할 것.
66)
『장아함경』 제19권 『세기경(世紀經)』「용조품(龍鳥品)」(대정장1,p.127); 『증일아함경』 제19권(대정장2,p.646상) 참조. 즉 묘시조(가루다)가 용을 잡아먹었다면, 화생인 용은 이미 죽어 형체가 없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배가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용을 잡은 것인가? 하는 난문.
제23권
1)
중유(中有, antarā-bhāva)란, 사유(死有, 죽는 순간의 존재) 이후 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의 존재) 이전의 5온, 즉 그 중간의 존재로서, 그 자체로서는 일어나고 몰(沒)하는 일이 있지만, 당래 태어나야 할 곳[生處] 즉 생유에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후술) 참고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고, 이상을 4유(有)라고 한다.(본론 제24권와 제30권 참조)
2)
이에 반해 경주 세친은 “두 가지 취(趣)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유’라고 이름하였다.”고 논설하고 있는데(『구사론』 제8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392), 이에 관해서는 본론 제21권(‘중유가 취에 포섭되지 않는 이유에 관한 경주와 상좌 설 비판’)에서 언급한 바 있다.
3)
중유 또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그럴 경우 無因論에 떨어짐)이 아니라 업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계경에서 말한 대로 ‘업은 생인(生因)’이기 때문에 중유에 대해서도 역시 ‘생’이라고 말해야한다는 힐난.
4)
이 말은, 하나의 견인업(牽引業)에 의해 중동분이 현현하고, 다수의 업인 원만업(圓滿業)에 의해 구체적으로 ‘생’이 성취될 때를 ‘일어나게 되는 것[所起]’이라고 말한다는 뜻이다. 인업과 만업에 대해서는 본론 제43권을 참조할 것.
5)
생결은 생유를 낳는 번뇌를, 기결은 중유를 낳는 번뇌를 말한다. 이는 곧 생유와 중유가 다같이 업을 원인으로 할지라도 각기 그것을 낳게 한 번뇌가 다르기 때문에 중유를 ‘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경증(經證)이다.
6)
참고로 ‘기(起, abhinirvṛtti)’는 중유의 다섯 이명(異名) 중의 하나이다. 본론 제30권 참조.
7)
이같이 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한 부파는 『대비바사론』 제69권(한글대장경120,p.430)에 의하면 분별론자이지만,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대중부, 화지부, 일설부, 설출세부, 계윤부이다.
8)
업에는 그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으며, 정업에는 다시 그 과보가 현생에 바로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또는 順現業)과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또는 順生業)과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또는 順後業)의 세 가지가 있다.(본론 제40권 참조) 즉 계경에서는 현생과 내생 그리고 그 후의 생을 초래하는 업에 대해서만 설하고 있을 뿐 중유를 초래하는 업에 대해 설한 일이 없으므로 그것을 생유와는 다른 별도의 ‘유’로 볼 수 없다는 뜻.
9)
중유는 지극히 미세하고, 가장 빠른 업의 신통을 갖추어 세존조차 막을 수 없는 등의 아홉 가지 특징을 갖는다.(본론 제24권 ‘중유의 여러 특징’에서 상론함.)
10)
『별역(別譯)잡아함경』 제5권(대정장2,403하)에 이에 상응하는 게송이 나온다. 여기서 ‘재생’은 재생족(dvija) 즉 바라문을 말하며(혹은 날짐승과 같은 어리석은 이, 본론 제22권 ‘4생’ 참조), ‘앞길……’은 선취로 나아가려 해도 보시와 지계 등의 자량이 없어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11)
순생(順生)은 순차생수(順次生受), 순후(順後)는 순후차수(順後次受)의 준말. 주8)을 참조할 것.
12)
세 종류의 정업(定業)에 대해서는 주8)을 참조할 것.
13)
중유는 본유 등의 다른 상태와 비교할 때 신통을 갖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여우 등이 된다거나 혹은 모든 유정이 항상 그 같은 중유의 신통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뜻.
14)
즉 앞서 중유무체설을 주장하는 부파에서 인용한 “만약 이 몸을 버리고서 다시 다른 몸을 취한다면, 나는 그것을 ‘생’이라고 말한다”는 경설에서 ‘취한다’는 말은 생유가 아니라 중유를 의미한다는 뜻. 왜냐하면 앞의 비판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유는 생유의 차별로서,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15)
즉 경에서 예류과를 극칠반생(極七返生)이라고 설한 것은 ‘생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일기(一期) 즉 생유ㆍ본유ㆍ사유ㆍ중유의 한 사이클의 생을 최대한 일곱 번 왕복하고서 열반에 든다는 의미라는 뜻.
16)
예류과가 인(人)ㆍ천(天)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부파는 음광부(飮光部)이다.(본론 제64권 ‘예류과’ 참조)
17)
『별역잡아함경』 제8권(대정장2,p.434중), “如來記, 彼得須陀洹, 於人天中七生七死, 得盡苦際.”
18)
예류과가 극칠반생(極七返生)하고서 반열반에 든다고 할 때 일곱 번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유부의 정의(正義)는 예컨대 칠엽수의 잎은 대단히 많지만 한 가지에 일곱 잎만이 달리기 때문에 칠엽수라고 하듯이 예류과를 획득한 이는 이후 최대한 인천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유와 중유를 향수하지만(28有)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에 ‘극칠반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극칠반생의 7생을 인ㆍ천을 합한 7생(인4 천3, 혹은 인3 천4)으로 이해한 것은 화지부(化地部)였다.(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64권 ‘예류과’를 참조할 것)
19)
즉 중유 무체론자는 중유가 존재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예류과는 최대한 열네 번 존재한다’고 말했어야 하였다고 논박하였지만, 그 때 일곱 번의 존재[7有]는 이미 인ㆍ천에 공통된 것이므로 “예류과는 최대한 일곱 번 존재한다”는 경설로써 중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뜻.
20)
즉 중유는 ‘취’와는 다른 것이고, 무간업이라는 말은 명종(命終)하여 다른 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간업은 취와는 다른(혹은 다른 취인) 지옥의 중유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생유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 대론자는 ‘취와는 다른 것[異於趣]’이라는 말과 ‘다른 취[異趣]’라는 말을 동일한 뜻으로 간주하여 이같이 힐난하였기 때문에 중현은 ‘애들 장난[童豎戱]과 같은 말’이라고 폄하하였던 것이다. 유부에 의하면, 중유는 취에 포섭되지 않는, 취와는 다른 것이다.(본론 제21권 참조)
21)
즉 인취에서 무간업을 지어 무간에 지옥취에 태어난다고 할 때, 인취나 지옥취와는 ≺다른≻ 어떤 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지옥취에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취’라고 말한 것이지 취와는 다른(다시 말해 취에 포섭되지 않는) 중유를 ‘다른 취’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
22)
번뇌를 갖는 유정[有惑有情]이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생유를 받는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로서, 단지 이 같은 사실만을 경에서 설하였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되고 만다는 뜻. 다시 말해 무간에 지옥에 태어난다는 말은 더 이상 다른 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지옥의 중유로 태어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23)
즉 ‘중유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무간업도 유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반대로 중유를 부정할 경우 일체의 모든 업(유간업)도 무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
24)
『잡아함경』 제27권 제736경 제740경(대정장2,p.196~7); 장아함 제8권의 『중집경(衆集經)』. 중(中)반열반이란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에 이르는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하는 불환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4권에서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중유의 실재성을 논증하면서 다시 언급한다.
25)
5무간업이란 어미를 해치고, 아비를 해치고, 아라한을 해치고, 화합된 승가를 깨트리고, 악심으로써 부처의 몸에서 피가 나가게 하는 것. 본론 제43권 참조.
26)
중유 무체론자가 인용한 주10)의 게송을 말한다.
27)
『구사론』(제8권, 앞의 책,p.404)에 의하면, “‘중간에 머물 곳이 없다’고 한 앞의 게송의 뜻은 그(악업자)가 인간 세상에서 너무나도 빨리 마멸(磨滅)되어 잠시라도 머무름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혹은 그의 중유가 [당래] 태어나야 할 곳에 이르는 동안 역시 잠시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니, 거기로 가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28)
즉 숙주지증통(宿住智證通, 6통의 하나)은 다만 전생에 속하였던 취(趣)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중유를 언급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는 뜻.
29)
즉 숙주통을 획득한 이가 중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갈랄람(수태 후 첫 7일간) 등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
30)
이 같은 반론은 중유 무체론자인 대중부 계통의 주장이다. 즉 이들은 거울의 영상[像, pratibimba]이 피사체[質, 또는 本質, bimba. 자신의 상을 능히 투사하는 본체를 말함. 이하 상색(像色) 가실(假實)의 논쟁에서의 본체라는 말은 ‘질’ 혹은 ‘본질’의 역어임]와 서로 떨어져서 맺히는 것처럼, 유정의 사유와 생유가 서로 단절되어 있어도 다시 말해 중유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속생(續生)할 수 있다는 것이다.
31)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95). 본 논설은 앞서 본체는 거울과 떨어져 있어도 영상을 맺듯이 유정의 사유와 생유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도 속생(續生)할 수 있다는 대중부설에 대한 세친의 반론 총론에 해당한다. 즉 본체에 근거한 영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세친은 像色無體論者이다), 설혹 실재한다 할지라도 생유와 그것의 비유인 영상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동유(同喩)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의 경우 상색(像色) 즉 영상(광명을 장애하여 중간에 나타나는 다른 색)은 열두 가지 현색(顯色) 중의 하나로서 그 실재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세친의 반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후술)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중유와 상색 모두의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32)
『구사론』 제8권(앞의 책).
33)
즉 우물의 수면과 거기에 비친 달의 영상(혹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그림자)에는 가깝고 먼 거리상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양자는 동일한 처소에 함께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
34)
『구사론』 제8권(앞의 책,p.395~396). 이상은 세친의 상색무체론의 논거로서, 네 가지의 예증을 언급하였다. 첫 번째 거울과 거기에 비친 영상, 두 번째 폭이 좁은 강물에 비친 양안(兩岸)의 영상, 세 번째 그림자(그늘) 속에 있는 거울에 비친 빛의 영상과 그림자 등 이상의 각기 두 가지가 동일한 처소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네 번째 거울의 면과 거기에 비친 영상에는 원근이 있으니, 동시 동처에 생겨난 실유의 존재라면 어찌 원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35)
여기서 ‘중유를 비판하는 힐난’이란 주30)의 본문에서 언급된 중유 무체론자의 힐난을 말한다. 즉 그들은 본체와 거울에 비친 영상[像]의 예로써 중유의 실재성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세친은 영상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이 언급한 예증을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였지만, 이상과 같은 논거로써는 영상의 실재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하 그 이유를 밝힌다.
36)
“……그가 설한 ‘다른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라는 논거는 ‘두 가지의 처소는 동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논증함에 있어 진위부정의 오류[不定失]를 성취하는 것이다.”(『현종론』 제13권)
37)
즉 유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처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대종과 소조색 역시 유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처소에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38)
이는 곧 앞서 경주가 “이와 같이 [두 가지 존재를 함께] 보게 된 것은 온갖 인연이 화합한 세력 때문이지만, 이러한 제 법성의 공능의 차별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고 말한 데 대한 해명이다.
39)
중현은, 거울과 영상이 다같이 실유라면 동일한 처소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세친의 논증에 대해 동일한 처소를 절대적 동일처가 아닌 지극히 인접한 무간의 상태를 ‘동일한 처소’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극미의 접촉[觸]을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절대적 근접[無間]으로 정의하는 것과 유사하다.
40)
즉 경주 세친은 ‘동일한 강물에 양쪽 언덕의 형상이 함께 비치지만 각각의 언덕에서 서로의 영상을 보기 때문에 영상[像色]은 실유가 아니다’고 주장하였지만, 하나의 색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보이는 경우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논거는 미확정의 오류[不成失]라는 것이다.
41)
달의 영상이 어떤 물에는 비치고 어떤 물에는 비치지 않는데, 그것의 결정적 근거가 없다는 뜻인가?
42)
달의 영상은 강물 전체에 비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한정되어 나타난다.
43)
그림자 중에 매달려 있는 거울에는 빛의 영상이, 빛 속에 매달려 있는 거울에는 그림자의 영상이 나타난다.
44)
이는 영상에 대한 라마(邏摩)의 입장을 앞서 그가 비판하였던 형식으로 다시 비판한 것이다.
45)
거울에 비친 영상 자체는 운동을 갖지 않지만, 대개 본체(피사체)가 움직임에 따라, 혹은 소의(즉 거울)를 든 자가 움직임에 따라, 혹은 그것을 보는 자가 움직임에 따라 영상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여긴다.
46)
본론 제3권 ‘6계 중의 공계와 식계에 대하여’ 참조.
47)
만월의 영상이 만월로 보이듯이 달이 멀리 있기 때문에 그 영상도 공계보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뜻.
48)
주44) 참조.
49)
주34).
50)
이는 즉 영상이 만약 실유의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온갖 인연이 화합한 세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51)
거울에 어떤 영상[像色]이 생겨났을 경우 반드시 그것의 근거[依]가 된 거울과 조건[緣]이 된 본체[本質]가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실유(實有)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같은 거울의 영상은 다시 본체가 되어 또 다른 거울에 영상을 낳기 때문에, 거울의 영상은 본체와 마찬가지로 실유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52)
유부에 따르면, 식유필경(識有必境) 인식에는 반드시 경계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경계대상이 되어 인식[覺]을 낳는 것이 참된 유(有)의 상(相)이다.”(본론 제50권 ‘삼세실유론’ 참조)
53)
만약 영상이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 다만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느 때 나타나고 어느 때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마땅히 항상 나타나지 않아 인식할 수 없든지 혹은 항상 나타나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
54)
즉 영상이 본체와 화합할 때만 인식될 수 있는 것[可得]이라면, 그 밖의 다른 유위법도 연(緣)과 화합할 때(다시 말해 현재상태)에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55)
거울에 어떤 영상이 생겨날 경우, 거기에 또 다른 영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이 역시 색법의 특성인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뜻.
56)
주39) 본문 참조.
57)
즉 ‘만약 달의 구슬에는 계(界)의 증감이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차가운 불꽃이 달의 구슬을 도와 능히 수(水)를 낳게 하는데, 뜨거운 불꽃은 달의 구슬을 도와 바로 화를 낳게 하지 않는 것인가?’
58)
여기서 본 논설의 발단과 전개과정을 요약하면, 곡식 등이 그러한 것처럼 중간에 단절됨이 없어야 다른 처소에 속생할 수 있기 때문에 유부에서는 사유와 생유의 중간존재로서 중유(中有)를 설정하였다. 이에 대해 대중부 등 중유 부정론자들은 본체[本質]와 거울 사이가 단절되어 있을지라도 영상[像色]이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사유와 생유 사이가 단절되어 있더라도 속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경주(經主) 세친은 『구사론』에서 영상은 실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예(例)는 비유로서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주31 참조) 이에 중현은 방론(傍論)으로서 경주 세친과 대덕 라마(邏摩)가 제시하였던 영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각각의 논거에 대해 다시 비판하고서 그것의 실유성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설혹 영상의 실재성이 인정될지라도 중유를 비판하기 위해 그 같은 영상의 예증을 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즉 본체가 법이(法爾)로서 낳은 대종이 소의(예컨대 거울)와의 사이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사이가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59)
이는, 영상이 본체와 단절됨이 없이 생겨나는 것임을 알게 된 이유가 아니라 영상의 비유(譬喩)를 중유무체론의 예증(例證)으로 설정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60)
즉 대중부 등에서는 ‘본체는 거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다시 말해 단절되어) 영상을 낳는 것처럼 사유와 생유도 그 사이가 단절되어 있는 것이지 중유로서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상은 본체에 따르는 것으로, 본체가 사라지면 영상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사유가 멸하면 생유 역시 멸한다고 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단멸론에 떨어지고 만다. 곧 중현(衆賢)은 영상이 실유가 아니기 때문에 중유의 비유(譬喩)로 인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동유(同喩)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61)
본론 제7권 ‘근(根)과 경(境)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 참조.
62)
계경에서 “마음은 멀리가고……”라고 설하였지만, 소의(6근)에 근거하지 않은 식(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색을 떠나 오로지 식만으로 유전 상속한다’는 주장의 경증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
63)
이하 거울과 본체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가 없어도 영상이 맺히는 것처럼 소리와 저편 골짜기 사이의 간격이 있을지라도 메아리가 생겨나기 때문에, 사유와 생유 사이가 단절되어 있을지라도(다시 말해 그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제온은 상속될 수 있다는 중유 무체론자의 비판에 대해 해명한다.
64)
본래의 소리와 메아리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고 한다면 메아리는 마땅히 들리지 않아야 한다. 즉 메아리가 본래 소리와 다른 시간대에 들리는 것은 소리가 저편 골짜기에 이르러 부딪칠 때까지 상속하기 때문으로,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사유의 제온과 생유의 제온 사이도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며, 그것이 이른바 중유라는 것이다.
65)
유부에서는 안근과 이근과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不至境]을 취한다. 즉 이근이 만약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면 비근(鼻根)처럼 멀고 가까운 소리의 차별을 이해할 수 없어야 하며, 명료함과 불명료함의 차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본론 제7권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 참조) 여기서 외도는 지경설(至境說)을 주장하는 승론(勝論, Vaiśeṣika)을 말한다. 즉 그들은, 안근은 화(火)를 본질로 하여 멀리 빛을 펼쳐 대상에 이르고, 이근의 경우 소리가 공중을 날아와 귀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24권
1)
즉 유부에서는 곡식은 단절됨이 없이 항상 종자로서 연속되기 때문에 중유의 비유로 들었지만, 사람 등의 유정은 업에 따라 5취(趣)로 유전상속하기 때문에 동류로서 상속하는 곡식을 동일한 법의 비유로 삼을 수 없다는 뜻.
2)
종자는 소멸하면 동일한 곳에서 싹을 낳듯이 안식의 경우도 소멸하는 순간 그곳(안근)에서 생겨나야 하며, 2식은 구기(俱起)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그 밖의 식은 영원히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곡식의 비유는 동유(同喩)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즉 유여사는 무색계에서 몰하여 욕ㆍ색계에 태어날 때 단절된 색법이 생겨나듯이 사유와 생유 사이가 단절되어 있더라도 역시 생유는 생겨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앞서 논설하였듯이 무색계에서 욕ㆍ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무색계에 태어나기 전에 지은 순후수업(그 과보가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업)에 따라 이숙의 색온이 생겨나기 때문에 결코 무색계 상에서 색법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같은 무색계의 예(例)는 욕ㆍ색계에서 상에서의 사유와 생유 사이의 단절을 입증할 만한 동일한 성질의 예[同喩]가 아니라는 것이다.
4)
앞서 유여사는 곡식의 종자는 동류로서 상속하지만 유정은 업에 따라 5취(趣)로 유전상속하기 때문에 곡식의 종자는 동유(同喩)가 될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이 또한 다섯 가지 원인이 되기 때문에 결코 인정할 수 없는[非可愛] 예증은 아니라는 뜻.
5)
앞서 유여사는 곡식의 예를 인용할 경우, 종자가 멸한 곳에서 바로 싹이 생겨나듯이 안근 중에서 식이 멸하면 바로 거기서 다시 생겨난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식 등은 사멸하는 일 없이 하나의 근에서 항상 생겨나야 할 것이라고 힐난하였다.
6)
『대비바사론』 제69권(대정장27,p.358상; 한글대장경120,p.437). 이에 따르면, 자벌레의 비유는 분별론자의 해석이다. “사유로부터 생유에 이를 때 요컨대 생유를 획득하고서 비로소 사유를 버리는 것이니, 이는 마치 절로가(折路迦,거미의 일종)가 풀이나 나무 등에 올라갈 때 먼저 앞발을 딛고 나서 비로소 뒷발을 옮기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와 생유 중간이 단절되어 있다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응리론자(곧 비바사사)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커다란 과실이 있을 것이니, 이를테면 인취 중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자는 마땅히 먼저 지옥의 제온을 획득한 이후 비로소 인취 중의 제온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취(趣)[의 분별]이 허물어지게 될 것이고, 소의신[의 분별]도 허물어지게 될 것이며, 하나의 소의신 중의 두 마음이 동시에 생겨나야 할 것이다”고 힐난하고 있다.
7)
자벌레의 몸은 그 중간이 단절되거나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8)
이상 제23권의 2-1) ‘중유의 이론적 근거[理證]’를 밝히면서 파생된 상색(像色) 가실(假實) 등의 제 문제와 이에 따른 중유 비판에 대한 해명을 마치고, 계속하여 중유의 이론적 근거에 대해 논설한다.
9)
무색계에서 몰하여 유색계에 태어날 때의 색은 무색계에 태어나기 전에 지은 순후수업의 이숙과로서(주3 참조), 무색계에는 색법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색계의 색은 전생의 색과 시간적으로는 무간이 아니지만, 처소 상으로는 무간이라 할 수 있다는 뜻.
10)
즉 유부의 종의에 의하는 한, 무색계에는 처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욕ㆍ색계로부터 무색계에 태어날 때 색신이 멸하였던 처소가 바로 지금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하계에 태어난 곳으로, 지금 생의 처소가 그곳과 무간으로 인접한 곳이 아니라는 뜻.
11)
원문은 ‘非由種故’이지만, 다른 판본과 『현종론』(제13권, 대정장29,p.837상)에 의거하여 ‘非猶豫故’로 고쳐 번역하였다.
12)
중유와 생유는 형상도, 그것을 초래하는 업도 동일하다.(후술)
13)
『장아함경』 제10권 『법보경(法報經)』(대정장1,p.236하) 참조.
14)
『중아함경』 제54권 『체체경(嗏諦經)』(대정장1,p.769상); 같은 경 제37권 『아섭지경(阿攝知經)』(동p.666,상). 건달박(健達縛, Gandharva, 食香身)은 중유의 다른 이름. 원래는 『리그 베다』에서 소마(Soma) 주(酒)와 관계하는 잡신의 일종으로, 불교일반에서는 8부 중의 하나로 제석천에서 음악(악기)을 담당하는 신이지만 여기서는 남녀의 침실과 관계하는 어떤 신비적 존재로서 중유의 5온을 말한다. 한편 중유는 다음 생처(生處)의 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심향(尋香)이라고도 하며, 혹은 오로지 향만을 먹기 때문에 식향(食香)이라고도 함. 이에 대해서는 본권에서 후술하며, 그 이명(異名)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에서 다시 논설한다.
15)
즉 잉태의 순간 악기나 음악 등이 관계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원래의 경문은 ‘건달박’이 아니라 ‘색건타(skandha, 蘊)의 멸’이었을 것이라는 해석.
16)
주14)의 『아섭지경』을 참조할 것. ‘장마족(掌馬足)’은 ‘아섭지(Assalāyana)’의 역어로서, assa(馬)는 바라문의 성이며 lāyana(羅延多那)는 그의 이름이다. 남전(南傳) 『중부경전』93의 Assalāyana-sutta.
17)
바라문(Brahman), 찰제리(Kṣatriya), 폐사(Vaiśya), 술달라(Śūdra). 이상은 인도의 4성계급의 음사. 즉 선행한 본유와 사유의 온이 이미 괴멸하였는데 어떻게 그것의 종성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의 경증.
18)
즉 모태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소멸한 전생의 온이 아니라 건달박(중유)이기 때문에 ‘건달박’은 ‘색건타의 멸’의 오전(誤傳)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뜻.
19)
나찰사(rākṣana)란 반수반인(半獸半人)의 귀신으로, 예컨대 지옥을 지키는 옥졸.
20)
즉 뒤의 경(주14)에서는 중유를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건달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일 뿐인데, 어찌 그것을 잘못 전승된 것이라고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인가? 하는 뜻.
21)
즉 이미 여기에 온 대왕에 대해 ‘어디서 오려고 하였던 것입니까’라고 물었듯이 이미 태어난 상태에 근거하여 ‘장차 태어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말한 것일 뿐 중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22)
원문은 ‘非唯究竟方說遠言, 現見有遠言亦說遠故.’
23)
의성(mano-maya) 즉 ‘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중유의 다섯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서, 정혈(精血) 등의 외적 존재와 인연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의성’이라고 하였다.(본론 제30권 참조)
24)
이는 의성이 겁초의 유정을 의미한다는 경증이다.
25)
단식천(段食天)은 단식을 수용하는 욕계6천을 말하며, 의성천이란 부모의 정혈(精血) 등의 연을 빌리지 않고 마음대로 몸을 성립시킬 수 있는 색계천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부류’란 불환과를 획득한 이를 말함.(본론 제12권 주113 참조) 이는 의성(意成)이 색계를 의미한다는 경증이다.
26)
이는 의성이 무색계를 의미한다는 경증이다.
27)
이상은 각기 의성이 변화신(變化身)과 중유를 의미한다는 경증이다.
28)
다시 말해 ‘의성이 무색계뿐만 아니라 색계 등을 의미한다는 그 밖의 다른 경설(經說)도 의성이 중유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논거가 된다’고 말한다면.
29)
『잡아함경』 제27권 제736경 제740경(대정장2,p.196~7); 『장아함경』 제8권의 『중집경(衆集經)』). 사문과(沙門果)의 세 번째 계위인 불환이란 말 그대로 몰후(歿後) 다시는 욕계에 환생하지 않는 성자로서, 반열반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일곱 가지로 분류되는데, 색계에서의 반열반은 다섯 가지이다. 즉 (1) 중(中)반열반은 욕계에서 몰하여 색계에 이르는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 (2) 생(生)반열반은 색계에 태어난 직후 반열반. (3) 유행(有行)반열반은 색계에 태어난 후 오랫동안 가행을 닦은 후의 반열반. (4) 무행(無行)반열반은 오랜 시간의 가행 없이 반열반. (5)상류(上流)반열반은 범중천 범보천 등 다시 상지로 전생하여 획득하는 반열반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65권 참조.
30)
즉 중반이란 중유에서의 반열반이 아니라 욕ㆍ색계의 중간의 하늘[中天]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사실은 『대비바사론』 제69권(한글대장경120,p.434)에서 분별론자의 설로 주장되고 있다.
31)
즉 중반열반을 욕계와 색계의 ‘중간’의 하늘[中天]에서의 열반이라고 해석할 경우, 생반열반도 ‘생’이라는 하늘[生天]에 머물면서 반열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
32)
유행반의 ‘유행(有行)’ 등은 중반이나 생반의 ‘중’이나 ‘생’과는 달리 처소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다만 가행도를 닦고 닦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에,(후술) 그것을 생반의 경우와는 차별되는 중천의 비유로 삼을 수 없다는 뜻.
33)
즉 중반열반을 자신들의 정의(情意)에 따라 중천(中天)에서의 반열반이라고 하였다면, 생반열반 또한 우리 자신의 정의에 따라 생천(生天)에서의 반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34)
『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 본론 제65권 ‘7선사취’ 참조.
35)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않고 반열반에 들 경우, 그것은 욕계 몰(歿) 후 중유에서의 반열반인 중반열반과 처소와 시간이 다같이 가까우며(제1 善士), 욕ㆍ색계의 중간에 이르거나 혹은 색계에 이르러 반열반에 들 경우, 처소와 시간이 다같이 중간이거나 혹은 멀다(제2, 제3선사). 이를 속반(速般, 중유에서의 신속한 반열반), 비속반(非速般, 얼마 동안 머문 후의 반열반), 경구반(經久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반열반)이라 한다. 이 같은 중반의 3종 불환은 9종 불환의 한 종류로 해석되고 있다. 본론 제65권 ‘9종 불환’ 참조.
36)
이는 『대비바사론』 제69권(한글대장경120,p434)에서 분별론자의 설로 논설되고 있다.
37)
이 논설은 중반열반을 중유에서의 반열반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별설부의 논설로서, 칭우(稱友)에 의하면 여기서 ‘계’란 번뇌종자의 뜻이다. 즉 계(界)ㆍ상(想)ㆍ심(尋)의 상태란 순서대로 아직 번뇌가 현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처음 현행하는 상태에서, 이미 일어나 오래된 상태에서 그것을 끊어 반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계’의 상태는 이근자(利根者)의 경우로 가까운 중반이고, ‘상’의 상태는 중근자의 경우로 중간에 해당하며, ‘심’의 상태는 둔근자(鈍根者)의 경우로 가장 늦어 먼 중반에 해당한다. 보광(普光)도 『구사론기』 제8권에서 ‘계’를 혹종(惑種)으로, ‘상’을 염상(染想)으로, ‘심’을 심구(尋求)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본론에 따른 것이다.(후설)
38)
『증지부경전』iv. 422.
39)
‘성자’는 견도로부터 무학위의 유정을 말하며, ‘현자’는 견도 이하 5정심위 이상의 유정을 말한다. 예컨대 이들이 욕계 불선을 떠나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이러한 선정에 대해 애락심을 낳아 출세(出世)를 구하지 않을 경우, (1) 혹 어떤 이는 상품의 인(因)을 지어 대범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2) 혹 어떤 이는 중품의 인을 지어 범보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3) 혹 어떤 이는 하품의 인을 지어 범중처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나아가 (4) 혹 어떤 이는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이에 대한 염리심(厭離心)을 낳아 열반을 흔락하여 보리를 구하기도 하며, (5) 혹 어떤 이는 나아가 불환과를 증득하고 욕계신에서 능히 번뇌를 끊고 현법열반하는 경우도 있으며, (6) 혹은 초정려를 획득하고서 중반열반하는 경우도 있으며, (8) 혹은 유행반열반(有行般涅槃)하는 경우도 있으며, (9) 혹은 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하는 경우도 있으며, (10) 혹은 상류반열반(上流般涅槃)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색정을 획득하는 자에게는 중유가 없고 또한 거기에는 처소의 상하구별이 없기 때문에, 앞의 3무색정에서는 앞의 열 가지 중 (6)의 중반을 제외하고 앞의 세 가지를 하나로 한 가지로 하여 각기 일곱 가지가, 그리고 유정처(有頂處)에서는 더 이상 상지가 없기 때문에 상류반열반이 제외된 여섯 가지가 있다. 이상 보광(普光)에 『구사론기』 제8권에 따름.
40)
원문에서는 ‘容中天故’이나 다른 판본이나 문맥상의 의미에 따라 ‘容中夭故’로 고쳐 번역하였다. 북구로주(수명이 천 세로 결정되어 있다)의 유정과 도사다천(도솔천)에 머무는 일생소계(一生所繫)의 보살과, 최후신의 보살과, 부처의 수기를 받은 자와, 부처의 사자와, 수신행(隨信行)ㆍ수법행(隨法行)과, 보살과 전륜왕의 어머니로서 그들을 잉태하고 있을 때, 이러한 이들은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본론 제31권 ‘중간의 요절’ 참조) 참고로 이들은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이라도 해코지할 수 없다.(본론 제13권 ‘목숨과 죽음의 관계’ 참조)
41)
곧 중유는 화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본론 제22권 ‘4생’ 참조)
42)
업은 과보를 낳는 시기에 따라 현생에 낳는 순현수업(順現受業), 다음 생에 낳는 순생수업(順生受業), 다음 생 이후에 낳는 순후수업(順後受業)으로 나누어지는데, 중유는 현생도, 차생도, 차후생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낳는 업은 마땅히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되어야 한다는 뜻.
43)
이 두 업에 대해서는 본론 제43권 ‘인업(引業)과 만업(滿業)’에서 상론함.
44)
만약 중유의 형상이 당래 본유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한다면, 예컨대 어미돼지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배었지만 어떤 사정에 의해 그것들이 일시에 죽었을 경우, 그 다섯 마리는 각각의 업에 따라 5취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어미돼지 뱃속에서 5취의 중유가 단박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만약 그 중에 지옥취의 중유가 있다면 그것 역시 당래 지옥과 그 형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미의 뱃속도 불태워야 할 것이라는 힐난.
45)
‘증(增, utsada)’이란 말하자면 8대지옥 각각에 딸린 부속지옥으로(구역에서는 지옥에 딸린 정원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園’으로 번역됨), 본래의 지옥에서 받는 괴로움과는 다른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증’이라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31권(‘8열지옥의 16증’)을 참조 바람.
46)
즉 보살(불타의 깨닫기 전의 명칭)의 중유가 마야부인에게 입태할 때 흰 코끼리 모습을 띤 것은 중유와는 관계없고, 다만 그 지역에서 그것이 길상스러운 조짐[相]이었기 때문이라는 뜻. 『구사론』 제9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407)에 의하면 꿈이란 다만 앞으로 닥쳐올 어떤 일의 조짐을 나타내는 것일 뿐 본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보살의 91겁의 수행에 대해서는 본론 제44권 ‘보살이 닦은 묘상(妙相)의 업’ 이하를 참조할 것.
47)
이는 『구사론』 제9권(앞의 책)에서 정의(正義)로 설해지고 있다. 『구사론』의 범본과 구역에는 ‘쌍생아 즉 쌍둥이 중에서 뒤에 태어난 자를 형이라 하고, 앞에 태어난 자를 동생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즉 중유가 우협(右脇)이 아닌 생문을 통해 입태하였다면 쌍생아는 두 번에 걸쳐 수태된 결과일 것이고, 그럴 경우 먼저 태어나는 쪽은 뒤에 수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동생이고, 뒤에 태어나는 쪽은 먼저 수태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형이다. 이는 당시의 상식을 반영한 논설이라 하겠다.
48)
색계 온갖 천의 신장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제 유정의 신장’)을 참조할 것.
49)
선백 비구니(구역에서는 叔柯羅, Sukrā)는 승가에 가사(袈裟)를 보시하고 수승한 원을 일으켰기 때문에 의복과 함께 태어난다는 것으로, 이 인연설화는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 제4권(대정장4,p.373)에 나온다.
50)
아직 색계의 이탐을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무색계에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음), 사유와 무간에 중유가 낳아질 것이고, 이에 따라 생유ㆍ본유ㆍ사유가 생겨나게 되므로 본유는 중유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중유는 본유와 유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의 힐난.
51)
본유는 이전에 지은 업에 의해 나아가게 될 처소, 예컨대 지옥취나 천취에 근거한 말이지만, 생유 등의 세 유는 다만 탄생이나 죽음, 혹은 죽음과 탄생의 중간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유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
52)
본 단에서는 중유의 아홉 가지의 특징적인 면, 이를테면 안견(眼見,)ㆍ행질(行疾)ㆍ구근(具根)ㆍ무대(無對)ㆍ불가전(不可轉)ㆍ소식(所食)ㆍ주시(住時)ㆍ결생(結生)ㆍ행상(行狀)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1) 중유는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동류의 눈과 청정한 천안에게만 보여진다. (2) 중유는 업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기 때문에 가장 빠른 업의 신통[業通]을 구족하고 있어 세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취로 가는 것을 능히 막을 수 없다. (3) 일체의 중유는 본유의 형상과 같을 뿐더러 가장 승묘(勝妙)한 최초의 이숙이기 때문에 모두 5근을 갖추고 있다. (4) 중유의 작용은 금강석 따위도 능히 차단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無對)이다. (5) 중유는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일단 나아갈 계(界)ㆍ취(趣)가 결정되면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대비바사론』 69권(한글대장경120,p.444)에 의하면, 비유자(譬喩者)는 중유가전론(中有可轉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6) 중유는 미세한 단식(段食)인 향을 먹고 살아간다. 즉 중유는 향(gandha)을 먹기(arva) 때문에, 혹은 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건달박(健達縛, gandharva, 食香, 혹은 尋香)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7) 중유는 생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이 바로 결생하며, 만약 바로 생유의 연과 화합하지 못할 경우 유사한 다른 종류 중에 기생(寄生)하기도 한다. (8) 태생과 난생의 중유는 애욕이나 진에(瞋恚)를 일으켜 결생(結生)하며, 습생의 경우는 태어날 곳의 향내를 맡고 애염(愛染)하여, 화생의 경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생처를 관지(觀知) 애염(愛染)하여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다. (9) 중유가 어떻게 5취로 나아가는가 하면, 천의 중유는 머리를 바로 세워 위로 나아가며, 인간ㆍ방생ㆍ아귀의 중유는 본유의 그것처럼 횡(앞뒤좌우)으로 나아가며, 지옥의 중유는 발을 위로하고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기로 떨어진다.
53)
이를테면 천취 중유의 안(眼)은 능히 5취의 중유를 모두 볼 수 있으며, 인간의 중유는 천취를 제외한 자신과 앞의 세 가지 중유를 볼 수 있다는 뜻.
54)
색계의 중유가 욕계의 유정으로 태어날 수 없듯이, 인취의 중유가 방생 등 그 밖의 다른 취 중에 태어날 수 없다는 뜻.
55)
건달박의 온전한 말은 건달알박(健達頞縛, gandha-arva, gandhārva)이지만, 연음(連音)의 a를 생략하여 단모음으로 발음한 것으로, 설건도(śakandhu)나 갈건도(karkandhu, 대추나무)가 원래 śakāndhu, karkāndhu이지만 단모음으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즉 arva의 어근 √arv는 ‘간다’는 뜻과 ‘먹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건달박은 건달(gandha) 즉 향을 ‘찾아가는 것[尋香]’과 향을 ‘먹는 것[食香]’이라는 뜻이 되며, 따라서 중유는 단식(段食)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6)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12)에서 논설되고 있는 대덕의 설은 다음과 같다. “이것의 지속기간에는 정해진 한도가 없다. 즉 생(生)의 연(緣)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중유는 항상 존재할 것이니, 이것의 명근은 별도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며, [또한 장차] 나아가게 될 취(趣)의 인간 등의 중동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중유의 명근이 최후로 소멸할 때에 마땅히 사유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중유의 명근은 본유의 명근과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본유로서 태어나기 전까지 항상 지속해야 한다는 뜻. 만약 본유의 명근과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중유의 사유 혹은 생유를 별도로 설정해야 하는 모순이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비바사론』 제70권(앞의 책,p.452)에는 중유의 지속기간에 대해 이같이 정해진 기한이 없다는 대덕의 설 이외에도 세 가지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설마달다(設摩達多)는 7ㆍ7일 즉 49일, 세우(世友)는 7일인데, 바사(婆沙)의 정설은 지극히 짧은 시간 지속하고서 결생(結生)한다는 것이다.
57)
만약 아버지가 될 이가 가습미라에 있고, 어머니가 될 이는 지나(至那, 중국)에 있을 경우, 생의 연이 화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중유는 신속하게 결생(結生)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에 대한 해명. 『대비바사론』 제70권(대정장27,p.361상)참조.
58)
이는 『구사론』(제9권, 앞의 책,p.413) 상에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언급된 것이다. 거기서는 다음과 같이 논설하고 있다. “이러한 중유의 몸은 짧은 시간 머문다. 즉 중유 중에서는 생유를 즐거이 희구하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신속하게 가 생과 결합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경우, 결정코 이러한 처소에서 이러한 종류의 유정으로 마땅히 태어나야 한다면, 업의 힘이 바로 이러한 생연(즉 부모)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결정코 이러한 화합연에 탁생(託生)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처소의 다른 종류의 유정에 기생(寄生)하기도 한다.” 『대비바사론』(제70권, 대정장27,p.361; 한글대장경120,p.450) 참조.
59)
예컨대 욕계에서 색계, 혹은 인취에서 천취 등으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면.
60)
‘두(豆)’ 자(字)와 ‘족(足)’ 자는 약간 다르지만 크게 보면 유사한 것처럼, 이와 같은 사소한 차이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
61)
이상은 ‘유부종의에 의하는 한 어떤 한 중유는 생유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생유의 중동분과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함에도 어찌 서로 유사한 것으로 옮겨가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경주 세친의 평파(評破, 『구사론』 제9권, 앞의 책,p.413~414)에 대한 해명이다.
62)
‘미워해야 할[所憎] 부정(不淨)’이란 남성의 정액을 말함. 다른 판본에 의하면 ‘내보내는 곳[所遣, 즉 배설기관]의 부정’으로 되어 있다.
63)
이 같은 점에서 본다면 부모의 정혈은 “마치 땅이나 거름 등은 싹의 연(緣)이 될 뿐 원인이 되지 않듯이 다만 색근의 연이 될 뿐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유정의 유집수의 색근은 무정물인 부모의 정혈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후술)
64)
이는 갈랄람(kalalaṃ, 수태 후 7일 간의 상태)과 그 후 생겨나는 색근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15)에서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업력에 의해 [생겨난] 정혈(精血)의 대종이 바로 근(根)의 소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업이 [색]근의 소의가 되는 대종을 별도로 낳으며, 그것이 정혈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구사론』에서는 양자의 견해를 모두 전하고 있을 뿐이지만, 중현은 후자의 견해에 따르고 있다.(후술)
65)
전 찰나의 무근의 대종이란 부모가 교회(交會)하여 누설할 때(이 때가 바로 중유의 최후찰나)의 한두 방울의 정혈을 말하며, 제2 찰나(생유의 첫 찰나) 정혈을 유근의 대종이라 하였다. 따라서 유여사에 의하면 전 찰나의 무근의 대종을 동류인으로 삼아 유근의 대종이 생겨난다.
66)
즉 유여사는 ‘전 찰나의 무근(無根)의 대종은 중유와 함께 멸하고, 다음 찰나에 유근의 대종(즉 색근)이 속생한다’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색근은 당연히 전 찰나의 유근대종인 중유를 원인으로 하였다고 해야 한다는 뜻. 전 찰나의 무근대종(부모의 정혈)은 다만 땅이나 거름처럼 싹을 낳는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67)
이는 화생의 경우 태어날 처소에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지옥의 처소에 대해 애염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에 대한 해명이다.
68)
여기서 유여사(有餘師)는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16)에 의하면 선구제사(先舊諸師)이다.
69)
생결은 생유를 초래하는 번뇌이며, 기결은 중유를 초래하는 번뇌이다. ‘기(abhinivṛtti)’는 중유의 이명(異名). 본론 제30권 ‘유정의 지속과 4식(食)’ 참조.
70)
태어나지 못하고 탯집 중에서 죽을 이에게도 근(根)이 생겨나는 것은 소용(쓰임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생에 그것을 초래할 만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듯이, 중유 역시 소용 때문이 아니라 전생에 애탐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
71)
즉 멸진정은 이염득(離染得)이 아니라 가행득(加行得)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증은 불환과로서 멸진정(滅盡定)을 획득한 성자, 구분해탈(혹은 俱解脫)은 번뇌의 장애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멸진정을 획득하여 해탈의 장애(불염오무지)마저 끊은 아라한을 말한다.
72)
『장아함경』 제12권 『자환희경(自歡喜經)』(대정장1,p.77상).
73)
즉 계경에서는 열등한 것에서 뛰어난 것의 순서로 네 가지 입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상태에 대해 무지한 입태가 첫 번째이지만(다른 세 가지의 순서는 게송과 동일함), 게송에서는 송문의 구성상 그것을 네 번째 입태로 설하였다는 뜻.
74)
난생은 먼저 입태한 후 미래세 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태생이지만 미래의 사실에 근거하여 난생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는 마치 ‘팔찌를 만든다’ ‘옷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여기서 팔찌나 옷은 미래 사실에 근거하여 말한 것으로, 지금 만들고 있거나 짓고 있는 것은 아직 팔찌 등이 아니다.
75)
모태 중에 머무를 때나 나올 때에도 역시 자기 자신이 그러한 처소에 머물거나 나오는 것이라고 여긴다.
76)
즉 전륜왕이나 독각ㆍ무상각(불세존)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중유로서의 명칭이 아니라 당래 본유의 상태에 근거하여 일컬은 명칭이라는 뜻.
77)
입태와 주태와 출태를 바로 아는 입태는 마침내 성불하는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의 단계에서라는 뜻.
78)
불세존은 성도하기 전에 3아승기겁 100겁 동안 보살로서 정진 수행하였는데,(본론 제32권 ‘겁의 본질’ 참조) 각각의 겁이 세 종류의 입태에 해당한다는 뜻. 이는 달리 말하면 다른 전륜왕이나 독각은 입태 내지 출태를 바로 알지 못하는 네 번째 입태라는 뜻이다.
79)
대부분 흰콩이고 검정콩은 얼마 되지 않을 경우, 그것을 ‘흰콩 무더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살의 생이 상속하는 상태 중에서는 대부분 선심이고 염심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다수에 따라 정지라고 말하였다는 뜻.
80)
“혹은 친애(親愛)의 염심을 일으킨 것일 뿐으로, 비법(非法)의 애염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현종론』 제13권)
81)
여기서 여섯 가지란 앞서 언급한 네 종류의 입태와, 주태(住胎)와 출태(出胎) 각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82)
‘이류(異類)의 두 종류의 입태’란 입태를 바로 아는 유정(전륜왕)과 바로 알지 못하는 그 밖의 유정을, ‘동류(同類)의 두 종류 입태’란 입태와 아울러 각기 주태와 출태에 대해서도 바로 아는 독각과 무상각을 말하는 것인가?
83)
불교의 경우처럼 무아(無我)를 주장한다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ㆍ주ㆍ출태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즉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내적으로 작용하는 자아(ātman) 내지 사부(士夫, puruṣa)가 존재하여 그것이 전지(轉至) 상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유정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아를 주장하는 유아론이 되어야 한다.”(『구사론』 제9권, 앞의 책,p.420) 이하 바로 이 같은 무아와 중유의 윤회상속에 대해 논설한다.
84)
색 등의 감각적 대상은 지각[現量]에 의해 구체적으로 알려지며, 안 등의 감관은 작용을 통해 그 존재가 추리[比量]되지만, 푸루샤와 같은 내적인 자아는 지식획득의 직접적인 수단[量]인 지각과 추리에 의해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비유(非有)이다.
85)
『잡아함경』 제13권 제355경『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p.92하),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
86)
이상은 ‘[모든 온은] 업이 인기(引起)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간다’는 본송의 해석으로, 번뇌와 업을 인연으로 하여 생이 낳아지고, 그러한 생에서 다시 번뇌와 업이 낳아져 또 다른 생을 인기한다는 삼세유전을 밝힌 것이다.
87)
즉 갈랄람은(kalalam, 凝滑)은 잉태 후 첫 7일 간의 응혈의 상태, 알부담(arbuda, 胞]은 그것이 엉키기 시작하는 두 번째 7일 간의 상태. 유정은 계속하여 피와 살이 엉키게 되는 세 번째 7일 간의 상태인 폐시(閉尸, peśi, 血肉), 살이 굳어지는 네 번째 7일 간의 상태인 건남(鍵南, ghana, 堅肉), 사지의 마디가 형성되는 다섯 번째 7일부터 38번째 7일까지의 상태인 발라사거(鉢羅奢佉, praśākha, 支節)(이상 胎內 5位)를 거쳐 출생 후에는 6세까지의 어린이[嬰孩]의 단계, 15세까지의 청소년[童子], 30세까지의 젊은이[少年], 40세까지의 중년[盛年], 그리고 41세 이후의 늙은 이[老年]라는 다섯 단계로 상속 증장하는데(이상 胎外 5位), 이 같은 생의 과정을 통해 산출한 번뇌와 업에 따라 또 다른 생이 낳아지고, 그 생에서 다시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끝없는 생사를 윤회하게 된다. 따라서 번뇌와 업을 소멸하지 않는 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88)
만약 무인생(無因生)이라고 한다면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생겨나야 하며, 그것을 제약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무인생이라 할 수 없다.
89)
본론 제20권 ‘외도의 일인(一因, 이를테면 자재천) 생론(生論) 비판’ 참조.
제25권
1)
여기서 본론(本論)은 『품류족론』 제6권(대정장26,p.715하; 한글대장경117,p.132), ‘緣起法云何? 謂有爲法.’
2)
『잡아함경』 제13권 제35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p.92하), ……俗數法者 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如無明緣行 行緣識 廣說乃至 純大苦聚集起.
3)
식(識)으로부터 시작하는 10지(支) 연기는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12권 제287경(대정장2,p.80하)등에서 설해진다. 참고로 『중아함경』 제1권의 동명(同名)의 『성유경』에서는 연기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다.
4)
여기서 『대연기경』은 『중아함경』 제24권의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8)일 것이다. 여기서는 노사ㆍ생ㆍ유ㆍ수(受, 取의 구역)ㆍ애(愛)ㆍ각(覺, 受의 구역)ㆍ갱락(更樂)ㆍ명색ㆍ식의 9지 연기를 설하고 있다. 참고로 『대연기경』과 유사한 이름의 경으로는 『장아함경』 제10권의 『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이 있지만, 여기서는 12지 연기를 설하고 있다.
5)
『잡아함경』 제14권 제352경(대정장2,p.9상). ‘若諸沙門婆羅門, 於法不如實知. 法集ㆍ法滅ㆍ法滅道跡不如實知.’ 여기서는 사문과 바라문이 참답게 알지 못하는 법으로서 노사ㆍ생ㆍ유(有)ㆍ취(取)ㆍ애(愛)ㆍ수(受)ㆍ촉(觸)ㆍ6입처(入處)의 8지(支) 연기의 법과 그 집(集)과 멸(滅)과 멸도적(滅道跡)에 대해 설하고 있다.
6)
여기서 염오란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내지 노사가 있다’는 유전문(流轉門)의 연기를, 청정이란 ‘무명이 멸하였으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노사가 멸한다’는 환멸문(還滅門)의 연기를 말한다.
7)
이는 바로 12지를 3세(世) 양중(兩重)의 인과관계로 해명한 것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행(과거세 2因)-식-명색-6처-촉-수(현재세 5果)-애-취-유(현제세 3因)-생-노사(미래세 2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7권 주22) 참조. 그렇다고 과거 2인과 미래 2과가 무인(無因)ㆍ무과(無果)의 원인과 결과는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 ‘혹(惑)ㆍ업(業)ㆍ사(事)의 상생관계’에서 해명한다.
8)
여기서 ‘모든 단계[位]’라 함은 태내 5위와 태외 5위를 말한다. 본론 제24권 주85) 참조.
9)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10)
이를테면 성자(聖者)의 경우 현재 생에서 향수한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의 5지(支)가 과거 생의 무명과 행의 결과는 아니며, 아직 애탐이 생겨나지 않은 어린 아이일 적에 요절한 이가 미래 생에서 향수하는 ‘생’과 노사 역시 현재 생의 애ㆍ취ㆍ유의 결과는 아니다. 다시 말해 3제(際)에 걸친 12지(支)의 인과상속은 다만 일반적인 욕계 유정에 근거한 것일 뿐 일체의 유정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경에서는 이 같은 예외적인 사실에 대해서까지 분별하고 있지 않다는 뜻.
11)
이는 12지를 2세(世) 양중(兩重)의 인과로 설한 것으로, 무명ㆍ행ㆍ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의 7지를 전제로, 애ㆍ취ㆍ유ㆍ생ㆍ노사의 5지를 후제로 이해하여, 이 중 전제의 앞의 2지(무명ㆍ행)와 후제의 앞의 3지(애ㆍ취ㆍ유)를 과거ㆍ현재의 원인으로 삼고, 그 밖의 전제의 5지와 후제의 2지를 현재ㆍ미래의 결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사실상 3세 양중의 인과(본론 제27권 주22의 도표 참조)와 동일한 것으로,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2)
연기(緣起)는 범어 pratītya samutpāda(=prati-itya-sam-ut-pāda, 鉢剌醫底參嗢鉢地)의 역어. 이하 이 말의 뜻에 대해 해석한다.
13)
원문은 ‘此總義者, 緣現已合有法昇起.’
14)
예컨대 물의 조건[緣]이 되는 H2O가 현전하면 그것은 바로 물로서 생기한다. 즉 연의 현전은 바로 연의 화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별도의 화합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15)
앞의 해석에서는 발지(鉢地, pādi)의 어근 √pad를 존재[有, sattā]의 뜻이라고 하였다.
16)
『구사론』 제9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446). 원문은 ‘有法至於緣已, 和合昇起, 是緣起義.’ 이에 따르는 한 연기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할 때, 행이라고 하는 법이 무명이라고 하는 연에 이르고 나서 생기하는 것이다.
17)
즉 경주 세친은 발지(鉢地, padi)의 어근 √pad가 ‘존재’의 뜻이고, 이것이 접두사 sam(화합하다)과 ut(상승하다)와 결합하여 ‘일어나다’는 뜻이 되었다고 하였지만, 일어난 것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접두사와 결합하든 하지 않든 그 뜻이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나아가 존재와 일어난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일어난 것도 없고 일어나지 않은 것도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의미로써는 연기의 뜻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18)
이는 성논사(聲論師, Śabdika) 즉 문법학자의 힐난이다. 즉 ‘목욕하고 식사한다(snatva bhunkte)’와 같이 한 작자에 두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은 동사의 절대분사(혹은 遊離分司, gerund, absolute)적 용법(전철을 갖지 않은 어근의 경우 어미 tva를, 전철을 가질 경우 어미 ya를 첨가)에 따라 이미 성취된 것이다. 즉 연기를 ‘~에 이르러(pratitya) 생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이상 ‘~에 이르러’는 생기 이전의 작용이며, 따라서 ‘연’과 ‘기’는 전후하여 존재하는 작용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럴 경우 생기하기 이전에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데, 연에 이른 것은 무엇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아] 작자가 없는데 어떻게 ‘이른다’는 작용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
19)
이상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6~447). ‘만약 먼저 연에 이르고 나서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엇이 연에 이를 것이며, 연에 이르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동시라고 한다면, 아직 연에 이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
20)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7~448).
21)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8). 여기서 ‘이러한 뜻의 말’이란 앞서 경주 세친이 해명한 “미래세의 제행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나려고 하는 상태에 대해 ‘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말을 말한다.
22)
유부의 경우 미래법의 실유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것의 연이 현전하여 화합할 때 작용하는 것(이 때가 바로 현재이다)이지만, 세친의 경우 미래법의 실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연에 이르는 것’은 비존재[無]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후술)
23)
이를테면 본론 제13권(‘상속에 근거한 경주의 유위4상 설 비판’)에서 경주 세친은 상좌(上座)의 설을 인용하여 “제행의 상속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이름하고, 끝내 다한 상태를 설하여 ‘멸(滅)’이라 이름하며, 중간의 상속으로 따라 일어나는 것[隨轉]을 ‘주(住)’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머무는 때의] 전후 차별을 일컬어 ‘주(住)의 이(異)’라고 한다”고 논설하였다.
24)
이는 곧 제행의 상속에 근거하여 ‘생’ 등의 유위상을 설정하였듯이, ‘연에 이르는 것’과 ‘일어나는 것’도 제행의 일 찰나의 상속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변명. 라마는 상좌 스리라타의 제자(본권 주35 본문참조).
25)
본론 제13권 ‘상속에 근거한 경주의 유위4상 설 비판’ 참조.
26)
유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어떤 법이 연에 이르고 나서[至已] 일어난다’고 할 때 법 자체는 3세에 걸쳐 실재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영역에서도 연에 이를 수 있으며, 그런 후 현재 순간 연과 화합하여 바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처럼 이미 일어난 현재법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일어나기 이전에 ‘연에 이르는 것(즉 작자)’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에 이르고 나서’라는 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주22) 참조.
27)
앞서 세친은, 비록 무아이지만 예컨대 ‘나는 목욕하고 나서 식사하였다’고 하듯이, ‘일어나는 것’의 작자를 세속적(언어적) 관행에 따라 ‘연에 이른 것’의 작자로 설하더라도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하였다.
28)
유부의 경우처럼 인과가 동시에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자도 시간적 선후가 전제된 ‘이미’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으며, 만약 사용할 경우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힐난.
29)
원문에서는 ‘어두움이 이르고 나서 밝음이 사라졌다(暗至已燈滅)’이지만 진제(眞諦)역본의 『구사석론』(대정장29,p.107하)이나 일상의 용례에 따라 그 반대로 번역하였다. 이상의 세 예는 앞서 경주 세친이 ‘세속적 용법에 따라 전후의 작용에 동일한 작자를 가설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예증으로, ‘이미’라는 말이 반드시 동일한 작자에게 일어나는 선행된 작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논거이다. 그러나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8)에서 ‘입을 벌리고서 잠을 잔다[開口已眠]’는 등의 뒤의 두 예증은 작자와 작용을 별도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경주 세친의 논거로 설해지고 있다. 즉 앞서 성론(聲論)의 논사는 “한 작자에 의거하여 두 가지 작용이 있을 경우, 앞의 작용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미’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등불이 이르고 나서 어둠이 사라진다’고 하거나 ‘입을 벌리고서 잠을 잔다’고 하는 경우, ‘등불이 이르는 것’과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 ‘입을 벌린 것’과 ‘잠을 자는 것’은 동시이지만 ‘이미’라는 말을 붙여 선후를 나타내는 것(이를테면 開口已眠)은 세간의 언어관습에 불과하며, 만약 그것을 계기(繼起)하는 실제적인 두 작용으로 이해할 경우 ‘입을 벌린 것’과 ‘잠을 자는 것’은 개별적 작용이 되어 입을 벌리고 난 다음에 잠을 자는 것이므로 그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서 잠을 잔다’고 할지라도 한 작자에 의거한 두 가지 작용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따라서 작자와 작용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0)
여기서 ‘이러한 해석’이라 함은 ‘구생하는 연이 현전하고 나서 화합함으로써 존재하는 법이 상승 생기한다’는 중현의 해석(주13의 본문)을 말한다.
31)
여기서 ‘나타낸 것[標]’이라고 함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연기 법설(法說)을 말하고, ‘해석한 것[釋]’이라고 함은 이에 따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의 의설(義說)을 말한다.
32)
다시 말해 뒤의 해석은 비유정수가 아니라 오로지 유정에 관한 연기라고 하였기 때문에 앞의 두 구절을 유정수와 비유정수 모두에 통하는 연기설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33)
이는 곧 본론(本論, 즉 『품류족론』)에서 설한 연기설이다. “무엇을 일컬어 연기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주1참조)
34)
상좌 스리라타(Śrīlāta)는 먼저 어떤 사실을 나타내고서[標文] 그 후에 이를 해석[釋文]하고 있는 일체의 경을 요의(了義)로 이해하였으며(본론 제27권 ‘요의경과 불요의경에 관한 상좌와 경부설 비판’ 참조), 이 같은 경(經)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기 때문에 경량부(經量部)라고 자칭하였는데, 『연기경』에서의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을 유정과 무정 모두를 포섭하는 연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면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는 등 12지분(支分)의 연기는 다만 유정에 관한 연기를 ‘해석한 것’이라고 분별하고 있으므로 그의 요의경관(了義經觀)에 따르는 한 이는 요의경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해석은 ‘일체의 경은 요의경이다’는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35)
이는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50)에서 논주 세친의 4설 중 두 가지로 설해진 것이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와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은] 3제(際)가 전생(傳生)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전제가 있으므로 중제가 있을 수 있고, 중제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후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친연(親緣, 직접적 조건)과 전연(傳緣, 간접적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무명은 무간에 행을 낳기도 하지만 혹은 전전 상속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제행(諸行)을 낳는 것이다.” 뒤의 해석의 경우, 무명은 행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전전 상속하는 힘에 의해 식(識) 등의 제행을 낳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2구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36)
뒤의 해석처럼 2구가 각기 3제의 친인(親因)과 전인(傳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전제는 중제에 대해 친인이 되고 후제에 대해 전인이 되므로 3제 각각에 대해 2구를 중설(重說)해야 한다는 뜻.
37)
주34) 참조.
38)
이하 앞서 대덕 라마의 두 번째 해석(12지가 3제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의 2구는 각기 친인과 전인을 나타낸다)에 대해 비판한다.
39)
즉 법설(法說)의 2구가 각기 친인(親因)과 전인(傳因)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 해석인 12지(支) 각각에 대해서도 두 뜻을 적용시켜 ‘무명은 행의 친인이 되기도 하고 전인이 되기도 하며, 행은 식의 친인이 되기도 하고 전인이 되기도 하며……’라고 설했어야만 하였다는 힐난.(후설)
40)
이숙과는 이미 멸한 전생의 업을 원인(遠因)으로 삼아 생겨난다고 할 때 이를 ‘전인(傳因)’이라고 하지만, 비유자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과거 업의 실유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연기의 앞의 2구를 친(親)ㆍ전(傳)의 두 원인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뜻.
41)
본론 제18권 ‘상좌의 수계설(隨界說) 비판’ 참조.
42)
비유자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과거ㆍ미래법은 실유는 아니지만 일찍이 존재[曾有]하였고, 당래 존재[當有]할 가유(假有)로 주장한다.
43)
수계 즉 종자(種子)와 같은 전지(轉至) 상속하는 공능이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선행한 전법(前法)인 이상 이미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기 때문에 결과를 낳는 힘(공능)을 전(傳)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뜻.
44)
다시 말해 비유자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과거ㆍ미래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법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미래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이상 현재법에도 결과를 낳을 공능이 전(傳)해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뜻.
45)
이는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50) 상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전해지고 있으나, 보광(普光)에 의하면 경부이사(經部異師) 세조(世曹)의 설이며, 칭우(稱友)에 의하면 상좌 세 개(世鎧, sthavira-Vasuvarman)의 설이다. 즉 첫 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원인 없이 제행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인론(無因論)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고, 제2구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는 항상하는 자성(自性)이나 자아는 생인(生因)을 갖지 않아 제행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상캬학파의 자성(puruṣa)이나 바이세시카학파의 자아(ātman)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
46)
“이를테면 원인의 상속이 있으면 결과의 상속도 있으며, 아울러 원인이 생기함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생겨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구사론』,앞의 책,p.451) 이는 보광에 의하면 상좌 동학(同學), 법보(法寶)에 의하면 경부 이사(異師), 칭우에 의하면 상좌 스리라타의 설이다.
47)
세친은 『구사론』에서 앞의 주장에 대해서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앞의 구절은 무용하게 될 것으로, 다만 뒤의 구절 ‘이것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난다’만으로도 능히 두 가지(無因論과 常因論) 모두를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고 비판하고 있으며(앞의 책,p.450), 뒤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것(즉 연기)은 생기에 대해 분별하고자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지속을 설하였겠는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생ㆍ주ㆍ이ㆍ멸의] 순서대로 설하지 않고서 먼저 지속[住]을 설하고 난 뒤에 생기[生]를 설하였겠는가?”라고 비판하고 있다.(앞의 책,p.451)
48)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51~452).
49)
여기서 ‘동방’은 정통 유부의 근거지인 서북인도 카슈미르 지방(북방)에서 본 동방이다. 『대비바사론』에서 정통 유부에 반대하는 이설자(異說者)가 간다라 혹은 서방사(西方師)로 불렸던 것으로 본다면, 이 시기 그들의 근거지가 동방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대당서역기』 제5권에 의하면, 스리라타는 아유타국의 대성(大城) 부근의 한 가람에서 『경부비바사(經部毘婆沙)』를 지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본론 제80권 말미에서는 “현견하건대 동방에는 [불타의] 증법(證法)도 쇠퇴 미약할뿐더러 교법(敎法)도 대부분 은몰하였지만, 북방에는 [불타의] 증법도 여전히 성하며, 따라서 세존의 바른 교법을 유포하는 이가 많다. 이에 따라 아비달마의 전도됨이 없는 뜻은 이 나라에서만 성행하니, 동방 등에서 능히 전습(傳習)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논설하고 있다.
50)
원문은 ‘我意, 不說果有位因方滅. 我意, 但言要果有位因方有滅. 是於果有時, 因方有無義’
51)
“유무생(有無生, 무생이 존재한다)이라는 말에서 ‘유(존재한다)’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약 [무생이]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유(존재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본론 제17권 ‘열반 비실유에 관한 상좌의 경증 재해석’)
52)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51). 여기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초구(初句, 此有故彼有)의 뜻을 나타내고, ‘생기한다’는 것은 제2구(此生故彼生)의 뜻을 나타낸다. 즉 『구사론』에서는 중현의 말대로 이에 대한 어떠한 평석(評釋)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53)
전제 중의 결과는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의 현재 5과를 말하며, 후제 중의 결과란 생ㆍ노사의 미래 2과를 말한다.
54)
예컨대 다수의 부품에 의해 구성된 ‘수레’라는 단일한 관념이 세속제라면, 다수의 부품 자체[法體]는 승의제이다.
55)
예컨대 다수의 부품(승의유)에 의해 수레라는 관념(세속유)이 설정된다고 할 때, ‘수레’라는 단일한 관념은 온갖 부품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것(즉 假有)’이라고 한다면, 실유의 부품은 다른 부품에 근거하여 비로소 작용하는 것(즉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는 세속유에 근거한 연기설이고,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은 승의유에 근거한 연기설이라는 뜻. 참고로 대승공관에서는 부품 또한 다른 부품이 아니라 ‘수레’라는 단일한 관념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법 자체도 무자성이고 공이라는 것이다.
56)
현생의 5과인 ‘식’ 내지 ‘수’가 생겨났기 때문에 별도의 대치도를 닦지 않을 경우 후유의 연이 되는 애ㆍ취ㆍ유를 낳게 된다는 뜻.
57)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24권 주86)의 본문을 참조할 것.
58)
여기서 4구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생겨나지 않음으로 저것이 생겨나지 않는다’이다.
59)
이 같은 예로 볼 때 6구는 뒤에 설하고 있듯이 8구의 오전(誤傳)으로 생각된다.
60)
유부에 의하는 한, 밝음[明]과 어두움[暗, 혹은 무명]은 개별적 실체이기 때문에 밝음이 바로 어두움의 소멸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 ‘무명의 실유 논증’에서 상론한다.
61)
예컨대 ‘등불의 밝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듯이 존재와 비존재에 인과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의 전체적인 의미를 나타낸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은 쓸모없게 될 것이라는 뜻. 왜냐하면 여기서의 연기는 오로지 ‘존재’와 ‘생기’의 조건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존재의 존재’나 ‘비존재의 생기’라는 말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62)
즉 이미 뒤에서 ‘등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등불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소멸하였다)’고 해석하였다면,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은 연기를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 이는 곧 존재[有]와 비존재[無], 법(法)과 자아(我)는 연기적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63)
여기서 『승의공경』은 『잡아함경』 제13권 제335경(일명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p.92하). 云何爲第一義空經? 諸比丘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而滅盡…….
64)
번뇌[惑]와 업을 원인으로 하여 후유(後有, 事)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으로, 앞서 12연기는 3세에 걸친 양중의 인과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 같은 혹ㆍ업ㆍ사의 인과구조이다. 즉 과거세의 무명(惑)과 행(業)을 원인으로 하여 현재생의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事)가 있으며, 현재세의 애ㆍ취(惑)와 유(業)을 원인으로 하여 미래세의 생ㆍ노사(事)가 초래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8권 ‘혹ㆍ업ㆍ사의 분별’ 참조.
65)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28).
66)
즉 무명이 그 밖의 다른 번뇌와 상응하는 법이라면, 그것만을 자재(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
67)
여기서 두 가지 두 논거란 ‘번뇌와 무명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와 ‘무명의 힘으로 말미암아 번뇌가 현행하기 때문에’를 말한다.
68)
즉 앞서 언급한 본송 제1구 ‘숙생에서의 번뇌의 상태[惑位]가 무명이다’에서, 상태[位]라고 하는 말은 12지 전체에 적용된다는 뜻. 여기서 ‘상태[位]’란 분위(分位)를 말하는 것으로, 5온 중 번뇌가 두드러진 숙생의 상태를 ‘무명’이라 하였듯이, 5온 중 ‘행’이 두드러진 숙생의 상태를 ‘행’이라 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7권 ‘분위(分位) 연기설’ 참조) 즉 숙생에 번뇌에 의해 선ㆍ불선 등의 업을 발동하여 현생에 결과를 초래할 때까지의 상태를 총칭하여 ‘행’이라고 한다.
69)
『구사론』 제15권; 본론 제40권 ‘복(福)ㆍ비복(非福)ㆍ부동(不動)의 3업’ 참조.
70)
미래세의 ‘생’을 낳을 현생의 업은 ‘유(有)’라고 한다. 즉 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존재[當有]를 초래하기 때문에 ‘유’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본론 제27권 ‘유(有)’ 참조.
71)
결생하는 찰나 중에서는 5온 중에 ‘식’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 ‘식지(識支)’라고 이름한 것으로(본론 제27권 ‘分位 연기설’ 참조), 이러한 결생의 찰나에는 아직 전5식을 낳게 하는 연(이를테면 안근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때의 식은 오로지 의식(意識)이다.
72)
본론 제3권 ‘식온(識蘊)과 의처(意處)와 7심계(心界)’ 참조. 거기서 유여사(有餘師)는 “오로지 법성(法性)에 대해 일시 작자를 가설함은 식을 떠나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막기 위함이다”고 말하였다.
73)
상좌의 주장은 ‘식이 요별하는 것이라면, 요별하지 않을 때 그것은 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별하지 않는 식이란 이미 소멸한 과거의 식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의 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는 과거ㆍ미래법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한 ‘요별하지 않는 식’이란 토각(兎角)이나 공화(空花)와 같은 비존재일 뿐이라는 힐난.
74)
만약 능히 요별하는 것을 설하여 ‘식’이라고 한다면, 요별하지 않는 것은 ‘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ㆍ미래의 식을 ‘식’이라고 한다면 ‘식’이 아닌 것(즉 요별하지 않는 것)을 ‘식’이라 해야 하며, 그럴 경우 ‘식’(즉 현재 요별하는 것)도 ‘식’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뜻의 상좌의 힐난.
75)
유부에 의하는 한, ‘식’은 3세에 걸쳐 존재하며, 다만 그것이 작용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요별하며, 이 때를 현재라고 한다.
76)
다시 말해 상(想)이나 혜(慧) 등의 제법도 작용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상’과 ‘혜’는 다만 중연이 화합할 때 대상을 개념화하고 통찰하는 것으로, 아직 작용하지 않았거나(미래) 이미 작용한 상태(과거)에서도 법 자체는 실유이다.
77)
식(識)ㆍ상(想)ㆍ혜(慧) 등의 제법은 실유이다. 즉 이러한 법체가 중연이 화합할 때 비로소 능히 요별 등의 작용을 하는 것으로, 만약 이러한 요별자 등의 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작용이 존재할 리 없고, 작용이 없다면 제법의 차별 또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제법의 차별이 없다면 그것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뜻.
78)
『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
79)
원문은 ‘乃至卽當來後有生所起’. 오늘날 전해지는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세존께서 식식(識食) 등의 4식(食)에 대해 설하자 파구나가 물었다. “세존이시여, 누가 이러한 식을 먹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륵구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식을 먹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식을 먹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였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렇게 물어야 하였을 것이다. 나는 식(識)이 바로 먹는 것이라고 말하니, 그대는 마땅히 ‘어떠한 인연에서 식식이 존재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어야 하였다. 그러면 나는 ‘능히 미래의 유(有)를 초래함으로써 상속이 생(生)하게 되는 것으로, ’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6입처가 존재하며, 6입처를 연으로 하여 촉이 있다(能超未來有, 令相續生. 有有故有六入處, 六入處緣觸)’고 답할 것이다.”
80)
즉 『파구나계경』에서 “식식(識食)은 어떠한 인연에서 존재하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식의 연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하지 않고 ‘능히 미래의 유(有, 곧 현생에서의 업)를 초래함으로써 상속이 생(生)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데(前註 참조), 이는 바로 ‘과거의 행을 연하여 현재의 식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뜻으로, 후제(後際)에 준하여 전제를 알게 하는 방식이다.
81)
『잡아함경』 제13권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p.92하). 여기서 법가(dharma saṃketa, 혹은 俗數法)는 5온의 상속 상에 일시 설정된 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은 본론 제24권 ‘무아와 윤회상속’(주83)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82)
여기서 ‘그 밖의 다른 작자’란 요별ㆍ취상(取像)ㆍ관찰(觀察)하는 작용의 주체인 식(識)ㆍ상(想)ㆍ혜(慧) 등을 말한다.
83)
불교에 있어 자아란 온갖 유위행(즉 5온)의 화합을 가설한 것으로 단일한 실체가 아니며, 유위행 역시 찰나에 생멸하기 때문에 전후를 달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후는 유사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은 자아와 같은 단일한 실체로 오인하는데, 이는 마치 사수(祠授)가 하는 일이 천수(天授)의 그것과 유사하다 하여 그를 천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뜻. 여기서 천수(Devadatta)와 사수(Yajñādatta)는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흔히 불려지는 일반적 명칭.
84)
이상 식지(識支)를 분별하면서 파생된 요별자(了別者, 요별의 주체)에 대한 상좌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이제 또 다른 방론(傍論)으로, 경에서 언급된 행(行)ㆍ명색(名色)ㆍ안(眼)과 색(色) 등의 두 가지를 반연하는 세 종류의 식(識)의 차별에 대해 분별한다. 즉 경에서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 ‘안과 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하여 식의 생기조건을 세 가지 유형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85)
이는 12연기를 설하는 거의 모든 경에서 설하고 있는 방식이다.
86)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참고로 여기서는 “아난이여! 만약 식이 명색을 획득하지 못하거나[不得] 혹은 식이 명색에 설립되지 않고[不立] 명색에 의지하지 않더라도[不倚] 식에 생 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없습니다. 아난이여! 그렇기 때문에 식의 원인[因ㆍ習]과 식의 근본과 식의 연은 바로 명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명색을 연하여 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87)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8권 제214경 “有二因緣生識. 何等爲二? 謂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如是廣說.”
88)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여기서는 “만약 식이 모태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명색이 이 몸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을 것인가?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89)
같은 경. 여기서는 “만약 식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명색이 정(精)과 만나겠는가?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90)
즉 식이 모태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혹은 들어갔더라도 장애의 연을 만나 단절되었다면(혹은 들어갔더라도 바로 나오게 되었다면) 명색은 성취되지 않고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결생(結生)할 때의 식은 명색에 대해 연이 된다는 뜻.
91)
같은 경. 여기서는 “만약 어린 남자아이나 어린 여자아이의 식이 첫 순간에 끊어지고 괴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면, 명색이 점차적으로 증장하겠는가? 증장하지 않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92)
영해(嬰孩)나 동자(童子)는 태외(胎外) 5위(位)의 두 단계로, 영해는 출생 후 6세까지이며, 동자는 7세부터 15세까지, 그리고 소년(少年)은 16세부터 30세까지, 중년(中年)은 31세부터 40세까지, 노년(老年)은 41세 이후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0권 ‘욕계 중유에서의 조업(造業)’ 참조할 것.
93)
이러한 경설로 볼 때 본유(本有)일 때의 식 또한 명색의 연이 된다는 뜻.
94)
즉 모태에서 결생하는 찰나의 식은 그것과 동시에 일어난 명색에 대해서도 연이 되지만(이 경우 물론 명색 역시 식에 대해 연이 되지만, 이 때는 5온 중 특히 식이 두드러진 상태이기 때문에 다만 ‘식’이라 함) 그것이 두드러진 상태가 되는 다음 찰나의 명색에 대해서만 연이 된다고 말한다는 뜻.
제26권
1)
즉 결생 이후 갈랄람ㆍ알부담ㆍ폐시ㆍ건남과, 발라사거의 일부(신근과 의근이 생겨난 상태)인 태내 5위의 상태를 말한다.
2)
앞서 비유사(譬喩師)는 무심(無心)의 유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멸진정 중에서도 ‘식’ 자체는 존재하며, 다만 ‘촉’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본론 제13권 ‘譬喩論者의 滅定 有心說 비판’ 참조)
3)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 ‘삼사화합(三事和合)이 바로 촉(觸)’이라는 상좌설 비판‘을 참조할 것.
4)
앞서 마라는 멸진정(滅盡定) 중에서도 의처는 괴멸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역시 의식이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서 그 밖의 다른 연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의식이 생겨난 이상 그것은 의근(意根)과 법경(法境)을 소의ㆍ연으로 한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삼사(三事)의 화합이다. 그런데 만약 ‘식은 존재하지만 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촉은 삼사의 화합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阿難! 若有問者 ‘更樂有緣耶?’, 當如是答 ‘更樂有緣.’ 若有問者 ‘更樂有何緣?’, 當如是答 ‘緣名色也’.” 갱락은 촉의 구역(舊譯).
6)
같은 경. 본론 제25권 주89) 참조.
7)
같은 경.
8)
여기서 ‘처(āyatana)의 특성[相]’이란 인식을 낳게 하는, 다시 말해 심ㆍ심소법을 생장시키는 문(門)으로서의 특성을 말한다.(본론 제3권 ‘3科의 假實論’ 참조) 즉 단일한 극미 자체는 방분(方分)을 갖지 않기 때문에 촉각(신근)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극미의 화집(和集)인 5근과 5경은 5식신의 소의ㆍ연으로서 인식을 낳게 하는 문이 되기 때문에 ‘처’ 자체라고 해야 한다는 뜻. 여기서 극미의 논의는, 이처럼 극미의 경우도 ‘처’가 되거늘 어찌 의(意)이면서 ‘처’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는 뜻의 힐난이다.
9)
즉 식과 명색의 단계에도 신처와 의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작용이 미열(微劣)하여 원만하지 않다. 그래서 명색을 4처가 아니라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10)
6처는 이숙과로서, 전생의 업(즉 이숙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11)
여기서 초품은 「변본사품(辯本事品)」. 본론 제4권 ‘상좌의 유색처(有色處) 가유론 비판’ 참조.
12)
본론 제4권(‘상좌의 有色處 가유론 비판’)에서 상좌는 “5식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 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 하나하나는 소의와 소연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할 때 비로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5식은 극미의 화합(즉 세속유)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였지만, 중현은 거기서 (극미의) ‘화합’은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화합’은 제법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제6의식의 대상이라고 하였다.
13)
본론 제2권 ‘행온은 오직 사(思)일 뿐이라는 상좌설 비판’ 참조.
14)
전5식이 다수의 극미가 화합한 5근과 5경의 세속유를 반연한 것이기 때문에, 무분별이기 때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루지 또한 다수의 법에 근거하여 ‘무상’ 등이라 관찰하며, 그것은 개념적 분별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
15)
예컨대 다수의 부품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수레’라고 하는 단일한 언어적 관념[一合相]은 다만 계탁분별(計度分別,즉 사유)의 대상으로, 무분별인 전5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주12 참조)
16)
즉 계경에서는 다만 ‘지(智)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말라’고만 말하고, 의식을 의지할 만한 것이라고 설한 적이 없었음에도 상좌는 ‘의식은 혹 어느 때 의지할만한 것이 된다’고 하였지만, 정리(正理)에 의해 그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은 경의 뜻에 따른 것도, 따르지 않은 것도 아닌 불분명한 태도[進退躊躇]일 뿐이라는 힐난.
17)
본론 제29권(‘觸에 대하여’)에서 상론한다.
18)
본론 제29권(‘受에 대하여’)에서 상론한다.
19)
‘애’는 3계의 탐(貪)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9결(結) 중의 하나.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한다.
20)
즉 상좌는 ‘수’는 ‘애’의 생인(生因)이 아니라 다만 소연의 경계대상이 될 뿐이라고 하였지만, 원인은 ‘~에 의해’ ‘~때문에’라는 제3 구격(具格)의 용법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에 있어서’ ‘~에 대해’라고 하는 위치 상황 등을 나타내는 제7 처격의 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진실[誠]하지 않다는 것이다.
21)
원문은 ‘因於受 喜愛得生, 是依受因 生喜愛義.’
22)
다시 말해 ‘수’가 ‘애’의 생인이 아니라 경계대상이라고 한다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계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애’가 생겨나고 나서 비로소 ‘수’가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
23)
원문은 ‘그는 애에 대해 기뻐하니[彼於愛喜]’이지만, 여기서 세친의 주장은 앞서 상좌(上座)가 인용한 경증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수에 대해 기뻐하니’로 고쳐 번역하였다.
24)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 ‘삼사화합(三事和合)이 바로 촉(觸)이라는 상좌설 비판’을 참조할 것.
25)
여기서 ‘동토’는 정통 유부의 본거지인 카슈미르(북방)에서 본 동방의 나라. 본론 제25권 주49) 참조. 이는 곧 상좌는 “‘수’에 대해 기뻐하면[喜, 즉 喜愛], 이것을 ‘취’라고 한다”는 경설을 불요의로 판석하여 ‘수’를 ‘애’의 소연의 경계로 해석하였다는 뜻.
26)
앞서 상좌가 인용한 “만약 이러한 온갖 수에 대한 희(喜)를 능히 멸한다면, ‘희’가 멸하였기 때문에 ‘취’ 역시 따라 멸하게 된다”는 경설(經說) 또한 요의가 아닐뿐더러 [희]애와 ‘취’가 별법(別法)이라는 상좌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경증이 되지 않는다는 뜻.
27)
원문에는 “만약 이러한 온갖 ‘애’에 대한 희(喜)를 능히 멸하면(若能滅此於諸愛喜)”으로 되어 있지만, 문맥상으로나 앞서 상좌의 인용문에 따라 ‘온갖 수에 대한 희를……’로 고쳐 번역하였다.
28)
여기서 ‘이와 같은 계경’이란 앞서 상좌가 불요의로 판석한 “만약 ‘수’에 대해 기뻐하면, 이것을 일컬어 ‘취’라고 하며, ‘취’는 ‘유(有)’의 연이 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계경.
29)
여기서 ‘취에 수순하는 법[順取法]’이라 함은 일체 유위법을 말한다.(『품류족론』 제6권, 대정장26,p.715하 ; 한글대장경117,p.133)
30)
욕탐을 비롯한 3계의 탐은 ‘애’의 본질이다.(주19 참조)
31)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7권 ‘요의경과 불요의경에 관한 상좌와 경부설 비판’을 참조할 것.
32)
본론 제25권 ‘무명’ 참조.
33)
여기서 ‘전제(前際)의 연기’라 함은 무명(번뇌)ㆍ행(업, 이상 원인)에 의해 초래되는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결과)의 7지(支)의 연기를 말한다.(본론 제25권 ‘12지의 2세 양중의 인과’ 참조)
34)
여기서 ‘후제(後際)의 연기’라 함은 애ㆍ취(번뇌)ㆍ유(업, 이상 원인)에 의해 초래되는 생ㆍ노사(결과)의 5지(支)의 연기를 말한다. 따라서 ‘애’와 ‘취’는 전제의 연기의 ‘무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애’가 ‘취’에 포섭된다고 함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뜻. 그렇다면 전제의 연기에서 일체의 번뇌를 무명으로 총칭한 까닭은 무엇이고(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론하였음), 후제의 연기에서 ‘애’를 별도로 나열한 이유는 무엇인가? ‘애’가 처음 일어난 탐이라면 ‘취’는 그것이 상속 치성하여 더욱 강력[堅猛]해진 것으로, ‘애’의 힘에 의해 ‘취’가 증성(增盛)될 때 온갖 선ㆍ불선의 경계로 마구 치달아 그것을 추구하여 획득하기 때문에 다수의 ‘취’는 능히 후유(後有)를 인기하는 선ㆍ불선의 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본론 제28권 ‘혹ㆍ업ㆍ사의 분별’ 참조)
35)
변지(parijñā,구역에서는 永斷)란 번뇌의 단멸(이를 斷遍知라고 함)을 말한다. 즉 번뇌의 단멸은 무루지(이를 智遍知라고 함)의 결과이기 때문에, ‘변지’라는 말은 결과상에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본론 제56권 참조)
36)
유부의 번뇌 수면론에서 ‘견(見)’은 유신견(有身見,혹은 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로 나누어지는데, 5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인 5취온(取蘊)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유신견과, 5취온의 단멸과 상주[斷常]에 집착하는 변집견과, 단멸의 입장에서 업도, 업의 이숙도, 해탈도, 해탈도(道)도 없다고 하는 사견은 바로 저열한 지식을 뛰어난 지식이라 집착하는 견취(見取)로 간주된다. 그리고 계금취란 영속[常]의 입장에서 고행 등의 금계를 청정도라고 집착하는 것으로, 이를 별도의 ‘취’로 간주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후술함.
37)
색ㆍ무색계의 번뇌는 외계대상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언어적 관념(내면적 사유)으로부터 비롯된 번뇌이기 때문에 아어취(ātmavāda upādāna, attavādūpādāna)라고 한 것인데, 여기에는 각기 16가지의 견혹(5견을 제외한 貪ㆍ慢ㆍ疑ㆍ無明의 4部)과 세 가지 수혹(탐ㆍ만ㆍ무명) 등 38가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 ‘번뇌의 이명(異名)’ 참조.
38)
취(取)는 수면(隨眠)ㆍ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 등과 함께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에서 논설한다.
39)
다시 말해 ‘알지 못하는 것[不了相]을 무명이라 하기 때문에.’(次註참조) 즉 잘 알지 못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능히 집착하지 못한다.
40)
즉 무명을 ‘취’의 하나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4제(諦)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는 무명은 그 성질이 날카롭지 않아 3유(有)를 능히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그것은 다만 다른 번뇌와 관계(상응)할 때 비로소 ‘취’가 될 수 있다.(본론 제53권 ‘번뇌의 이명’ 참조)
41)
즉 5견 중 계금취만을 별도의 ‘취’로 설정한 것은, 그것이 프라크리트(원질)와 푸루샤(자아)의 식별지를 참된 해탈도라고 여기는 등의 성도(聖道)에 적대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혹은 단식이나 목욕 등을 하늘에 태어나는 도로 간주하고 고행을 청정한 해탈도라고 간주하는 등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를 속이는 지식이기 때문이다.(본론 제53권 ‘번뇌의 이명’ 참조)
42)
견(dṛṣṭi)이란 의식의 모든 순간에 나타나는 보편적 작용(즉 大地法) 중 혜(慧,mati)로 분류되는 판단작용을 말하지만, 여기서의 ‘견’은 물론 그릇된 견해 즉 염오혜(染汚慧)를 말한다. 즉 그릇된 견해 역시 확인 판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43)
원문은 ‘我語之取名我語取. 是於我語能執取義.’
44)
원문은 ‘此有我語說爲我語. 是於此中有我語義’.
45)
안(眼)ㆍ색(色) 등의 5근ㆍ5경은 사실상 모두 색처ㆍ색계이고, 색ㆍ수ㆍ상ㆍ행ㆍ식도 모두 행온이며,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4념처도 모두 법념처에 포섭되듯이, 일체의 번뇌는 본질적으로 ‘나’라는 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어취에 포섭되는 것으로, 바로 이 같은 포섭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일부의 법을 총명(總名)으로 설정하였다는 뜻.
46)
10력과 4무외 등은 불타만이 갖는 공덕[不共法] 중의 하나로, 10력의 첫 번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고, 4무외의 첫 번째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인데, 이는 각기 일체지(一切智)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총론적인 것이다.(10력 등에 대해서는 본론 제75권 ‘18불공법’을 참조할 것)
47)
여기서 ‘아(我)’ 등은 ātman(자아), sattva(존재자), jīva(생명의 원리로써 살아가는 자), jantu(能生者), poṣa(能食者로서 생명의 주체), pudgala(이기성에 근거한 개체자) 등의 의역과 음역으로, 모두 현상적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우 영속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용어이다. 즉 이것들은 모두 경험과 변화의 기체(基體)로서의 자아(혹은 영혼)를 의미한다. 즉 앞에서 중현은 아어취를 ‘나’라는 언어관념을 증장시키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상계의 번뇌로 해석하였지만, 아비달마에서는 이처럼 아(我) 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앞뒤의 말이 서로 모순된다고 한 것이다.
48)
성교는 오로지 언교(言敎)로서 발성된 것뿐만 아니라 이치에 부합하는 일체의 정리(正理)도 포섭한다는 뜻.
49)
이른바 8만의 법온(法蘊)으로 일컬어지는 부처가 설한 성교는 양적 제한이 없기 때문에 ‘성교에서 그 같이 말한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뜻.
50)
이는 즉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아난타도 아비달마에서 해석한 아어취에 대해 ‘경에서 그와 같이 해석하여 설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계경의 일부만을 수지한 상좌가 어찌 그와 같이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 계경에 의하는 한 ‘일체의 모든 계경을 수지한 이는 올달라 뿐이다.’ 올달라(Uttara,혹은 優多羅, 鬱多羅)라고 이름하는 비구나 재가신자로는 여러 명이 있지만, 특히 왕사성의 바라문 출신으로 『테라가타』121ㆍ122송을 설한 이와, 사케타의 바라문 출신으로 동 161ㆍ162송을 설한 이가 유명하다.
51)
이상 상좌의 해명과 힐난. 즉 아비달마에서는 상2계의 번뇌를 아어취라고 하였지만, 이 경문으로 볼 때 아어취란 다만 자아관념에 대한 집착일 뿐이라는 뜻.
52)
‘[아어취는] 아견(我見)을 근거로 한 것이다’고 함은 아비달마에서 제시한 또 다른 방식의 해석이었다. 즉 앞서 “이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능히 ‘나’라는 언어관념[我語]을 인기하는 것이니, 여기서 ‘이것’은 바로 아견(我見)으로, 이를 일컬어 ‘아어’라고 하였다”고 논설하였다.
53)
즉 상좌는 계경에서 언급한대로 ‘나’라고 하는 언어적 관념[我語]에 집착하여 취하는 것을 아어취로 해석하였는데, 그럴 경우 아어취는 유신견과 동일한 것으로(주67 참조) 3계에 두루 통하는 번뇌이다. 그러나 중현의 경우처럼, 집취(執取)되어진 ‘나’라고 하는 언어적 관념에 근거하여(혹은 더불어) 일어난 번뇌를 아어취로 가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욕계에서는 외계대상에 대한 집착에 근거하여서도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다만 상계에 존재하는 번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54)
즉 상좌의 해석대로 아어취가 3계에 두루 통하는 번뇌라고 한다면, 계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했어야 한다는 뜻. 원문은 ‘由我語取 執常恒等’ ‘執我語體 爲常恒住.’ 참고로 앞서 상좌가 인용한 계경의 원문은 ‘汝等昔時, 執我語取 爲常恒…….’
55)
누타(屢吒) 불명(不明).
56)
완전한 인용은 “온갖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으로서 온갖 법성 등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잡아함경』 제14권 제352경) 본론 제25권 주5) 참조.
57)
이상 앞서 상좌가 논란한 “이와 같은 말은 이치에 상응하지 않을뿐더러 성교에서도 일찍이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에 대한 비판과 해명을 마치고, 이하 “앞뒤의 말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에 대해 비판한다.
58)
즉 앞서 상좌가 인용하였던 “출가외도(出家外道)들은 기나긴 세월동안 아(我)ㆍ유정(有情)ㆍ명자(名者)ㆍ생자(生者)ㆍ양육자(養育者)ㆍ보특가라에 대해 집착하였으니, 그들은 무아(無我)에 대해서도 능히 기별(記別)할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아어취를 시설하여 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 아비달마의 논설.
59)
여기서 ‘마땅히 뜻을 세워서는 안 되는 것’은 유아론(有我論)을, ‘마땅히 뜻을 세워야 하는 것’은 아어취(我語取)를 말하는 것인가? 비유자(상좌)의 경우에 대해서는 후술함.
60)
이하 욕취에 대한 상좌의 견해에 대해 비판한다.
61)
여기서 5묘욕이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한 욕탐을 말함.
62)
설해진 것 이외에 다시 별도의 뜻을 갖는 경을 요의경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가 불분명한 것은 모두 요의경이라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
63)
앞에서 논설한 ‘애(愛)와 취(取)의 관계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64)
‘애’는 바로 3계의 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취의 본질이 욕탐이라고 할 경우, ‘애’는 ‘취’에 포섭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65)
만약 욕탐에 집착하는 것을 욕취라고 할 경우, ‘취’가 ‘애’를 연으로 하여 일어났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66)
여기서 동방은 상좌 스리라타의 본거지. 본론 제25권 주49) 참조.
67)
이하 ‘견취’에 대한 상좌의 견해에 대해 비판한다.
68)
본권 주51) 본문 참조. 즉 여기서는 능히 집착하여 버리지 않는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의 5견을 견취의 본질이라고 하였지만, 앞에서는 내적인 법을 자아로 집착하는 유신견을 아어취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앞뒤의 말이 모순된다는 것이다. 만약 아어취가 ‘나’라는 언어적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이는 유신견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견취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취’에는 네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후술)
69)
여기서 4사는 4전도(顚倒) 즉 무상한 것을 항상(영원)하는 것으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70)
상좌의 해석에 의하는 한, 견취란 5견으로서 ‘애’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집착하여 사리(捨離)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견취는 5견과는 다른 존재이다.
71)
이하 ‘계금취’에 대한 상좌의 견해에 대해 비판한다.
72)
5견 중의 계금취란 대자재천(Maheśvara)이나 생주신(生主神,Prajāpati) 등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참된 원인으로 간주하고[非因計因],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스강에 목욕하거나 불 속에 뛰어들며, 해탈하기 위해 고행을 하고 재나 소똥을 온몸에 바르는 등 참된 도가 아닌 것을 참된 도로 여기는[非道計道] 염오혜를 말한다.(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함) 그러나 상좌는 전자만을 5견 가운데의 계금취로 인정하고, 후자는 4취 가운데의 계금취라고 해석하였다.
73)
계금취는 ‘취’인 이상 어떤 사실에 집착한 견해(취 자체)이기 때문에 먼저 관찰하고서 계금을 수지하는 것(취의 개별적 갈래)이라는 뜻.
74)
즉 4취 중의 계금취(먼저 희욕하고서 수지한 계금)는 5견 중의 계금취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취’는 ‘유’ 즉 당래 생을 초래하는 업도 되기 때문에, 당래의 생유는 ‘취’을 연으로 삼는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당래의 ‘생’은 ‘유’를 연으로 삼는다는 정설에 혼돈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75)
유부에서는 ‘유(有)’를 당래 생을 초래하는 업으로 해석하지만, 상좌는 후유(後有)의 생기로 이해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유’는 다만 욕ㆍ색ㆍ무색의 3유로서, 이는 ‘취’를 생인으로 삼고 업을 보조적인 원인으로 삼아 일어난다.(본론 제27권 ‘유는 욕ㆍ색ㆍ무색의 3유라는 상좌설 비판’ 참조) 이에 대해 중현은, 그렇다면 3유의 업은 3유와는 다른 지분으로 설정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3유의 업(즉 업유, 원인)과 3유(즉 이숙유, 결과)는 차별이 없게 되어 결국 인과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외도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비판한다.(후술)
76)
즉 4취 중의 계금취가 5견 중의 계금취가 아니라고 한다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계금취는 당래 생유를 초래하는 업이 될뿐더러 그것은 희욕(喜欲,즉 ‘애’)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애(愛)로 말미암아 유(有)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의 힐난.
77)
원문에는 ‘유(類)로 삼는다’로 되어 있지만,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에 ‘연(緣)으로 삼는다’로 고쳐 번역하였다. 그럴 경우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이라는 집제(集諦)의 네 행상(行相)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무명이라는 번뇌는 ‘애’를 불러일으키는 것[集]이며, ‘애’의 원인이 되는 것[因]이며, ‘애’를 낳는 것[生]이며, ‘애’가 생기하는데 두드러진 조건이 되는 것[緣]이다.
제27권
1)
뒤(주10의 본문)에 설하는 바에 따르면, 이는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잡아함경』 제372경)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能招當來有觸生, 是名有’로 설해지고 있다.
2)
즉 유(有)를 미래생의 존재[有性]로 해석할 경우,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미래세의 ‘생(生)’과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연기의 12지(支)는 감소하여 11지가 되어야 한다는 뜻.
3)
원문은 ‘有謂能令後有生起.’ 참고로 앞서 상좌가 인용한 “유란 말하자면 당래 후유(後有)의 생기이다”의 원문은 ‘有謂當來後有生起’이다.
4)
즉 과거(前際)의 무명(혹)과 행(업)을 원인으로 하여 현재의 생(즉 識)이 생겨나게 되고, 현재의 애ㆍ취(혹)와 ‘유’(업)을 원인으로 하여 미래(후제)의 생이 초래된다.
5)
여기서 세 가지 ‘유’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를 말하는 것으로, 만약 ‘유’가 유부 아비달마에서 주장하듯이 후유를 낳는 원인으로서의 업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3유와는 다르게 별도로 설했어야 하였다는 뜻의 힐난.
6)
즉 12연기의 ‘유지(有支)’에 대해 경전에서 그것이 업유라고 별도로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3계의 ‘유’라고 한다면, 상좌 또한 욕ㆍ색ㆍ무색계의 탐 등이 수증된 법을 3계의 ‘유’라고 하였을 뿐 무정물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12연기의 ‘유’에는 무정물도 포섭되어야 한다는 힐난.
7)
이처럼 12연기의 유지(有支)를 업유로 해석하는 것은 유부 아비달마뿐만 아니라 대승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법온족론』 제12권(대정장26,p.512중하. 한글대장경115,p.676~678)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유’를 3계의 5온(즉 3유), 능히 후유를 초래하는 업, 생분(生分)의 5온[識食] 등 세 가지로 설하였지만, 12연기에서의 ‘유지’는 신(身)ㆍ어(語)ㆍ의(意) 3악행의 업유로 해석하고 있다. 『발지론』 제1권(대정장26,p.921중, 한글대장경176,p.19)에서는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와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의 차이에 대해 논설하고 있는데, 그 해석인 『대비바사론』 제24권(대정장27,p.125상중)에서는 이에 대해 논설하게 된 이유를 계경에서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행’과 ‘유’의 본질이 업이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8)
본론 제25권 ‘행’ 참조. 숙생의 업은 과보가 이미 초래되어 그 상(相)이 원만하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생의 업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후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유’라고 하였다.(전술)
9)
『칠유경(七有經)』(『장아함경』 제10권 『法報經』,대정장1,p.236중)에서 7유란 지옥유(有)ㆍ방생유ㆍ아귀유ㆍ천유ㆍ인유ㆍ업유(業有)ㆍ중유. 본론 제21권 주45) 참조.
10)
본권 주3)의 본문 참조.
11)
즉 “업이 당래 후유를 초래하는 것을 ‘유’라고 이름한다”고 한 경설에서 ‘유’는 이숙인인 업의 존재[業有]와 이숙과로서의 존재[異熟有]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라는 뜻.
12)
구 수계는 종자(種子)의 이명(異名)으로, 경량부에서 주장한 인과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 본론 제18권 ‘상좌의 수계설(隨界說) 비판’;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13)
여기서 일분(一分)은 일인(一因) 즉 구 수계를 말함인가?
14)
즉 상좌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과거ㆍ미래법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주장한 일체의 생인(生因)으로서의 구(舊) 수계(隨界)는 항상 현재의 존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현재의 존재는 현재 업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일체의 생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뜻의 힐난.
15)
미래세 업의 과보로 생겨난 것을 의미하는 말에는 여러 가지 차별적인 명칭이 있지만, 현재의 업유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所有,즉 이숙유]도 그 중의 하나라는 뜻.
16)
주14) 본문 참조.
17)
‘이숙계(vipāka-dhātu?)’라고 함은 이숙의 수계(隨界)를 말하는 것인가?
18)
즉 무명을 비롯한 12연기의 각각 지분은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지만, 두드러진 상태에 근거하여 각각의 지분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무명이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무명’이라 하고, 노사가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노사’라고 이름하였다는 뜻. 이를 분위(分位) 연기설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한다.
19)
12연기 가운데 유지(有支)라는 명칭의 근거는 업유이지 이숙유가 아니라는 뜻. 즉 업과 동시에 존재하는 이숙유는 업유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20)
즉 12연기 중의 생지(生支)는 ‘생’의 작용이 가장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말한 것일 뿐 불상응행법 중의 생상(生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21)
여기서 ‘상좌가 시설한 힐난의 말’은 불명(不明). 참고로 본론 제13~14권에서는 유부의 유위4상을 비판한 경주 세친을 비롯한 상좌와 비유자의 견해가 인용되고 있다.
22)
이상에서 논설한 12지(支)의 관계를 다시 요약하면, 무명과 ‘행’은 과거 생에서 지은 현재 생의 원인이고, ‘식’에서 ‘수’에 이르는 5지는 그 결과이며(이상 과거ㆍ현재의 인과), ‘애’와 ‘취’와 ‘유’는 현재 생에서 짓는 미래 생의 원인이고, ‘생’과 노사는 그 결과이다(이상 현재ㆍ미래의 인과). 그리고 3세에 걸친 인과적 관계를 떠나 실제적인 작용관계로 본다면 ‘애’와 ‘취’는 번뇌이기 때문에 무명에 해당하고, ‘유’는 업이기 때문에 ‘행’에 해당하며, 미래 생의 첫 찰나 5온인 ‘생’은 ‘식’에, 노사는 명색에서 ‘수’에 이르는 4지(支)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록 12지만을 설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없는 생사의 윤환적(輪環的) 과정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23)
여기서 ‘두루 노사의 연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함은, 현생의 경우 ‘식’이 명색 하나만을 낳듯이 미래생의 경우도 ‘생’은 ‘명색 내지 수’를 포함하는 의미로서의 노사가 아니라 다만 ‘노사’ 하나에 대해서만 연이 되어야 한다는 뜻.
24)
12연기는 전제와 후제의 인과관계로 구성된 것으로, 현생에서의 후제의 결과는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의 다섯 가지였으며, 미래생에서의 후제의 결과는 생과 노사이다. 이 중 ‘생’이 이미 ‘식’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노사는 나머지 네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5)
다시 말해 ‘생’이라는 말에 후제의 모든 결과가 포섭될 수 있기 때문에 나머지 4지(즉 노사支)를 다시 언급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26)
여기서 ‘생의 [그릇된] 방편을 추구한다’고 함은 비쉬누천과 같은 신을 우주만유의 원인이자 주재자로 여겨 그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비쉬누(Viṣṇu)신은 브라흐마ㆍ쉬바와 함께 힌두교의 3신의 하나. 그는 온갖 만상으로 화현한다.
27)
다시 말해 생-명색-6처-촉-수-노사의 순서로 설하였다면, 지분의 수는 증가하여 16지가 될 것이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반복이기 때문에 실제 지분의 수는 감소할 것이라는 뜻인가?
28)
즉 후제의 결과와 그것의 생기[生]는 바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허물을 드러내기 위해 ‘생’이라는 말로 총설(總說)한 것이지만, 12연기상에서는 ‘생’과 ‘노사’의 두 단계로 설한 것은 후제의 결과는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뜻.
29)
구름이 있는 곳이라 해서 반드시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구름은 비의 조건이 되듯이,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늙어 죽는 것은 아니지만(예컨대 요절하는 경우) 태어남은 늙음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설하게 되었다는 뜻.
30)
상온과 행온과 색온. 이 경우 상온은 전부이지만, 색온은 표ㆍ무표업과 5처를 제외한 성ㆍ향ㆍ미ㆍ촉의 4경(境), 행온은 무명ㆍ사(思, 이는 행)ㆍ촉ㆍ탐과 무참ㆍ무괴ㆍ혼침ㆍ도거 등(이는 纏으로, 바로 ‘취’임)과 생ㆍ이(異, 이는 老)ㆍ멸(死)를 제외한 작의 등의 일부이다.
31)
전(纏,paryavasthāna)이란 근본번뇌로부터 파생된 수번뇌(隨煩惱,upakleśa)로서, 무참ㆍ무괴ㆍ악작ㆍ수면(睡眠)ㆍ도거ㆍ혼침ㆍ분(忿)ㆍ부(覆)ㆍ질(嫉)ㆍ간(慳) 등 열 가지. 본론 제54권 참조.
32)
이는 『구사론』 제9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430~431)에서의 찰나연기에 관한 정설로, 다만 거기서는 “명색이 머무는 근을 설하여 ‘6처’라 하며, 6처가 그 밖의 다른 것(즉 경ㆍ식)에 대해 화합하는 것을 ‘촉’이라 하며, 촉을 영납(領納)하는 것을 ‘수’라고 이름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33)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본론 제25권 주88) 참조. 즉 ‘식’이 모태 중에 들어가고 나서 비로소 명색이 갈랄람을 성취하므로 식과 명색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일 찰나에 구기(俱起)할 수 없다는 경증. 상좌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동시인과를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 ‘동시인과에 관한 상좌의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34)
앞서 유여사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사[思]가 ‘행’이다”고 하였지만, 『연기경』중에서는 ‘행에 복(福)ㆍ비복(非福)ㆍ부동(不動)의 3업(혹은 신ㆍ어ㆍ의 3업)이 있다’고 설하였다는 뜻.
35)
본론 제25권 ‘총설’ 참조.
36)
본론 제15권 ‘구유인(俱有因)’ 참조.
37)
본론 제25권 ‘총설’ 참조.
38)
“따라서 일 찰나에도 연기의 뜻이 존재하는 것이다.”(『현종론』 제14권) 이상은 앞서 상좌설을 비판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된 여섯 이유 중 다섯 번째 ‘계경에서 [다르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에 대한 해석.
39)
본권 ‘요의경과 불요의경에 관한 상좌와 경부설 비판’ 참조할 것.
40)
인등기(hetu-samutthāna)란 표ㆍ무표업을 인기하는 심ㆍ심소를 말하는데, 업을 짓고자 할 때 현재의 인등기심은 미래의 업을 인기하기 때문에 ‘전인(轉因)’이라고도 한다. 곧 여기서 ‘전’이란 일으킨다[起]는 말이다. 그리고 찰나등기(tatkṣaṇa-samutthāna)란 업과 동시병존하면서 업의 생기에 충족조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업이 현재하는 찰나에 그것과 불상리(不相離)의 관계로서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수전인(隨轉因)’이라고도 한다. 본론 제36권 ‘표ㆍ무표업을 낳는 두 가지 등기심’ 참조.
41)
원속연기란 다음 생 이후에 과보를 받거나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지 않은 업과 번뇌로 말미암아 여러 생에 걸쳐 12지가 상속한다는 연기설로서, 아득히 먼 과거의 무명과 ‘행’에 의해 현생의 ‘식’ 등의 결과가 초래되며, 현생의 ‘유’에 의해 아득히 먼 미래세의 생과 노사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연박(連縛) 연기란 12찰나에 걸친 동류와 이류의 인과로서 무간에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42)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32) 경주 세친은 12연기를 분위연기설로 해석하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의 ‘전설’로 논설하고 있다. 이를테면 경량부에서는 ‘12연기의 각 지가 5온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5온에서 5온으로 변이하는 것이 되어 인과의 차별은 허물어지고 만다’고 하여 유부의 분위연기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후술)
43)
즉 계경에서는 다만 “식이 모태에 들어간다”(『중아함경』 제24권 「大因經」)고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결생할 때에는 오로지 ‘식’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12지가 모두 5온을 본질로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44)
즉 연기란 5온의 상속으로 선행한 5온으로부터 5온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6처ㆍ촉ㆍ수(즉 苦果로서 생겨난 것)도 5온을 본질로 하고, 번뇌(애ㆍ취)도 업(유)도 5온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생(生,苦果)ㆍ혹(惑)ㆍ업(業)이라는 생기의 구체적 순서를 어기게 된다는 뜻의 힐난.
45)
무명도, 행도, 식도 모두 5온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5온을 원인으로 하여 5온이 생겨나고, 다시 5온을 원인으로 하여 5온이 생겨나는 것이 되어 원인의 차별을 설정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의 힐난.
46)
예컨대 현실적으로 ‘애’는 ‘수’를 연으로 하여 자꾸자꾸 생겨나지만, 분위연기설을 인정하는 경우 ‘수’의 단계를 거쳤으면 더 이상 ‘애’는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힐난.
47)
즉 계경(예컨대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주57참조)에서 무명 등의 12지에 대해 각기 개별적으로 설하고 있는데, 만약 그것들이 다 같이 5온의 상속이라고 한다면, 계경의 설을 어기게 된다는 뜻의 힐난.
48)
상응인은 본론 제16권에서, 구유인은 제15권에서 논설하였다.
49)
아라한(즉 應供)이면서 ‘애’와 ‘취’에 따라 생과 노사를 초래하는 이라면, 그는 마땅히 아라한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그가 아라한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그 자신만이 그에게 귀의해야 할 것이라는 뜻의 힐난.
50)
즉 연기는 오로지 이생 범부의 유전(流轉)을 밝힌 것이지 아라한과 같은 성자에 적용되는 이치가 아니라는 뜻.
51)
즉 상좌가 인용한 『연기경』에서는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하고, 여기서 무명이란 전제 등에 대한 무지라고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만, 또 다른 경에서는 ‘행’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탐 등에 의해 은폐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상좌는 “12연기에서의 무명은 온갖 번뇌를 말한다”고 하여 경과는 달리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경』은 요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좌가 해석한 요의경의 정의에 대해서는 후술함.
52)
즉 경에서 심ㆍ심소법을 다 무명이라고 한 것은 상좌가 ‘무명을 포함하여 행온은 오로지 사(思)의 차별이다’고 말한 것보다 심각한 오류로서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요의경이라 할 수 없다는 뜻. 무명이 ‘사’의 차별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행온은 오직 사(思)일 뿐이라는 상좌설 비판’을 참조할 것.
53)
여기서 ‘동방’은 정통 유부의 본거지였던 서북인도 카슈미르 지방(북방)에서 본 동방이다. 본론 제25권 주49) 참조.
54)
여기서 ‘표석’이라 함은 어떤 사실을 먼저 나타내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즉 상좌는 예컨대 “‘무명’를 연하여 ‘행’이 있다”는 사실(標文)을 먼저 나타내고, ‘무명’과 ‘행’의 의미 내지 양자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釋文)을 요의경이라 하였다.
55)
즉 이 경에서는 문답을 통해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어 해석하고 있을지라도(다시 말해 標文과 釋文을 모두 갖추고 있을지라도), 이치상 색ㆍ향ㆍ미ㆍ촉의 조색(造色)의 화합물로서 가법(假法)인 머리털 등이 바로 견고성을 본질로 하는 실법(實法)의 지계(地界)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시 추구해 보아야 하는 불요의경이라는 뜻. 인용한 계경은 『중아함경』 제7권 「상적유경」(주60 참조).
56)
경량부라는 명칭은 ‘경(經)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같은 의미에서 중현은 본론상에서 ‘경량부’ 혹은 ‘경부’라는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 ‘아비달마 설자(說者)에 대한 세친의 불신 비판’을 참조할 것.
57)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대정장2,p.85상). 云何無明? 若不知前際, 不知後際, 不知前後際, 不知於內. 不知於外, 不知於內外, 不知業, 不知報, 不知業報……. 是名無明.
58)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2). 즉 무명을 무지(無知)라고 말한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요의설)을 나타낸 것인데, 여기에 경에서는 설하지 않은 또 다른 말(즉 5온)을 보충하여 그 뜻을 취하는 것은 요의경을 불요의경으로 간주하는 것이라는 뜻의 힐난. 참고로 『구사론』에서는 이 같은 경부제사(經部諸師)의 견해를 차후에 논설할 ‘연기법(緣起法)과 연이생법(緣已生法)’(본론 제28권)에서 언급하고 있다. 즉 유부의 분위연기설에 따를 경우 12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원인이 되기도 하고(연기) 결과가 되기도 하는데(연이생), 그것은 바로 경설에 따르지 않은 자의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59)
예컨대 “상(想) 등도 역시 ‘촉’을 연으로 삼지만 별도의 원인을 관찰하여 다만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고 나타내었을 뿐이다.”(『현종론』 제14권)
60)
『상적유경』은 『중아함경』 제7권(대정장1,p.464)에 실린 경으로, 여기서 내(內) 지계(외 지계는 대지 등)로 언급된 머리털이나 손톱 등에는 지계(地界) 뿐만 아니라 수(습윤성)ㆍ화(온난성)ㆍ풍계(운동성)도 존재하지만, 두드러진 특성(즉 견고성)에 근거하여 지계로 나타낸 것이라는 뜻.
61)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3~444). 즉 머리털을 떠나 별도의 내적 지계(地界)가 존재하지 않듯이, 전제 등에 대한 무지를 떠난 별도의 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62)
예컨대 무명의 단계에 색 등의 5온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행’은 오로지 무명에 의한 것으로,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있으며, 무명이 없으면 ‘행’도 없다. 그럴 때 무명만을 ‘행’의 연기(즉 원인) 지(支)로 설정할 뿐인데, 그 밖의 5온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
63)
즉 아라한에게 비록 5온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번뇌가 없기 때문에 행(行)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 따른 결생의 식(識)도, 나아가 애ㆍ취ㆍ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5온을 본질로 하는 분위연기의 12지를 세울 수 없다는 뜻의 힐난.
64)
원문은 是故經義卽如所說. 다시 말해 “무명을 전제 등에 대한 무지(無智)라고 설한 주57)의 경설은 바로 요의(了義)이다”는 뜻.
65)
동일과 구유인이란 동시 존재하는 두 가지 이상의 법이 서로를 도와 동일한 결과를 낳는 것으로(본론 제15권 주20 참조), 경주는 앞에서 ‘모든 단계에도 다 5온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라고 하여 5온이 결과에 대한, 동시 존재하는 원인임을 밝혔다.
66)
이를테면 5온 중 무명의 행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무명’이라 일컫고,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하였지만, 무명 이외의 법 또한 ‘행’에 대해 동일과 구유인이기 때문에 무명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결과 또한 그러하다는 뜻.
67)
원문은 ‘故非如說卽是經義.’ 이는 주64)의 부정으로, 무명을 전제 등에 대한 무지(無智)라고 설한 주57)의 경설은 바로 요의가 아니라는 뜻. 즉 경에서는 “‘수’를 연하여 ‘애’가 있다”고만 설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애’를 갖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경부사가 인용한 계경은 다만 거기서 설하고 있는 뜻만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요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68)
‘정리(正理)가 『아급마(阿笈摩)』에 어긋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아급마』가 정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에 주목할 것.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유부는 경(『아급마』)보다 논(正理,즉 아비달마)을 우위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논(論)은 요의이나 경은 불요의이다.”(본론 제25권 ‘총설’); “아비달마는 능히 온갖 경을 결택(決擇)하고, 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판별하기 때문이다.”(본론 제1권 ‘아비달마 說者에 관한 세친의 불신 비판’ 참조)
69)
본 분위(分位)연기설에 대한 논설은 ‘네 종류의 연기 유형 중에서 세존께서 설한 것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구사론본송』 제1구에서 “전설에 따르면, 분위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인정되니”라고 하였던 것을 “부처님께서는 분위에 근거하여 설하였으니”로 고쳐야만 하였다는 뜻.(주42 참조) 참고로 『현종론』(제14권)에서는 실제로 이 같이 개작되어 설해지고 있다.
70)
3제에 걸친 12연기가 오로지 유정에게만 적용되는 까닭은 그들만이 3제를 차별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9권, 앞의 책,p.433)
71)
첫 번째는 자아의 존재에 관한 의심이고, 두 번째는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아는 바로 온[卽蘊]인가, 온과는 별도의 다른 존재[離蘊]인가, 온이면 색인가, 내지 식인가 하는 자아의 자성에 관한 의심이며, 세 번째는 존재양태에 관한 의심이다. 이하 미래ㆍ현재 생의 경우도 동일하다. 즉 3세에 걸친 이러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3세에 걸친 유정의 연기로서 12지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72)
『잡아함경』 제12권 제296경(대정장2,p.84중하). 인용문 중에서 연기(pratītya- samutpāda)가 원인이 되는 능생(能生)의 법이라면 연이생(pratītyasa- mupānna)은 결과가 되는 소생(所生)의 법이다.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본론 제28권에서 상론한다.
73)
즉 앞에서 ‘식’에서부터 ‘유’에 이르는 8지(支)는 중제 즉 현재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설하였다고 하였는데, ‘애’ 등의 지분은 그것이 존재하는 중제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후제의 어리석음도 역시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칭우(稱友)는, 이러한 세 지분은 중제가 아니라 오로지 후제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제28권
1)
여기서 사(事,vastu,vatthu)란 혹(惑), 즉 번뇌와 업의 이숙과로서 드러나는 현행과 미래의 괴로움을 말함. 즉 그 같은 괴로움은 바로 다시 제 번뇌와 업의 소의처(所依處)가 되기 때문에 실체로서의 의미인 ‘사’로 일컫게 된 것이다.
2)
중제(즉 현재)의 8지 가운데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는 전제(과거)의 결과로서 ‘사(事)’이며, 수ㆍ취와 유는 후제(미래)의 원인으로 혹과 업이다. 그러나 전제의 무명ㆍ행은 중제의 원인으로 혹과 업일 뿐이고, 후제의 생ㆍ노사는 중제의 결과로서 ‘사’일 따름이다.
3)
즉 과거세(前際)의 혹인 무명은 현재세의 혹(애ㆍ취)과 동일하므로 그 이전에도 식ㆍ명색 등의 5지의 결과가 있음을 현재의 8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미래세(後際)의 ‘사’인 생ㆍ노사는 현재세의 사(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와 동일하여 5지에 애ㆍ취ㆍ유의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ㆍ노사에도 역시 이에 상응하는 무명ㆍ행의 원인이 일어난다. 이처럼 현재세의 혹ㆍ업ㆍ사의 관계를 통해 혹(무명)ㆍ업(행)의 과거세와 사(생ㆍ노사)의 미래세에도 각기 그 원인과 결과를 추리해 볼 수 있기 때문에, 12지연기에서 과거세에서는 원인만을 설하고 미래세에서는 결과만을 설한 것이다. 본론 제27권 주22) 도표 참조.
4)
즉 초 찰나의 애탐을 ‘애’라고 하였다면, 결생(結生)의 찰나인 식(識)과 생(生)뿐만 아니라 ‘애’도 찰나성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12지(支) 가운데 ‘식’과 ‘생’만을 찰나성이라고 말한 것인가? 하는 힐난.
5)
즉 애(愛)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초 찰나(初念)의 애탐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대상에 대한 애탐을 말하며, 그것이 화합한 것이 ‘치’이기 때문에 ‘식(識)’ 등과 같은 찰나성이 아니라는 뜻.
6)
“그렇지만 ‘취’라고 하는 말에 온갖 번뇌가 모두 다 포섭되는 것이다.”(『현종론』 제14권)
7)
즉 노사(미래세 事)는 바로 현재세의 ‘사’인 명색ㆍ6처ㆍ촉ㆍ수의 4지와 동일하며, 아울러 무명(과거세 惑)은 바로 현재세의 혹인 애ㆍ취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에, 노사는 무명의 원인이 되며, 무명은 노사의 결과이다. 각 지의 상응관계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8)
즉 『아함경』에서는 일반적으로 12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설한 다음 반드시 순대고취(純大苦聚)의 집멸(集滅)을 설하고 있는데, 만약 ‘사(事)’인 노사는 ‘사’와 ‘혹’의 원인이 되고, ‘혹(惑)’인 무명은 ‘혹’과 ‘사’의 결과가 되어 12연기가 유정의 끊임없는 전전유전의 존재형식으로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면, 단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생을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만 설하고 ‘……내지 순대고취의 집이 있다’고는 설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앞에서의 힐난처럼 유시유종(有始有終)이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
9)
상좌 스리라타는 제경(諸經)을 논거로 삼아 무명과 비리작의의 상호인과로써 유부의 혹ㆍ업ㆍ사의 3도설을 대신하였다. 즉 비리작의는 근ㆍ경ㆍ식 삼사 화합하여 촉이 성립할 때 무명을 근거(因)로 하여 함께 생겨나며, 촉의 순간 비리작의는 다시 촉에 의해 낳아진 온갖 수(受)를 조건(緣)으로 하여 애(愛)를 산출함으로써 무명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무명을 떠난 촉(즉 비리작의를 여윈 촉)은 전도된 것이 아니며, 전도되지 않은 촉은 능히 염수(染受)의 연이 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무명을 떠난 수)은 더 이상 애의 연이 되지 않는다. 곧 이 같은 이증(理證)에 따라 무명을 인(因)으로 하는 비리작의는 촉(觸)ㆍ수(受)를 통하여 무명의 연이 됨을 안다’는 것이 본 논설의 요지이다. 이는 『구사론』(제9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438) 에서 어떤 다른 논사[餘]의 해석으로 언급되고 있다.
10)
즉 ‘그 밖의 다른 경’에서 ‘비리작의에 의해 무명이 생겨나고, 무명은 다시 비리작의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을지라도, 노사와 무명의 결과와 원인을 혹ㆍ업ㆍ사의 윤환적 관계로 해석한 앞서의 『대연기경』에 대해서도 마땅히 다시 논설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
11)
『구사론』(앞의 책,p.439)에 의하면, 상좌는 이치상으로도 비리작의가 무명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고 하였다. “무명을 떠난 수(受)는 능히 애(愛)의 연이 되지 않으니, 아라한의 ‘수’는 더 이상 ‘애’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도됨이 없는 ‘촉’은 능히 염수(染受)의 연이 되지 않으며, 또한 역시 무명을 떠난 ‘촉’을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아라한의 ‘촉’은 더 이상 전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증(理證)에 의해 비리작의가 무명의 연이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2)
유부에서는 분위연기설에 따라 제온(諸蘊) 중 6처가 가장 수승한 상태를 ‘6처’라고 하였으므로 촉의 연은 오로지 6처만이 아니다. 즉 제온 중 6처가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6처를 연하여 촉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본론 제27권 ‘분위연기설’ 참조.
13)
『구사론』 제9권(앞의 책, p.439~440).
14)
본론 제27권 ‘3제에 걸쳐 12연기를 설한 이유’ 참조.
15)
『잡아함경』 제12권 제296경(대정장2,p.84중),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 이 경에 따르면, 인연법(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식의 원인을 말하며, 연생법(연이생법)이란 이와 같은 인연(원인)에 따라 일어난 무명ㆍ행 등의 결과를 말한다.
16)
여기서 본론은 『품류족론』 제6권. ‘무엇이 연기법인가? 말하자면 유위법이다.’(대정장26,p,715하); ‘무엇이 이생법(已生法)인가? 말하자면 과거ㆍ현재법이다.’(동p.715중)
17)
『품류족론』 제6권(같은 책,p.715하), ‘緣起法云何? 謂有爲法.―緣已生法―亦爾’. 즉 『구사론』(제9권, 앞의 책,p.440)에서는 이에 따라 연기법과 연이생법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본론(本論)의 문구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는 차별이 없으니, 다 같이 일체 [유위]법을 포섭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18)
밧줄이나 반지, 혹은 남자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존재에 근거하여 그 같이 말하는 것처럼, 미래법 역시 이생법이 아니지만 미래 생겨나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생법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의미에서 본론(『품류족론』)에서 일체 유위법을 연이생법이라 이름하였다는 해석.
19)
만약 이미 생겨난 것이 아닌 법(미래법)도 이미 생겨난 연이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미 소멸한 것이 아닌 현재ㆍ미래법이나 무위법도 역시 과거법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
20)
존자 망만(Pūrṇāśa)의 뜻은 원인에 의해 이미 생겨난 것을 연이생법이라 하고, 다른 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을 연기법이라 한다는 것이다. 곧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의 유위법도 능히 원인이 되어 후법을 낳기 때문에 연기법이라 할 수 있으며(제1구), 아라한 최후심의 온은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연이생법이지만 더 이상 후법을 낳지 않기 때문에 연기법이 아니다(제2구). 그 밖의 과거ㆍ현재의 유위법은 이미 생겨난 것이면서 능히 후법을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연기이면서 연이생법이다.(제3구) 그리고 무위법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능히 다른 법을 낳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연기도 아니고 연이생법도 아니다.(제4구)
21)
주15)의 『잡아함경』 제12권 제296경.
22)
즉 미래 생과 노사를 기준으로 할 때 현재의 애ㆍ취ㆍ유를 무명과 행이라 말할 수 있으며, 과거의 무명과 행을 기준으로 할 때 현재의 식ㆍ명색ㆍ6처ㆍ촉ㆍ수를 생과 노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전제의 무명ㆍ행과 후제의 생ㆍ노사도 현재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23)
택멸을 비롯한 여러 무위법은 소연연과 무장(無障)능작인이 되지만, 증상과를 낳지 않는다.(본론 제15권 ‘능작인’ 참조)
24)
이를테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할 때 ‘무명’은 원인으로서의 상태[因分]이고, ‘행’은 결과로서의 상태[果分]이지만,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할 때에는 ‘행’이 원인으로서의 상태이며, ‘식’이 결과로서의 상태이다.
25)
『승의공경』은 『잡아함경』 제13권 제335경(일명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俗數法者, 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如無明緣行, 行緣識, 廣說乃至 純大苦聚集.’ 여기서 법가(法假,dharma saṃketa,『제일의공경』에서는 俗數法)란 바로 연기를 말하는 것으로, 인과상속 중에 일시 연기를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법가’라고 하였다는 뜻.
26)
열반(택멸무위)은 유위법이 아니기 때문에 원인이 되지 않지만, 결과(즉 離繫果)는 되기 때문에 연이생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도에 의해 생겨난 결과[所生果]가 아니라 증득된 결과[所證果]이다. 다시 말해 이때 도의 작용은 다만 택멸의 ‘득’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계과는 무루도에 의해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증득된 결과라고 한 것이다.(본론 제17권 ‘택멸무위의 인과관계’ 참조)
27)
열반은 원인으로서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연기’가 아니라는 뜻.
28)
이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들을 함께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구사론』 제9권, 앞의 책,p.441)는 힐난의 답이다. 즉 12지 각각의 원인적 상태를 ‘연기’라 하고, 결과적 상태를 ‘연이생’이라고 한다면, 원인이 될 때에는 결과가 되지 않으며, 결과가 될 때에는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뜻이 함께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29)
어떤 이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들로 불리지만, 아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로 불리는 것으로, 두 가지 뜻이 동시에 성취되는 일은 없다.
30)
『구사론』 제9권(앞의 책,p.442). 본론 제27권 주58) 참조.
31)
여기서 유여사는 『대비바사론』 제23권(대정장27,p.116하)에 의하면 분별론자(分別論者)이지만,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대중부, 『논사(카타밧투)』에 의하면 화지부와 동산주부의 설이다. 인용한 계경은 『잡아함경』 제12권 제296경.
32)
즉 계경에서 ‘연기법성은 상주한다’고 하였는데, 연기가 바로 무명이라고 한다면, 상주하는 연기법이 바로 무상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33)
다시 말해 “경에서 ‘연기의 법성은 상주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연기를 무위라고 한다면.”
34)
연기와 4대종은 다 같이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성이 상주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유여사는 연기의 경우는 무위로 인정하였으면서 4대종은 무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뜻의 힐난.
35)
무명이 ‘명이 아닌 것[非明]’이라고 한다면, 명은 바로 75법 가운데 혜(慧)이기 때문에 ‘혜’를 제외한 안 등의 74법은 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두를 무명이라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무명을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명의 비존재[無]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할뿐더러 책상의 비존재와 명의 비존재는 비존재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책상의 비존재도 무명이라고 해야 한다.(후술)
36)
무명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의 ‘명’ 역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명이 명을 장애한다’는 말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장애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뜻.
37)
상좌 종(宗)에서 수계를 떠나 무명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듯이, 유부의 종의에서도 무명의 ‘득’을 떠나 무명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득’을 무명의 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38)
즉 상좌는 “무명의 ‘득’이 존재하지 않을 때라도 무명은 일어날 수 있지만, 수계를 떠나 무명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반대로 이생의 경우에서 보듯이 수계를 갖지 않을 때라도 성법(聖法)은 일어날 수 있지만, ‘득’을 떠나 본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
39)
본론 제18권 ‘상좌의 수계설 비판’ 참조.
40)
상좌의 종의에서 무명은 ‘명’의 비존재, 혹은 ‘명’은 무명의 비존재이므로 무명이 현전하지 않는 상태는 바로 ‘명’(무명을 영원히 떠난 상태)이다.
41)
즉 무명이 ‘명’의 비존재라면, 아라한과에서 물러나 ‘명’을 상실하게 되면 무명이 생겨나야 할 것인데, 어떠한 법이 대치하여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힐난.
42)
사견에 대해 익히거나 닦아도 치(癡)가 맹리해지고, 흑암에 대해 익히거나 닦아도 치가 맹리해지는 것이라면, 상좌가 무명의 두 종류라고 한 사견(邪見)과 흑암(黑闇)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뜻. 참고로 유부 법상에 의하는 한 사견의 ‘견’은 혜(慧,염오혜)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치(癡,무명)와는 다른 것이다.
43)
즉 인용한 계경에서 “‘탐’과 ‘진’은 탐욕과 진에에 대해 혹은 익히고, 혹은 닦으며,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맹리함을 성취하게 된다”고 하였으면서, ‘치’의 경우 “사견에 대해 그렇게 할 때 맹리함을 성취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치’와 사견은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탐 등의 경우와 달리 혼동을 초래하게 된다는 뜻의 힐난.
44)
원문에는 ‘현행(現行)으로 설정하였다’로 되어 있지만, 문맥에 따라 ‘견행’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45)
예컨대 『잡아함경』 제13권 제298경(대정장2,p.146하), ‘彼云何無明? 若不知前際, 不知後際, 不知前後際, 不知於內, 不知於外, 不知內外, 不知業, 不知報, 不知業報, 不知佛, 不知法, 不知僧, 不知苦, 不知集, 不知滅, 不知道, 不知因, 不知因所起法, 不知善不善. 有罪無罪, 習不習, 若劣若勝, 染汚淸淨, 分別緣起 皆悉不知, 於六觸入處 不如實覺知, 於彼彼不知不見, 無無間等, 癡闇無明大冥, 是名無明.
46)
지(智)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책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로서 동일하다는 뜻.
47)
원문은 ‘亦非離色等應成無明故’이지만, 문맥상 리(離)를 리(理)로 고쳐 번역하였다. 이는 즉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명이라고 한다면, 색 등에도 ‘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색 등도 무명을 성취해야 한다는 뜻.
48)
즉 12연기상의 무명지(支)는 전체적으로 번뇌를 의미하지만, ‘명’에 의해 대치되는 무명은 다만 ‘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능히 혜를 염오하게 하는 공능을 지닌 개별적 실체이다.
49)
즉 친구(mitra)에 반대되는 원적을 ‘친구 아닌 이(amitra)’라고 할 때, 그러한 이는 친구 이외의 모든 이를 말하는 것도, 친구로서의 성상(性相)이 부재하는 어떤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듯이, 무명(avidyā) 또한 명(vidyā)이 아닌 것도, ‘명’의 성상이 결여된 것도 아닌, ‘명’에 반대되는 실유의 개념이라는 뜻.
50)
이를테면 어두움을 ‘밝음이 아닌 것’ 혹은 ‘밝음이 결여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밝지 않은 모든 존재, 혹은 밝음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밝음 이외 모든 존재나 상태를 어두움이라고 해야 한다. 어두움이란 밝음에 반대되는 별도의 존재라는 뜻. 비백(非白)은 불선, 비애(非愛)는 좋아하지 않는 것.
51)
이하 무명의 개별적 실재성을 밝힌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무명을 악혜(惡慧) 즉 염오혜로 이해하여 그것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다시 말해 무명을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명의 부재’, 비리작의에서 비롯된 ‘선혜(善慧)의 결여’로 이해하였는데, 앞서 유부가 ‘무명은 명의 비존재가 아니다’고 한 것도 여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52)
이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결(結,saṃyojana)은 유정을 결박시키는 의식작용으로, 애(愛)ㆍ에(恚)ㆍ만(慢)ㆍ무명ㆍ견(見)ㆍ취(取)ㆍ의(疑)ㆍ질결(嫉結) 등 아홉 가지. 박(縛,bandhana)은 속박의 뜻으로, 애탐ㆍ진에ㆍ무명박 등 세 가지. 수면(anuśaya)은 심신의 상속과 함께 증장하며 그것을 항상 계박하는 번뇌로서, 욕탐ㆍ진ㆍ견ㆍ의ㆍ만ㆍ유탐ㆍ무명ㆍ수면 등 일곱 가지. 누(漏,āsrava)는 6근으로부터 누출되어 유정을 3계에 오래 머물게 하고 해탈로 나아가는 것을 장애하는 의식작용으로, 욕(欲)ㆍ유(有)ㆍ무명루 등 세 가지. 폭류(ogha)는 홍수가 모든 것을 씻어내듯이 유정의 뛰어난 일을 표탈(漂奪)시키는 의식작용으로, 욕ㆍ유ㆍ견ㆍ무명폭류 등 네 가지. 액(軛,yoga)은 유정을 6취나 9지(地) 등의 존재로 속박시키는 의식작용으로 내용은 폭류와 같다. 이상의 번뇌론에 대해서는 본론 「수면품」 제53~54권에서 상론함.
53)
명(明)을 제외한 안(眼) 등의 일체법 역시 무명(정확히는 非明)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일체법이나 자아 등의 비존재는 ‘결’ 등의 번뇌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 설한 무명은 그와는 다른 별도의 실체라는 뜻.
54)
온갖 악혜(염오혜) 중에는 다섯 가지(즉 5見: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ㆍ계금취ㆍ견취)가 있는데, 이는 판단작용[推度]으로 정의되는 ‘견(見)’을 본질로 한다. 즉 염오혜 역시 확인 판단된 것이기 때문이다.(‘먼저 審慮하고 決度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 한다.’ 본론 제6권 ‘견ㆍ비견 분별’ 참조) 그러나 무명(즉 癡)은 무지(無智) 무현(無顯)으로서(본론 제10권 ‘대번뇌지법’ 참조) 몽매성(蒙昧性)의 작용이기 때문에 판단작용의 ‘견’과는 다르며, 따라서 악혜와 무명은 다르다는 것이다.
55)
즉 무명이 악혜라고 한다면, 혜를 본질로 하는 ‘견’과 상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견’과 상응한다고 할 경우, 심ㆍ심소는 각기 일 찰나에 일법(一法)만이 생겨난다는 사평등(事平等)에 위배되는 것이다.
56)
『잡아함경』 제26권 제710경(대정장2,p.190중) 참조.
57)
『구사론』 제10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459). 보광(普光)과 법보(法寶)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의 구석(求釋)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마음의 오염을 잠재(종자)적 형태로든 현행의 형태로든 무명이 뒤섞인 상태[間雜]로 이해함으로써 무명과 혜는 일 대 일로 대응하는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무명을 악혜 즉 염오혜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58)
원문은 ‘若現有非有能互相染則’이지만, 『현종론』(제14권)에서는 ‘現’이 ‘許’로 되어있다.
59)
원문은 ‘熏習本無更何所滅.’ 『현종론』에서는 ‘熏習理無, 當何所滅’(훈습은 이치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마땅히 무엇을 소멸해야 할 것인가?)로 되어있다.
60)
훈습은 수계(隨界,종자)의 이명으로, 무명의 종자가 바로 무명은 아니다. 본권 ‘무명의 명의에 관한 상좌설 비판’ 참조.
61)
무명의 자성은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이지만,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체법을 다 아시는 세존만이 헤아릴 수 있다는 뜻. 주45) 참조.
62)
『잡아함경』 제26권 제710경(대정장2,p.190중), ‘比丘, 離貪欲者心解脫, 離無明者慧解脫.’
63)
원문은 ‘又此如明說爲因故’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판본이나 문맥에 따라 ‘又此無明……’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4)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마쳤다[所作已辨]’는 말은 흔히 무학의 아라한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그의 자각내용을 나타낸다.
65)
어두움이 다만 ‘밝음의 결여[明無]’라고 한다면, 밝음 또한 ‘어두움의 결여’라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순환논리에 빠져 결국 지식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해야 하는 뜻.(이 같은 相依相待의 논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을 참고할 것)
66)
예컨대 어두움에는 ‘조금 어두운 것’과 ‘더욱 어두운 것’ ‘매우 어두운 것’ 등의 차별이 있는데, 만약 밝음에 근거하여 어두움이 가설된 것이라고 한다면, 조금 어두운 것은 매우 어두운 것에 비해 ‘어둡지 않은 것’이 되어야 하며, 끝내 어두움의 차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이러한 논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 참조)
67)
유부에 의하는 한, 어두움[闇]은 청ㆍ황ㆍ적ㆍ백과 그림자ㆍ밝음 등과 더불어 12현색 중의 하나이다.(본론 제1권 ‘5경(境)’ 참조)
68)
이를테면 본론 제26권 ‘안(眼) 등 5근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 제4권 ‘상좌의 유색처 가유론 비판’ 참조.
69)
본론 제1권 ‘5경(境)’; 제5권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續)’ 참조.
70)
『중아함경』 제3권 「화파경(和破經)」(대정장1p.434하), “몸이 괴멸하고 생명이 끝나 목숨이 이미 다하고 나면, 현세의 일체의 각(覺)도 바로 다 멈출 것이니, 마침내 싸늘한 시체[冷]가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화파여, 이는 마치 나무로 인해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과 같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를 갖고 그 나무뿌리를 산산조각으로 베고 끊고서 태워 재로 만들거나 혹은 바람에 날리거나 혹은 물로 씻어버리면, 화파여, 어떠한가? 그림자는 나무로 인해 존재하므로 그 그림자도 이를 쫓아 이미 끊어졌으니, 그 원인이 소멸하여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인가?”
71)
부처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었기 때문에 염오무지뿐만 아니라 불염오무지도 끊었지만, 성문(아라한)과 독각은 염오무지는 끊었지만 불염오무지는 끊지 못하여 현행한다. 본론 제1권 주3) 참조.
72)
앞서(‘무명의 명의에 관한 상좌설 비판’) 상좌는 “이와 같은 종류(즉 ‘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심(心)과 심소(心所)를 총칭하여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하 그에 관한 논주 중현의 비판을 참조할 것.
73)
여기서 금강도단이란 유정지(有頂地,비상비비상처) 제9품의 수혹(修惑)을 끊는 무간도. 이후 이를 작증(作證)하는 진지(盡智,즉 해탈도)가 생겨나 아라한과를 증득한다.
74)
불공법이란 오로지 일체의 지혜(즉 十智)를 구족한 불타만이 갖는 공덕으로, 10력(力)ㆍ4무외(無畏)ㆍ3념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 여기서 염주란 어떠한 경우에서도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불타는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공경하고 능히 받들어 행하더라도 그에 대해 기뻐하지 않으며[제1 염주], 공경하지도 않고 받들어 행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 근심하지 않으며[제2 염주], 어떤 이는 공경하고 능히 받들어 행하며 또 어떤 이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 기뻐하거나 근심함이 없이 머문다[제3 염주].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5권 ‘18불공법’을 참조 바람.
75)
『잡아함경』 제34권 제962경(대정장2,p.245하) 참조. 여기서 여시지(如是知) 여시견(如是見)은 4제에 대한 지견(知見)을 말하고, ‘애’는 애착을, ‘견’은 5견을, 존재하는 모든 유성(類性)은 무명의 존재를 말하며, ‘흔적도 없는 적멸’이란 무여열반을 말한다.
76)
그 밖의 다른 만(慢)이란 7만 가운데 아만을 제외한 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만(卑慢)ㆍ사만(邪慢)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함.
제29권
1)
본론 제1권 ‘색온’ 이하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색의 의미’를 참조할 것.
3)
즉 과거와 미래의 색 등은 비록 변애(變礙)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다시 말해 시간적 변이성과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을지라도 색과 비색(非色,무색)의 차이가 변애에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할 수 있듯이, 비록 불상응행법은 소연을 갖지 않을지라도 그 밖의 무색의 4온은 색과는 달리 소연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명’이라 이름할 수 있다는 뜻.
4)
즉 색법은 거친 것[麤]이기 때문에 ‘명’에 의하지 않고 드러나지만, 무색의 4온은 미세하기 때문에 ‘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드러날 수 없다. 즉 무색의 4온은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명(名)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명’이라 이름하였다는 뜻.
5)
예컨대 무색계에서 추구하는 것은 색이 아니라 ‘명’이기 때문에 색을 3계 5취에서 두루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6)
앞의 게송(가타)은 본론 제14권 ‘명ㆍ구ㆍ문의 3신’에서도 인용되고 있는데, 이 게송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를 참조할 것.
7)
무심의 유정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 ‘무상정’과 ‘멸진정’에서 상론하였음. 즉 그들은 심ㆍ심소가 일시 소멸하였기 때문에 ‘득’이 상속의 능성인(能成因)이 되지 않는 것이다.
8)
여기서 ‘언의’란 유위의 이명(異名)으로, 5온 즉 일체 유위법은 모두 말(能詮)의 근거(所詮)가 되기 때문에 언의이다. 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 참조.
9)
18계 중 안계(眼界) 내지 신계(身界), 색계 내지 촉계가 색법이며, 12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한데, 안계 등이라는 말[名] 또한 결국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10)
원문은 ‘已於名中間出識故’이나 다른 판본과 문맥에 따라 ‘簡出’로 고쳐 번역하였다.
11)
등무간연이란 후 찰나의 식의 근거가 되는 전 찰나의 식을 말하는 것으로, 전식(前識)은 후식(後識)의 소의가 된다. 그런데 만약 ‘명’ 중에서 식을 별도로 분별하여 능의라 하고, 그 밖의 명색이 소의라고 한다면, 그는 마땅히 구유(俱有)의 동시인과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후술)
12)
『성유경(城喩經)』은 『잡아함경』 제12권 제287경(대정장2,p.80하). 『대연기경(大緣起經)』은 『중아함경』 제24권의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8). 본론 제25권 주3), 4) 참조.
13)
본론 제15권 ‘구유인’ 참조.
14)
겁초(劫初) 온갖 유정들의 업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허공에 의지하여 풍륜(風輪)이 생겨나고, 여기에 다시 업의 증상력에 따라 구름과 비가 내려 수륜(水輪)이 형성되며, 또 다른 바람이 수륜을 후려쳐 상부가 응고하여 금륜(金輪)이 된다. 따라서 금륜(즉 대지)은 수륜에 근거하는 것이면서, 이와 동시에 존재한다. 이상은 기세간의 형성과정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에서 상론한다.
15)
즉 왕과 신하는 서로에 의지하지만, ‘왕의 신하’라 하고 ‘신하의 왕’이라 하지 않는 것은 왕의 세력이 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16)
다시 말해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경우, 이때 식과 명색은 전후로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동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
17)
다시 말해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분위(分位)연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식과 명색은 서로에 대해 연이 된다’고 설한 것은 찰나(刹那)연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는 뜻. 분위연기와 찰나연기에 대해서는 본론 제27권 ‘연기에 대한 네 가지 해석’ 참조.
18)
명색의 ‘명’은 무색의 4온을 의미하므로, 중유의 명색이 연이 되어 무간 찰나에 인기한다고 하면, 이때 중유의 ‘명’에는 식도 포함되는가? 하는 힐난. 만약 식이 포함된 것이라면, 어떠한 까닭에서 중유의 명색(즉 5온)은 다만 결생의 식만을 인기하고 나머지 4온(심소와 색)은 인기하지 않는 것인가?(후술)
19)
심ㆍ심소의 전후 생기를 주장할 경우, 각각의 법은 시간을 달리하여 현행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경계대상을 소연(생기의 조건)으로 삼는다고 해야 한다.
20)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3권 ‘비유논자의 멸정유심설(滅定有心說) 비판’을 참조할 것.
21)
이는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의 취지이다.
22)
다시 말해 상좌가 해석한 것처럼 명색이 식의 생연이 아니라 다만 식이 머물게 되는 근거라고 한다면.
23)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참고로 여기서는 “아난이여, 만약 식이 명색을 획득하지 못하였거나[不得] 혹은 식이 명색에 설립되지 않고[不立] 명색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도[不倚] 식에 생 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난이여! 그렇기 때문에 식의 원인[因ㆍ習]과 식의 근본과 식의 연은 바로 명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명색을 연하여 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다.
24)
여기서 『대연기경(大緣起經)』은 『중아함경』 제24권의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8). ‘當知所謂緣名色有更樂.’(동p.579하).
25)
같은 경(p.579상), ‘緣求有利, 緣利有分, 緣分有染欲, 緣染欲有著…….’ 참조
26)
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의근(意根)이지만, 소연은 5경과 법경(法境)이며, 전5식의 소의는 5근과 의근이지만, 소연은 오로지 각기 자신에 대응하는 경계대상이다.
27)
앞서 언급하였듯이 상좌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제법의 구생(俱生)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8)
원문은 ‘我觀緣起, 至識便還, 過此於餘心不復轉’. 『잡아함경』 제12권 제287경(대정장2,p.80하), ‘正思惟如實無間等生, 識有故名色有, 識緣故名色有. 我作是思惟時, 齊識而還不能過彼. 이는 이른바 연기는 식지(識支)로 한정된다는 제식연기(齊識緣起)에 관한 언급이다.
29)
즉 노사의 생연은 ‘생’이고, 생의 생연은 ‘유’이며 내지 6처의 생연은 명색이지만, 명색의 생연은 식이고, 식의 생연은 다른 별도의 법이 아니라 다시 명색이라는 뜻.
30)
“어떠한 법을 일컬어 식주(識住)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그곳에 계속(繫屬)되는 5온과 4온을 말하니, 식(識)은 거기에 낙주(樂住)하며 집착하기 때문이다.”(본론 제22권 ‘식주의 體性’ 참조)
31)
주23) 참조.
32)
식(識)은 색ㆍ수ㆍ상ㆍ행온에 따라 머물기 때문에 이를 4식주(識住)라고 하는 것으로, 식온이 식주가 되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는 본론 제22권을 참조할 것.
33)
12연기를 3세 양중의 인과로 볼 때, 노사지(支)는 명색ㆍ6처ㆍ촉ㆍ수에 해당한다.
34)
여기서 유전의 지분이란 ‘생’을 연으로 하는 노사, 즉 명색ㆍ6처ㆍ촉ㆍ수를 말한다.
35)
여섯 번째의 세 가지란 의근ㆍ법경ㆍ의식으로, 이 경우 의근은 과거의 존재이며, 법경은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두와 통하며, 의식은 현재의 존재이다. 즉 이 세 가지는 비록 시간을 달리하여 존재하지만, 근과 경이 원인이 되어 식의 결과를 낳는 인과관계로 규정되기 때문에, 혹은 삼자는 ‘촉’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화합’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36)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 ‘삼사화합이 바로 촉이라는 상좌설 비판’에서 상론하였다. 즉 그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촉’이란 다만 삼사의 화합일 뿐이라 하여 이것의 개별적인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37)
본론 제10권 ‘가타에 대한 상좌의 해석 비판’에서 이를 인용하여 해석하였다.
38)
이를테면 『중아함경』 제58권 「대구치라경」(대정장1p.791중), ‘覺(受의 구역)ㆍ想ㆍ思此三法合, 不別. 此三法不可別施設.’
39)
여기서 ‘분(分)’은 원인의 뜻인가?
40)
“[마음은] 대법(大法)의 ‘지’가 되기 때문에 ‘대지(大地)’라고 이름하며, 제법 가운데 만약 어떤 법이 ‘대지’에 소유되었다면, 이를 ‘대지법’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를테면 일체의 품류(대지법 내지 소번뇌지법)와 일체의 마음(선ㆍ불선ㆍ무기)과 두루 구생하는 법을 말한다.” (본론 제10권 ‘대지법’ 참조)
41)
여기서 ‘그 종(宗)’은 촉가유론자(觸假有論者) 즉 상좌를 비롯한 경량부를 말한다. 경량부에서는 촉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고서 ‘삼사(三事)의 화합 그 자체가 바로 ’촉‘이며, 삼사를 배제한 촉은 실재하지 않는다[三和成觸說]’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촉 가유론은 『대비바사론』 제149권(한글대장경123,p.539)에서 비유자(譬喩者)의 설로 언급되고 있다.
42)
유심유사 등의 차별이라 함은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를 말하고, 선 등의 차별이라 함은 선지(善地)ㆍ불선지(不善地)ㆍ무기지(無記地)를, 학 등의 차별이라 함은 학지(學地)ㆍ무학지(無學地)ㆍ비학비무학지(非學非無學地)를 말한다.
43)
예컨대 선지(善地)에 존재하는 법을 대선지법(大善地法)이라 하며, 불선에 존재하는 법을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이라 한다는 뜻.
44)
주38)의 「대구치라경」(대정장1p.791중), ‘覺所覺者, 卽是想所想, 思所思. 是故此三法合, 不別. 此三法不可別施設.’ 곧 촉가유론자는, “수ㆍ상ㆍ사ㆍ식은 일 찰나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소연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계경에서 ‘서로 뒤섞여 있다[相雜]’고 설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5)
여기서 앞의 것은 중현이 인용한 “이러한 수(受), 이러한 상(想), 이러한 사(思), 이러한 식(識), 이와 같은 제법은 서로 뒤섞여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는 경설을 말하고, 뒤의 것은 바로 앞서 촉가유론자가 인용한 경설을 말한다.
46)
이를테면 『중아함경』 제58권 「대구치라경」(대정장1,p.791중하), ‘壽及煖, 此二法合, 不別. 此二法不可別施設. (중략) 有三法--一者壽, 二者煖, 三者識’.
47)
본권 ‘식과 명색의 상호연기에 관한 해석’ 참조.
48)
즉 밝음은 등불의 작용이고, 그림자는 싹의 변이이기 때문에 등불과 싹으로부터 반드시 밝음과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촉ㆍ수의 경우와는 동일하지 않다는 뜻의 힐난.
49)
『잡아함경』 제3권 제68경(대정장2,p.18상)의 ‘緣眼及色眼識生, 三事和合生觸’; 혹은 같은 경 제13권 제306경(동p.87하)의 ‘眼色緣生眼識, 三事和合觸’ 등을 참조할 것. 경량부에서는 바로 이 같은 경증에 근거하여 촉이란 다만 삼사(三事)의 화합을 가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구사론』 제10권, 앞의 책,p.463참조), 중현은 본론에서 이처럼 ‘촉’을 삼사화합으로서의 촉(가유)과 대지법으로서의 촉(실유)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50)
원문은 수신념(修身念)이지만, 이는 다른 판본이나 내용상으로 볼 때 순신념(循身念)의 오사(誤寫)이다.(이하 同) 순신념(혹은 순신관)이란 4념처의 하나로, 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하는 신념처관(身念處觀)을 말한다. 본론 제60권 ‘별상념주(別相念住)’에서 상론함. 이는 곧, 탐욕을 끊는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순신관이 가장 수승하다고 설한 것처럼, 촉에 관한 경설도 역시 그러하여 가유의 촉이라는 측면에서 ‘촉은 오로지 수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지만, 심소인 실유의 촉이라는 측면에서 ‘수 또한 촉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51)
여기서 ‘이와 같은’이란 주49)의 본문에서 인용한 삼사화합으로서의 촉(즉 가유의 촉)의 경우를 말한다.
52)
색처는 안처(眼處)에 포섭되는 색을 말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처 내지 신처, 색처 내지 촉처의 10처를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촉은 안근ㆍ색경ㆍ안식 등이 화합한 결과로서의 안촉 등의 6촉을 말하지만, ‘촉’이라 함은 다만 그것의 총명(總名)일 뿐이다. 따라서 총명으로서의 촉은 안 등의 원인에 따라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
53)
이는, 촉은 일체의 심소법에 대해 연이 되는 것임에도 계경에서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고 설한 이유에 대해 밝힌 것이다. 즉 촉은 일체의 심소에 대해 연이 될지라도 특히 ‘수’에 대해 강성할뿐더러 촉의 결과인 ‘수’는 다시 ‘애’의 수승한 연이 되기 때문에 계경에서 그 같이 설하였다는 것이다.
54)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그러나 현존하는 아함경설은 이와 약간 다르다.
55)
즉 ‘명’과 ‘색’ 두 가지를 반연하는 촉은 증어촉과 유대촉으로 그 상태[分位]가 결정적이지 않으며, 6처를 반연하는 촉과 명색을 반연하는 촉은 그 상태가 결정적이지만, 전자의 경우 다만 촉의 소의(眼 내지 意處)만을 나타낼 뿐이며, 후자의 경우 소의(根)와 소연(境, 무색의 4온)을 모두 나타내기 때문에 이 3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다는 뜻.
56)
원문은 ‘五根應有對’이나 『구사론』(제10권)과 『현종론』(제15권)에 따라 ‘상응’으로 교정하였다.
57)
증어촉(adhivacana-saṃśparsa)은 구역에서는 의언촉(依言觸)이라고 하는데, 언어적 개념[名,nāma]을 소연으로 삼는 촉이다. 즉 ‘증어’란 ‘명’의 다른 명칭으로, 『광기』에 의하면, 반드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는 ‘명’이 말[語]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말을 뛰어난 방편으로 삼아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에, 명의 세력에 의해 말이 뛰어나게 되기 때문에 ‘증어’라고 이름하였다.
58)
증어촉의 소연인 ‘명’은 전5촉 즉 유대촉의 그것(유대색)에 비해 탁월하고도 수승한 특장(特長)의 경계이기 때문에 장경(長境,adhikamālambana)이다.
59)
원문은 ‘眼識但能了靑, 不了是靑. 意識了靑, 亦了是靑’ 말하자면 전자가 감성적 인식이라면, 후자는 오성적 인식이다.
60)
각기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하는 촉이다.
61)
안(眼) 등의 6촉과 유대촉과 증어촉, 명(明) 등의 3촉, 애촉과 에촉, 그리고 순락수촉 등의 3촉이 그것이다.
62)
앞서 6수 중 제6 의촉소생수(意觸所生受)를 심수(心受)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희(喜)ㆍ우(憂)ㆍ사(捨)의 자성에 따라 세 가지 의근행(意近行)으로 나누어지며, 이 같은 세 가지의 영납은 오로지 의식과 상응할 뿐이지만 각기 여섯 경계[境]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된다. 즉 이러한 희 등의 3법이 직접적인 연[近緣]이 되어 마음[意]으로 하여금 경계로 자주 유행(遊行)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manopavicāra)이라고 하였다.(후술)
63)
심수의 자성은 희ㆍ우ㆍ사 세 가지로서, 의식과 상응하며, 각기 6경을 소연으로 하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라는 뜻.
64)
『구사론』 제10권(앞의 책,p.474)에서는 이를 ‘비바사사(毘婆沙師)에 따르면’ 이라는 뜻의 전설(傳說,kila)로 설하여 유부 정설로 나타내고 있다.
65)
즉 신수는 오로지 의식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3세법도, 자상과 공상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지(意地)의 직접적인 연[近緣]이 되지 않으며, 역시 그것을 경계대상으로 자주 유행하게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
66)
“신수는 오로지 의식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近)’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이며, 무분별이기 때문에 역시 ‘행(行)’이라고도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구사론』,앞의 책,p.475)
67)
즉 욕계에는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계에도 역시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 유부에서는 상계에 설정되는 법은 원칙적으로 욕계에도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68)
제3정려에는 낙근에 상대가 되는 고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없는 낙근을 의근행으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
69)
제3정려의 사근(行捨)은 사수(捨受,즉 不苦不樂受)의 ‘사’가 아니라 행온에 포섭되는 ‘사’ 심소이기 때문에 낙근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70)
만약 반드시 안근 등이 색 등을 보고 나서 희 등의 의근행을 일으킨다면, 색계에는 향ㆍ미(味)의 경계와 비ㆍ설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본론 제4권 ‘[18계의] 3계 계속관계 분별’참조) 이에 대한 의근행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71)
죽을 때와 태어날 때에는 오로지 사수(捨受)만이 존재한다. 본론 제30권 주47)의 본문 참조.
72)
즉 색계에는 단식(段食)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식성인 향ㆍ미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며(본론 제4권 ‘[18계의] 3계의 계속관계 분별’ 참조), 따라서 희(喜)ㆍ우(憂)ㆍ사(捨)에 걸친 여섯 가지 근행이 없는 것이다.
73)
무색계에는 색법(색경 내지 촉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경(法境)에 대한 희ㆍ우ㆍ사 3수(受)에 따른 세 가지 의근행만이 존재한다.
74)
희수와 사수의 두 가지가 욕계의 6경을 소연으로 하기 때문에 열두 가지이다.
75)
색계에는 우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거기서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을 경우, 거기에는 앞의 5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법을 경계로 하는 희ㆍ사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다.
76)
공무변처의 근분이란 제4정려의 염오함을 원리(遠離)한 상태로서, 여기서는 제4선의 색 등을 관하여 추(麤)ㆍ고(苦)ㆍ장(障) 등으로 관하는데, 다만 사수만이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인 색ㆍ성ㆍ촉ㆍ법에 대한 네 가지 근행을 일으킬 뿐이다
77)
『대비바사론』 제139권(한글대장경123,p.312)에서는 이러한 근분지의 계속과 그 소연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전하고 있는데, 첫째는 색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 네 가지 근행(색ㆍ성ㆍ촉ㆍ법)이 있으며, 자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오로지 사(捨)의 법근행 한 가지뿐이다. 둘째는 색ㆍ성ㆍ촉ㆍ법을 각기 별도로 구별하지 않고 총괄하여 잡다한 하나의 소연[雜緣]으로 삼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법근행만이 있으며, 자계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사’의 법근행 한 가지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제1설을 가리킨다.
78)
이는 초정려의 근분지(近分地), 즉 미지정에 든 자를 말함.
79)
색계천이 성취하는 욕계 의근행은 통과심과 구기(俱起)하는 ‘사’ 한 가지뿐인데, 이 역시 색 등의 6경을 총합한 일법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법의 사근행이라고 한 것이다.
80)
애착은 탐(貪), 증오는 진(瞋), 사택하지 않고 버려두는 것은 치(癡)이다. 곧 ‘희’는 탐과, ‘우’는 진과, ‘사’는 치와 함께 하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는 의(意)와 더불어 서로를 이끌어 자주 소연으로 유행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고 하였다는 뜻.
81)
『잡아함경』 제13권 제340경(대정장2,p.93상), “有六常行, 云何爲六? 若比丘 眼見色不苦不樂 捨心住正念正智…….” 즉 6항주(ṣaṭsātatā vihārā)란 잡염(雜染)을 떠난 마음의 평등성, 정직성, 무경각(無警覺), 임운성(任運性)에 머무는 것으로(『집이문족론』 제15권, 한글대장경115, p.310), 곧 사(捨)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때 ‘사’는 심소 중의 행사(行捨)의 뜻으로, 3수 중의 ‘사(사수)’가 아니다.
82)
『구사론』 제10권(앞의 책,p.480~481). 이는 보광에 의하면, 유부이설(異說)로 경부 이사(異師)의 설. 칭우에 의하면 세친의 설. 법보는 세친이 일시 이설을 빌려 유부를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근행이란 오로지 염오(잡염)로서, 이것에 의해 마음이 자주 소연의 경계로 유행(遊行)하게 된다. 따라서 색계에 태어나 이미 이염(離染)하였다면, 이러한 지에서는 필시 근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83)
즉 세친은 애착 등의 잡염이 근행이라 하였고, 앞에서 이염(離染)을 획득한 이는 근행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염의 염법이 애착 등의 잡염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뜻인가?
84)
여기서 ‘원분’이라 함은 번뇌의 득(得)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승진도(昇進道)로서의 대치도를 말한다.
85)
여섯 가지 우(憂)근행을 제외한 희ㆍ사의 열두 가지 근행.
86)
탐기의 소의가 되는 열여덟 가지(6경 각각의 喜ㆍ憂ㆍ捨耽嗜依)는 근행하여 대치되는 것이며, 출리의 소의가 되는 열여덟 가지(6경 각각의 喜ㆍ憂ㆍ捨出離依)는 근행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다.
87)
“이는 마땅히 사적(師跡)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니, 바로 온갖 그릇된 스승[邪師]들이 밟고 돌아다닌 것[遊履]이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제139권,p.718중)
88)
“이는 마땅히 원로(怨路)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원수로 일컬어지는 애탐 혹은 온갖 번뇌가 이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앞의 책)
89)
“이는 마땅히 도도(刀道)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놀거나 걷는 자[遊步]는 상해를 입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범지여, 세 번째 의(意)의 칼을 휘두를 때 악을 낳고 괴로움을 초래하게 된다’고 설한 바와 같다.”(『대비바사론』,같은 책)
90)
즉 향ㆍ미의 희(喜)ㆍ우(憂)ㆍ사(捨)의 세 탐기의(耽嗜依)와 향ㆍ미의 희ㆍ우ㆍ사의 세 출리의(出離依).
91)
원문은 ‘一種性依捨爲依故.’
92)
12연기라는 존재의 갈래[有支] 중 ‘수에 대해 간략히 설하면 이상과 같지만, 널리 설하자면 무량(無量)의 뜻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논의를 그만 마친다는 뜻.
93)
즉 본론 제28권(‘무명의 名義’) 중에서 “행ㆍ유와 애ㆍ취에 대해서는 「변업품(辯業品)」과 「변수면품(辯隨眠品)」에서 마땅히 널리 해석할 것이며, 식과 6처에 대해서는 「변본사품」에서 이미 널리 해석하였기 때문이다”고 논설하였다.
94)
본론 제28권 ‘혹ㆍ업ㆍ사의 분별’ 참조
95)
이하 본론 제28권에서 논설한 ‘혹(惑,kleśa)ㆍ업(karma)ㆍ사(事,vastu)의 상호 상생관계’ 즉 ‘혹으로부터 혹과 업이 생겨나고, 업으로부터 사가 생겨나며, 사로부터 사와 혹이 생겨난다’를 상기하기 바람
제30권
1)
『구사론』 제10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486)에 따르면, 본 단락까지가 ‘12연기에 따른 유정의 윤회전생’에 관한 논설이다.
2)
즉 결생위에서는 자지의 일체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다고 하였지만, 결생의 순간에는 심신의 상태가 어둡고 저열하여 사택력이 없기 때문에 사택력에 의해 일어나는 간(慳)ㆍ질(嫉)ㆍ분(忿)ㆍ부(覆)ㆍ회(悔) 등의 10전(纏)과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구(垢)는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생유는 그것에 의해서는 더럽혀지지 않는다. 생유는 다만 열 가지 근본번뇌(貪ㆍ瞋ㆍ慢ㆍ無明ㆍ疑ㆍ有身見ㆍ邊執見ㆍ邪見ㆍ戒禁取ㆍ見取)와 그것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무참ㆍ무괴ㆍ혼침ㆍ도거 등의 힘에 의해 오염될 뿐이다. 10근본번뇌에 대해서는 본론 제46권에서, 10전과 6번뇌구에 대해서는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3)
즉 무색계에는 방처(方處)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중유가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4권(‘무색계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와 이에 관한 제 논란’)에서 논설하였다.
4)
『잡아함경』 제17권 제489경(대정장2,p.124하), “……謂一切衆生由食而存”
5)
겁초의 유정은 지미(地味,단식의 시초)ㆍ지피병(地皮餠)ㆍ임등(林藤)을 먹어 배설의 더러움이 없었으나 그 후 그것이 고갈되어 벼를 먹음으로써 두 배설기관이 생겨나게 되었다.(본론 제32권 ‘겁초의 유정과 국왕의 옹립’ 참조) 원문에는 ‘변질의 더러움[變穢]’로 되어 있으나 이에 따라 ‘배설의 더러움’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
색계에는 비록 가장 미묘하고 능히 섭취 증익할 만한 색ㆍ성ㆍ촉의 경계가 있을지라도 필경 분단(分段)하여 씹어 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단식이 아니다.
7)
단식의 본질이 촉처라면, 촉처에 포섭되는 태양의 빛, 나무의 그림자, 불의 뜨거움, 바람의 시원함과 같은 것을 어찌 식(食)이라 할 수 있는가? 하면 추울 때에는 따뜻함이, 더울 때는 시원한 바람이나 나무 그림자가 몸을 증익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식을 ‘조각으로 나누어[段別] 삼켜 먹는 것[呑噉]’이라고 함은, 대개 유정들은 먹을거리를 씹어서(分段하여) 삼켜서 먹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에 따른 것이라는 뜻. 이러한 해명은 『구사론』 제10권(앞의 책,p.488)에서 전설(傳說)로 전해지고 있다.
8)
허기짐[飢]과 목마름[渴]은 촉처(觸處)의 열한 가지 자성 중의 하나이다.(본론 제1권 ‘5경’ 참조)
9)
색처는 안근의 대상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非至境임) 보이는 것이지 향ㆍ미ㆍ촉처처럼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섭취되는 것이 아니다.(본론 제7권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 참조) 즉 만약 색이 먹혔다면 그것은 설(舌)ㆍ신(身)의 경계(즉 미처ㆍ촉처)일 뿐, 안(眼) 등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안 등의 근과 그 대종을 이익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10)
천수 즉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미래세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여 현재의 그를 나락가 즉 지옥이라 할 수 없듯이, 현재는 다만 안근의 대상일 뿐인 그릇 속의 색처(色處,음식물)를 미래에 입으로 들어갈 것이라 하여 단식(段食)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
11)
여기서 안선나(añjana)는 안약을 말하며, 산가지는 안약을 묻힌 작은 나무 조각을 말한다. 요컨대 안근의 작용은 보는 것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눈을 증익 감손시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눈에 닿을 때 비로소 눈을 증익 감손시키지만, 그 때의 눈은 능히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 증익 감손되는 것은 신근(身根)이다.
12)
즉 ‘공경하여 [단식을] 시여한 것’에 대해 찬탄하였을 경우, ‘공경’이 바로 단식은 아니며, 다만 시여의 보조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아울러 함께 찬탄하였듯이, 색은 단식이 아니지만 단식의 보조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계경에서 아울러 함께 찬탄하였다는 뜻.
13)
어떤 이가 꽃과 과실과 그림자와 물(연못?)을 갖춘 꽃동산[華林]을 찬탄하였을 경우, 그림자와 물이 바로 꽃동산이 아니라 그것의 보조적인 조건이듯이, 계경에서 색ㆍ향ㆍ미를 갖춘 단식을 찬탄하였을 경우, 색은 바로 단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보조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찬탄하였다는 뜻의 비유.
14)
즉 경에서 색처가 단식이 아니라고 별도로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마시거나 씹어 먹는 취색(聚色)도 마땅히 단식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15)
계경에서 “업을 생인(生因)으로 삼는다”고 설하였다고 하여 무루업도 생인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로지 업만이 생인이라고 할 수 없듯이(번뇌도 역시 생인이다), 비록 경에서 단식의 본질에 대해 설한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밖의 사실로써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는 뜻.
16)
마시거나 씹어서 먹는 색취도 소의신과 제근(諸根) 대종을 증익시키기 때문에 ‘식(食)’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의신과 대종을 어떻게 증익시키는지 구체적 근거를 언급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만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뜻.
17)
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다. 주9) 참조.
18)
아직 이욕하지 못한 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고 희락을 낳았을 경우, 그것도 신체를 증익함이 있기 때문에 색처 또한 ‘식’이 아니냐? 하는 난문의 답이다. 즉 이러한 희락은 색을 소연으로 하는 순락수촉(順樂受觸)이기 때문에 다음에 논설하는 촉식(觸食)에 포섭된다.
19)
촉식(혹은 樂食,śparsāharā)은 삼사화합의 촉을 본질로 하는 희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의 섭취에 의해 신체가 장양되기도 한다.
20)
사식(혹은 念食, saṃcetanāhāra)은 제6의식이 희구하는 대상에 대해 낳은 희망의 작용으로, 사(思)를 본질로 한다. 이 또한 온갖 근을 자조(資助)하는 에너지이다.
21)
식식(vijñānāhāra)이란 능히 유정의 신명(身命)을 존속시키는 심식 그 자체를 말한다.
22)
단식의 열세 가지(향ㆍ미ㆍ11촉)에 촉ㆍ사ㆍ식을 더한 열여섯 가지를 말한다.
23)
예컨대 욕계의 식(食)은 색계의 유정을 성장시키는 자량은 될지라도 그것을 견인하지는 않기 때문에 색계의 ‘식’이 되지 않는다는 뜻.
24)
즉 향 등의 단식은 촉식 등의 원인이 되는 근(根) 등을 자조(資助)하여 당래 내법(內法)의 향(이를테면 몸에서 나는 향) 등을 취할뿐더러 촉식 등으로 하여금 능히 후유(後有)를 낳게 하므로 역시 ‘후유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식’의 두 가지 조건(근과 대종을 자조하고 ‘유’를 견인하는 것)을 충족한다는 뜻.
25)
이는 식(食)이 무루가 아닌 이유에 대한 경증(經證)이다. 즉 무루는 부다(部多) 등을 안주하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6)
부다(部多,bhūta)란 이루어진 것,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이미 지나가 버린 획득 등 다수의 뜻을 갖지만(보광에 의하면, 너무나 뜻이 많아 음역하였다) 여기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을 구하는 자(求生, 즉 중유)’에 대해 ‘이미 태어난 이(즉 生有)’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역에서는 ‘이생(已生)’으로 번역되고 있다.(후술함)
27)
중유는 생유와는 달리 부모의 정혈(精血)에 근거하여 소의신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전생의 업에 의해 견인된 결과이기 때문에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것(그러나 대개는 ‘일어난 것[起]이라 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중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23권에서 상론하였다.
28)
‘유괴(savyabadha)’란 유뇌괴(有惱壞) 혹은 유고(有苦)의 뜻이다. 즉 이 경문은 ‘뇌괴할 만한 자체(自體,즉 중유)가 일어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같은 성격의 세간(생유)이 생겨났다’는 뜻으로, 이 문장 가운데 ‘일으키다[起,abhinirvartya]’는 말로써 중유의 한 명칭(abhinivṛtti)으로 삼았다는 경증이다.
29)
앞의 두 가지 식 중 단식(段食)은 현재신의 소의인 유근신(有根身)을 증익하고, 촉식(觸食)은 그것의 능의인 심과 심소를 자익(滋益)하며, 이에 따라 사식(思食)은 인업(引業)이 되어 미래 생유[當有]를 인기하고 식식(識食)은 종자가 되어 그것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각기 이미 생겨난 유정을 도와 이익되게 하고, 또한 후유를 이끌어내어 일어나게 하는 공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네 가지만을 ‘식’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후술)
30)
즉 앞에서는 단식 내지 식식의 순서로 설하였지만, 여기서 뒤의 두 식을 먼저 설하고 앞의 두 식을 나중에 설한 것은 현실적으로 생겨나고서 증장되기 때문이라는 뜻.
31)
이하 식(食)에 네 가지 종류만이 있게 된 두 번째 이유를 밝힌다.
32)
여기서 ‘처중(處中)의 사(捨)’란 애착도 증오도 떠난 평등심을 말한다.
33)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심소 중 수(受)ㆍ상(想)만을 별도로 설정한 이유’ 참조.
34)
이를테면 향ㆍ미ㆍ촉의 단식에 의해 성장한 육체를 청정한 것[淨]이라 여기며, 촉에 따른 낙수(樂受)를 즐거운 것[樂]이라고 여기며, 희망의 의지[思]를 항상하는 것[常]이라고 여기며, 식식(識食)에 의해 낳아진 후유의 명색을 자아[我]로 여기기 때문이다.
35)
즉 식(食)이 다만 유정과 비유정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슨 이유에서 경에서 ‘부다’라는 말과 ‘생을 구하는 자[求生]’라는 말을 별도로 설하였을 것인가? 하는 힐난.
36)
여기서 세 구(句)란, “4식은 능히 부다(部多)와 유정을 안주(安住)하게 하고, 아울러 능히 생을 구하는 자[求生者]를 도와 이익되게 한다”에서 ‘부다’와 ‘유정’과 ‘구생’의 세 구를 말함.
37)
다시 말해 심ㆍ심소의 구기를 주장하는 한 ‘촉’이 끊어지면 그에 따른 낙수나 이에 따른 애탐, 나아가 애가 식의 종자를 윤택시켜 낳게 되는 당래의 명색도 일시에 모두 끊어진다고 해야 한다.
38)
수(受) 즉 낙수(즐거운 느낌)나 희수(기쁜 느낌)는 유정을 북돋우어 이익[資益]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능히 이익되게 하는 작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능히 이익되게 하는 것은 ‘따뜻함’과 같은 촉이다.
39)
“옛날 어떤 한 아비가 있었는데, 때마침 기근을 만나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자신이 이미 굶주리고 여위어 감당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떠나기 전에] 자루에다 재를 가득담아 벽에 걸어놓고 두 아들을 위로하여 “이것은 보릿가루를 담은 자루이다”고 말하였드니, 두 아들은 희망을 갖고서 오랜 시간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런데 그 후 어떤 사람이 와서 자루를 열어 보여주자 아들은 그것이 바로 재인 것을 보고 절망하여 바로 죽어버렸다고 한다.”(『구사론』권제10,p491) 이는 곧 사(思, 의지 혹은 희망)도 역시 현신(現身)을 안주하게 하는 식(食)이 될 수 있다는 예증이다.
40)
예컨대 “상인들이 대양에서 조난을 당하였을 경우, 멀리 물거품이 쌓인 것을 보고 해안인가 의심하여 그곳에 속히 이르기를 희망하는 동안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만, 그곳에 이르러 해안이 아닌 것을 알고는 절망하여 바로 죽게 된다.”(『구사론』,앞의 책)
41)
주32) 본문 참조.
42)
『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대정장2,p.102상), ‘누가 이러한 식식(識食)을 먹는 것입니까? 나는 식식을 먹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나는 식(識)이 바로 먹는 자라고 말한다.’
43)
다시 말해 무학도 식(食)을 가지므로 역시 ‘애’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44)
경증의 출처는 미상이고 다만 『잡아함경』 제15권 제374경(대정장2,p.103상)에 ‘4식에 대한 희탐이 식-명색-제행-당래유-생노병사를 낳는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병ㆍ종기ㆍ화살(무상)은 바로 5취온의 비유로서, 식식뿐만 아니라 단식도 능히 ‘애’의 인연이 되어 후유를 낳게 한다는 뜻.
45)
중유는 생유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그 첫 찰나를 ‘태어난다[生, 혹은 생겨난다]’가 아니라 ‘일어난다[起]’고 해야 하는 것으로, 그래서 이는 중유의 이명(異名) 중의 하나였다.
46)
이상 일 찰나인 사유와 생유에 일어나는 식(識)에 대한 분별.
47)
이상 사유와 생유의 의식과 상응하는 수(受)에 대한 분별.
48)
아래 세 정려에는 사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3정려의 행사(行捨)는 사수의 ‘사’가 아니라 행온에 포섭되는 ‘사(捨)’ 심소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결코 죽는 일이 없다. 이 같은 이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선정에서는 결코 사유(死有)가 존재하지 않는다.(후술)
49)
즉 예컨대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상계의 선정에 들 경우 정심은 소의신과 계지(界地)가 다르기 때문에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뜻.
50)
무상정이나 멸진정과 같은 무심정(無心定)은 말 그대로 심ㆍ심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서, 출정심은 입정심(入定心)을 등무간연으로 하여 일어난다. 즉 입정심은 반드시 출정심을 인기하는 연으로서의 공능을 갖기 때문에 이 사이에 명종하는 일이 없다. 참고로 경주 세친은 입정심의 등무간연을 부정하고 색심호훈설을 주장하였다.(본론 제13권 ‘경주의 멸정 무체설과 색심호훈설 비판’ 참조)
51)
이상 생유와 사유는 산심(散心)의 상태에서 일어날 뿐 선정심이나 무심의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분별.
52)
즉 열반에 들 때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염심이 없으며, 선심과 공교(工巧)ㆍ통과(通果)의 무기심은 강성하여 마음의 멸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선심에는 반드시 이숙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열반은 오로지 위의로(威儀路)와 이숙생(異熟生)의 두 가지 무기심에서만 가능하다.
53)
원문에는 ‘그것에 대한 염환(厭患)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不說厭患)’로 되어 있지만, 문맥상으로나 『현종론』(제15권) 등 다른 판본에 근거하여 이 같이 ‘不深厭患’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4)
이상 열반에 드는 마음의 3성(性) 분별.
55)
“목숨을 마치는 단계에서 의식은 어떠한 신체부위에서 최후로 소멸하는 것인가?”(『구사론』 제10권, 앞의 책,p.498) 여기서 의식이 최후로 소멸하는 곳이란 최후까지 온기가 있어 활동하는 부위를 말한다.
56)
이상 목숨을 마칠 때 의식이 최후로 소멸하는 처소에 대한 분별.
57)
말마(末摩,marma, 또는 死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급소로서, 지극히 작은 부위이나 몸 가운데 백여 곳이 있다고 한다.
58)
차주(次註) 참조.
59)
의방명(醫方明) 즉 고대인도의 의학에서는 심장 위의 담분(痰分), 심장 아래로부터 배꼽 이상의 열분(熱分), 배꼽 아래의 풍분(風分) 등 신체에는 세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병드는 것을 내적 삼재(三災)라고 하였다. 즉 네 번째 재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계(地界)는 말마를 끊지 않는다는 것이다.
60)
화ㆍ수ㆍ풍의 세 가지 재앙[大三災]은 외계 물질적 세계를 파괴하지만 지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내적인 신체상의 재앙도 이에 따른다는 뜻. 기세간의 3재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에서 상론함.
61)
그것은 바로 이 천취가 이러한 다섯 가지 쇠퇴의 상을 갖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62)
이상 단말마(斷末魔)에 대한 분별.
63)
“‘정(定)’이란 이를테면 성자를 말한다. 성자란 이미 무루의 도가 생겨난 이로서, 온갖 악법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한 것이다. 곧 물러남이 없는 필경(畢竟)의 이계(離繫)의 득(得)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결정코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정정(正定)’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구사론』 제10권, 앞의 책,p.501) 따라서 순해탈분(順解脫分)을 획득한 현자는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또한 열반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성정취가 아니다.
64)
“이를테면 온갖 지옥과 아귀와 방생, 이것을 일컬어 ‘사성’이라 한다. 그리고 ‘정(定)’이란 이를테면 5무간업(無間業)을 말하니, 무간업을 지은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사정(邪定)’이라고 이름한 것이다.”(『구사론』, 앞의 책) 여기서 5무간업이란, 어미ㆍ아비ㆍ아라한을 해치는 것, 화합된 승가를 파괴하는 것, 악심으로써 불신(佛身)에서 피가 나게 하는 것.(본론 제43권 ‘업ㆍ번뇌ㆍ이숙의 3障’을 참조할 것) 다섯 가지 부정견이란 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견ㆍ사견ㆍ견취의 5견을 말함.(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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