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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이 야인(野人)시절 어느 날 화계사(華溪寺)를 찾았다.
언덕길을 땀을 뻘뻘흘리며 올라오고 있는데 절 입구에 동자승(童子僧)이 꿀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은 꿀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난 후 "누가 주라 하더냐?" 하고 물으니 "만인" 스님 앞으로 인도한다.
"만인 스님은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에게 파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스님으로서 가람을 훼손하는 것이라 고심했지만 당시의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끝낼 비밀을 알려준 것이다.
그는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帝王)이 나올 자리이니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移葬)하라고 하는 것이였다.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 지관(地官)과 같이 가야사(伽倻寺)에 가서 고탑(古塔)이 앉은 자리를 보니 과연 명당이였다.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여 돈을 마련하여 그 돈의 절반을 승려에게 주고 절을 불사르게 하여 폐사(廢寺)를 만든다.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이 옮겨지고 이장(移葬)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命福)이 12세의 나이에 왕위(王位)에 오른다.
이하응(李昰應)의 두째아들이 고종(高宗)이 되면서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원군(大院君)이 화계사를 중건하는데 큰 역할을 한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듯하다.
"화계사"(華溪寺) "일주문"(一柱門)
입구 우측에 세워진 공덕비(功德碑)와 기념비(記念碑).
입구 우측 언덕위에 있는 부도군(浮屠群)
"초부당 적음 대종사"(草夫堂 寂音 大宗師) 부도(浮屠)
덕산 대종사(悳山 大宗師) 부도(浮屠)
고봉(高峰)큰스님 추모탑.
이분은 독립운동(獨立運動)도 하신 분이다.
1961년 8월 19일 화계사에서 세수 72세 법랍 51세로 열반.
숭산 대종사(崇山 大宗師) 부도(浮屠)
숭산 선사는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하였다.
스님은 힘든 100일간의 기도 수행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고봉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았다.
숭산행원 선사는 서양에서 가르침을 시작한 첫 번째 한국 스님이다.
스님은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잠시 "로드 아일랜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인근의 "브라운"대학 학생 중에서 참선수행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스님의 작은 아파트를 찾게 되면서 첫 해외 포교가 시작되었다.
이후 "프로비던스"선원이 만들어져 현재 전 세계에 퍼져있는 선원들의 중심이 되었다.
관음선종(觀音禪宗)의 창설자인 숭산원행 선사는
화계사에서 2004년 11월30일 세수 77세 법랍 56세로 평화롭게 제자들에 둘러싸여 열반에 들었다.
숭산 대종사(崇山 大宗師) 비(碑)
"화계사"(華溪寺)의 터가 작아서 일까?
입구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대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된 돌기둥이 서 있다.
화계사 주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이 있다.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모두 있다.
범종(梵鐘)
화계사의 범종루(梵鐘樓)에는 목어(木魚)가 둘이 있다.
저 목어(木魚)는 고려 때 창건사찰인 보덕암에 있던 목어(木魚)라고 한다.
현재는 너무 오래되어 사용하지는 않지만 함께 걸려 있다.
운판(雲版)
佛紀 二五三0년이면 198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목어(木魚)
눈여겨 볼 "鐘"은 위쪽으로 매달린 작은 鐘이다.
"사인비구"(思印比丘)가 1683에 제작한 동종(銅鍾)으로 보물 제11-5호이다.
이 동종(銅鍾)은 원래 영주 희방사(喜方寺)에 있었는데 고종 35년(1898)에 화계사(華溪寺)로 옮겨왔다고 한다.
몸통의 윗부분은 "범자문"(梵字文)으로 장식되어 있고,
아랫부분은 "보상화문"(寶相華紋)과 "당초문"(唐草紋)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한 몸통에는 왕실(王室)의 안녕(安寧)과 불법(佛法)이 전파되길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승려(僧侶)가 공명첩(空名帖)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龍鈕) 역할을 한다.
보통 범종(梵鐘)의 용뉴(龍鈕)는 한 마리 용으로 된 장식과 음통(音筒)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종은 음통(音筒)이 없고 쌍룡(雙龍)으로만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通
政
大
夫
畵
員 緣
厚 祖 淸 雪 湛 思 化
英 信 允 玉 衍 印 秩
우측의 글자만 인터넷 자료에 의해 글자를 조립해 보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인 수장(首匠) 사인(思印)의 지휘 아래에
보조 장인(補助 匠人) 담연(湛衍), 설옥(雪玉), 청윤(淸允), 조신(祖信), 후영(厚英) 등
모두 6명의 주종장(鑄鐘匠) 이 이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가까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지만 들어가기가 뭣해서 멀리서 찍었더니 글자가 잘 안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측의 글은 아래와 같다.
鑄 方 基 四 康
成 寺 地 月 熙
也 大 西 日 二
鐘 面 慶 十
重 小 尙 二
三 伯 道 年
百 山 豊 癸
斤 喜 亥
康熙22년(1683년) 4월 경상도 풍기(경북 영주시) 소백산의 희방사에 봉안하기 위해 무게 300근짜리 종을 만들었다.
대웅전(大雄殿)
화계사 대웅전(大雄殿)은 고종 7년(1870)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지원을 받아 중창(重創)하였다.
석수(石手) 30명, 목수(木手) 100명이 수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지어졌기 때문에 "궁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용마루 한가운데는 청기와가 올라가 있고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가 있다.
취두(鷲頭)는 왕실 건축물의 용마루에만 있는것이라고 한다.
현판(懸板)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威堂)신관호(申觀浩)가 썼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 앞 양 옆에는 "드무"가 있다.
"드무"는 화재를 막기 위해 물을 담아 놓는 솥 모양의 용기로 궁(宮)에 만 있는 기구다.
대웅전 벽에 그려진 벽화(壁畵)가 있는데 이곳 화계사 (華溪寺)법당(法堂)에 그려진 벽화로는 제일 온전(穩全)했다.
다른 절에서도 봐 온 그림이지만 내용은 모른다. 그림이 모두 온전(穩全)하기에 사진을 찍어왔다.
내용은 나중에 여러 자료를 찾아서 알아냈다.
이그림을 팔상도(八相圖)라고 하는데,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태어나서 깨달음을 위해 정진(精進)하고 열반(涅槃)에 드는 한 생애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오다.
"도솔천"(兜率天)에 있던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전생(前生)인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옆구리로 들어가는 장면이라고 한다.
인간 세상에 여러 번 내려갔던 "금단천자"(金團天子)는 "호명보살"(護明菩薩)에게
"가필라"성(城)의 "석가 족"(釋迦 族)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날 것을 권한다.
이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은 "도솔천"(兜率天)에서 나와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간다.
낮잠을 자던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여섯 이빨을 가진 코끼리가 금으로 이빨을 단장하고
허공을 날아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다.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신기한 꿈의 이야기를 남편인 "정반왕"(淨飯王)에게 이야기한다.
"정반왕"(淨飯王)은 "바라문"(婆羅門)을 불러 꿈의 의미를 물으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이 낳을 아들은 삼계(三界)에서 더없이 높은 어른이 된다."라고 말하여 기뻐했다고 한다.
2,"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석가모니"가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탄생하다.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출산(出産)을 위해 친정으로 향한다.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친정으로 향하는 길목인 "룸비니"(Lumbini)의 "무우수"(無憂樹) 나무아래서 출산하게 된다.
나뭇가지를 잡고 선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싯다르타"(Siddhārtha) 태자(太子)가 태어나는 모습과,
태자(太子)는 태어나자 마자 일곱걸음을 걸었고, 일곱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을 땅을 가리키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용 아홉마리가 감로수(甘露水)를 부으며 태자(太子)를 목욕시키고,
천인(天人)들이 나타나 태자(太子)에게 비단옷을 입혔다고 한다.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사문(四門)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다.
왕자로 태어난 부처가 성문 밖에서 늙음, 병듬, 죽음, 그리고 수행자(修行者)를 목격하게 된다.
싯다르타 왕자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宮殿)의 동문(東門)을 나섰다.
그 때, "정거천인"(淨居天人: 하늘의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부축 받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으로 변신하여 왕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왕자는 노인의 추하고 볼품없는 모습에 대해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이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에는 남문(南門)을 나섰다.
남문(南門) 밖에서는 "정거천인"(淨居天人)이 돗자리 위에 누워
가족의 시중을 받는 피폐(疲弊)하고 마른 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왕자는 병자를 마주하고, 인간이 병드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서문(西門)을 나섰다.
서문(西門) 밖에서는 "작병천자"(作甁天子)가 시체로 변하여 왕자 앞에 나타났다.
왕자는 시종에게 저 시체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던지 죽어서 저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깊은 고민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북문(北門)을 나섰다.
북문(北門) 밖에서는 "정거천인"(淨居天人)이 지팡이를 들고 출가(出家)한 사문(沙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왕자는 시종에게 이 사람은 무엇인지 묻는다.
"정거천인"(淨居天人)은 시종의 입을 빌어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문(沙門)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수행(修行)과 명상(冥想)을 통해 해탈(解脫)을 구하고,
중생을 구하려는 사람이다."라고 답한다.
이와같은 경험을 통해 "싯다르타 왕자"는 출가(出家)를 결심하게 된다.
4, 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 성을 넘어가서 출가(出家)하다.
29세가 되던 음력 2월 8일, 왕자는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말을 타고 한 밤중에 성을 넘어가다.
"싯다르타 왕자"는 수행자(修行者)를 만난 후, 출가(出家)를 꿈꾼다.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정반왕"(淨飯王)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정반왕"(淨飯王)은 왕손(王孫)을 얻기 전까지는 허락할 수 없다하며 회유(懷柔)를 한다.
하는 수없이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인 "야쇼다라" 공주(公主)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출가를 하고싶었던 왕자는 아들의 이름을 "장애"(障碍)라를 뜻을 가진 "라훌라"(羅睺羅)라고 지었다.
이는 아들이 장애자(障碍者)가 아니라 자신의 출가(出家)에 "장애"(障碍)가 된다는 뜻이다.
정반왕(淨飯王)은 아내와 자식까지 얻게된 왕자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랬지만, 왕자는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정반왕(淨飯王)은 밤낮으로 유흥을 제공하였지만 그럴수록 왕자는 더욱 출가를 꿈꾼다.
왕자의 나이가 29세가 되던 음력 2월 8일 밤, 자신의 백마 "칸타카"와, 마부(馬夫) "찬다카"와 함께 성을 넘는다.
왕궁이 멀어지자 말과 마부를 돌려보내고, 왕자는 머리를 깎고 옷을 갈아입고, 수행길에 들어선다.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도를 하다.
고통스러운 수행(修行)을 계속하는 싯다르타 왕자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싯다르타 왕자는 출가 후 여러 스승을 찾아나섰지만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결국 혼자 이루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고, "마가다"국(國) 서쪽에 있는 설산(雪山)으로 들어간다.
싯다르타 왕자는 모든 수행자(修行者)들이 경험하지 못한 고행(苦行)을 하기로 한다.
왕자는 하루에 쌀 한 톨과 콩알 반쪽으로 연명(延命)하며 고행(苦行)을 한다.
씻지도 머리를 깎지도 못했고, 날이 갈 수록 야위어갔다.
몸의 먼지를 털면 털이 부스러져 떨어지고,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질 정도가 됐다.
싯다르타 왕자는 고된 고행(苦行)을 6년간이나 계속하였지만, 이 또한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른 길을 찾아나섰다.
6년 동안 함께 수행(修行)하던 다섯 비구(比丘)도 왕자의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 버린다.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다.
"마왕 파순"(魔王波旬)은 깨달음을 눈 앞에 둔 싯다르타 왕자를 방해하지만, 부처님은 마왕(魔王)을 물리친다.
마왕은 싯다르타 왕자의 깨달음을 방해하고자 아름다운 세 딸 "은애"(恩愛), "상락"(常樂), "대락"(大樂)을 보낸다.
세 딸은 온갖 유혹을 했지만 결코 현혹되지 않았다.
오히려 싯다르타 왕자는 세 딸을 늙고 추한 모습으로 바꿔버렸다.
할수없이 마왕이 직접 나서서 세속世俗의 모든 권력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코끼리와 말이 끄는 군대를 앞세워 굴복시키고자 한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킨다. 그러자 대지가 진동하며 지신(地神)이 나타났다.
마왕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친다.
땅을 가리킨 이 자세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한다.
7, 녹원전법상(鹿野轉法相) -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포교를 하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뒤 녹야원(鹿野苑)에처 처음으로 설법(說法)을 하고 그후 대중과 제자들을 위해서 설법을 이어나간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부처님은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比丘)에게 처음으로 설법(說法)을 하기로 정했다.
이들에게 설법(說法)을 하기 위해 수백km떨어진 녹야원(鹿野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두 명의 상인 "발타라사나"와 "발타라리"를 만나는데, 이들이 최초의 귀의자(歸依者)들이다.
"녹야원"에 도착한 "부처"는 처음으로 설법(說法)을 한다. 이를 "초전법륜"(初傳法輪)이락 한다.
다섯 비구(比丘)에게 "사정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를 설(說)했다
8,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涅槃)에 들다.
열반(涅槃)에 든 부처님의 모습과 슬퍼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다.
"초전법문"(初傳法輪) 이후 21일 동안 일곱 곳에서 아홉차례 화엄경(華嚴經)을 설한다.
하지만 중생(衆生)들은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여, 중생(衆生)들의 이해 능력에 맞게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였다.
그리고 아함경(阿含經)을 8년, 방등경(方等經)을 8년, 반야경(般若經)을 21년, 법화경(法華經)을 8년,
총 45년 동안 법문(法文)을 설하고 열반(涅槃)에 들었다.
열반(涅槃)을 앞둔 부처는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비밀은 없으며, 간신히 움직이는 낡은 수레와 같다.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하고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다.
그리고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涅槃)에 든다.
부처님은 침상에 올라 오른쪽 옆으로 누워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머리를 북쪽에 두고 다리를 포갰다.
이 장면은 열반상(涅槃像)이라 불린다.
머리를 북쪽으로 둔 이유는
"내가 열반(涅槃)에 든 뒤에 불법(佛法)은 "북천축"(北天竺)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는 제자가 그림에는 13명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열명의 제자가 있다고 말한다.
1 #사리불(舍利弗 : 사리자(舍利子), 2 #목건련(目建連), 3 마하가섭(摩訶迦葉),
4 수보리(須菩提), 5 부루나(富樓那) 6 가전연(迦旃延), 7 아나율(阿那律), 8 우바리(優波離),
9 라훌라(羅睺羅 : 석가모니의 아들) 10 아난(阿難 : 석가모니의 사촌 형제).
#의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보다 먼저 열반에 들은 제자라고 한다.
부처의 일생을 정리하다보니 문득 예수의 일생과 비교를 하게 된다.
우선 두 분의 탄생이야기가 매우 비슷하다.
두 분 모두 인간의 일반적인 탄생이 아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자들도 모이는 과정이 흡사하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대목이다.
그러나 팔상도(八相圖)를 알은 것만으로도 이번 "화계사"를 찾은 보람은 충분히 있다.
대웅전 안의 모습이나 가까이에서 주련(柱聯)을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법당안에 사람이 많아 포기했다.
이곳에 있는 풍경(風磬)은 범종(梵鐘)모양으로 특별 제작된듯한데 소리가 무척 아름답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의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명부전(冥府殿)에 있는 그림의 안내문.
대웅전(大雄殿)과 명부전(冥府殿)의 사이가 좁아 정면에서 전체적인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현판(懸板)과 주련(柱聯)만 찍으려고 했는데 주련(柱聯)앞에 탁자를 놓아 찍을 수가 없었다.
물론 꼭 필요해서 그자리에 가져다 놓았겠지만
되도록이면 다른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왼쪽에 "大院君印"과 "石坡"라는 "대원군"의 호가 찍혀있다.
대웅전 좌측 위의 삼성각(三聖閣)으로 올라간다.
삼성각(三聖閣) 외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그림 좌측은 공사에 사용중인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아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일부는 통로가 너무 협소해 그림을 보기도 힘들다.
그래도 명색이 유명 사찰인데 보이지 않는 뒤라고 창고처럼 사용하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과 당간지주.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대웅전의 왼편에 자리 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 나한"(五百羅漢)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 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나한상"(羅漢像)을 높이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봉안된 조각상은 찬하(餐霞) 최기남 거사가 조성한 것으로,
최기남은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십팔나한상"(十八羅漢像)과 "천불상"(千佛像),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 등을 조각하였다.
조성한 조각상들을 강남 봉은사와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가,
1964년 최기남의 아들 무방(無方)거사의 시주로 천불오백성전을 건립하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님이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
"나한"(羅漢)을 모신 건물에는 보통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전"(羅漢殿)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앞에 "천불"(千佛)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법당(法堂)에 불상(佛像)이 천 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백나한"(五百羅漢)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관음보살"(觀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져 있다.
앞에 "천불"(千佛)이 있는 것은 "천불전"(千佛殿)과 "나한전"(羅漢殿)을 겸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대적광전.
화계사 대방(大房).
大房은 여러가지 용도가 있겠지만 남녀차별이 심하던 조선시대에 왕실(王室)의 궁녀(宮女)들이
대웅전 같은 전각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방(大房)에 머물면서 예불(禮佛)을 드릴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대웅전에 많은 인원이 기도하게 될 경우 그 맞은편에 위치한 대방과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경(禮敬)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구성되었으며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종비생(宗費生 : 스님) 교육시설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건물 안에는 크고 작은 방과 부엌 등이 있어 다목적으로 쓰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방"의 다목적 기능은 엄혹한 일제강점기의 1933년 7월에
최현배, 이희승, 정인섭,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회원 10여명이 비밀리에 모여 한글 맞춤법 통일을 위한
9일간의 회의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 성과는 같은 해 10월 29일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로 이어졌다.
대방(大房)왼쪽 창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해탈시(解說詩)가 씌어 있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구인가? 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구인가?
시기질투 없는 사람 누구이며 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나?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라!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말라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치지 말며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말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며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가 가자.
다 바람 같은 것이라네 뭘 그리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깊어도 비바람이라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며
폭풍이 세차다 해도 지나간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독한 사연도 지난 뒤에는
쓸쓸한 바람만 맴 도네. 세상 다 바람이라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리오?
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리오?
내 것도 아닌 것을 삶도 내 것이라 할 게 없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있겠나?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안 가겠나? 그저 부질없는 욕심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한번 못 펴고 늙은 주름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는가?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는 법.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 게 있겠는가? 살다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지만 잠시.
대역(代役) 연기하는 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 게 있겠나?
기쁜 표정 짓는다고 다 기쁜 것은 아니라네.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라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나?
그게 다 사는 것이라네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없어짐이라네.
구름이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1604년 1월 묘향산(妙香山)에서 설법(設法)을 마치고
앉은 자세로 85세에 이 "해탈"(解說)이라는 시(詩)를 남기고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해남 두륜산(頭崙山) 대흥사(大興寺)에 있는 또 다른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해탈 시(解說 詩).
아마도 아래 글이 윗글의 일부인듯하다.
그러나 이 글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生從何處來(생종하처래) 삶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死向何處去(사향하처거) 죽음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생겨나는 것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과 같다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뜬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이니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이와 같더라
獨有一物常獨露(독유일물상독로) 한 물건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있으니
湛然不隨於生死(담연불수어생사) 담담하게 생사에 따르지 않는다
중국불교 의례문(儀禮文) 가운데 "다비작법문"(茶毘作法文) 중 "체발"(剃髮)편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대방(大房)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글씨.
옆에 있는 위당(威堂)신관호(申觀浩)의 글씨.
위당(威堂)은 대원군(大院君)과 같이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에게 서예를 배웠고
철종대(哲宗代)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刑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공조 판서(工曹判書),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高宗) 초기(初期)에도 대원군(大院君)의 신임을 받아 형조(刑曹),병조(兵曹),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보화루(寶華樓)
위당(威堂)신관호(申觀浩)의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