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17) 기묘한 혼사
밤새도록 각혈을 한 유 초시가 딸을 불렀다.
“이, 이, 인경아~.”
부인이 옆방에서 곤하게 자는 인경을 깨워 데려왔다.
“인경아. 너, 너는 나의 생명이고 나의 혼이고….”
여섯살의 어린 나이지만 인경은 아버지가 이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제 아버지 품에 쓰러져 인경은 눈물을 쏟았다.
인경 어미가 유 초시의 형님을 모시고 왔다. 유 초시는 형님과 어린 인경을 앉혀놓고 말했다.
“형님. 저, 저, 저는 이제 갑니다. 집사람은 재가하도록 길을 열어주시고….”
쿠룩쿠룩 목에 피가 끓어 요강에 토해내며
“우리 인경이는 제 어미 재가할 때 딸려 보내지 말고 형님이 길러주세요. 컥컥.” 하고는
조용해졌다. 인경은 제 아버지 목을 안고 통곡하고, 형님도 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새벽닭이 울었다.
그게 십년 전 일이다. 인경은 그날 밤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인경 어미는 재가하지 않았고, 인경은 어미와 줄곧 살았다.
유 초시가 남긴 재산이 많지는 않았지만 모녀가 소박하게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인경의 큰아버지가 집문서 땅문서를 모두 움켜쥐고 멋대로 팔아치우고 자기 자식들
이름으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인경의 큰아버지는 과부가 된 인경 어미에게 재가하라고 윽박지르고 인경을 자기 자식으로
호적에 올려놓았다. 인경이 하루는 돈 쓸 일이 있어 큰아버지를 찾아갔더니 꼬치꼬치
캐물으며 큰 선심이나 쓰듯이 돈을 던져주고선
“이게 마지막이다!”라며 하는 짓이 놀부와 다름없었다.
인경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꺼냈다.
“큰아버님.”
인경이 꿇어앉아 입을 연 첫마디에 큰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큰 자는 왜 붙이냐! 너는 내 딸이야”라며 호통을 쳤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께서 저희 재산 관리를 해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경이 말이 끝나기 전에 노발대발한 큰아버지는
“네 아버지 삼년 동안 드러누워 있을 때 들어간 약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라며
인경에게 검지로 찌를 듯이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 네 어미는 어떤 놈 만나 언제 떠날지 몰라! 네 아비 유언을 너도 들었잖아!”
인경이 눈물만 쏟고 사랑방을 나올 때
“다시는 우리 집에 발도 붙이지 마라!”라며 큰아버지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인경이 눈물을 훔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가다가 한살 위 사촌언니를 마주쳤는데
그녀는 싸늘하게 시선을 돌렸다.
인경이 모녀는 손재주가 있어 어미는 집에서 삯바느질로,
인경은 아랫동네 천석꾼 부자 장 대인 댁에서 침모로 일했다.
장 대인 댁 장남은 급제해 한양에서 살고 있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책하고는 담을 쌓아 친구들과 말썽만 피우더니 철이 들자 장사에 흥미를 보였다.
통이 큰 장 대인은 둘째아들 호걸에게 장사 밑천을 대줬다.
호걸은 돈의 흐름에 동물적 감각이 있었고, 아버지를 닮아 통이 커
장사할 땐 집중을 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저잣거리에 젓갈 도매상, 포목상, 목재상을 차렸다.
문제는 사람을 너무 믿어 회계가 돈을 빼돌리고 집사가 돈통을 들고 튀는 일이 빈번했다.
어느 날, 해도 뜨기 전에 가게로 나가는 호걸에게 인경이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식구들 봄옷을 짓는 데 필요한 포목 목록이었다.
호걸이 깜짝 놀랐다. 하나하나 필요한 치수를 깨알 같은 글씨로 자세하게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날부터 밤늦게 집으로 들어온 호걸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조끼, 저 주머니에서 외상표·영수증·물표·돈주머니 등등을 꺼내
침모 인경이 일하는 곳 방바닥에 어지럽게 쏟아부었다.
인경은 밤늦도록 정리해 이튿날 아침 깨끗한 치부책과 돈을 호걸에게 전해줬다.
얼마 후 인경은 침모 일에서 손을 떼고 아예 호걸의 가게로 나가 회계를 봤다.
침모 일은 인경 어미에게 넘겨졌다.
장 대인과 안방마님은 호걸이와 짝을 지어줄 색시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점찍은 둘째 며느릿감이 바로 인경의 사촌언니였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보름날에 혼례를 올리기로 하고 장 대인네는 사주단자를 보냈다.
인경의 큰아버지 댁에서는 외동딸 시집보낼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바느질 솜씨 좋은 인경 어미를 불렀다.
인경 어미는 그래도 큰집이라고 밤이 새도록 바느질을 했다.
혼례 날짜를 불과 열흘 남겨두고 신붓집이 발칵 뒤집혔다.
중신아비가 파혼장을 들고 온 것이다.
봄이 가기 전인 사월초 닷새, 드넓은 장 대인 안마당에서 혼례식이 올려졌다.
신랑은 둘째아들 장호걸이고 신부는 유인경이었다.
(318화에서 계속)
첫댓글 10월 1일 화요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가끔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친 후에는 쌀쌀한
날씨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