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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좌도명인 故 제산 박재현
근래 한국 명리학계의 빅3 가운데 두 사람인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92),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2000)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발견된다.
박재완과 박제현. 공통점은 둘 다 박씨(朴氏)라는 점이다.
한국에는 역대로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기인·달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시작해 조선조 창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무학대사의 속성도 박씨였다.
그런가 하면 계룡산 신도안의 바위에 새겨져 있던 풍수도참의 글씨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다.
박씨 가운데서 미륵불이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로 인해 계룡산에는 박씨 성을 가진 도사들이 엄청나게 몰려 왔었다.
근래 ‘신앙촌’으로 유명했던 감람나무 박태선 장로도 박씨이고,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도 박씨다. 왜 박씨인가?
한국의 지리적 위치는 동방이다.
동방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木)의 방향에 속한다.
박(朴)자에는 나무 목(木)이 들어 있다.
따라서 동방의 나라에 부합하는 성씨는 박씨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나무 목의 오른쪽으로 복(卜)이라는 글자가 첨가된다.
‘복’ 자의 의미는 점을 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배출되는 영(靈)적 능력자 가운데
박씨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설이 있다.
필자에게 풍수를 전수해 준 선생님의 성씨도 공교롭게 박씨였는데,
언젠가 그 선생님과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이
‘한국에서는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인 박(朴)씨와 이(李)씨를 주목해야 한다’였다.
제산은 좌충우돌 신출귀몰하는 천재형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와 아울러 격한 감정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충돌하면서 스파크를 남겼다.
그가 남긴 스파크를 추적하다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96년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나 받은 인상도 대단한 재사(才士)라는 느낌이었다.
우선 제산은 관상부터 비범하였다.
보통사람이 제산의 관상을 보면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상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제산의 얼굴은 원숭이형 관상이다.
눈과 눈썹 부분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
자고로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천재가 많다.
우선 도올 김용옥부터 보자. 도올도 필자가 보기에는 원숭이형 관상이다.
도올이 TV에서 ‘도덕경’을 강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필자는 손오공을 연상하였다.
그 변화무쌍한 초식을 동원하여 종횡무진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신통력은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현재 한·중·일 3국에서 도올과 같은 손오공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올 선생! 원숭이라고 평했다고 해서 필자를 너무 욕하지 마시라!
역사적으로 볼 때 원숭이형들은 천재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선생과 제산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니….
일본의 원숭이형 천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경북 안동의 강직했던 선비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93)은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본 뒤 “원숭이 같이 생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
히데요시도 원숭이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는 만고에 죽일 놈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 꼽는다.
히데요시는 평지돌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을 끌던 미천한 마부 출신이 입신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은 물론 대국인 중국까지 삼켜버릴려 했던 걸물이다.
평론가의 안목에서 볼 때 오
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보다 히데요시의 인생이 훨씬 극적이다.
아무튼 제산은 원숭이상을 지닌 천재였다.
실제로 제산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의 서상(西上)이라는 지역인데,
유년시절부터 ‘서상에 신동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던 인물이다.
그 천재성이 바둑으로 갔으면 이창호가 되었을 것이고,
학문으로 갔으면 도올 같은 인물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천대받는 업종인 명리쪽으로 갔다.
그것도 결국 팔자소관이요, 주님의 섭리일 테지만 말이다.
필자가 명리학 연재를 시작하면서 ‘월간중앙’의 정재령 부장에게
“우리나라 역술가 가운데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정부장의 즉각적인 답변이 “박도사를 먼저 소개해 달라”였다.
박도사는 바로 제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간지 부장도 이미 그 명성을 알고 있었을 만큼
제산은 이 분야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1970년대 후반(아마 1978년쯤) 전국적으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몇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고, 주무부서인 농수산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수산부 장관은 장덕진씨였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각료회의에서 가뭄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쳤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난 인물이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였다.
양수기 수만대를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당시 계룡산에서 칩거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견뎌 보라”는 답을 주었다.
제산의 말을 믿은 장덕진 장관은 가뭄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얼마후 정말 비가 온다면 양수기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면 일국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일개 점쟁이의 말을 듣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장덕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만 총총하게 빛났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장관은‘아! 나는 내일쯤 목이 날아가겠구나!’하고 체념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오래지 않아 장대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된 것은 물론이었다.
필자는 이 비사(秘史)를 제산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당시 제산의 집이 서울 연희동에 있었는데,
억수같은 비가 오자 장덕진 장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오후 6시까지 연희동 집으로 갈 테니 제산과 같이 만나자’는 전화를 하였다.
계룡산에 있던 제산은 장장관의 연락을 받고 급히 연희동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장덕진은 6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5시쯤 되었을 때
비서관을 대동하고 미리 연희동에 와서 박도사를 기다렸다.
박도사 믿고 양수기 안사고 버틴 장덕진
제산의 내공이 절정기에 있을 때는
이처럼 언제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천기의 부분까지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과 국가적 대사를 예언하는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486 컴퓨터와 팬티엄 3의 차이라고나 할까.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정도까지 적중하다 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산의 이름은 정치인들이나 고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1990년대 초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헬기를 타고 제산이 살고 있던 서상까지 제산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박회장과 제산은 같은 박씨라서 인간적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포철 박회장이 헬기를 타고 직접 박도사를 만나러 왔던 일은
몇몇 일간지에서 이를 기사로 보도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박도사를 가리켜 “살아 있는 토정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 바 있다.
정치인 김복동씨와 김기재씨도 제산과 왕래가 잦았다.
이들 유명 정치인들과 제산의 관계는 사판의 대가와 이판의 고수가 만난 격이었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 시절 이곳 저곳을 방랑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였다.
함양·산청·남원의 운봉 등지였다.
특히 제산은 20대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m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도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땅 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노씨의 집안도 그 중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 경전을 단련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과연 하수라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평소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 보고해 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되는 수가 있다.
접신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 대고 정보를 알려 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귀에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하고 추궁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 보라”하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63)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乙亥명당의 地氣 받고 태어난 박도사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달이고 무전취식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소위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亥)다.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손자가 태어났다.
첫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도사에 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다음 호로 넘어간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퍼온이 주) 제산은 지리산파 좌도수련가였다.
이는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하겠다.
죽기 몇 해 전인 말년에는 붙었던 신장마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예전의 총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제대로된 사람 구실조차 하기 어려워 주위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좌도의 맹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인연이 쇠하여 신장이 버티지를 못하고 수양사 본인의 곁을 떠나가게 되면
그 잘나가던 재주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점도 1호흡 2분 이상의 수양사라면 단점을
능히 극복하고 신장과의 결사를 평생동안 간직할 수 있기 때문에
제산과 같은 비참한 말년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겠다.
좌도든 우도든 호흡이 가장 먼저임은 재론하지 않겠다.
제산이 이룩한 생전의 가장 큰 공이라면
삼성을 지금처럼 재계 서열 1위의 기업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 힘을 많이 쏟아부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삼성가에서는 쉬쉬하나 어디 숨길 이유마저 굳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제산과 도계(고 박재완 옹)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로써 제산의 직접적인 투시의 적나라한 세계와 도계가
일관되게 추구하였던 명리상 문리의 접근성은 비교에 많은 무리가 따른다.
정확하며 직시하는 영적인 세계의 우수성을 말할라치면
단연코 제산이 행하였던 좌도수련의 힘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단순한 학문만으로 좌도의 벽을 넘기에는 그 벽이 너무 높고 두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