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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연기법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하면서 이제 그 색즉시공에 관련된 부분들을 조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좀 정리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제 연기법이라고 했구요. 연기법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의 상관성. 즉, 이것에 의존해서 저것이 존재한다. 그러구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구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면, 그 둘은 둘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거지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니까.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으니까.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둘의 관계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이런 연기적인 관계인 것이지요. 그래서 중중무진 연기(重重無盡 緣起)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수한 어떤 연기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연기법으로써 만들어진 인연생 인연멸의 존재.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존재들은 전부다 서로 의존해서만 존재합니다. 독자적으로 자기랄 게 없단 말이지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하나도 없다.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고 해서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것들은 생겨났지만 생겨난 바가 없다. 무생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이런 표현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인연 관계 속에서
이렇게 생겨났다가 사라질 수 있다. 인연생하고 인연멸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연기법이라는 것은 곧 불이법을 설명한다. 이랬습니다. 둘이 아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연기법이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생겨났지만, 생겨난 것 그대로 생겨난 바가 없는 무생이고 공생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가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삼라만상이라고 부르는 일체 모든 것들의 특징은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은 공과 다르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제행무상 연기법(諸行無常 緣起法)의 어떤 시간적인 사유. 그래서 제행무상이라고 했지요.
여기 생겨난 모든 것들. 여러분 몸, 여러분 마음, 저, 여기 있는 이 빌딩, 건물, 책, 음료수, 머핀,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인연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언젠간 사라지겠지요. 거지요.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연생 인연멸.
그래서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사유해보면 그게 무상하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잖아요. 색불이공이라는 사실을 금방 사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기초적인 사유. 색불이공이라는 이 진리를 사유하는
어떤 네 가지 단계가 있다,라고 한다면 아주 단순한 가장 첫 번째 단계의 사유가 색불이공을 깨닫는 겁니다. 색불이공은 어찌 보면 이 부분까지는 좀 사유를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주에요.
그래서 우리가 깨닫기 전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이유가 이 색불이공을 깨닫기, 공부하기 위한 것이지요. 왜냐면 이것 공부만 해도 색불이공이라는 사실만 자각을 해도 괴로움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돈 , 명예, 권력, 지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집, 내 차,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생각들, 무수히 많은 것들을 내 거라고 생각하고 그거를 더 많이 채우기 위해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막 집착하면서 살아왔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이루지 않으면 큰일 날 것같이 느껴요. 그걸 이루면 성공인 것처럼 느끼고 그걸 이루지 못하면 실패인 것처럼 느낀단 말이지요. 그렇게 이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 색불이공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보니
‘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 이 색이라는 모든 것들은 다 실체가 아니구나.’ ‘진짜가 아니구나.’ ‘언젠간 반드시 사라질 것이구나.’ ‘인연 따라 생겨났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질 것이구나.’
‘그러니까 여기에 내가 지금 인연 따라 나에게 왔으니 썩 먹기는 할지언정 이렇게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명예도 언젠간 사라질 거고. 건강도 사라질 거고. 돈도 사라질 것이고.
이 몸도 사라질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고 명명백백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오죽 명백하면 부처님께서 제행무상이라는 것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해서 법의 도장. 이거는 뭐 명명백백한 진실이다.
라고 이제 법인이라고 불렀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사유해 봐도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사유를 해봐도 이건 확실합니다. 내가 지금 목숨 걸고 있던 모든 것들. ‘이게 있으면 좋은데 이게 없으면 괴롭다’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져간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정도의 사유의 힘만 있어도, ‘그렇구나. 내가 지금까지는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 집착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 그래서 집착을 좀 내려놓고 살게 됩니다. 명백하니까. 언젠가 떠나갈 거에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요.
그래서 지금은 마음껏 쓰지만 반드시 떠나간다. ‘떠나갈 때 나는 깔끔하게 안녕하고 보내 주리라.’ 이런 마음을 내고 삽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떠나가더라도 명예가 떠나가더라도 크게 집착하지 않고 보낼 때 보내주면서도 뭐 그건 자연스런 인연이니까.
‘어차피 한번 온 거는 한번 가니까’ 하고 가볍게 보내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그러지요. 야, 스님. 역시 연기법과 제행무상을 공부하니까 이 무상만 제대로 공부를 해도 저는 너무 행복해졌습니다. 정말 괴로움이 없습니다.
정말, 어차피 다 떠나갈 거 내가 뭐 그렇게 할 필요가, 열심히 집착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제 상당히 가벼워져요. 이제 여기까지가 어떤 색불이공(色不異空)의 어떤 이치를 어느 정도만 공부를 하더라도 이렇게 집착 없이 살아가게 되니까,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요렇게 사는 거까지는 좋은데. 개중에는 어떤 사람은 이제 이런 문제가 생겨요. 색불이공을 너무 제대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야 이게 다 공한 거구나’ ‘이거 필요 없는 거구나’ ‘쓸데없는 거구나’ ‘내가 돈 벌 필요도 없다’
‘뭐 사랑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살 필요도 없고’ ‘어차피 인생 다 끝날 건데 열심히 살아서 뭐 하나’ 뭐 대충대충 살게 된단 말이지요. 그냥 뭐 완전 공에 빠져서 이제 공에 치우치는 것이지요. 공에 치우쳐서 너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공병에 걸려서 허무주의에 빠져서 ‘야 세상 열심히 살 필요가 없었어.’ 내가 공부를 해보니까 이 세상은 어차피 다 공이야. 열심히 살아봐야 공으로 갈 것이고. 안 살아도 공으로 갈 건데. 난 그냥 대충, 대충 살다가 공으로 갈래.
열심히 살 필요가 전혀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즉, 색즉시공이라고 하니까, 우리 앞에서 말했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설명했습니다. 오온개공만 딱 설해놓으니까 그걸 바르게 알면은, 그 자리에서 바로 딱 계합하면 끝이 나버릴 텐데.
그것을 이렇게 공에 치우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공에 치우치는 사람을 위해서 중도의 가르침을 설합니다. 어떻게 중도를 설하느냐면, 색불이공인데 다시 공불이색(空不異色)이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
라고 하니까 ‘아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까 이거 어차피 공이구나.’ 해서 막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공은 다시 색과 다르지 않다. 공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고. 지금 내가 오는 것은 잘 이렇게 써먹고 살고 있지 않느냐. 분명히, 완전히 없는 완전 극단적인 공이 아니다. 지금 이대로, 어떤 지금 이대로라는 이 펼쳐진 나의 본래 불성이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제 좀 긍정적인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제 공이라는 것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면서 그래서 공이라는 것이 사실은 내 본래면목, 주인공을 얘기한다. 본래 불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불성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무조건 없다고 하지만 지금 나에게 온 이대로의 삶을 정말 눈부시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함으로써 공불이색을 설함으로써 공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 있게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좀 균형감각 있게 중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들, 색불이공(色不異空)과 공불이색(空不異色)을 아울러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면, 과도하게 집착이 없습니다. 인생 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게 그 어떤 것도 없어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에너지가 없이 ‘정말 인생은 다 필요 없다.’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삽니다. 내가 하고 싶은 가슴 뛰는 일이 있으면 그걸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내가 일을 하고 싶으면 일을 하고. 음악을 하고 싶으면 음악을 하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여행도 가고. 무엇이든 나에게 지금 주어진 인연을 거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그 인연을 살아줍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고 액티브(active) 하게 살고 그 어떤 그 누구보다 오히려 더 순수한 열정이 생겨나요. 왜 그러느냐면 집착이 동반이 되는 열정은 좀 맹목적일 수도 있구요. 또 그 집착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착이 없는 상태에서의 열정은 집착은 없어요.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그러나 난 지금 이것이 좋아서 한다. 이것이 즐거워서 한다. 이것이 지금 나를 가슴 뛰게 하기 때문에 난 이것을 한다. 그렇게 하면 순수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두려움 없이.
이게 안 되는 것에 대한 압박감 없이. 두려움 없이. ‘안 되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 없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아. 난 그러나 지금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난 지금 즐거워서 하는 거야. 난 지금 이것이, 너의 인연이 왔기 때문에 인연 따라 열심히 사는 거야.
이것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 즐거운 것. 이것으로 난 충분해. 결과는 상관없어. 난 지금 이대로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음악으로 성공하겠다.’ 하고 음악을 하면 음악이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전도몽상(顚倒夢想) 된 거지요.
본래 음악이라는 건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때 저절로 나오는 게 음악이잖아요. 나는 지금, 지금 이 순간 내 입에서 나오는 음악. 이걸 그냥 즐기고 재밌게 열정을 다해 가지고 음악을,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면서 그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어떤 결과를 성취하겠다.’라는 집착이 없으니까 순수한 열정이 생길 뿐 아니라 과도한 집착이 없으니까 뭐랄까, 가장 좀 뭐랄까 사람이 이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열심히는 사는 데 집착이 없어요.
그런 세계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무엇이든 주어진 것을 열심히는 하고 최선을 다해 하는데 과도한 집착이 없는 삶이 있다면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얼마나 스트레스 안 받고 살 수 있겠어요?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데 전혀 스트레스받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데 전혀 몸에까지 압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몸에 병도 나지 않아요. 집착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면 몸에 병이 옵니다. 과도한 그 집착과 스트레스가 몸까지 타격을 줘요.
그래서 몸도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다가 좀 성공하기 위해서 좀 해서는 안 될 일까지도 합니다. 그 집착이 심해지면. 그러니까 요즘에 뭐 무슨 유튜브이니 무슨 뭐 아프리카 TV이니 뭐 이런 방송 같은 거에 뜨려고 무슨 뭐라지요. 그 무슨 별?
무슨 별을 받는다던 데요. 뭐 돈을 받는. 아, 별 풍선을 받으려고 뭐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까지 하면서 정말 해선 안 될 짓까지 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잖아요. 그건 이제 극단에 치우친 것이지요. 그걸로 성공하겠다. 순수하게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집착을 가지고 그것을 하니까 그 결과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게 바른 길이 되진 못하지요. 순수한 열정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바로 이렇게 색불이공이지만 공불이색이라는 이런 어떤 균형감각 있는 중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내가 최선을 다해 살긴 살아가되 이게 다 공한 것이구나.’ 그러구 공한 데 치우치는 사람에게는 아! 공하지만 바로 이 공한 이것이 바로 진실이고. 이것이 바로 불성이고. 이것이 바로 자성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면목이다.
라고 해줌으로써 공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부처님 당시에는 주인공, 본래면목, 자성불, 뭐 이런 얘기가 없었습니다. 참나 이런 걸 얘기하지 않았어요. 참나를 얘기하면은 그걸 외도라고 봤습니다. 왜냐면,
그건 힌두교 아트만과 똑같다. 이렇게 생각을 했지요. 부처님은 그냥 열반과 해탈을 얘기하셨습니다. 열반과 해탈은 괴로움에서 소멸된,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얘기합니다. 괴로움이 소멸되면 끝이에요.
열반이라는 뭔가 따로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종종 괴로움이 없을 때도 있지요. 아무 일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참 좋다. 이럴 때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난 깨달아야 돼.’ (웃음)
이미 괴로움 없음이 부처님은 열반이라고 했는데. 괴로움 없음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 때조차 뭔가 자꾸 추구하고 있어요. 그거는 왜 그러느냐면, 괴로움이 없음이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괴로움이 없는 것 가지곤 부족해’
‘뭔가 내가 부처가 돼야 돼’ ‘내가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돼’ 이런 어떤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지요. 부처님 당시엔 그런 얘기를 전혀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무아(無我)라고만 했어요.
어찌 보면 부처님 당시는 색불이공이라고 색즉시공이라고 한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아예 애초부터 공에 치우치지 못하도록 그 자성이라는 뭐 주인공이라는 뭐 불성이라는 이런 걸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길 쥘 일이 없어요. 애초부터.
그걸 쥘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공즉시색을 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주인공에 집착하지 못하게 무아. 제법무아(諸法無我). 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인데 제법무아잖아요. 제행(諸行)은 모든 것들인데 열반을 빼고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제행무상. 모든 것들은 항상 하지 않아요. 그런데 무아는 제법무아예요. 거기서 제법(諸法)이라는 것은 제행과 똑같은데 거기 플러스(plus) 열반을 포함합니다. 무위법(無爲法) 유위법(有爲法)을 포함하는 거예요. 제행은 유위법만 얘길 하고.
그러니까 즉, 모든 것이 부처님조차 무아다,라는 것이지요. 부처라는 것조차 무아다. 그러니까 그런 건 없다,라는 것이지요. 금강경에서 아라한과는 내가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다. 왜 그러느냐, 아라한과는 진리랄 것이 따로 없다,
라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고 이름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냥 열반 해탈을 얘기하고 하다 보니까 이제 부파불교에 와가지고 부처님 가르침을 막 연구하고 이렇게 하면서 뭔가 이제 오위 백법이니 이래서.
뭐 우리는 여기서는 오온개공 이렇게 하는데. 오위 백법이니 이래서 백 가지 아주 없어지지 않는 요즘에 말하면 원자 같은, 뭐가 없어지지, 파괴되지 않는 뭔가가 백 가지의 구성요소가 있다. 혹은 오위 75법. 75가지의 깨지지 않는 어떤 뭔가가 있다.
이렇게 착각하는 일들도 생기고 이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이제 그것을 깨주기 위해서 공사상이 나오면서 또 공에 치우치는 사람들도 생기고. 또 이런 이제 역사적인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당시 했던 말을 아주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이요.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부처님이 한 얘기라고 해서 100% 진리라고 그 말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대승불교 경전에서도 부처님은 평생 설법을 하셨지만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그리고 계율을 무수히 설했지만 소소계(小小戒)는 버려도 좋다. 계율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마라. 버릴 건 버리고 쓸 건 쓰고 하라는 얘기거든요. 진리라는 무언가가 딱 쥘 게 있으면 그거는 절대 바뀌면 안 되는 뭔가의 실체지요.
진리라는 뭔가를 쥘 게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방편은 어차피 방편이거든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방편. 그러니까 방편은, 부처님의 법은 법이랄 게 따로 없지만, 법은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방편은 당연히 바뀌고 변하고 이럴 수 있는 것이지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 또 인도라는 환경과 중국이라는 환경이 다르고 이러다 보니까. 그러고 또 그 시대적인 환경이 또 달라지고 이랬을 때는. 그러다 보니까 이제 대승불교에 오고 또 특히나 선불교에 오고 하면서는 이것을 뭐 주인공이니
자성불이니 뭐 본래면목이니 또는 뭐 저 열반경에서도 불성이니, 뭐 이런 식으로 이제 조금 더 긍정적으로 좀, 조금 더 이렇게 좀 강하게 해석을 하는 측면으로 방편을 쓰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게 방편을 쓴 것일 뿐이지. 거기에 과도하게 치우칠 필요는 없다. 그래서요.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우리가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연기법을 시간적으로 사유했을 때의 제행무상으로 본 진리다. 이렇게 표현을 보통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벌써 실체가 없는데. 사유를 통해서 시간이 등장하지요. 거지요.
그러니까 색불이공과 공불이색까지는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주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도 괴로움이 상당히 많이 소멸돼요. ‘아 내가 집착하지 말아야 되겠구나.’
그러구 최선을 다해 살면서 그 집착하지 않는 것에도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은 채 삶을 열심히 살면서 집착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 머무는 바 없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실천해도 뭔가 미진함이 남습니다.
당장 말기 암 판정을 갑자기 받는다거나, 갑자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거나, 너무나도 큰 괴로움이 갑자기 내 인생에 딱 닥쳐올 때 그럴 때 아무리 머릿속으로는 ‘색불이공이야’ ‘이게 다 공한 거야’ 그런데 당장 내가 내일 죽는다는데,
‘공한 거야’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생긴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사유를 통해서 공부를 했을 때만 해도 마음공부를 통해 행복해지는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게 완전히 나를 생로병사에서 해탈시켜주지는 못하더라.
노병사라는 정말 큰 괴로움이 왔을 때 내가 거기 휘둘리더라는 것이지요. ‘아 이게 다가 아니겠구나’ ‘내가 완전히, 내가 이 공을 완전히 체득한 게 아니었구나’ 좀 방편으로 설명을 해본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까지는 사유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공부가 되는 가능한 범주이고. 또 어찌 보면 해오(解悟)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해오(解悟)’ 이치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많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이 생사를 대적할 날이 오게 됐을 때,
그랬을 때 거기서 내가 주춤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이지만,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시간적으로 나중에, 나중에는 공해질 거야.’ 이런 생각을 할 필요 없이. 시간이라는 게 환상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 할 필요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공하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라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즉, 지금 틈 없이 곧바로 곧장 이 소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곧장 공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곧장 공하다,라는 얘기는 뭐예요?
공하다,라는 것은 진리를 설명하는 단어에요. 즉, 공하다,라는 것은 곧 우리가 불성, 진리, 깨달음, 열반, 해탈, 자성불, 본래면목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들을 공이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즉, 색즉시공이라는 말은 책은 책대로 마이크는 마이크대로
나는 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공하다. 실체가 아니다. 비 실체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여지없이 부처란 소리입니다.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 없다는 소리입니다.
지금 이대로 모든 것은 아무 문제없이 해탈 열반한 채로 존재한다. 지금 이대로가 그대로 해탈이라는 겁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그대로가 그대로 ‘번뇌 즉 보리’ 깨달음이라는 것이지요. ‘생사 즉 열반’, ‘생사’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것이 그대로 열반이다.
바다 위에 파도가 치지만 파도가 치는 걸 가지고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파도가 그대로 바다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여기는 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을 깨닫는 것은,
이거는 이제 머리로 되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간의 범주이지요. 범주가 다릅니다. 이건 뭐 좀 다른 용어로 쓰이지만 범주의 오류라는 말이 있어요.
이 범주 안에서 옳으냐 틀리냐를 범주가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얘기할 수 없듯이. 우리는 머리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세간의 범주. 그 속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까지는 이해가 갈 순 있지만, 색즉시공에 대해서는
이 머리로 헤아릴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큰 스님들께서는 이렇게 색즉시공을 깨닫게 하도록, 이 색즉시공은 깨닫는 겁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색즉시공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큰 스님들께서 진리를 보여준단 말이지요.
어떻게 진리를 보여주느냐?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면 진리가 뭐예요? 색이 바로 공이란 말이지요. 색이 바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동안은 다양한 방편을 쓰지요. ‘나는 요 중생이고.’ ‘이 언덕에서 저 깨달음의 언덕으로 가야 돼.’
‘열심히 수행을 하다 보면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닦다 보면 저 깨달음의 언덕으로 갈 수 있어.’ 이런 방편을 쓰지만. 이 색즉시공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곧장 지금 여기,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부처고. 지금 이대로가 해탈이고 열반이다.
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래서 큰 스님들께서 “부처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이것이(죽비로 설 법대를 치며) 부처다.”라고도 하고. 뜰 앞의 잣나무 앞에서 요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제자가 와서 “법이 뭡니까?” “깨달음이 뭡니까?”
물어보면 “저 뜰 앞의 잣나무야.” 뜰 앞에 마른 똥 막대기가 있으면, 얘기하다가 저 똥 막대기가 부처야. 시계가 부처고. 탁자가 부처고. 책이 부처고. 마이크가 부처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지요. 그 말이 색즉시공을 곧장 바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게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입니다. 곧바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켜 보인다. 여기서 직지인심 할 때 그 마음은 본래심. 본래 자성 청정심. 본래 부처의 마음. 때 묻지 않는 이 본래 마음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직지인심을 한다.
그래서 어떻게 직지인심을 하느냐? 지금 색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직지인심을 해서 이것이 바로 부처다.라고 보여준단 말이지요. 혹은 어떤 소리를 경험하게 해주거나 그럼으로써 진리를 곧바로 확인하도록 만들어준단 말이지요.
그러나 중생들은 이제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에서는 색은 색이고 시계는 시계이고 죽비는 죽비이고 소리는 소리이고 마이크는 마이크고 이렇게 다 분별하며 산단 말이지요.
다 분별된 것을 보고 살아왔단 말입니다. 색에서 공을 보지 못하고 색에서는 색만을 보고 살아왔어요. 여기 지금 뭐 100명, 200명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저의 대한 판단은 다 다르겠지요. 어떤 분은 저를 정말 너무 과하게 한쪽으로 치우쳐가지고
‘야 정말 도인이야’ 뭐 이러 식의 망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왜냐면 저한테 가끔 그런 질문하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런 망상을 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아 저 양반은 뭐 별로 뭐 들을 게 별로 없어’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100명이면 100명, 저를 볼 때 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머릿속에서 이해된 저를 만나고 있지요. 거지요. 머릿속에서 판단하는 저를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 100명이 전부다 다른 법상 스님을 안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서 ‘나는 법상 스님을 안다’라고 생각해요. ‘나는 법상 스님 알아’ 그런데 아는 걸 내놔보면 다 달라요. 다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안다,라고 여길 때는
내 머릿속에서 바깥에 있는 이 색을, 색즉시공 할 때 그 색을 대상. 모든 대상을 이걸 있는 그대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내 머릿속에다 기억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 이렇게 생긴 모양’ ‘나무를 잘라놓은 모양’
‘중간에 구멍을 뚫어놓고 이렇게 한 모양’ ‘이런 소리가 나는 아 이것은 죽비야’라고 명색으로써 이름과 모양으로써 머릿속에 기억을 하고. 다음에 죽비를 보면 그 죽비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죽비에 대한 내 머릿속에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고
‘아 이게 죽비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법상 스님은 여기 있는, 있는 그대로의 제가 아니라, 여러분 머릿속에서 개념화된 법상 스님입니다. 상으로 이미지로 상으로 만들어진 법상 스님을 보고 있어요.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들 있는 그대로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서 기존에 공부해왔던 무수한 지식들에 대해서 제가 하는 말을 그걸로 걸러서, ‘아 이 얘긴 맞아. 맞아. 맞아. 아 맞는 얘기하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더 견고히 하거나.
혹은 좀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가 나오면 그냥 이렇게 흘러버려 버려요. 안 들은 것처럼. 흘러버리거나 혹은 내가 분명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제가 틀리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저건 틀렸어.’ 이렇게 이제 취사간택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제가 하는 말도 100명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지난주 제가 뭔 얘기했지요? 물어보면 100명 이하는 얘기가 다 달라요. 뭔 얘기를 들었는지가. 왜냐면 제가 하는 얘기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식대로 듣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이해로 만난, 이해한 그 사유한 거. 알음알이 분별한 것. 그것을 가지고 정말 그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지금 저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법상 스님을 만나놓고 ‘나는 법상 스님을 알아’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진짜 있는 그대로의 그 색을 보는 것이 아니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게 되면 색을 보는 게 아니라 공을 보게 됩니다.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릿속에 내 식대로 해석한 것을 만난다.
모든 걸 볼 때 전부다 그와 같이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이건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이건 뭐다. 저건 뭐다. 이런 식으로 취사간택하면서 자기 식대로 알음알이 분별한 것을 안다고 여긴다. 그래서 내가 내 머릿속에 법상 스님이란 이미지를 딱 쥐고 있잖아요.
내가 이미지를 보구서 ‘내가 법상 스님을 알아’ 이러잖아요. 이 보는 부분을 견분이라고 하고 이 보이는 이 상을 상분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견분도 상분도 전부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이에요. 견분이 상분을 보는 겁니다. 유식에서 말하면.
그 말은 곧 내가 나를 보는 거예요. 내가 내 안에 있는 분별 망상을 보고 저 바깥에 있는 실제를 봤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색즉시공인데 공을 보진 않고 색만을 보아왔습니다.
세상을 볼 때 다 자기의식대로 알음알이 분별심대로 보아왔단 말이지요. 어떤 소리를 들을 때도(죽비를 치며) 그 소리와 직접적으로 접하지 못합니다. (죽비를 치며) 이 소리와 직접적으로 접했을 때 전혀 생각하지 않고 판단 분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접했을 때 이 소리에서(죽비를 치며) 진실을 만나게 되는데. 진실이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실을, 뭐 따로 진실을 만날 게 없어요. 그냥, 그냥 (죽비를 치며) 이거를 만나는 게 진실을 만나는 거예요. 이걸 해석하지 않고 (죽비를 치며)
그냥 만나면 그냥 이것을 만나는 게 진실을 만나는 것이다. 진실이랄 게 따로 뭐 따로 진실이라는 뭐 어마어마한 게 있어서 이 소리를(죽비를 치며) 지금은 이렇게 듣다가 나중에 어느 날 갑자기 이 소리가(죽비를 치며) 정말 다르게 놀랍게 새롭게 뭔가 확 들리는 날이 있겠지.
그날도 똑같이 이렇게(죽비를 치며) 들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꺼풀 덧씌워서 내 머릿속에 해석 분별 망상을 가지고 보는 것이지요. 듣는 것이고. 우리도, 우리도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이 종종 있어요. 어디,
제가 고등학교 아,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소풍을 가는데 그 소풍인지 뭔지 기억도 안 나는, 소풍 같은 거 갔어요. 그런데 새벽에, 주말 새벽에 오라 해가지구 새벽에 아침 해 뜨는 일출을 보여준다고 그래서 다들 막 욕을,
욕을 하면서 이놈의 학교는 왜 우리를 이럴 때 불렀느냐 하면서 모였던 기억이 나요. 그 어둑어둑할 때 이제 새벽에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는데. 산 정상에 그렇게 힘들게 올라갔는데.
그때 산 정상에서 이렇게 힘들게 마주한 그 첫 새벽의 그 감동이랄까? 그렇게 욕을 하면서 올라갔는데 다들 그 위에 올라가서, 그날따라 또 너무 아름다웠던 거 같애요. 밑에 구름이 착 깔리고 해가 떠오르는데, 너무 멋있는 장관을 만났거든요.
그 순간 정말 전부다 그 종알종알 되던 모든 아이들이 갑자기 일순간 말을 잊고 다들 정말 버벅 버벅거리면서 “야! 나는 정말 왜 사람들이 이렇게 산에 가는지 몰랐는데, 오늘 알 것 같다.” 이런 얘기들을, 쟤네들이 뭘 안다고.(웃음)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렇게 뭔가 압도적인 어떤 풍광을 문득, 산을 힘들게, 힘들게 올라가고 올라가다가 문득 바위 위에 딱 올라섰는데 갑자기 장관(壯觀)이 착 펼쳐지는 그런 모습을 볼 때 뭔가 이렇게 생각이 딱 멎으면서 그것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런 해석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아〜 하면서 생각과 말이 그냥, 말을 잊는 풍경. 생각과 말이 그냥 딱 끊어지는,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돼요. 그때 ‘내가 저것을 본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그것과 내가,
그냥 말하자면 하나가 되는 그런 경험이에요. 그거를 뭘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오래 안 가지요. 한 10초 그렇게 딱 보다가 갑자기,
‘그런데 내가 지난번에 봤던 그보다 별로야. 히말라야에서 보는 게 훨씬 멋있어’ 뭐 이런 식의 분별심이 이제 일어나서 지금 이대로의 있는 그대로를 접촉하던 이 귀한 시간이 곧장 사라져버립니다. 곧장. 우리 분별 망상으로.
분별심이 다시 개입이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곧바로 ‘색즉시공’ 색에서 곧장 공을 만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자기의식, 알음알이, 분별심으로 걸러서 색을 보기 때문에, 거기서 공을 마주하지 못하고 색만을 보고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스님들이 직지인심을 통해서 견성성불하도록 직지인심을 통해서 이렇게(죽비를 치며) 자기 자성을 확인하도록 가르쳐준단 말이지요. 끊임없이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이것이(죽비를 치며) 바로 부처다.
라고 얘기할 때 콱 막혀버립니다. ‘저게 무슨, 저게 무슨 소리지?’ 이제 연(緣)이 있겠지요. 어떤 사람은 아예, 아예 이 공부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이게(죽비를 치며) 부처다” 이러면 ‘뭐 말도 안 되는 뚱딴지같은 소리 하고 있느냐’
하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요. 진짜 불교는 정말 대책 없다. 불교 저래가지고 저 불교가 20세기를 선도할 수 있겠느냐. 뭐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니까. 이게(죽비를 치며) 부처라고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으니까 그냥 다 스쳐 지나가 버린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시절 인연이 딱 동해서 이 마음공부에 인연이 동하고. 부처님과 이 금강경 표현에 의하면 선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선근 인연이 있거나 혹은,
이렇게 이런 법문을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듣고, 이래 듣던 사람들은 뭔가 진리를 향한 어떤 발심이 되어 있고. 이러기 때문에 (죽비를 치며) 이것이 바로 부처다,라는 이 한 말에 믿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대신심(大信心).
이 공부에서는 신심이 중요하다는 대신심. 여기서 믿음을 일으킵니다. ‘그렇겠지.’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게 부처겠지.’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겠지.’ ‘색즉시공이 맞겠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맞지 않겠나?’
‘그런데 내가 아직 어리석음에 가려서 분별 망상에 가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저게 저거는 진실이겠지.’ 하고 믿어버립니다. 그래서 분별 가능한 범주에서는 뭐 분별을 해야 되겠지만,
이분이 제대로인 스승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서 내가 따를지 말지를 결정해야 되겠지만. ‘정말 내가 따라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있으면 분별하지 않고 ‘그냥 맹목적으로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하고 믿어야 되는 것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어디까진 지가 애매해집니다. 왜 이런 말씀드리느냐면. 저도 사람들이 워낙 얘기해가지고, 이제 사람들이 뭐 00선원이니 아니면 뭐 무슨, 뭐 무슨 뭐니 여러 명상단체나 뭐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고 하는 스승들.
이런 다양한 단체들을 물어봐요. 그럼 그 사람들, 유튜브 강의하는 내용이나 책이나 이런 것만 보면 불교랑 똑같은 거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어느 부분은. 이게 저기 호리유차면 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이라고,
여기서 한 티끌 머리카락 하나만큼의 작은 간격이 벌어져도 그게 엄청난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말 불교랑 정말 비슷해 보이는 한 끗 차이인데 이 사이비인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야,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의외로 많은데.
이 사이비들은 진짜보다 더 사이비 같애요. 왜냐면 사이비니까 더 신통 자재해 보일 거 아니에요. 뭔가 신통 자재함을, 평범함을 강조 안 하지요. 뭔가 모르는 어떤 신통 자재함을 강조하고. ‘우리는 너희들과는 달라’하는 걸 강조하고.
뭔가 이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이제 어쨌든 끌어모을 테니까. 저도 보니까 유튜브에도 보면은 그 사이비분들이 오히려 더 구독자가 몇 만 명, 몇 십만 명씩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정말 이걸 말 같으면 대놓고 얘기를 하고 싶은데. 참 이거, 좀 법적으로 걸린 다대요. 대놓고 또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도 어려운데. 좀 심한데도 있습니다. 좀 봐줄 만한 데도 있긴 한데. 이게 너무 심해서 야 정말 걱정스러운 경우도 많이 있어요.
실제 그런데 가서 좀 정말 몸과 마음이 너무 피폐해지고 힘들어지고 심지어 돈까지 다 날리고 이런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구요. 또 그런 것들을 지금 뭐 조명해가지구 어느 정도 막 저기 PD수첩이나 이런 데 조명해서 깨지고 이런 단체도 있고.
그런데도 그걸 기어이 살아남는 데도 있고. 별의별 단체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참 어찌 보면, 참 어려운 부분이지요. 다시 돌아가서요. 이렇게 곧장 직지인심을 해준단 말이지요. 어떻게? ‘색즉시공’ 색이 곧 공이다,라는 사실을 가리켜 보여준 단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수행자는 거기 막힙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뭔 말이지? 모르겠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모르겠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게(죽비를 치며) 법이야. 그 모르겠다. 아니면 알겠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100% 거나 0% 거나. 내 한 70%는 알 거 같은 데요. 내 한 80%는 알 거 같은데.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그거는 자기 알음알이가 분별하고 지금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몰라야 돼요.
그거는 100% 몰라야 됩니다. ‘조금 알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면 ‘그거는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냥 몰라야 됩니다. 그냥 모르다 보면 그냥 꽉 막혀 있다가, 이게 이제 간화선에서의 구조에요. 간화선에서 이런 방식을 주로,
간화선의 방식이 이제 이런 방식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꽉 막히게 만듭니다. 화두를 타파하라고 그러잖아요. 화두를, ‘이 뭐고?’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해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화두를 줍니다. 그럼 화두 앞에서 꽉 막혀있지요.
“진리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하는데 ‘진리가 왜 뜰 앞의 잣나무인가?’ 여기서 꽉 막혀버리는 겁니다. ‘왜 뜰 앞의 잣나무가 진리이지?’ 그런데 간화선에서 하는 얘기가 주의점이 많아요. 주의점이 뭐냐 하면, 이것이 부처다.
뜰 앞의 잣나무가 부처다,라고 해놓고. 단, 이 답을 푸는 데 있어서 생각은 움직여선 안 된다. 생각을 가지고 답을 내선 안 된다. 뭐 옛날에 배웠던 거 가지고 이렇게 갖다 붙여가지고 뭐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뭐, 뭐 하면 안 된다.
뭐 하면 안 된다. 한 10가지 가까이가 있어요. ‘선어록과 마음공부’에 적어놨는데요. 그런 여러 가지 어떤 주의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뭐, 뭐 하라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꽉 막히기만 하되,
머리를 가지고 해석할 수가 없어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막혀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냥 꽉 막힌 채 막힌 것에서 버텨라. 그럽니다. 뭔가 모르겠음. 모름. 오직 모를 뿐. 모름에서 버티고 버티고 버텨라.
그러나 스승은 계속해서 직지인심을 하고 있지만 직지인심을 해도 모르겠는 이 모르겠는 이 뭔가 꽉 막힌 벽처럼 뭔가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는. 은산철벽에 갇힌 것 같은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온갖 아주 그냥 산 같은 철벽이 나를 꽁꽁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꽉 막혀서 한 발도 갈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고. 한 발 내디딜 수도 없고 뺄 수도 없고. 이렇게 하다가 처음에는 머리에서 궁금하다가 모르겠다가 나중에 이제 가슴으로 내려와서 온 존재가 궁금하고 온 존재가 모르겠는,
그걸 이제 의단독로(疑團獨露)라 그럽니다. 의단이 이제 하나로 뭉친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구요. 그렇게 하다가 너무 꽉 틀어막혀 있을 때 100% 꽉 막혀있을 때 한순간에 그냥 탁 열린다. 이게 이제 어떤 간화선에서 얘기하는 어떤 깨달음의 구조이고.
주로는 이제 이런 방식으로 많이 해결이 되지요. 주로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만이 100%라고 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이제, 이 선에서의 방식은 색즉시공을 곧장 드러내 보여주는 공을 곧장 보여주는 방식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초기 어떤 조사선에서는 이렇게 큰 스님들께서 뜰 앞의 잣나무가 부처다. 혹은 지금 이대로가 부처다. 모든 것이 다 부처 아닌 바가 없다. 하고 끊임없이 법문을 설해주면 그런 얘기를 듣고 뭔가 모르게 계속해서 내 마음의 발심은 있으니 계속 가서 법문을 듣게 되고.
‘도대체, 도대체 법이 무엇일까?’ 하는 어떤 궁금함. 발심.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 계속해서 그냥 허탈하게 법문을 듣는 겁니다. 다른 건 뭐 크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요. 수행을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다 보니까.
그냥 같이 살면서 삶을 살아가면서 법문을 듣다가 어느 날 탁 이걸 확인하는 순간이 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다른 점이, 간화선과 다른 점이 뭐냐 하면요. 초기 조사선이라고 불리는 초기 어떤 조사선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깨달았습니다.
법문 듣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습니다. 그러구 뭐 임제, 조주, 마조, 황벽, 뭐, 뭐, 백장, 육조 혜능 스님에서부터 아주 유명하고 걸출했던 스님들도 워낙 많았구요. 그런데 특징이 그때는 아무것도 시키는 게 없었어요.
간화선에서처럼 은산철벽에 막 가두려고 막 애쓰고 기를 쓰고 은산철벽에 가두려고 막 노력시키고 이렇게 하나도 안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었어요. 그냥 스님은 스승을 의지해서 스승 법문 듣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간화선에서 꽉 막히듯이 막 미친 듯이 막히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상기병 같은 게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간화선에서 너무 몰아붙이고 쪼아대니까 거기서 막 상기병도 오고 또,
그런 걸 모티브(motive)로 어떤 명상 단체에서 깨닫게 한다는 또 이런 갖다 유위 조작으로 막 그냥 몰아붙이는 그런 명상 단체도 많아요. 그래서 대부분 상기병. 병이 옵니다. 심지어 정신병까지 오고 그래요.
그렇게 몰아붙여 가지고 공부가 제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까 간화선 지금 천 년 넘는 역사가 진행해왔는데, 간화선에서 깨달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없잖아요. 초기 조사선에서는 아무것도 시킨 게 없고 열심히 할 게 없었는데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깨달았는데도 불구하고 간화선은 그렇게 열심히 시키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많은 데도 못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들 같은 사람들이, 이게 엘리트 교육이지요. 어찌 보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앉아가지고 장좌불와로 몇 시간씩 앉아있고. 일주일씩 앉아있기 힘든 사람에게는 ‘난 안 되나 보다’ 하는 자괴감을 자꾸 가져다주는 그런 수행법이었었던 것이지요. 그게 진짜가 아닙니다. 왜? 유위 조작이잖아요.
뭔가 유위법이잖아요. 뭔가 조작해서 법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이미 있는 법을 조작해가지고 ‘열심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한다고 만들어지겠어요? 이미 만들어진 것을 내가 분별 망상의 힘을 갖다 실어주느라고 못 봤을 뿐인데.
분별 망상의 힘을 실어주던 것만 그냥 안 하면 되는 거거든요. 뭔가 따로 할 게 없습니다. 그냥 안 하면 된다. 즉, 내가 가속 페달을 계속 밟아왔어요. 분별 망상이라는 가속 페달을 괴로움의 페달을 계속 밟아왔는데 이것, 페달에서 발만 떼면 됩니다.
그냥. 하던 것만 안 하면 돼요. 이것 밟는 것도 힘들거든요. 내가 그냥 이것 안 하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명상을 가속페달을 밟다가 다시 브레이크를 밟는 걸로 착각을 해요. 브레이크를 밟는 유위 조작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브레이크를 심하게 밟으려고 했다가 오히려 더 사고 날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는 게 명상이 아니고. 그냥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그냥 놔두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해요, 공부에는.
견성을 해도 보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이 선풍기도 틀어놨다가 전원을 싹 뽑는다고 갑자기 딱 서는 게 아닙니다. 그 전원이 돌아가던 ‘습’, 그동안 돌아가던 그만큼은 어느 정도 계속 간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계속 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과도하게 수행을 통해서만 막 깨닫는다.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모름에 대해서 내가 막 사무쳐야 되고 막 나는, 나는 법문 듣는 건 좋은데. 나는 막 모름이 너무 사무쳐지지가 아니니까 나는 깨닫지 못하겠지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너무나도 사무쳐서 깨닫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고. 뭐 그런 경우는 빠르면은 3일에서 일주일 안에 깨닫는다고 얘기하는 스님들도 있지요. 너무 몰아붙이니까. 그런데 이제 장단점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냥 법문 듣다가 ‘뭔가 나는 언젠가 금생에 깨달아야지’ 하는 마음을 발심을 이렇게 가지고 있고. 여러분들 이 지하철도 복잡하고 찾아오기도 힘들고 여러분들 제가 집을 여쭤보니까 다들 뭐 무슨 인천, 의정부, 남양주,
뭐 경기도 외곽, 정말 멀리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씩 오시더라구요.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이 귀한 시간을 빼서 여기를 찾아온다. 사실은 그 정성도 사실은 엄청난 정성이지요. 그 정성이 상당히 엄청난 정성이에요.
그 정성은 곧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누가 여러분한테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니잖아요. 안 가면 뭐 출석체크해가지고 뭐 벌주겠다,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냥 내가 그냥 오게 되는 거예요. 유위법이 아니라 이건 무위법입니다. 어찌 보면.
자기가 그냥 마음을 내다보니까 그냥 내가 가고 싶어서 오는 거지요. 그 정도의 정성? 그 정도의 정성이면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너무 과도한 애씀, 과도한 노력, 이것도 하나의 극단입니다. 한쪽에 극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과도하게 몰아붙이는 사람은 깨달음이 올 때, 그래서 간화선의 전통에서 깨달음이 오는 사람은요. 간화선 하다 깨달은 줄 아는데. 간화선을 막 몰아붙이고 몰아붙이고 몰아붙이고 물아 붙이다가 정말 죽을 것처럼 몰아붙이다가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애가지고 확 놔버려요. 그때 확 깨달음이 오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몰아붙여서 깨달은 줄 알아서 딴 사람, 제자들에게도 물아 붙이라고 시켜요. 계속. 간화선의 스승들은. 몰아붙여서 깨달은 줄 알고.
그래서 그렇게 됐을 경우는요. 막 몰아붙이니까 깨달음이 올 때 그 깨달음의 쾌감? 깨달음의 감각? 깨달음의 그 통 밑이 쑥 빠지는 그 경험들이 너무 크게 옵니다. 이게 꽉 막혀오고 막 나를 제한시켰던 게 크면 클수록 거기서 딱 타파됐을 때 오는 그 시원함도 크지요.
뭐 이것과 비슷해요. 그냥 교도소에 어떻게 한 일주일 잠깐, 잠깐 잡혀갔다가 그냥 나오는 사람에 비해서 5년 복역한 사람, 10년 복역한 사람, 20년 복역한 사람, 나는 여기서 이제 연구적으로 죽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감면되고
감면되어가지고 딱 풀려났다. 난 여기서 원래는 저기 뭐래지요. 죽는 걸 뭐래지요? 사형을 받았다가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면되고 또 10년으로 감면되고 해서 나오게 됐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는 여기서 죽는 줄 알았다가 나오니까 그 나가는 날,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감동이. 그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구 막 나가기를 간절히 원하면 간절히 원할수록 나가는 날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데 그 나가는 날 기쁜, 그게 평생 갑니까? 그게 나가는 거 실체인가요? 아닙니다.
나가는 그날만 기쁘지.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당장 먹고살아야 돼요. 먹고살려면 일해야 되고. 이제 평범한 삶이 벌어지는 그게 진짜 삶이지. 나가던 날, 그날이 나가는 거 실체가 아닙니다. 그 기쁜 감정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몰아붙이다 깨달은 사람은 그 감정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기도 쉬울 뿐 아니라. 그게 잘 오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감각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사라졌을 때의 그 충격도 너무 크고.
그걸 다시 찾으려고 다시 찾으려고 더 많이 노력하고 애쓰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더 장애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아니까. 그리고 또 한 편으론 교만함도 심할 수가 있구요.
그리구 그게 딱 사라지고 났을 때 이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것만이 남았을 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를 못하고 내가 그때 느꼈던 그 쾌감. 그게 깨달음일 텐데. 그걸 한 번 더 경험해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망상 부리면서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허비해버리는 일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야 이거 내가, 내가 이게 확. 분명히 내 인생, 내 삶은 가벼워졌고.’ ‘내 삶은 정말 많이 가벼워진 게 맞는데.’ 그 경험이,
그래서 이제 지금 불교계의 어떤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지금 기존의 불교계의 문제점은 간화선 천 년 동안 내려왔잖아요. 한국불교 정체성으로. 그러다 보니까 간화선에서 깨달은 사람의 경험을 책으로 써놓은 모든 책에는
전부다 엄청난 깨달음의 경험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말, 정말 엄청난 깨달음의 경험이. 그러니까 그것만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뭔가 그렇게까진 아닌데, 나는 뭔가 그냥 쑥 뭔가 왔는데. 뭔가가 하나가,
분명히 그 이후와 그전은 분명히 달라졌는 그거는 분명한데. ‘이거는 깨달음이 아니야’라고 또 스스로 또 착각을 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는 오히려 그런 감각, 이런 데 치우치지 않아요. 거기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그런 감각이 깨달음일 거라는 생각이 없어요. 이 맹숭맹숭함을 처음부터 그냥, ‘에게 이게 다란 말이야?’ ‘그냥, 그냥 딱 이런 느낌? 이게 다라고? 정말 이게 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막 화려하고 이런 걸 찾지를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 이후부터 그냥 꾸준히 이 자리에서 이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이것이 중요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막 내가 깨달았다. 이런 얘기도 더 안 하게 되지요. 이거는 체험이 좀 가벼우니까 그런 얘기를 내세우지도 않게 돼요.
그리구 어차피 그 체험, 작은 체험이 있어도 왔다 가버리니까, ‘아,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어차피 그러더라도 내가 업습에 휘둘리는 것이 있다 보니까 ‘이 업습을 점점 더 조복하는 이 공부는 끝없는 공부구나!’ ‘꾸준히 해야 되는 공부구나!’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이런 또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오느냐? 이 색즉시공을 깨닫는 그 돈오의 순간. 그래서 이 색즉시공이라는 것은 한 번 몰록 자성을 확인하는,
자성을 확인한다고 하니까 ‘자성이 있어서 내가 그 자성을 확인하는구나.’ 이렇게 착각할까 봐. 그냥 그것은 뭐 따로 자성을 확인하는 그런 순간이 아닙니다. 문득, 아 본래 내가, 이걸 내가 다 쥐어왔던 것이구나.
그래서 이걸 다른 말로 어떤 표현을 쓰냐면요? 어떤 말로는 자성을 확인한다. 뭐 견성을 한다. 뭐 성품을 본다. 이러는데. 별로 안 좋은 표현입니다. 오히려 이런 거에 가까워요. 생각이, 생각이 나 망상이 분별심이 생각이 가짜였구나,
라는 걸 문득 확인한다. ‘아 이 생각이 진짜가 아니었구나.’ 이것을 문득 확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제가 엊그제 유튜브에도 그 바이런 케이티 얘기를 잠깐 했었는데요. 그 사람도 문득 확인하고 보니 ‘다른 건 다 필요 없구나.’
‘다른 게 다 필요가 없구나.’ ‘그냥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구나.’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괴로움? 그건 진짜가 아니다.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 아니냐. 그 생각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계속해서 알려줍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 이 생각이 진짜가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면, 그 생각으로 인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냥 내가 부리던 분별 망상과 생각. 거기에 힘주고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면서 그걸 주인 삼아 왔던 삶이
그냥 문득 한번 내려놓아지고 ‘그게 진짜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문득 그냥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꾸준히 계속해서 다시 또 한 번 생각에 속아요. 다시 한번 속고. 또 한 번 속고. 깨달음 얻은 사람들도.
그러나 그전과 다른 점은 빨리빨리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아 이거 분명한 생각은 실체가 아니야’라는 것에 빨리 이 색즉시공이라는 것에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공이라는 본래 텅 비어있는 아무것도 아닌 이 자리.
내가 생각을 주인 삼아 왔던 그것이 아닌 아 이 생각 이전, 생각 이전. 그게 화두가 그겁니다. ‘화두’ 말 머리. 말 이전. 말이 나오기 이전 자리. 분별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 그 이전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꾸준히 공부를 해나가면서 이제는 그전에 그야말로 이런 사실에 대해서 미세한 자각이라도 없던 사람과는 공부의 진도가 몰라보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전에 이런 어떤 이 공부에 대한 어떤 안목이 없는 사람들은
10년, 20년, 30년을 해도 뭐가 뭔지, 뭐가 틀린 지를 전혀 몰라요. 전혀 모릅니다. 30년을 공부했어도 몰라요. 30년을 공부한 사람도 법을 알려주면 듣기 싫어하고. 기도하라 그러면 좋아하고. 스님이 훌륭한 스님인지 아닌지의 요건은
기도를 오래 잘 하느냐. 오래 앉아 있느냐. 오래 염불을 몇 시간 동안 하느냐. 이런 걸로 그 스님을 판단을 해요. 아니면 그보다 더 심한 사람은 점을 잘 보는지. (웃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공부에 대해선 아무리 얘기해줘 봐야 30년을 얘기해줘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부에 대한 안목?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 그래서 부처님이 끊임없이 법을 설하셨잖아요. 제자들은 끊임없이 부처님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걸 통해서 내 안목이 당연히 달라지고 훈습이 된단 말이지요.
부처님 법에 훈습이 됩니다. 정법훈습(淨法熏習). 부처님 법에 훈습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이 법이 점점 안착이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 성품을 한번 확인하고 나도, 제가 아는 스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 많이 계세요.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구요.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자기 성품은 확인을 했는데. 이제 보임을 해야 된다고 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우리나라 불교, 그동안의 어떤 반성이라면 어찌어찌하다가 간화선을 통해서 어찌어찌하다가 문득문득 견성한 사람이 때때로 이렇게 있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 이후에 보임을 잘 이끌어 줄, 보임이라는 건 따로 보임의 체계적인 커리큘럼(curriculum)이 없습니다. 그냥 법을 드러내주는, 이 법을 드러내주는 법문을 꾸준히 듣고 그러면서 그때부터 사실은 뭐 위빠사나,
알아차림, 그게 그전에 분별 망상이 수없이 많을 때 해봐야 잘 안돼요. 그런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되고 나면 훨씬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기가 쉬워져요. ‘생각이 나를 휘두르고 있구나’라는 게 보인단 말이지요. 그럼 그게,
이게 뻔히 이 생각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게 보이니까 다시금 제자리에 돌아오기가 쉬워집니다. 그때부터 사띠가 훨씬 잘 되는 것이고. 알아차림이 더 잘 되는 것이고. 내가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알아차려지잖아요.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그 공부가 저절로 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이제 저절로 뭐 마음 챙김의 공부도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 마음도 챙기고 그러면서 법문 꾸준히 듣고. 그러면서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이 공부입니다.
막 뭔가 애써서 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고. 그러니까 보임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법과 가까이하면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법과 가까이하면서 내가 본래 부처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대로가 자등명이에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나라는 존재도 부처고. 이렇게 사는 이 삶도 부처고. 진실이, 모두가 다 진실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진실 속에서 사는 것.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실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진실 속에서 그냥 살아주는 것. 그것 말고 뭐 할 게 있겠습니까? 그게 보임이고. 그게 공부지요. 이렇게 처음에 색즉시공을 깨달은 사람. 쉽게 말해서 견성을 했다,
라는 사람들이 한동안 그때 체험했던 그 순간의 어떤 감각, 그 화려했던 그 행복했던 그 감각에 사로잡혔던 사람들 중에는 이제 이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색즉시공을 깨달았잖아요. 그러니 이 색이 실제가 아니라 공이 실제인 거예요.
이제 그 사람에게. 공은 좋은 거지요. 그러니까 공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겁니다. 색엔 오고 싶지가 않고. 미세하게 틈이 생기는 거예요. 색과 공 사이에. 색즉시공이라는 건 틈이 없다는 얘기인데. 처음 깨달았을 그때의 감각이 잠깐 있지만,
그 이후엔 다시 습이 있다 보니까 그 틈이 생겨서 색과 공 사이에 틈이 생겨서 공은 좋은데 색은 싫어요. 그래서 공에 자꾸 머물고 싶고. 그래서 자꾸 직장생활 좀 멀리하고. 나는 어디 산에 들어가서 혼자 조용히만 있고 싶고.
가족들과 부딪치는 것 싫고. 조용히만 있고 싶고. 혼자 뭐 명상을 하든 공부를 하든 법문을 듣던 이런 공부 하는 시간은 좋은데 나머지 시간은 자꾸 싫게 느껴지기도 한단 말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이제 꾸준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거 보임을, 그렇게 그게 싫어가지구 이제 보임한다고 저 지리산 토굴 짓고 사는 스님들 은근히 계세요. 꽤 계세요. 그것도 어떤 스님들 중에는 심지어 어떤 뭐 절을 열고 포교를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절 문을 닫고 어디 공부하는 분들도 더러 계시기도 하구요.
어쨌든 그럴 수 있는 분들은 참 훌륭하신 거지요. 어쨌든.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고 있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다행인 것은 여러분은 훨씬 좋은 조건 속에 있습니다.(웃음) 언제나 색 속에서 언제나 진리 속에서 항상 부딪치면서
내가 떨어져 나가서 혼자 조용한 곳을 찾아서 보임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자식 밥을 해줘야 되고. 남편 와가지고 밥을 해줘야 되고. 돈은 벌어야 되고. 이 현실이라는 문제와 계속 부딪치잖아요.
그렇게 현실 속에서 피한다고 해서 빨리 공부가 진척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현실 속에 뛰어들어서 ‘그것이 바로 이 현실, 이 자체가 진리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현실 속에서 온전히 살아주고 경험해주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주고.
그것을 확 흡수해서 살아주는 그것이 참된 보임이고, 참된 공부거든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문득 이제 공즉시색을 깨닫게 된단 말이지요. 즉, 이 말은 공이 좀 더 좋은 거예요.
색보다 공이 좋았는데 이제 공즉시색을 깨닫고 나면 공보다 색이 좋고 색보다 공이 싫고 이런 게 없어지는 것이지요. 아 색이 곧 공이라는 걸 완전히 계합이, 완전 불이법에 진리와 현실이 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완전히 틈 없이 계합이 되다 보니까,
그래서 이제 심우도에서는 그때를 반본 환원(返本還原). 입전수수(入廛垂手). 이렇게 부르지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냥 삶 속에 뛰어들어서 다시 사는 것이다. 그때는 이제 전혀 거리낌 없이 현실을 사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과 전혀 둘이 아닌 것이지요.
수행하는 것과 삶을 사는 것이 전혀 둘이 아니고. 하나도 거리낄 것 없이 이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렇게 단계처럼 보이지요. 이게 이제 색불이공 공불이색. 그러다가 또 색즉시공 다시 공즉시색에 어떤 이런 어떤 공부의 단계와도 같은 이런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고 마찬가지로 색과 마찬가지로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지요. 처음에 수상행식. 느낌, 생각, 의지, 의식, 이것이 아 잠깐만요. 그 부분은 제가 잠깐 10분 쉬었다가 네, 하겠습니다.
첫댓글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녹취록을 뽑아서 읽으면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것들을 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모든것을 알고나면 그 다음은 어찌되었다는거죠?
그리고 나의 생활은 어떻게 변화 되는가요?
님의 마음에도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