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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성지 -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퍼져나간 순교성지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양근의 의미 -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끈질긴 신앙심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한다.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버드나무는 일단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이다. 그래서 남한강 변에 심어진 버드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폭우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와도 같다. 혹독한 박해 과정을 거침으로 더욱 신앙은 단단해지고 신앙의 뿌리는 더욱 깊이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근(楊根)이라는 말에서 양제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튼튼한 기초란 의미로 천주교 신앙의 오래된 뿌리인 양근 성지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있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도 양근군(楊根郡)과 인접한 지평군(砥平郡)에서 한 글자씩 따서 오늘날 양평군이 되었다.
처음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곳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직암( 稷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벽을 위시한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은 1777년경 이곳과 가까운 천진암에 모여 강학회를 열어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7년 뒤 드디어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으로 파견되어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는 미사나 세례, 고해성사 등을 집전할 인력이 모자라자 권일신을 비롯한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행하도록 했다. 이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양근 지역 공동체가 가성직자인 이존창과 유항검 등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되었다. 나중 이것이 교회법에 어긋나는 독성죄인 줄을 알고 중단됐지만 1년에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영향은 엄청나서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런 의미에서 가성직제도가 시행되었던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동정부부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의 고향
양근성지는 권칠신 권일신 형제뿐 만아니라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동정 부부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조 베드로는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린 곳
양근 성지는 복자 조숙(베드로)와 권천례(데레사)의 순교지일 뿐 아니라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이밖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복자는 조용삼(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독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등 순교 복자만도 9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양근 출신으로 한양이나 경기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해읍정법(亥邑正法)에 따라 출신 지역으로 보내어져 처형되었던 것이다. 한편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 ?~1801, 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801년 5월경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1747~1801) · 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10월 초에는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趙東暹, 1739~1830, 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趙尙德, ?~1801, 토마스)이 옥사하였다고 한다.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양근 성지의 의의을 요약하자면 첫째,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가성직제도를 통해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 권철신, 권일신,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순교지이다.
성지의 조성
2003년 전담신부 발령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양근 성지는 대형 십자가와 기념성당, 강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고, 2010년에는 순교자 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순교 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정자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마련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1년 5월 7일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및 시설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 후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등을 설치하고, 2013년 5월 23일에는 양근 출신으로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 사형터에서 순교한 권복 프란치스코(권일신의 증손자)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치하였다.
11시 조금 못 미쳐 양근 성지에 도착.
오밋다리를 건너 성당 안에 들어서니 훤하게 펼쳐진 넓은 마당은 성당 건물과 같은 불그스레한 색으로 채워져 있다. 오밋다리란 남한강와 양근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다리로 이 근처 백사장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이 다리를 성당 안에 축소 재현해 놓은 것이다.
순례 동선은 오밋다리 건너 성지 서쪽으로 들어가서 성전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나오는 코스를 택했다.
정자 두 개가 나타난다. 하나는 녹암정(鹿菴亭), 하나는 직암정(稷菴亭)이다.
녹암정(鹿菴)은 권철신의 호이고 직암(稷菴)은 권일신의 호이다. 형제는 모두 천주교 창설의 공로자들이다.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庵), 세례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권돈(權敦)이며,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 동생은 권일신(權日身)이다.
실세한 남인 가문에 태어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김원성(金源星)·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蘗)·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 학자들과 서학교리 연구회를 가지면서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철학·수학·종교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연으로 암브로시오라는 교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혹은 珍山事件)로 동생 권일신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지만, 직접적인 포교에 관여하지 않고 학문과 교리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위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체포되어 혹심한 형벌을 받는 중에도 조금도 변색하지 않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신문에 임하였다. 사형언도를 받고 형 집행에 앞서 장독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조선초 문벌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권암(權巖)이고, 형이 권철신(權哲身)이며,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이벽·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과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켰다.
1787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避靜: 도피해 조용히 지냄)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예산으로 귀양 가는 도중에 장독으로 죽었다.
양근 성당 마당 가장자리에 성모동산과 예수 성심상이 있다.
양근 성지 외부 십자가의 길은 성지 입구 오밋다리 건너 왼쪽 녹암정 앞에 조성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시작 지점에 십자가를 맨 예수님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나를 따라라’는 루카복음의 말씀이 돌에 새겨져 있다. 14처는 손과 십자가를 모티브로 했으며 14처 중간에 권일신의 동상이 있다.
양근성지 성전
사제관도 사무실도 모두 큰 건물 안에 다 있다.
성당 밖으로 나오면 맨 먼저 마주치는 건물이 감호정이다.
감호정(鑑湖亭)이란 석문(石文)이 쓰여진 바위의 발견으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생가가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 마을이 아닌 양평군 양평읍 갈산 현 양평 읍사무소 자리로 굳혀지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녹암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녹암이 거쳐하던 곳은 감호라고 불렀다. 즉 감호라는 곳에 거하였다는 것인데 감호암이란 석문의 발견은 양근 성지 일대가 감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감호(鑑湖)란 강물이 잔잔하고 맑아 ‘거울같은 호수’라는 말이다. 물론 이 건물은 옮겨 복원한 건물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순교자를 위한 기도와 순교화 주중직심도(主中直心圖)가 게시되어 있다. ‘주중직심도’(主中直心圖)는 ‘주(主)님을 삶의 중심(中)에 두고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곧은 마음(直心)으로 살아가자’는 뜻으로, 124위 복자를 내용을 고덕동 본당 신자 강경미(실비아, 31)가 그린 그림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양근 성지 순교복자 9위의 영정이 길다랗게 걸리기도 했다. 순교복자의 이름은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윤점혜(아가타), 윤유오(야고보), 조숙(베드로), 권천례(데레사), 손경윤(체르바시오), 조용삼(베드로), 윤유일(바오로), 홍익만(안토니오)이다.
사발을 엎어놓은 형상의 순교자 묘가 있다. 양근 출신으로 병인박해 시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 사형터에서 순교한 권복 프란치스코(권일신의 증손자)의 유해를 2013년 5월 23일에 이곳에 이장한 것이다.
순교 복자상 두 위가 있는데 하나는 동정녀 윤점례 아가타 상이고 다른 하나는 동정부부 조숙과 권천례 상이다.
동정녀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로서 종교적 목적을 위해 동정을 지키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2세기말까지 초대 교회에서의 동정녀들은 기도와 금욕 생활을 위해 모임을 가졌고, 과부들은 특수한 교회 활동을 위해모임을 가졌다.
그 후 3세기경에 이르러 동정녀들은 공식적인 축성식을 갖게 되고, 또한 동정녀들의 모임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동정녀들의 모임은 여자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 창설 이후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동정녀들이 나타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때 동정으로 순교하여 성녀(聖女)가 된 김효임(金孝任)·김효주(金孝珠) 자매, 이인덕(李仁德), 이경이(李瓊伊) 등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동정녀들이다.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Agatha)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Paulus)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Lucia)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Columba)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되었는데 목에 솟은 피가 우유빛이 났다고 한다.
동정부부란 신앙을 위해 부부로 살면서도 정결을 유지하는 부부를 말한다.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는 독신 생활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부부를 가장하여 자신의 동정을 하느님께 바쳤으니, 첫 번째 동정부부는 초남이의 유중철 요한 · 이 루갈다였으며 두 번째가 양근의 조숙 · 권천례 동정부부였다.
▲조숙(趙淑) 베드로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 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권천례 데레사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출구에는 권일신과 조동섬의 용문산 8일 피정이 돌에 새겨져 있고 “나에게 와서 쉬어라”(마태오 11, 28)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돌 소파도 상징적으로 옆에 정답게 배치되어 있다.
11시 반쯤 양근 성지 순례를 마치고 수원 교구 서남쪽에 있는 수리산 성지로 향했다. 양근 성지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천주교 집안인 한양조씨 집성촌이 있다. 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도곡리 107-4번지. 이 집안에서 조동섬, 그리고 순교자 조숙, 조용삼 등이 배출 되었다. 거기도 순교현양비가 있다지만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