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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생명, 교제, 기쁨/요 1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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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상호목사
경제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 극심한 취업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취업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필요한 분야의 인재들을 찾고 있지만 그 일에 적합하게 준비된 탁월한 사람들은 적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대에 왕이신 주님을 탁월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교회는 군중을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군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떠합니까? 아니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과연 철 병거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싸울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는가? 탁월하게 주님을 좇기 위해 세상에서 버림받고 왕따가 되기를 다짐하는 인재, 세상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영성과 실력을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지 약 60년쯤 지난 때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었습니다. 한 세대를 30~40년을 한 세대라고 한다면 교회 지도자들의 세대가 벌써 제 2, 제 3 세대로 교체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주축이 된 제2, 제 3 세대들에게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앞선 세대가 처음 예수를 믿으며 느꼈던 뜨거운 피의 끓어오르는 흥분이나 진리를 통한 감동이 거의 식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습관화 되었고 예배는 타성적인 종교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영의 세계 보다는 육신의 소욕이 더 큰 관심이었습니다. 그 결과 거룩한 생활은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세상을 대항할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랑의 사도 요한은 본서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전하고 교제를 회복하고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했습니다. 병들기 시작한 교회, 힘을 잃고 세상 물살에 떠밀려가는 성도들을 살리기 원했던 것입니다.
생명은 소망이지만 죽음은 절망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시간 생명이 끊어지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맙니다.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극과 극을 말해줍니다. 백년 안에 사는 우리의 육적인 생명도 이렇게 중요합니다.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첫째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절에 보면 서두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말씀으로 잠자는 영혼을 깨우칩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립니다. 말씀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습니다<2절>.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육적인 생명을 떠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인생은 육적인 생명의 문제가 다는 아닙니다. 죽음의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철학이나, 어떤 사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가는 자들은 절망의 문이 앞에 가로막혀 있어도 그 빗장을 열어제치고 죽음의 다리를 능히 건너 생명으로 나갈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영적인 자긍심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윤리적으로도 탁월하고 예의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영적인 생명이 있느냐?'하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진정한 시금석이 됩니다. 윤리적으로 흠이 있어도 영적인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존경할만한데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고 영적인 생명이 없이 주님을 등지고 살면 불쌍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스스로 득도하려 하고, 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사셨습니까? 앞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두셨을까요? 주의 복음을 잘 간수해서 후대에게 물려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의 육적인 생명을 먼저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뿐 아니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의 생명이 끝나면 천상의 생명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은 생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생명의 말씀이시라면, 이 생명은 나타나질 때에만 인간이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감춰진 비밀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명을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나타내셨습니다.
내 마음을 열기만하면 구체적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사도요한이 섬겼던 주님을 이런 모습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으로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생명의 관계가 있어서 내 영혼이 살고 이 생명이 충만하고 확산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 생명의 샘물이 고갈되어 있다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의 권능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요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요한이 증거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믿는 즐거움과 예수믿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아직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교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3절>.
'사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살아 있을 때 교제가 가능합니다. 죽어 있으면 교제라는 말이 있을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교제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빚어서 만들어 세워놓은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잠자는 하나님, 죽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교제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사귐'이라는 단어가 베드로후서1:4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본문의 '사귐'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공통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나누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한다고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해도 안목이 다르고 문화와 가치관이 다를 때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생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고백할 수 있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과의 교제가 어느 정도 깊습니까? 어떤 분은 아직도 마음의 현관문조차 열지 않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안방문까지 열어 놓으시고 나와 더불어 격이 없는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을 좀더 풍성히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목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주님과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물질에 손해를 볼 것 같고 직분이 올무가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귀찮게 하시고 괴롭게 하시려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을 풍성케 하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우리 삶을 채워주시려는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문밖에 세워둘 때가 많습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으로 마지못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가지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만나야 합니다.
솔로몬의 자기 아들 르호보암이 대인관계가 좋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잠언1:10에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말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결혼후에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방여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할 때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들고 왔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는 교제가 멀어지고 우상숭배하는 여인들과 교제하다 보니까 우상화 되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전한 마음이 나뉘어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도 여러분을 사귐으로 믿음이 생기고 증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피조물의 영광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4절>.
생명이 있기에 교제가 가능하고, 교제가 있어야 기쁨충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속에 기쁨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24에는 주님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 때문에 생기는 기쁨입니다.
'교제'가 외롭고 고독한 삶에 대한 주님의 처방이라면, '기쁨'은 공허하고 무가치한 삶에 대한 처방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기쁨을 상실하고 허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자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다른 것 강조하지 않고 주님의 생명과 주님과의 끈기있고 은혜로운 사귐과 그 사귐을 통한 기쁨충만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새벽에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충만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도 사도요한 처럼 영적으로 도전할 수가 있습니다. 권면하고 새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 주안에서 끊임없는 사귐이 있는교회, 예수믿는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