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4. 연변 조선족자치주
선조가 터잡은 간도…새로운 활력 가득
발해의 첫 도읍지였던 돈화에서 연길까지는 먼 거리였다. 정각사에 참배하고 나오자마자(오후3시) 곧바로 출발했지만, 연길에 도착하니 저녁7시. 4시간 거리였다. 2002년 10월17일 새벽6시30분 하르빈 역 도착, 10월18일 목단강과 발해진 취재, 이 날 밤 바로 연길에 도착한 셈.
‘작은 서울’이라는 평가가 무색치 않게, 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 연길은 마치 우리나라 같았다. 거리마다 한글 간판이 즐비했고,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말이었다. 시내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종업원들이 전부 교포(조선족)였다. 커피를 마시며 조선족자치주의 역사와 현황을 안내인으로부터 들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면적은 4만3547㎢, 인구 219만5000명(1998년 기준). 주도(州都)는 연길.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해 개척한 곳으로, 이전엔 북간도라고 불렀다. 1952년 9월3일 자치구가 설립됐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승격됐다.
연길(延吉)·도문(圖們)·돈화(敦化)·화룡(和龍)·용정(龍井)·훈춘(琿春)의 여섯 개 도시와 왕청(汪淸)·안도(安圖)의 두 개 현으로 구성됐다. 자치주 안에는 11개 민족이 거주하는데, 우리 민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한족(漢族)·만주족(滿州族)·회족(回族) 순으로 많다.
길림성 동부에 있으며, 흑룡강성(黑龍江省)과 접하는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장백산맥과 노야령산맥(老爺嶺山脈) 사이에 자립한 분지다. 이 분지 안에 송화강, 목단강, 해란강 등이 흐르고 있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谷底平地)에서 이뤄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도 많이 생산된다.
특히 벼농사는 우리 민족이 이주한 뒤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잎담배는 길림성 생산량의 5분의 4를 담당하며,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 이런 것보다 연변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이로 인해 청산리(靑山里) 항일전승지·봉오동(鳳梧洞) 항일전승지·일송정(一松亭)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연길 대우호텔 2층3호에 투숙한 뒤 창문으로 시내를 보았다. 우리 민족이 연길 등 만주지역에 이주(移住)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 1919년 3·1운동,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거치며 이곳에 정착한 한국인 수는 늘어만 갔다.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의 수는 200만 명에 달했다.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 이후 이주는 줄었지만, 1945년 8월 광복 이전까지 연변 등 만주지역에 정착한 대부분의 우리 민족은 농업에 종사했다. 우리 민족이 만든 도시가 연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연길에 도착하니 고국에 돌아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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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근세 대종교를 부흥시켰던 삼종사의 무덤. |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청사가 있는 연길시는 연변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변에서는 가장 큰 도시. 정치·경제 등 모든 면에서 연변의 중심도시다.
연길의 총면적은 1340㎢, 인구는 40만, 조선족은 40%정도라 한다. 조선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한족. 이 외 만주족, 몽골족, 회족 등 모두 11개 민족이 살고 있다. 이곳이 연길로 불려진 것은 안개와 연기 때문이다.
산에 안개가 자욱하고 연기가 끼여 처음엔 ‘연집강(延集崗)’이라 하다, 나중에 음이 바뀌어 연길로 됐다고 한다. ‘길림’을 이었다고 ‘연길(延吉)’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다.
연길시의 역사는 200여년.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주민과 산동성·하북성 백성들이 이곳 농토를 개간하면서부터. 1931년 이후 이곳을 강점한 일본은 연길을 간도성의 직할시로 만들고(1934), 동북지방 자원약탈의 교두보로 삼았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이곳에 2년간 있다가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후, 자치주의 직할시로 됐다. 오늘날의 연길은 교육과 언론, 문화의 도시다. 연변대학이 종합대학으로서 중국의 100개 중점대학에 뽑혔으며, 대학에 준하는 전문학교만도 10개나 있다. 게다가 61개의 중소학교가 있다. 물론 연변방송국과 연변일보 등 언론기관도 상당수 있다.
다음 날(2002년 10월19일). 북한과 중국의 접경도시 도문으로 갔다. 두만강 위를 가로지르는, 중국과 북한이 서로 통하는 도문다리에 서서 북한지역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불과 200m 거리. 북한지역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를 건너가면 한반도의 다른 한 쪽인데, 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연길로 돌아와 다시 가곡 ‘선구자’의 고향 용정으로 달려갔다. 해란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건넜다. 노래에서만 들었던 해란강. 갈수기라 그런지 강물은 적었다. ‘서시’의 시인 윤동주가 졸업한 대성중학(지금은 용정중학으로 개칭)에 들어갔다.
용정에 처음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장인석·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에 도착,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하며 ‘용정 마을’을 만들었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인 셈. 지금도 70% 이상이 조선족이다.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운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간도에서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도 용정이다.
용정에 우리 민족이 자리 잡자 간악한 일제(日帝)가 가만두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는 1908년 “조선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이곳에 군경을 파견, ‘조선통감 간도파출소’를 세웠다. 그러나 후일 많은 애국지사들이 용정에 몰려들자 교육열이 높아져 학교가 세워지고, 차차 민족의식도 싹텄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3월,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3·13만세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만주지방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과시한 가장 뜻 깊은 사건이었다. 일제시대 용정은 우리 민족의 얼은 가장 잘 지키는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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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비암산에서 본 화룡평야 전경. |
최근 복구된 용정중학의 옛 교사(校舍)를 둘러보고 비암산(琵巖山)으로 올라갔다. 일송정에 서서 용정 시내와 서쪽의 ‘화룡평야’를 내려다보았다. 용정 앞을 지나 비암산을 거쳐 화룡 쪽으로 흘러가는 구불구불한 해란강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일송정과 용정 사이 산기슭에,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사찰 ‘용주사’가 복원되고 있었다. 1시간 정도 감상에 젖어들었다.
비암산을 내려와 화룡으로 달렸다. 볏단을 쌓아 놓은 논들이 계속 이어졌다. 추수철이라 그런지 오가는 수레와 경운기엔 논에서 베어 낸 볏단이 가득했다. 화룡 청호촌에 있는, 근대 대종교를 부흥한 나철 등 세 분의 무덤인 삼종사에 들렀다.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한 삼종사(三宗師) 무덤을 보니, 무엇인지 모를 서글픔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조국독립을 위해 고생만 하다 결국 고국엔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국(異國)에 누워있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였다.
歌曲 선구자에 나오는 용주사는 복원 중
차는 또 다시 달렸다. ‘청산리 대첩’이 있었던 청산리 마을에 가려면 한 참을 더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화룡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1시간 정도 시골길을 달려가자 청산리 마을이 저 멀리 보였다. 마을 깊숙한 산자락에 ‘청산리 대첩 승전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탑 앞에 서 묵념을 올리고, 탑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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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청산리 대첩 승전기념탑’ |
청산리 전투의 개요는 이렇다. 1920년 8월 하순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남하하고, 나남(羅南)의 제21사단 등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해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됐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對日)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의 권고로 장백산에 입산해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2500여명의 북로군정서군(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대이동을 감행했다.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에 자리 잡은 북로군정서군은 기습포진을 펴고 적을 기다렸다. 9월10일 아침,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선두로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일본군 혼성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을 시작으로 공격을 감행, 적 2200명을 사살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북로군정서군은 주력 부대를 백운평에 그대로 둔 것처럼 위장하고, 밤사이 120리를 강행군, 갑산촌에 도착해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독립군은 이어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일본군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泉水坪)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병력을 투입,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했다. 이후 만 2주야에 걸친 혈전을 통해 2000명의 북로군정서군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 2만의 적병 중 1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3차례에 걸친 청산리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유명하다.
기념탑에 참배하고, 몰려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화룡을 거쳐 연길로 돌아왔다. 하늘엔 마침 둥근 보름달이 두둥실 떠있었다. 달빛에 비친 화룡벌판과 비암산, 해란강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논 마다 쌓인 볏단,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해란강, 평지에 우뚝 솟은 비암산의 정경(情景)은 간도에 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역(異域)에 뿌리내리기 위해 고생한 동포들의 역정(歷程)이 있었기에, 해란강처럼 돌고 볏단처럼 쌓인 동포들의 고생이 있었기에, 연변은 마침내 오늘날 우뚝 서게 됐으리라.
연길 용정 화룡 도문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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