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의 음반 목록에 관해서는 이문세/음반목록참조. 이문세의 음악은 이영훈과 함께한 3집부터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한 음반에서 히트곡이 하나만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던 당시에 음반 수록곡의 대다수가 히트곡이
되는 전례를 남겼으며 음반의 완성도뿐 아니라 한국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문세-이영훈라인은 가요 전체 역사를 놓고 봐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작곡가 듀오로 손꼽히며 대중가요 100대 명반 중 4집이 16위, 5집이 50위에 랭크되었다.
신촌성결교회
안수집사다. 이승환의
경우 신승훈과 90년대 초중반에 같이 활동하며
발라드 왕자로 불리긴 했으나, 당시 신승훈 보다는 인기도나 음반판매량에서 확실히 아래였던 데다 활동
전반기에만 발라드를 구사했을 뿐 인기를 얻고 나서 후반기부터는 록 장르로 완전히 옮겨 지금까지도 록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기에 발라드 계보를 잇는
뮤지션으로서는 다소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윤종신의 경우 신승훈, 이승환 바로 아래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윤상은 1993년 이후 활동이 뜸해졌을뿐더러 2000년대 이후 일렉트로니카
장르를 시도하는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 김동률은
아티스트로서 장점은 두드러지만 저 계보 인물들과 비교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와 파급력을 소유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성시경, 김범수박효신,
테이이
계보를 잇고 있다고도 하지만, 모두 2000년대 전반적으로
침체를 맞은 음반판매량 감소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위의 계보에 위치한 가수들보다 히트곡들이나 가요순위 입지에서 아직 부족한 편이다. 물론 이들이 실력이 없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지만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전유성에 의해 픽업돼서 무대를 최초로 설 수 있었다고 한다.
방송사에서도
이문세가 쌓아온 별밤 브랜드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속 그 시간대 방송은 별밤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
청취자들(특히 이문세 시절에 주 청취자들은 진행자가 이문세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이후 별밤을 사도로
취급한다. 나아가 이문세가 진행하는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2시의
데이트,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 등)을 오히려 별밤의 후속으로
여길 지경이다.
지금의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저 당시는 문화와 교육을 묶어 문교부였다. 청와대
부의 경우 정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개편이 지속되어왔다. 실제로 1995년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당시 팝을 즐겨듣던 사람들은 한국
가요의 수준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경향은 늘 존재하지만…
1987년 12월 표준FM 개국. 그리고 냉장고를부탁해에 출연해서 진짜로 당근을
좋아해서 작업실 냉장고에 당근이 떨어진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물론 이 마삼 트리오는 음악적 요소가 기본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셋 다 당대 음악계를 풍미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각자의 영역에서 인정받았고, 그것이 감성을 자극하는 발라드로 듣는 이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후대에는 셋 다 하관이 긴 걸로 기억에 남지만, 가령 이런
거다. 최불암과 이문세가 등산을 갔다가 미끄러진 이문세를 최불암이 붙잡았는데 "이문세 씨 괜찮으세요?"라고 묻자 매달린 이문세가 "선배님 말 놓으세요~"라고 답하자 말을 놓아서 떨어져 버렸다거나(…). 사상의학이아닌 8체질의학에서 분류한 체질이다. 이문세: “석천아 니가 울면 너하고 나하고 사귄 줄 알잖아~”
[7080그때
그시절엔]가수 이문세씨와 종로 분식센터
사랑은
DJ 목소리를 타고…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쪽이나 파고다극장
근처에는 유난히 분식센터가 많았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하교 후 왜 그 먼 곳까지 와서
분식센터를 돌아다녔는지 지금도 의아하기만 하다.
분명 그 근처에는 고등학교가 별로 없었고
대부분 명륜동 쪽에 보성 경신 서라벌 경복고와 혜화여고, 정동 쪽에 서울고 이화여고 서울예고 등이 몰려
있었는데…. 그 외에 서울시내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종로 쪽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뭐였을까.
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아∼맞다! 종로에는 학원들이 많았다. 그때는
대부분의 학원이 종로에 몰려 있었다. 그 유명한 종로학원 등 입시학원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학원들이
밀집해 있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점에 그 일대는 그야말로
교복 입은 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종로는 지금처럼 패션가도, 술집이나 극장가도 아니었다. 빌딩
숲을 이루지도 않았고 나지막한 건물에 학원들이 많았다. 허름한 분식집이나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도 많았다.
난 그랬던 종로가 그립다. 학원 강의 끝나면 근처 분식집에 들어가 쫄면 하나 시켜먹으면서 친구들과 수다 떨었던 그곳…. 그 분식센터에는 노래 틀어주는 DJ가 있어서 신청곡도 즉석에서
틀어주고 자신이 마치 최동욱이나 이종환 같은 유명 DJ나 된 것처럼 팬들을 이끌고 다녔다.
장발머리에 군복을 입고 마이크에 앉아 목소리
깔며 신청곡 틀어주고 사연 읽어주면 여학생들이 거기에 반해 ‘꺅∼ ’
뒤로 넘어갔다. 그곳은 또 남녀 학생들이 요즘말로 ‘작업’ 들어가기 쉬운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노골적이지 않았다. 맘에 드는 여학생이 있다 해도 직접 말을 거는 강심장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DJ를 통해 그 여학생이 좋아할 만한 음악과 사연을 띄운다든지….
당시 DJ는 풋풋한 사랑의 전령사와도 같았다. DJ는
또 신청 사연을 전하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학생을 발견하면 더 느끼한 목소리로 음악을 소개하곤 했다.
“이 음악은 DJ인 제가
저기 외롭게 혼자 앉아 ‘다꽝’만 드시는 머리긴 여좌∼분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줌마,
저기 저∼ 아름다운 여좌∼분께 어서 쫄면 갖다드리세요∼∼.”
“로보가 노래합니다. ‘아이드
러브 유 투 원 미’∼∼∼내 마음이에∼요.”
난 그때 그 기름진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고등학생들의 문화적 돌파구였고 건전한(?) 이성교제의 장이였던 분식센터가
지금도 그립다. 그때의 종로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