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기행] ⑭ 라즈기르 Ⅳ
영산 정토에 올라 붓다를 회상하다
옛 사원터의 무성한 숲
시간의 無常함 이야기하고
연꽃을 들어 웃음지은 까닭
정법안장으로 천년을 이었구나
영축산 봉우리 올라
옛 왕성 바라보니
만년 두고 흘러 못은 맑고
천년 지난 그 뜰 깨끗하건만,
옛일을 새겨 주는 빔비사라 길,
부서져 남은 왕성의 지난 날 영화.
아, 칠보의 다보탑 사라지고
하늘 꽃 피워 내린 빗소리 멈추었네.
<사진설명> 영축산 봉우리에 바위로 남은 독수리가 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있다.
1300년 전, 중국의 의정 스님이 라즈기르를 돌아보고 쓴 한 편의 시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성기 라즈기르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없었던 모양이다. 황량한 유적지 속에 깃든 을씨년스러움이라고나 할까. 붓다가 오랜 기간 머물렀고, 붓다의 가르침들이 무려 세 군데에서 결집됐던 라즈기르의 사라진 영화를 비록 시간은 다르지만 모습은 흡사했을 공간을 바라보며 옛 의정 스님과 오늘의 내가 영축산 꼭대기에서 이렇게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높은 산은 아니나 눈 아래 펼쳐지는 잡목으로 이뤄진 밀림의 광경은 무상의 이치를 알려주는 자연이 만들어낸 일종의 만다라이다.
라즈기르의 동쪽에 챠타(Chhatha) 언덕 남단에 위치한 빼놓을 수 없는 성소 영축산(그리드라쿠타·Grdhrakuta). 능선에서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가 독수리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불보종찰 양산 통도사를 품고 있는 산의 이름이 영축산인 덕에 영축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지명이다.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는 당시의 영축산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독수리가 살고 있고 그 높은 곳에서는 하늘의 푸름이 서로 이곳을 비추어 짙은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붓다가 성도를 이룬 후 세상에 머물기를 50여년. 가르침을 펴는 동안 이 산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으며, 널리 대중에게 묘법을 설법했다.”
붓다는 이곳 영축산에 머무는 동안 『법화경』 이외에도 『보적경』, 『대집경』, 『허공장경』 등 대승경전에 속하는 경전들에 실린 가르침을 설파했다.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영축산 꼭대기에 벽돌로 정사가 지어져 있었고, 붓다가 설법을 했던 설법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903년에 복원되었다는 설법좌, 즉 여래향실과 아난다가 머물렀다는 시자실의 기단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설법상 및 과거 7불, 미륵보살상, 연꽃봉우리 형상과 기타 유적들은 현재 나란다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또 이곳의 어딘가에 『법화경』「견보탑품(見寶塔品)」에도 언급된 칠보탑(다보탑)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져 그 정확한 위치를 알 길이 없다.
<사진설명> 붓다가 『법화경』을 설법한 터에는 1903년 복원된 설법좌가 조성돼 있다
두루 알다시피 『법화경』은 붓다가 열반이 임박한 시점에 설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불교의 핵심이요, 골수라고 일컬어지는 경이다. 이 『법화경』「견보탑품」 중 칠보탑의 모습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그때 부처님 앞의 한가운데 땅이 갈라지면서 땅속으로부터 높이가 5백 요자나(유순·거리의 단위, 소달구지로 가는 하루 정도의 여정이라고 전해진다)에 둘레도 그 정도 되는 칠보로 된 탑이 나타나 공중으로 올라가 한가운데서 멈추었다. 그 탑은 밝게 빛나 보기에도 매우 아름다우며 꽃으로 가득 찬 5천의 난간으로 장식되고, 수천의 많은 아치형의 문이 있으며, 수천의 깃발이 장식되고, 수천의 보석으로 된 장식 끈과 수천의 색색의 천과 방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또 타말라 나무의 잎과 전단의 향기를 내뿜고 있으며, 그 향기는 온 세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탑에는 금, 은, 유리, 호박, 마노, 붉은 진주, 수정 등 칠보로 된 해 가리개들이 우뚝 솟아 사대왕천의 궁전에까지 이르렀다. 그 탑 위에는 삼십삼천에 속하는 천자들이 있어 하늘 꽃인 만다라바의 거대한 꽃을 그 탑 위로 이리저리 뿌렸다.” <현해 스님 역 『묘법연화경』 중에서 인용>
바로 이 부분을 형상화 한 것, 즉 법화경을 설하시는 샤카무니 붓다를 형상화한 석가탑과 설법하는 중에 공중에 나타난 다보여래의 칠보탑을 형상화한 것이 인도에는 사라졌으나 우리나라 경주 불국사에 석가·다보탑으로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으니 한국불자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다.
영축산은 또 불자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염화시중의 미소, 즉 붓다가 설법 도중 연꽃을 들어 보이니 오직 마하 카샤파만이 이심전심으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으므로 붓다가 당신의 정법안장을 마하 카샤파에게 부촉한 곳이기도 하다.
영축산을 오르는 계단으로 된 산길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천천히 걸으면 산책 길 수준이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아 중턱에 오르면 제법 숨이 가빠진다. 이 길은 걸식 등을 위해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붓다를 위해 빔비사라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이 길은 빔비사라 왕과 붓다의 각별했던 관계를 짐작케 하는 유적에 다름 아니다.
이 산길에는 두 개의 스투파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빔비사라 왕이 붓다를 뵙기 위해 산을 오르다가 수레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곳을 알리는 것이고, 두 번째 스투파의 위치는 빔비사라 왕이 시종마저 물리치고 홀로 붓다를 향해 올랐던 자리이다. 붓다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데바닷타가 붓다를 해치기 위해 바윗돌을 굴리고 사나운 코끼리를 풀었다는 곳도 이곳이다. 영축산 정상 아래에는 아난다와 사리풋트라 등 붓다의 제자들이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동굴들과 절터 등이 산재해 있다.
이와 관련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잣타사트루를 꼬여 부왕을 죽게 한 데바닷타에게 붓다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데바닷타는 아잣타사트루의 신하를 자객으로 붓다에게 보냈다. 그런데 자객들이 붓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몸이 굳어버렸다. 붓다가 ‘그대들은 두려워할 것 없다’고 타이르자 자객들은 칼과 방패를 버리고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또 한번은 붓다가 영축산의 샛길을 걷고 있는 것을 겨누고 산위에서 바윗돌을 굴렸다. 바위는 골짜기에서 멎어 붓다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파편이 튀어 발에 상처를 입혔다. 이 사실을 안 제자들이 앞으로는 붓다의 주변을 둘러싸고 지키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붓다는 ‘여래는 폭력으로 목숨을 앗기지 않는다’며 제자들을 제지했다.
또 한번은 데바닷타가 코끼리를 모는 사람들을 꼬드겨 ‘나라기리’라는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놓게 하였다. 코끼리는 코를 높이 치켜들고 귀와 꼬리를 세운 채 라즈기르의 거리를 걷던 붓다에게 달려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잠시 뒤 벌어질 끔찍한 장면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두 눈을 가렸다. 그러나 코끼리는 붓다 앞에 이르자 코를 늘어뜨리고 조용히 멈춰 섰다. 붓다는 손으로 코끼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영축산을 중심으로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와 지이비카의 망고 동산 등의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공히 붓다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어서 붓다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빔비사라 왕의 감옥 터는 아들 아잣타사트루에 의해 왕위를 사실상 찬탈당한 후 유폐되었던 곳이다. 아잣타사트루는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아버지를 굶겨죽일 속셈으로 음식 반입을 금했다. 그러나 빔비사라 왕은 부인 바이데히가 온몸에 묻혀온 꿀과 밀가루로 연명하며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영축산 산정의 붓다를 향해 예배를 올리며 그 생명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잣타사트루는 감옥의 창문마저 벽돌로 막아버리고, 왕의 발목을 절단한 후 어머니를 후궁에 가둬버렸다.
<사진설명> 빔비사라 왕의 감옥 터.
빔비사라 왕의 감옥 터는 널찍한 4각 모양의 평지에 지나지 않는다. 중간 지점에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는 곳이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 평범한 들밭에 돌담을 둘러놓은 형국이다. 그렇더라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붓다를 그리워하고 붓다에게 의지했던 빔비사라 왕의 임종지라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다. 때마침 해도 서쪽하늘에 걸려 울적함을 더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이비카 망고 동산은 붓다의 주치의 지이비카가 붓다에게 기증한 정원이다. 지이비카는 붓다의 몸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빔비사라 왕의 명령을 받고 영축산과 죽림정사를 찾았다. 마가다 국의 대신이었던 지이비카는 붓다를 치료하면서 그의 고결한 성품과 비길 데 없이 높은 가르침에 감동, 붓다에게 귀의한 당대의 명의였다. 지이비카는 특히 부왕을 죽인 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아잣타사트루 왕을 붓다에게 소개해 이곳에서 참회와 귀의를 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붓다의 8대 근본사리탑 중 하나인 아잣타사트루 스투파가 거의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이곳에 대해 탑은 다 해체되고 유골도 다 사라졌으며, 뼈 몇 조각만이 흐트러져 있을 뿐이나, 마음이 맑은 사람들에게 한 밤에 반짝거리는 사리가 보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기단과 기둥 등 부재만이 남아 있고, 바로 옆에는 모슬렘이 무덤이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라즈기르의 유적지를 순례하고 우리 일행은 호텔까지 마차를 이용했다.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서늘한 기운이 시작되는 저녁 무렵 사람들의 눈망울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있다.
<사진설명>아잣타사트루 스투파. 붓다의 8대 근본사리탑 중의 한 곳이다.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