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컴퓨터의 아버지, 튜링(Alan Turing)과 콜로서스|자유시간 새 시대를 연 거목. ‘알란 튜링’ · Alan Turing |
▲ 앨런 튜링(Alan Turing,1912~1954)은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이다. 특히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1975년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서 전술에 이용한 ‘울트라 작전’ 과 ‘콜로서스(Colossus)’ 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튜링도 컴퓨터 이론가에서 ‘컴퓨터의 아버지’로 격상됐습니다. 튜링은 경제학자 케인스의 후원으로 1935년 케임브리지대 ‘펠로(fellow·특별 교우)’ 로 선출됐다. 그는 프린스턴대가 선정한 가장 자랑스러운 동문이기도 하다 |
애플의 로고 탄생설? · 인류 최초의 해커, ‘알란 튜링'
사망자 5천만명, 금전적 피해 1조 달러 이상,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남긴 전쟁인 2차 세계 대전.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전쟁의 막바지에 연합군 쪽으로 승기를 가져온 작전이 있었으니… 소위 작전명 ‘오퍼레이션 오버로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향방을 알 수 없던 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뒤집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쟁의 판세는 연합군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유럽대륙은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그런데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Normany Invasion)에 숨은 두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 2차 세계대전의 숨은 영웅, 콜로서스(Colossus) 그리고 알란 튜링(Alan Turing)을 소개한다.
독일군의 암호를 푸는데 사용한 ‘콜로서스’를 개발한 알란 튜링(Alan Turing, 1912~1954)은 세계 최초의 해커라고 불린다.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컴퓨터를 만들어낸 튜링의 삶은 어땠을까?
전쟁 직후 그는 컴퓨터 설계와 프로그램 분야에 있어서 혁명적 성과를 거두지만, 전쟁의 연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1952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유는 동성애자였던 그에게 “음란행위 일반에 대한 위배”로 인한 기소처분이 내려졌던 것. 영국법원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는 사실은 묵살한채 10년동안 감옥 생활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을 것인지 결정하라는 법정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결국 튜링은 에스트로겐을 선택하는데요, 이로 인해 그는 치명적인 신체의 변화를 겪게 되고 2년 뒤인1954년 3월, 그는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버려 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42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이 때 그의 손에는 청산가리가 묻어있는 붉은 사과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 사과모양이 지금 세계적인 IT기업 애플의 로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인류의 지우고 싶은 과거, 2차 세계대전.. 그 전쟁을 종식시킨 콜로서스와 개발자 알란 튜링. 어쩌면 IT 세상에는 이처럼 우리가 아직 모르는 숨겨진 비밀들이 무궁무진하지는 않을까? |
앨런 튜링 … 독사과 를 먹고 죽은 천재, 컴퓨터의 아버지가 독사과를 베어 먹고 숨진 까닭은?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모리스 드니는 세 개의 사과가 인류를 움직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브의 사과’는 역사가 아니라 성경의 내용이므로, 역사적 인물 가운데 사과와 관련한 위인 세 명을 고른다면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나 독사과를 먹고 자살한, 컴퓨터의 발명가 앨런 튜링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로고로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선택한 것이 튜링 (Turing)을 기리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1954년 오늘은 그 천재, 튜링이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베어 먹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튜링은 한 동안 세계 최초의 컴퓨터로 소개된 ‘에니악’보다 2년3개월 앞선 세계 첫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 巨人이란 뜻)’를 개발한 과학자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 시스템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 란 뜻)’를 해독하기 위해 자신의 수학이론에 따라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전후 이 사실을 일급비밀로 분류해서 숨겼습니다. 1975년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서 전술에 이용한 ‘울트라 작전’과 콜로서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튜링도 컴퓨터 이론가에서 ‘컴퓨터의 아버지’로 격상됐습니다.
튜링은 공립학교인 셰르본느 스쿨 출신인데, 당시 교장은 “어떤 학교나 공동체에서 문제가 될 위험이 있는,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소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 | | 튜링은 경제학자 케인스의 후원으로 1935년 케임브리지대 ‘펠로(fellow·특별 교우)’로 선출됐다. 그는 프린스턴대가 선정한 가장 자랑스러운 동문이기도 하다. | | | 그러나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을 통해 컴퓨터의 이론적 틀을 마련했습니다. 폰 노이만 교수가 그의 아이디어를 높이 사서 공동연구를 제안했지만, 전쟁에 휘말린 고국으로 되돌아가서 역사의 기념비를 세우지요. 콜로서스(Colossus,下사진) 덕분에 연합군은 독일이 연합군 상륙지를 칼레로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과감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칩니다.
세계대전 이후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연산(演算) 뿐 아니라 사람처럼 생각하는 컴퓨터의 개발을 꾀합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삶은 나락으로 빠집니다. 튜링은 셰르본느 스쿨 시절 한 학년 위의 친구의 따스한 우정으로 ‘왕따’를 극복했는데, 그 친구가 18세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발전했고 동성애의 씨앗이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튜링은 체포됐고 법원은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는 ‘화학적 거세’ 형을 선고합니다. 어쩔 수 없이 약물을 투여 받지만 가슴이 커지고 발기력이 떨어지면서 우울증이 왔습니다. 그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는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순수한 여성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말입니다. 동화 속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편히 쓰고 있는 컴퓨터에는 이런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현재 허리우드에서는 앨런 튜링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 중인데 주인공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튜링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PC의 발전이 훨씬 빨랐을 것이고, 잡스의 애플이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2010년 오늘은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4’를 세상에 선보인 날이네요.
천재들의 생명이 숨어있는 이 컴퓨터, 소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PC나 스마트폰, 지적으로도, 지성을 망치도록 사용할 수도 있겠지요? 오늘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 튜링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컴퓨터를 가장 긍정적 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가 덜 억울하게 말입니다.
| ▲ 위 사진. 독일군의 암호를 푸는데 사용한 최초의 연산식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 이를 개발한 영국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인 앨런 튜링(Alan Turing,1912~1954) ! 특히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975년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서 전술에 이용한 ‘울트라 작전’ 과 ‘콜로서스’ 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튜링도 컴퓨터 이론가에서 ‘컴퓨터의 아버지’로 격상됐습니다.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을 통해 컴퓨터의 이론적 틀 을 마련했다. 폰 노이만 교수가 그의 아이디어를 높이 사서 공동연구를 제안했지만, 전쟁에 휘말린 고국으로 되돌아가서 역사의 기념비를 세운다. ‘콜로서스’ 덕분에 연합군은 독일이 연합군 상륙지로 칼레(Calais)를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과감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칩니다. - 계산기 학회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수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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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평판을 이긴 천재들 이야기
● 앨런 튜링=셰르본느 스쿨 교장이 “어떤 학교나 공동체에서 문제가 될 위험이 있는, 사회성이 아주 부족한 소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 블레츨리 공원의 비밀연구소에서 일군의 과학자들을 이끌고 컴퓨터를 통한 암호해독 시스템을 구축,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 프레드 스미스=예일대 경영학과 학생 때 ‘1일 배달 서비스’에 관한 리포트를 썼다. 교수는 “개념은 재미있고 리포트의 구성은 좋지만 C학점 이상을 받으려면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운송회사 ‘페덱스(FedEx) 사’를 설립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10세 때 뮌헨의 교장이 “너는 절대 나중에 어른 구실을 못할 것”이라고 가혹하게 말했다. 허나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세계관을 바꿨다. ● 스티브 잡스=아타리와 휴렛팩커드로부터 입사를 거부당했다. 휴렛팩커드의 인사 담당자는 “헤이, 우리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 없어. 당신은 아직 전문대학도 나오지 않았잖아”라고 조롱했다. 그는 애플사를 설립해 세계 최초의 상용 PC를 내놓았으며 시련과 역경을 딛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내놓으며 ‘IT업계의 신(神)’으로 추앙받았다. ● 마이클 조던=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 팀에서 탈락했다. 자신의 실력을 입증 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해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농구선수로 등극했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어린 시절 음악 선생은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그를 악성(樂聖)으로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 월트 디즈니=캔사스 시에서 만화를 그릴 때 “창의적이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없으므로 신문 편집자로 일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는 세계 각국의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 토머스 에디슨=교사가 “너무 바보 같아서 가르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만 1093개의 특허를 받았으며 인류의 생활 방식을 바꾼 발명가였다. 비록 자기 못지않은 천재 니콜라 테슬라를 끝까지 괴롭힌 죄를 졌지만... ● 비틀스=1962년 음반회사 데카 사는 “당신의 음악과 기타 연주 스타일이 싫다” 며 음반 취입을 거절했다. 이 그룹은 70년대 세계 문화 코드가 됐다.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찰스 C 만즈, 크리스토퍼 P 넥 공저) 등 참조.
- 코메디닷컴 |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679호 | 2012.06.07 |
| ▲ 위 사진은 튜링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만든 암호 해독 장치인 봄은 영국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봄은 원래 문장의 알파벳과 암호문의 알파벳을 비교해 일대일 대응이 되는 알파벳 쌍을 찾아 암호를 해독한다. 빠르면 20분 만에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다. |
> ‘알란 튜링’ · Alan Turing... 독일 암호체계 해독 |
앨런 튜링 … 독일 암호체계 해독, 2차대전 연합군 승리 이끈 공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스프레드시트 파일을 열거나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튜링 기계’ 의 화신(化身)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 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人’ 에 앨런 튜링(1912~54)을 포함시키며 발표한 선정 사유다.
올해는 앨런 튜링 탄생 100주년이다. 그는 ‘컴퓨터과학의 아버지’ ‘인공지능(AI)의 아버지’ 로 불린다. 튜링은 1936년에 발표한 논문인 ‘계산 가능 수에 대하여 (On Computable Numbers)’ 에서 컴퓨터 의 개념적 기초를 확립했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튜링 기계(Turing machine)’ 는 개인용컴퓨터(PC)에서 수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터의 원형(原型)이다.
튜링 기계(Turing machine)는 실제 기계가 아니라 컴퓨터의 실행과 저장에 대한 추상적인 모델이다. 이 가상 모델에 따르면 컴퓨터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바꿔가며 무한히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노트북 컴퓨터가 수퍼컴퓨터와 동일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이유다.
튜링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가, 전쟁의 함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을 저지한 사람을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누굴까. 영국 총리를 두 차례 지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은 앨런 튜링을 지목했다. 섬나라 영국을 위협하는 독일의 대형 잠수함 유보트(U-boat)를 막은 것은 튜링의 독일 암호문 해독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39년. 런던 북서쪽으로부터 80㎞ 떨어진 블레칠리파크(Bletchley Park)에 있는 정부암호학교 (Government Code and Cypher School)에 영국 최고의 수학자·암호학자들이 집결했다. 블레칠리파크가 선정된 이유는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블레칠리파크에 모인 전문가 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튜링이었다. 튜링과 동료들의 상대는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Enigma)였다. 독일 수뇌부는 에니그마의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튜링이 암호를 깼다. 그가 1939년 디자인한 초고속 계산기 더 봄브(The Bombe)는 매일 바뀌는 독일 암호문의 배열을 몇 주가 아니라 단 몇 시간 안에 풀어냈다. 영국은 유보트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영국 상선들은 독일의 대형 잠수함들을 피해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영국 전함들은 유보트를 격침시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은 암호 해독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스파이나 내부의 제5열을 의심했다.
인문학 싫어해 사립중등학교 생활은 지옥
튜링은 중등교육을 받은 기숙학교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미적분학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고난도 수학 문제를 풀어냈다. 그러나 튜링에게 사립중등학교(public school) 생활은 지옥이었다. 교사들은 과학과 수학만 좋아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교사들에게 인문학을 배우지 않는 중등교육은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립학교에는 구타와 ‘왕따 괴롭히기’ 가 난무했다. 이상하게 보이는 튜링을 급우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를 마루청 밑에 묻어버린 적도 있다.
튜링이 입학한 캐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King’s College)는 천국이었다. 온갖 유형의 기행(奇行)과 기인(奇人)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였다. 블레칠리파크 역시 자폐증세가 있었던 튜링을 이해하고 용인한 천국이었다. 머리를 빗지 않고 손톱이 더러웠던 튜링은 면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는 피를 보면 실신까지 했기 때문에 면도가 두려웠다. 튜링은 괘종시계를 허리에 묶고 다니고 머그잔을 파이프에 묶어 남들이 훔쳐가지 못하게 하는 기인이었다. 매년 6월이 되면 고초열(枯草熱·hay fever) 때문에 방독면을 쓰고 다녔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 튜링도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있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다. 학문과 연구가 다른 무엇보다 중시되는 케임브리지와 블레칠리파크에서는 동성연애 성향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튜링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가급적 숨기려 했다. 동성애를 둘러싸고 튜링이 세상과 벌인 숨바꼭질 이 그를 암호 전문가로 훈련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첫사랑도 기숙학교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다. 한때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했다. 1941년에는 동료인 수학자 존 클라크(Joan Clarke)에게 청혼했다. 고민 끝에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했으나 클라크는 동요하지 않고 튜링을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아 튜링이 클라크에게 파혼을 요구했다. 1940년대 말부터 튜링은 동성연애에 대해 보다 공개적이 됐다. 자부심까지 품게 됐다. 그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으며 고지식했다. 그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났을 때 학교나 학계와 달리 일반 사회는 가혹했다. 1952년 튜링은 아널드 머리라는 19세 노동자와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 궁핍한 아널드에게 돈을 주기도 했다. 일종의 원조교제였다. 둘의 관계는 튜링이 ‘엄중한 외설 행위(gross indecency)’, 즉 동성애를 이유로 처벌되는 비극으로 끝났다. (영국에서 동성애 처벌법은 1967년에야 폐기됐다.)
어느 날 튜링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범인은 아널드 머리와 그 동료였다. 그들은 동성애자는 동성애가 발각돼 처벌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경찰에 절대 신고 못한다고 오판했다. 튜링은 신고했을 뿐만 아니라 ‘범인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동성애 관계를 털어놨다. 법원은 튜링이 컴퓨터를 개발하는 중요한 인력이라는 점을 고려해 징역형 대신 화학적 거세를 제안했다. 튜링은 여성 호르몬의 일종인 에스트로겐을 투여받았다. 튜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조정(漕艇)·마라톤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런 그가 가슴이 나오고 체형이 비대해졌다. 점차 심각한 우울증세로 빠져들었다.
독사과 먹고 자살, 애플 로고 기원설
1954년 튜링은 자살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시안화물(cyanide)을 묻힌 사과 였다. 사과를 선택한 이유로 튜링이 월트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937)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기왕에 그는 취침 전 사과를 먹는 습관이 있었다. 어머니 세라는 자살이 아니라 실수라고 주장했다. 튜링은 실제로 실험에 시안화물을 사용했다. 어떤 전기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튜링은 어머니의 충격을 덜기 위해 자신의 자살이 실수로 보일 수도 있게 자살 정황을 꾸몄다.
영국 정부에 의한 타살설도 있다. 튜링은 영국의 핵무기 · 컴퓨터 · 암호 · 첩보 시스템에 대한 핵심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적국인 소련이 탐낼 만한 대상이었다. 소련은 협박에 취약한 동성애자들을 공작의 타깃으로 삼았다. 실제로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이 돌던 두 명의 영국 외교관들이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다 1951년 소련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튜링은 호르몬 ‘치료’와 보호 관찰이 끝나자 동성애 상대를 찾아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여행지에는 동유럽 국가와 인접한 나라들이 포함됐다. 영국 첩보기관이 이를 모니터링했을 것이다. 튜링의 시신은 화장됐다. 그를 칭송하는 부고 기사는 없었다. 대중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업적은 국가 기밀이었던 것이다. 비밀이 해제되고 컴퓨터 시대가 개막하자 네티즌은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2009년 9월 10일 고든 브라운 총리는 튜링이 받은 ‘극악한(appalling)’ 처벌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튜링은 아직 ‘범법자’ 상태다. 동성애에 대한 처벌이 당시로서는 적법했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 때문이다.
사망하기 몇 달 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튜링은 과학이 미분방적식이라면 종교는 경계조건이다 (Science is a differential equation. Religion is a boundary condition)라는 말을 남겼다. 튜링은 뇌의 작동을 포함해 만물의 움직임은 물질적이라고 믿은 무신론자였다. 그에겐 영혼도 물질이었다. 하지만 튜링은 오히려 영혼이 물질이기에 사후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인 튜링은 기계도 언젠가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뇌와 컴퓨터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주장했다. 튜링이 제안한 ‘튜링 테스트(Turing test)’에 따르면 기계가 사람인 척했을 때 사람이 속으면 그 기계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던진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사람이 한 것인지 기계가 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그 기계는 생각하는 것이다.
애플 로고는 사과를 먹고 자살한 튜링에 대한 오마주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유포됐다. 에덴동산에 있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에 달려있던 선악과 (전통적으로 사과로 추정), 뉴턴의 ‘만유인력 사과’, 튜링의 사과를 연결하면 그럴듯한 스토리라인이 형성된다. 하지만 애플사와 로고의 디자이너는 오마주설을 부인했다. 관련 있는지 스티브 잡스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It isn’t true, but God, we wish it were.)” “그런 일들을 할 다른 여성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 -중앙선데이 제272호 | [김환영의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3>] | 2012.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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