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8월 26일 온고을교회 수요설교 (황의찬 목사)
개구리
출8:1·15
1. 개구리의 추억
“개구리” 하면? “뒷다리”입니다. 어린 시절 뒷다리 제법 구워먹었습니다.
논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을 갈고, 써레질 할 때면 밤새워 개구리가 울었습니다. 개굴개굴
요란하게 울다가 인기척이 나면 일시에 울음이 “뚝!” 그칩니다. 천지가 조용해집니다. 잠시후 한
마리가 개굴개굴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두어 번 울면, 또 다 같이 또 합창이 시작됩니다. 신기
합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개구리 우는 논에 돌을 자꾸 던져 봅니다. 던질 때마다 뚝 그쳤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또 한 마리가 선창을 하면 다시 일제히 합창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유명
한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그런데 이 개구리들은 특징이 있어요.
① 개구리는 낮에는 잘 울지 않아요. 어두운 밤이 되어야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그것도 숨어
서 웁니다. 음흉스럽습니다. 썩 기분 좋은 동물은 아닙니다.
② 한 마리가 시작하면 다 따라서 웁니다. 울어야하는 이유나 목적도 없습니다. 그냥 다른 개
구리가 우니까, 따라서 웁니다. 왜 울어야 되는지 개구리들이 알고 울까요?
③ 한번 울기 시작하면 줄기차게 울어댑니다. 밤새도록 웁니다. ♬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
서,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한국의 개구리들은 이렇게 낭만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농약을 많이 써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개구리가 많이 없어지고, 특
별히 외국의 황소개구리가 수입되어서 생태계를 유린했습니다, 그동안은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
었는데, 이제는 황소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습니다. 시대가 점점 악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 개구리는 상서롭지 못한 동물입니다.
계16: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최종 심판 때에 대한 환상을 본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계시록에서 세 가지 악마로 상징되는 용, 짐승, 거짓 선지자가 울부짖고, 떠벌리는 소리를 개구리
의 요란한 울음소리로 비유했습니다.
사실 개구리는 죄가 없습니다.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개구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처럼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고 애교로 봐 주면 좋았을 것을 애굽 사람들은 개
구리를 신으로 보았습니다. 개구리를 신격화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구리를 숭상했습니다.
2. 애굽의 개구리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습니다. 나일 강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홍수가 나서 범람합니다. 이때 상류
지역, 내륙 깊숙이 있던 기름지고 비옥한 토양을 실어 와서 나일 강 하류 지역으로 흩어놓았습니
다. 그래서 농사짓기에 대단히 유리합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개구리들이 나일 강에서 올라옵니
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은 이 개구리들이 좋은 토양을 가져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마운 짐승이
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또 개구리는 번식력이 뛰어납니다. 이른 봄 고여 있는 물속에 엄청나게 많은 알을
까놓습니다. 그 알들이 부화되면 개구리 천지가 됩니다. 고대에는 다산이 최고의 축복이었습니
다. 아들 하나하나가 다 보험이었습니다. 생명보험입니다. 아들 많이 낳은 사람이 노후를 편하게
지냈습니다. 아들 없는 사람의 노후는 비참합니다. 그런데, 개구리를 보니 엄청나게 새끼를 깝니
다. 또 장마철이면 농사짓기에 알맞은 좋은 흙도 가져옵니다. 이쯤 되면 어찌 됩니까?
개구리를 신으로 생각하고, 자식 못 낳는 사람, 농사 잘 안 되는 사람이 개구리에게 정한수 떠 놓
고 정성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개구리 신에게 이름도 붙여줬습니다. 이름
을 헤케트(heget)라고 불렀습니다. 헤케트는 “십만 100,000”이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많다는 의미
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억수로 많다.”는 사투리를 씁니다. 이 헤케트는 “억수”쯤 되는 말입니다.
이 헤케트 신에게 다산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개구리 뒷다리를 먹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이집트 사람들은 개구리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는데, 한국 사람들은 개구리를 보는 족족 먹어치우
니까, 급기야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사람들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은 용납하실 겁니다. 그러나 개구리에게 절하
고 개구리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냥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싫어하십
니다. 왜 하나님이 싫어하실까요?
절을 할 만한 대상을 보고 절을 하고, 섬길만한 것을 섬겨야지 되나 케나 절을 하고 섬기니까 싫
어하십니다.
아버지한테는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툴툴 거리는 아들 녀석이, 어느 날 아버지
가 보니까, 엉뚱하게도 개구리 앞에서는 두 손을 싹싹 빌고, 절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납니
까?
3. 사람들의 종교성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하게도, 조금만 신비로워도, 조금만 경이로워도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자기 소원을 비는 종교성을 갖고 있습니다. 수백 년 묵은 나무, 기암 괴석이 종교의 대상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감옥에서 나오면 생 두부를 먹이는 풍습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종교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청준씨가 쓴 소설 ‘잔인한 도시’를 읽어보면, 감옥살이를 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참새를
파는 장사꾼이 나옵니다. 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왔으니, 이제는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세상을 마음껏 훨훨 날기를 기원하는 죄수들이 한 마리씩 사서 날려 보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혈혈단신 천애고아입니다. 가족도 친척도 없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감옥
문을 안방 드나들듯 합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막막합니다. 생 두부를 사서 마중나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라는 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주머니를 털어서 참새 한 마리를 샀습
니다. 그리고 날려 보냅니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없어도 이 참새 한 마리처럼 세상을 자
유롭게 날면서 다시는 감옥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소원을 실어서 날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어서 감옥 주변에 있는 공원에서 하룻밤 노숙을 합니다. 공원 벤치에 길게 누
워서 밤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잠을 깼습니다. 슬며시 눈을 뜨고 보니까,
낮에 형무소 문 앞에서 참새를 파는 장사꾼이 나무 위에 앉아서 가울가울 졸고 있는 참새들을 잡
고 있습니다. 참새를 잡아서 또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잡은 참새마다 날개 죽지를
억지로 펴고 죽지 밑에 있는 깃털을 가위로 잘라내는 것입니다. 멀리 못 날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소망하면서 돈을 주고 사서 날린 참새는 멀리도 못가고 형무소 주변에 있는 공원까지 겨
우 날라 왔다가 다시 잡힙니다. 마치 주인공인 전과자의 신세와 똑같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왔
지만, 어디 멀리 가지를 못합니다. 날개 죽지가 꺾였으니 어찌 멀리 갑니까? 그래서 이 소설의 제
목이 ‘잔인한 도시’입니다.
4. 우리가 섬기고 경배해야 하는 분은?
우리는 누구에게 절하고, 누구에게 소원을 빌고, 누구에게 제사하고, 예배를 해야 됩니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출20:4~5『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
씀을 믿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께만 절하
고, 하나님만 섬기는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짱을 부립니다. 이 말씀을 안 믿습니다. 거부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멸시합니다.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나는 무교야” 이렇게 말하고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나가서 하는 행
동이 등산하다가 기암절벽이 있으면, 그 밑에 가서 두 손을 합장하면서 자기 소원을 빕니다. 그런
사람들이 돼지 머리 앞에서 절을 하고, 누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를 하면 두부를 사들고 갑니다. 오
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의 왕 바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또 애굽의 요술사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4. 애굽의 요술사들
애굽의 요술사들은 당대의 지성인들입니다. 왕의 측근들입니다.
이들은 나일강 물이 피가 되게 한 첫 번째 재앙을 보고, 피가 된 나일 강물을 다시 물로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덩달아서 다른 물도 피가 되게 했습니다. 잘난 척은 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고 거꾸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준 두 번째 재앙은 무엇입니까?
(3절)『개구리가 나일 강에서 무수히 생기고 ~』
첫 번째 재앙에서 나일강 물이 피가 되게 했을 때, 나일 강에 살던 모든 생물들이 다 죽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번째 재앙에서 개구리가 무수히 생기
게 하십니다. 그렇게 무수히 생긴 개구리들이 나일 강에서 올라와서 궁궐 안으로 들어와서 왕의
침실까지 정복하게 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애굽의 요술사들이 또 어찌 합니까?
모세와 아론의 흉내를 내기에 급급합니다. 이들도 개구리들이 나일 강에서 땅으로 올라오도록
합니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권능 받아 그렇게 한다지만, 그쯤은 나도 할 수 있어!”하면
서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겁니다.
“그쯤은 나도 할 수 있어” “그건 나도 할 수 있어!”
이것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그것쯤은 나도 할 수 있어!” 이것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앙을 주셨으니, 그 재앙을 극복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들
의 대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그것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나도 할 수 있다.”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불신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
종 목표입니다.
이에 반해서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입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합니다. 하나님!”
지금 모세와 아론이 그렇게 합니다.
모세는 지금 자기의 능력으로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개구리를 생기게 하여 궁궐까지 점
령하게 합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할 뿐입니다. 모세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은 “그 정도는 나도,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술사들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합
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구리 떼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되었습니다. 애굽 왕은 물론 신하들과 모든
국민들이 개구리 떼에게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거기다 다른 개구리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이것
이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이고, 이것이 불신자들의 모순입니다.
6. 애굽 왕 바로
애굽 왕 바로 역시 하나님을 외면한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모순에 빠져 있습니
까?
애굽 왕이 다급해져서 모세를 불러서 부탁했습니다. 너희 백성을 보내줄 터이니 이 개구리 떼 좀
어떻게 해보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급했습니다. 앞뒤가 보이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
습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이 때 모세가 한 말입니다.
(9절)『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이 개구
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 나일 강에만 있도록 언제 간구하는 것이 좋을는지 내게 분
부하소서』
모세가 지금 애굽 왕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개구리 때문에 팔짝팔짝 뛰고 있는 왕에게 여유를 가
지고 “개구리 떼를 물리쳐 달라고 여호와께 언제 간구할까요?” ‘여유’는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다급해도 여유가 있습니다.
언제 간구할까요? 하고 물으면 당연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에 좀 해 주세요!”해
야지요! 그런데 바로는 당황했습니다. 자기 생각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이 나옵니다.
(10절)『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그가 내일이라고 대답한 배경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작정하신다면 즉
시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신을 바탕으로 생각하니까, 개구리들이 다시 나
일 강으로 뛰어가려면 하루 쯤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개구리가 아무리 빨라도 전국에 걸쳐 있는 개구리들이 다시 나일 강으로 복귀하려면 하루도 부족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바로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모세가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육지에 있는 개구리들을 몰사시켜버립니다.
(13절)『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과 마당과 밭에서부터 나와서 죽은
지라』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사고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다스리
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왕 바로의 불신을 드러내는 또 한 가지가 본문에 있습니다.
바로는 두 번의 재앙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분이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8절)『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를 떠
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여기서 여호와께 구하여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여호와께 기도하여’ 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주신다
는 것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 시인을 했다면, “너의 하나님을 내가 믿어도 되겠느냐?”라고 물어야 합니다.
“나도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선을 긋고 있습니다. “나는
내 방식을 고수하겠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그냥저냥 살겠다.”
(15절)『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
이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화장실에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개구리 떼에 치여서 못살 것 같으니까, 이 개구리 떼만 해결해 주면 너희 백성들을 놓아 주겠다.
그러니 이 개구리들 좀 어떻게 해 봐라! 해 놓고, 막상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개구리를 다 치우고 한 숨 돌리게 되었을 때, 바로는 본색이 드러납니다.
다급할 때는 언제고, 다시, “못 보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되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상시
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 이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오늘
날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있을 때, 먹고 살만할
때, 별 일 없이 평탄한 세월을 지낼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 됩니까?
바로 앞에는 이제 여덟 번의 재앙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재앙을 경험한 다음에 하나님을 부르는 어리석은 신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