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울렸다. 셋째 언니였다. "나 지금 여기 왔다 도착했어" 그 순간은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진하게 내게 다가왔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르고 흥분한 나는 콘도 거실에 앉아계신 언니오빠들한테 소리부터 질렀다. “셋째 언니 형부 오셨대요. 여보 얼른 내려가요”
그와 내가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앞장섰고 넷째언니가 급히 따라나섰다. 콘도 카운터에 들러 휠체어를 빌려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일 초라도 늦는다면 모든 기쁨과 행복이 사라져버릴 것처럼 서둘렀다.
아르헨티나에 살고 계신 네째 언니네가 오셨고 여느 해처럼 가족 모임 겸 여행을 계획하였다. 특히 희귀병과 투병중이어서 하루하루 쇠약해져가는 셋째 형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모시기로 하였다. 칠남매 모여 함께 밥이라도 먹고 웃기라도 해 보자고. 그런 일이 앞으로 또 몇 번이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형부의 건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는 일이 어려워졌고 밥을 삼키는 속도, 걸음걸이, 손놀림이 불안해지고 느려지고 있었다. 갈 수 있으려나? 셋째 언니의 말이었다. '업고라도 가야지' 큰언니의 절실한 말이었다. 저희가 모시고 갈께요. 막내로서 그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익산에서 둘째 언니네가 오셨다. 함열역까지 자동차를 타고 와서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에서 내려 청량리로 가서 양평행 기차를 타고 오셔서 우리와 합류하였다. 무려 일곱 시간. 일흔 여섯의 연세로는 무리한 여행길이었지만 마다하지 않으셨다. 가족들이 좋아한다고 직접 뜯은 쑥을 넣어 찰떡을 한 상자 만들어 오셨다. 무거웠다. 사랑의 무게였다.
카톡방에서나 만나는 스님, 큰오빠는 강원도에서 저녁 예불까지 마친 후 부랴부랴 오셨다. 원주에서는 양평행 버스가 없어 여주로 갔는데 양평으로 오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셨단다. 택시를 타고 오는데 기사님이 고맙게도 앞에 가고 있는 버스가 양평행 버스라며 앞질러가서 내려주더란다. 작은오빠와 큰언니 아르헨티나 언니네가 오셨다.
콘도 주변은 온통 울창한 산이었다. 산이 가까이에 있어 오월의 푸르름이 콘도 창문마다 밀려 들어올 듯 가득이었다. 거실에는 세째 언니네와 스님을 제외한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웃고 먹고 이야기중이었지만 셋째 언니네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을 어찌 감추랴. 세째네 온다니? 올까? 올라나? 누군가는 질문을 했고 그때마다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출발하기 전에 나는 세째언니와 통화를 하였다. 무리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언니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였다. '글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형부가 가고 싶어 하시니 한번 출발은 해 보겠는데 가다가 만약 형부가 힘들다고 하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해.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놀고 있어라.
우리가 달려 나갔을 때 셋째 언니는 몸이 불편한 형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고 있었다. 수십 년 헤어져 살아온 형제들의 만남처럼 감격스런 상봉이었다. '언니 형부 오셔서 정말 좋아요' 내 목소리가 금시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네째 형부와 둘째 형부가 뛰어내려와 기다리고 계셨다. 잘 왔네 잘 왔어. 고개를 숙인 셋째 형부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물론 셋째 형부는 말씀을 할 수 없어 듣고만 있었지만 표정으로 모든 것을 말씀하고 계셨다. 함께 라는 것. 이보다 따뜻하고 정겨운 일이 있을까. 이보다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당연한 줄만 알았던 함께 라는 일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매사에 완벽주의자였던 셋째 형부다. 아내와 자식 사랑은 물론이고 직장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정으로 대하셨던 분. 사람을 하도 좋아하여 시간을 불문하고 집으로 데려오셨던 분. 자신의 성격처럼 검소하고 깔끔하게 집을 꾸며 우리는 호텔이라고 말했다. 자식들은 독립하여 제 가정 튼실하게 꾸려가고 있으니 부모로써 책임도 충실히 끝낸 셈이었다. 운동도 열심이셨다.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던가.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더니.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침대에 누워계신 시간이 많은 셋째형부다. 언니가 운전을 하고 형부는 의자에 기대고 왔으나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이곳까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어 여기저기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오는 길에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시 몸을 일으켜 쉬었다가 오셨단다. 고생했다는 우리의 말에 셋째 형부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물론 언니만이 알아들었다. ‘당신이 하도 오고 싶어 하는 거 같아 참고 온 거야’
아아! 형부! 존경합니다. 언니를 아끼고 사랑하는 형부를 존경합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마다 절대로 빼놓지 않고, 지난번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에도 배달되었던 꽃바구니며 선물이며 때맞춰 여행 계획을 꼼꼼하게 세워 언니와 떠나셨던 일들 모두 사랑입니다. 남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존경합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챙기며 살아오신 그 마음을 존경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전화로 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보 햇볕이 좋으니 거실에 앉아 팔다리에 햇볕을 쪼이세요’ 어느 남편이 이처럼 자상하게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요.
퇴직 후 렌트카로 언니와 함께 미서부를 한 달 간 여행하신 일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멋지셨습니다. 도전 정신에 낭만까지 곁들여졌을 그 여행, 꿈꾸지 않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저는 최서방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했는대요. 꿈쩍도 안했지요. 그것도 형부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였던가요. 오늘처럼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갔을 때였지요. 기분 좋게 취한 형부가 큰언니의 붉은 꽃무늬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더니 노래에 맞춰 춤을 추셨지요. 나긋나긋하고 애교가 넘치는 여인 같은 몸짓인지라 우리는 배가 아플 만큼 박장대소하였지요. “형부는 여자로 태어났어도 행복 했을걸” 언니의 말씀에 우리도 동의 했지요. 장소에 따라 자신을 세우기도 하고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형부의 품성을 그 누가 따라갈까요.
그 저녁도 저는 기억합니다. 형부는 막 퇴근을 하셨고 언니는 식탁을 차리고 있었지요. 잘 익은 김치가 통째로 접시에 놓여 올라왔는데요. 김치국물이 촉촉하게 흘러내렸고 김치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는데요. 그 김치를 쭉쭉 찢어서 뜨끈한 김이 오르는 형부 밥숟갈에 척하니 언니가 올려놓았고 형부는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드셨는데요. 어린 조카들도 나도나도 먼저 달라고 소리를 쳤지요. 행복을 구경한 날이었지요. 저도 그렇게 살리라 마음 먹었지요.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이 그만큼 행복하게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오신 날들입니다. 매일매일이 제게 교훈을 주신 날들입니다. 형부 존경합니다. 언니도 존경합니다.
서너 해 전 베트남 캄보디아 가족여행, 기억하시죠? 캄보디아 공항의 말도 안 되는 입국 심사를 어찌 잊을까요. 미리미리 계획하고 서류를 작성한 형부 덕분에 다른 여행객들이 우왕좌왕 하는 동안 우리는 일등으로 입국했지요. 의기양양했지요. 다음번에는 아르헨티나에 가자고 약속하셨지요. 그 약속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큰언니가 며칠 전에 말씀하셨지요. 재우아빠가 몸이 나아지면 아르헨티나에 갈 수 있을텐데.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착한 친구가 말해주었습니다. 성당에 나가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절실하게 기도하면 하느님은 바라보신다구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