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漆黑)
안숭범
병원을 지났다, 누구는 지금도 아파할 것이다, 좀처럼 하지 않는 표정을 생각해 냈다, 반쯤 내려진 제과점 셔터가 주인을 두 동강 냈다, 살아남은 빵들만 냄새로 다녀갔다, 휴대폰이 오른손으로 기어 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했으므로, 누구와는 아무 숫자도 교환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구름은 또 거기서 서성였다, 오늘 하루만도 수없이 저 길을 오갔다,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게 오는 밤은 구름의 망설임을 머금는다, 버스가 멀리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멀어지는 것들 사이에 남은 건, 매연이거나, 사랑이거나, 매연 같은 사랑이다, 그런 식으로 침침한 채 버스와 사람은, 서울역과 우체통은, 하수도와 전선은 곧잘 닮아 간다,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불투명은 떠나기 위해 모인다, 기억을 능욕했던 매서운 문장들까지, 문장 안에 가득 찬 너의 형식까지, 단지 병원과 제과점과 버스 정류장을 지났을 뿐이다,
휴야(休夜)
안숭범
강의를 쉬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나무 밑에서 생수를 마셨다, 개 한 마리 힐끔 눈길을 주었다, 쓰다 만 편지가 생각났다, 더 이상 주소가 없었다, 주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늘어진 그늘이 어둠을 불렀다, 멀리서 수동적인 저녁이 실려 왔다, 아무나 보고 싶었다, 밤늦도록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던 애인들, 내게서 퇴근했다, 저녁이었으므로, 앰뷸런스가 주춤대는 석양과 몇몇 사내를 병원에 구겨 넣었다, 병원은 불을 켜기 시작했다, 인내심 강한 건물 앞 동상, 표정을 유지했다, 벤치에서 잤다, 그렇게 잔 건 처음이 아니다, 프랑소와 오종(Francois Ozon)이 유혹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갑자기 기형도가 죽은 이유로 피곤했다, 모든 저녁은 알 수 없이 피곤하다, 아무도 학교를 원망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치마는 짧아졌지만, 주가는 오른다고 한다, 자살한 자들의 마지막 욕망에 욕을 했다, 욕이 살아 내게 왔다, 갑자기 허벅지가 저렸다, 강의를 쉬었을 뿐이다, 전단지와 버려진 리포트와 꽃잎 몇 개가 달려왔다, 무서웠다, 내 영혼에 자취하는 몇 개의 표정이었다, 입천장이 쓸리던 사랑은 어디 가고, 송이버섯처럼 별이 돋았다, 별이 아니었다,
뜨지 않는 별과
사라진 사람과
그와 더불어 죽은 기억이 밤샘하는 시간
점자의 윤곽을 따라 흐르는
휴야
득세하는 징후
안숭범
소극장을 나오자 연극적인 밤이 왔습니다, 저를 탕진하고 돌아가는 욕망이 잠시 뒤돌아보다 갑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미간에서 튀어나온 꿈같은 것들 말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엔 늙은 가수가 늦여름 모기만 불러 세웁니다, 빗나갈 예언에 결속되거나 스스로 유기되기 위해 기타는 저 홀로 분주합니다, 저 음험한 어둠은 필시 오래전 집 나간 개입니다, 사라진 약수터에 가 눈알을 헹궈 주고 싶습니다, 완행으로 가는 종착지가 어디냐고만 묻겠습니다, 도식적인 건물엔 누군가의 오답이 오래도록 걸려 있습니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 이런 순간에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는 반어적이거나 필사적입니다, 누구는 섹스하는 자세로 「한여름 밤의 꿈」을 읽는다지만, 생활은 발견되고 생계는 발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차가 끊겼다는 곤란이 그리움을 훈육합니다, 저는 오늘 너무 많은 방랑에 방황의 성분을 수락했습니다, 현실적인 꿈자리를 지상에 청약하려는 동선은 아니었습니다, 정처(定處)가 필요합니다, 그런 상식만이 아폴로의 저녁과 대질심문할 수 있습니다, 취객 몇 명이 재즈처럼 위태합니다, 이 순간에도 밤이 연극적이란 건 제 시의 내면주의와 상관합니다, 대열에서 이탈한 별똥의 끝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시가 위독할 일은 없다고 해 두겠습니다, 아직 저를 소모할 욕망이 남았다면 이 거리에 저와 함께 유기될 것입니다, 승선을 기다리는 시어들을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막차여야 합니다,
비정규적 슬픔
안숭범
어머니는 유학도 보내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세 문장을 읽으면 시를 쓸 시간을 준다, 혼자 사는 열대어처럼, 고요하게 늙는 촛대처럼, 느리게 커피가 시간을 젓자 밤이 잔 안에서 잔잔해진다, 어둠들이 삐걱대는 소리를 적을 수 있게 됐다, 거실로 출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날들 동안, 웃자란 아가는 아버지 대신 정규적으로 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건너뛰고 내뱉는 농담은 월급보다 재미가 없었고, 포기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런 시간들로 나를 당기는 힘을 지울 수 있을까, 가령 고시원 끝 방에 두고 온 휴대폰에선 첫사랑 연락처가, 함부로 쌓아 둔 책 어느 페이지에선 첫 직장 약도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와 살수록 슬프다 사이에 서 있는데, 다가갈 수 없는 반대편은 쉬이 휘발된다는데, 아들이 코와 자기 생애를 곯기 시작한다, 반환된 서류 상자를 던져 놓자 어느덧 데리다의 세 문장 길이로 새치가 자라 있다, 베란다의 선인장은 집 안 공기와 익숙한 여자의 완숙한 연민을 찔러 댄다, 어제 받은 부고를 떠올리자 받지 못한 사랑의 남은 몫이 울어 댄다, 읽던 페이지를 서쪽으로 접는다, 안방에서 먼저 잠든 여자가 그쪽으로 따라 눕는다, 진짜 날카로운 풍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밤에서 숨죽이고, 거실 TV는 무음으로 예의를 갖춘다, 오디션 프로에서 탈락한 소녀가 자기 울음에 뼈마디를 세운다, 안방이 너무 멀다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까, 바람의 정권이 겨울에서 실각하는 내일이 오면,
하차
안숭범
오늘 보니 젓가락이 휘어 있다, 반찬보다 먼저 흘러내리는 어제의 다짐, 몇 번을 읽은 만화책이 등을 돌리자, 늦은 밤 현관문이 겨울 쪽으로 몸을 연다, 평균적 생활이라는 믿음, 아파트 상가 삼층 개척교회를 지나다가, 본다, 마지막 신자를 잃은 지 오랜 것들, 희한한 회한에 대해, 음지와 극지를 오가다 날개를 접은 철새에 대해, 건들바람이 황량한 겨드랑이를 확인하고 가고, 슬리퍼가 나를 고쳐 신는다, 야간업소 포스터 속 오빠도 이리저리 돌아눕는 밤에, 온종일 기다림을 짓는 버스 정류장으로, 돌과 마음의 자리를 툭툭 옮겨 가면서, 마중 간다, 자꾸 얼어붙는 예언 쪽에서 한 여자를 떼어 내며, 걸음마다 고이는 것이 두렵다, 굴뚝 위 난쟁이의 표정을 향해 꽃마리가 흔들리는 시간에, 드디어 막차가 어둠을 토한다, 모두 내게로 쏟아지는 것들, 처녀 때부터 입던 외투를 걸친 여자는 거기서, 비도 눈도 아닌 것을 괜스레 털고 있는데, 미소를 흉내 내는 저 안간힘의 이유들이여,
말라기
안숭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지구를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규체되는 인생을 살갗 깊숙이 숨기느라, 지구는 얼마나 바쁜 것일까, 하루에 한 번 빙글 도는 지구 때문에, 새들은 제 하늘을 기억하기 위해, 할머니는 검은 옷을 벗고 수제비를 끓인다, 비 갠 후 저녁 나무들이 말랑말랑해진다, 하나님의 편지를 뚝뚝 떨군다, 거기서 태어났을까, 투명한 벌레들이 처음 보는 음정으로 부르는 복음성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걸 주저한다, 이런 저녁에 후루룩 삼켜지는 수제비의 눈치를 보다 보면, 들린다, 창문만 한 바깥 세계가 두서없을 내일을 미리 삭이는 마음, 구김살 없는 안방의 꽃들 곁에서, 여기서 가장 먼 저기도 할머니를 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