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2> 서장 (書狀)
루추밀(樓樞密)에 대한 답서 (1)
모든 현상 빠짐없이 법의 ‘작용’
“매일 매일 인연(因緣)에 응하는 곳에서 바깥의 경계에 딸려 가지는 않는지, 쌓여 있는 문서를 바라보고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사물과 만날 때에 사물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사물을 부릴 수 있는지, 고요한 곳에 머물러 망상(妄想)을 짓지는 않는지, 하나 하나의 일을 직접 구명(究明)함에 잡념(雜念)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망녕되게 과거의 것을 취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일에도 탐착하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도 않아야,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텅 비고 고요함을 확실히 알게 된다.’ …다만 모든 때에 인연을 따라 응대하면, 자연히 이 하나의 도리(道理)에 합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매 순간 부딪히는 인연에 응하여 반응하는 행위의 연속이다.
외면적이고 감각적인 인연에도 부딪히고 내면적이고 사변적인 인연에도 부딪히는데, 부딪힐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있고 분별하고 선택하여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인연따라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사람과 대화하고, 책을 펼쳐 보고, 자동차를 타고, 신문을 읽고 한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인연에 따라 반응함에는 둘로 나누어짐이 늘 함께하고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나와 나 아닌 것, 인연과 그 인연에 반응하는 자, 좋아 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 이것과 저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인연에 따라 반응함에는 항상 둘로 나누어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나누어짐 사이에서 반응의 작용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법(法)을 알아야 하는데, 법을 알고 보면 본래 둘로 나누어짐이 없다. 인연에 반응하는 행위가 전부 법 아닌 것이 없는데, 다만 하나의 법인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은 바로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내가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물을 마신다’, ‘내가 뜰 앞의 잣나무를 본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인다’, ‘왼 손과 오른 손이 부딪혀 소리가 난다’, ‘내 의식에 삼라만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일을 두 인연이 만나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분별심에서의 이해일 뿐이다. 법에서는 닭 우는 소리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물 마심 속에 나와 물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보는 속에 나와 잣나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펄럭임 속에 바람과 깃발이 따로 있을 수가 없고, 손뼉소리 속에 왼 손과 오른 손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나타남 속에 의식과 삼라만상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좋으니 나쁘니 선하니 악하니 하는 판단 속에 이것과 저것 나와 네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다만 듣고, 마시고, 보고, 펄럭이고, 부딪히고, 나타나고, 판단되는 작용이 일어날 뿐이다.
나타나는 모든 일은 빠짐없이 법의 작용이다. 법이란 작용하면 나타나고 작용치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기면 만물도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만물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법은 본래 의지할 만한 한 개 사물도 아니고, 나타내거나 가리킬 만한 한 개 모양도 아니다.
사물과 모양은 다만 법이 작용하거나 작용하지 않음에 따라서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현상일 뿐이다. 오직 모양 없는 법만이 늘 그대로 이며, 모든 존재의 의지처이다. 그러므로 법의 존재는 오직 작용(作用)하는 곳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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