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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면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동리로 구미(九美)와 사촌(沙村) 두 행정 부락으로 구성된 옛 방리(坊里)이다. 구미는 칠탄산(七灘山)을 배경으로 하여 단장천을 왼편에 바라보고 있으며, 사촌(沙村)은 가마봉(교봉(轎峯))을 주산으로 하여 들판 건너 구미 마을과 마주 보고 자리 잡았다. 동쪽으로 안법리와 이웃하였고, 서북쪽으로 단장천(東川)을 사이에 두고 산외면 다죽리와 면계(面界)를 이루었으며 남쪽에는 자씨산(慈氏山) 너머에 밀양시 덕성동과 시군계를 이루었고 북쪽에는 양당들과 금수(錦水)를 건너 산외면 금곡리와 경계를 지었다.
17세기 말에 발간한 밀주구지(密州舊誌)의 기록에는 이곳을 사촌리, 일명 제초동이라 하였고, 그 후 구며리와 덕성리를 합하여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삼았다. 1906년의 지방 행정 개편시에 구며를 구미(九美)로 표기하여 사촌(沙村)을 아울러 미촌리(美村里)라 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조정에 따라 덕성리를 밀양읍에 이관하고 구미, 사촌, 안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법정리를 삼음으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1) 구미(仇며, 九美, 龜尾)
미촌리 서남쪽 칠탄산 아래에 있다. 마을 앞으로 안법천이 흘러 서쪽에서 단장천(동천)과 합류하는 곳이다. 마을 뒤의 산세가 거북형으로 되어 있어 이 마을이 그 꼬리에 해당한다 하여 구미라 한 곳을 구며로 표기하였고, 다시 구미(九美)가 된 것이라 한다. 또 서쪽으로 뻗은 자씨산 북쪽 산 밑을 따라 흐르고 있는 동천에는 맑은 여울과 깊은 연못, 그리고 백사장과 율림(栗林)이 펼쳐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이 형성된 지는 매우 오래인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은 이후에 효자 손지겸(孫智謙)이 복거(卜居)함으로써 일직(一直) 손씨(孫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30년대에 우석(友石) 손승헌(孫昇憲)이 그 선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구산정(龜山亭)을 건립했다. 구한말에는 구봉(九峰) 이의택(李義澤)이 입촌하여 그 후 벽진(碧珍) 이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기성(岐城) 반씨(潘氏)도 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
■ 진암(眞巖)
구미 서쪽 자씨산 아래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앞에는 칠리탄(七里灘)이 있어 조선조 광해조 때 문관인 오한 손기양(孫起陽) 선생이 낚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초에는 초정도 있었다. 그 후 후손들이 이 곳에 진암서당(眞巖書堂)을 세워 강학의 장소로 삼았으나 지금의 칠탄정(七灘亭)으로 옮기고 이름만 남아 있다.
■ 칠리탄(七里灘, 七灘沼, 七灘亭)
구미의 서쪽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말한다. 단장리의 앞 산인 경주산 뒷편에서 단장천과 산내천의 물이 모여 칠리(七里)를 흐르면서 아름다운 여울을 이룬 곳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칠리탄(七里灘)의 끝간 데를 칠탄소(七灘沼)라고 하며 그 남쪽 언덕바지에 오한 손기양(孫起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밀성 손씨 문중의 칠탄정이 자리 잡고 있다.
■ 등장소(燈淵, 燈堂淵, 燈岩淵)
九美의 서쪽 칠탄정 동쪽에 있는 깊은 소(沼)이름이다. 언덕바지에 있는 바위가 등잔처럼 생겼다 하여 본래 등암(燈岩)이라 했다가 못 이름으로 바뀌어 등연(燈淵) 또는 등장소라 하였다.
■ 꽃밭등(花田嶝)
구미 남쪽 진등(長嶝)옆에 있는 등성이의 이름인데 봄에 진달래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 하여 꽃밭등이라 한다.
■ 큰갱빈(大江邊, 갱빈마, 갱빈들)
구미 마을 서북쪽에 있는 동천 강변을 가리킨다. 강변쪽에 있는 들을 갱빈들이라 하고 그 곳 땀을 갱빈마, 또는 서쪽각단이라고 한다.
■ 서구정
구미의 동쪽에 있는 들판의 이름이다.
■ 홍두깨등
구미의 남쪽에 있는 진등 옆의 등성이 이름인데 마치 홍두깨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동쪽각단(동편)
구미의 동쪽에 있는 마을의 한 부분이다.
■ 서쪽각단(서편)
구미의 서쪽에 있는 마을의 한 부분이다. 각단은 각담(各담)에서 온 말이다.
■ 남판서 술새미(南判書 酒泉)
구미 마을 어구에 있었던 샘의 이름이다. 조선조 중종때 판서를 지낸 남오가 벼슬을 그만 두고 향리인 사촌에 퇴거하여 살았다. 평소에 술 마시기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여종을 시켜 구미 마을로 가서 술을 사 오라 했다. 여종은 술을 사 오다가 실족하여 넘어지는 통에 그만 술병을 깨뜨리고 주인에게 꾸중들을 일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그 때 홀연 샘이 있어 병을 새로 구해다가 물을 담아 가지고 돌아가 주인에게 바쳤더니 물맛이 술맛보다 못하지 않다 하여 그 후로 그 샘을 남판서의 술새미라 불렀다고 한다.
■ 소스랑등(쇠스랑등)
자씨산 아래 칠탄정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이다. 등장소(燈淵)로 내려 뻗은 지형이 마치 쇠스랑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파금등(파구분등(破舊墳嶝), 파음등)
소스랑등 동편으로 뻗어내린 등성인데 풍수설에 따라 긴 뱀이 하늘로 따라 오르는 혈(장사승천(長蛇昇天)穴)이라 하여 명당 자리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파금등은 파구분(破舊墳)등성이에서 온 말로 명당에 개장하기 위하여 구묘를 파버린 지점이라는 뜻이다.
■ 진등(長嶝)
파금등 서쪽 산등성이의 이름인데 등성이가 기다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꽁어등(雉嶝, 뒷갓등)
파금등 동쪽 산등성이인데 꿩의 등과 닮은 지형일 뿐 아니라 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형국이라고 한다.
■ 고래방우등(경암등(鯨岩嶝))
꽁어등(치등(雉嶝))동쪽 산등성이인데, 고래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마당방우(장암(場岩))
꽁어등 중턱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꿩의 날개쭉지에 해당되는 위치이다. 마당처럼 면적이 넓다하여 마당방우(場岩)라 한다.
■ 가매방우(轎岩)
고래방우등(경암등(鯨岩嶝)) 근처에 있는 바위인데 가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통시방우(측간암(厠間岩))
고래방우등 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두 개의 크다란 바위가 포개어져 있는 모양이 마치 사람이 앉아 대편을 보는 것 같다 하여 뒷간을 의미하는 통쉬, 곧 통시 바위로 이름이 붙여졌다.
■ 절터굼티기(寺址窟)
통시방우 동쪽에 푹 꺼진 지점을 가리키는데 옛날 이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주춧돌을 비롯한 건물의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굼티기는 구무처럼 생긴 터 자리에 대한 사투리이다.
■ 쪽박등(瓢嶝)
절터굼티기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인데, 쪽박을 엎어 넣은 것 같은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쉬는 방우(休岩)
쪽박등 아래쪽에 있는 평평한 바위의 이름인데, 나무꾼이나 길가는 사람들이 앉아 쉬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큰등(大嶝)
쪽박등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등대가 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선방우(立岩)
큰등 위쪽에 있는 바위로 마치 세워 놓은 것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옥안
구미의 서쪽 큰등 아래 부분에 있는 샘 이름이다. 지금 이 마을 상수도의 수원지로서 활용되고 있다.
■ 넉방우굴(호암굴(狐岩窟))
진등 서편에 있는 바위굴의 이름이다. 너구리가 이 굴속에 산다고 하여 너구리 바위굴인데 준말이 되어 넉바위굴이 되었다. 굴이 몹시 깊다고 한다.
■ 큰골(大谷)
구미의 서쪽 파금등과 소스랑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인데,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
■ 일곱실이(七山谷)
자씨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지명으로 일곱 개의 산등성이와 일곱 개의 골짜기가 합친 곳이라 하여 칠산곡 또는 일곱실이라 부른다. 조선말에 이 곳에 죽암(竹巖) 손건(孫鍵)이 칠산정
을 세웠다.
■ 갓골(林谷)
구미의 서쪽에 있는 동편 골짜기의 이름이다. 우거진 밀림갓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파생된 지명이다.
■ 찬새미골(冷泉谷)
큰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여름에 이가 시릴 정도로 달고 찬 물이 샘 솟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구미 아랫들(九美下坪)
구미 마을에서 칠탄정 쪽으로 펼쳐진 들판의 이름이다. 아릿들이라고도 한다.
■ 구용들(구롱, 구렁들)
구미 아랫들 윗쪽에 있는 들판의 이름이다. 본래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곳을 메워 경작지를 만든 곳이다. 구룡은 구렁(움푹 파인 곳)에서 온 말이다.
■ 참물웅딩이(冷泉沼)
구미 아랫들에 있는 데 찬물이 솟는 웅덩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구미 아랫들에 물을 대는 보(洑) 한가운데 편입되었다.
■ 진기미웅덩이(도깨비웅덩이)
구미 서북쪽에 있는 웅덩이의 이름인데, 도깨비가 나타나는 곳이라 하여 도깨비 웅덩이라고도 한다.
(2) 사촌(沙村, 士村, 제초동(堤草洞))
미촌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안법천을 사이에 두고 구미 마을과 마주 보고 있다. 마을 뒤쪽에 솟아 있는 가마봉(轎峯)을 분수령으로 하여 단장리와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으로는 들판을 끼고 안법리와 이웃하였다. 본래의 지명은 사촌이며, 일명 제초동이라 했는데 南氏와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사촌(士村)이란 선비의 마을이라는 뜻이 되고, 제초동(堤草洞)은 중국 송나라 때 유현인 주희(朱熹)의 고향 무원현에 있는 남성 마을을 본 따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 곧 남씨의 자손들은 말(馬)이 풀을 뜯으며 기루어지는 사마(司馬)의 장(제초동)에서 조상의 덕업을 계승하고 말처럼 뛰어올라 출세를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밀주구지에 고인기라는 중국의 해학적인 설화가 실려 있어 그 지명의 유래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마을은 1510년(중종5)에 판서 남지족당이 입촌한 이래 480여 년 동안 의령 남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그 자손들이 마을 가운데 지족당(止足堂)이란 문중 재사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중종(1506-1544)때 진사 남우문(南右文)은 마을 앞에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살았으며,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 조암(操庵) 남필문(南弼文)도 이 곳에서 학문을 닦았다.그 후에도 진사 남계선(南繼善), 교수 남영길(南榮吉), 감정(監正) 남이흔(南以炘) 등이 나서 마을을 빛냈다. 또 조선조 초기 이래 밀성 박씨도 이 곳을 세거지로 삼았는데 부사 박시乂,첨정 박이화가 그 뿌리를 내렸다. 조선말기에 사과 박지순(朴志淳)은 금석정(錦石亭)을 세워 문중의 터전을 굳건히 했으며, 박지열(朴志悅)의 처인 열부 달성 서씨의 정절을 표창하는 비각도 마을에 남아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죽동의 밀성 손씨와 죽서의 일직 손씨의 일파도 이 마을에 이거(移居)하여 세거지를 삼았다.
■ 웃각단(상담)
사촌 마을 위쪽(동쪽)에 있는 땀이라 하여 웃각단이라 한다.
■ 아랫각단
사촌 마을 아래쪽(서남쪽)에 있는 땀이라 하여 아랫각단이라 한다.
■ 보갓산(洑林山)
사촌 마을 뒷편의 가마봉에서 북쪽으로 휘감은 산 이름인데 그 산 기슭을 돌아 나가면 단장리에 이르는 국도와 연결된다. 단장천의 물을 끌어 들여 양당들에 물을 대는
양당보(陽塘洑)수로가 산 아래로 지나간다 하여 보갓 또는 보갓산이라 한다.
■ 금수정(錦水亭)
보갓산 북쪽 기슭 중턱에 금수(錦水)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구한말 때 참봉 안홍원(安弘遠)이 세운 금수정(錦水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이 터는 원래 밀성 박씨의 금석정(錦石亭) 자리였으나 1960년에 사촌 마을 뒷산 기슭에 중건하였다.
■ 삼층방우(三層岩)
보갓산 중턱에 있는 바위인데 삼 층으로 구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소드방지(鼎蓋址)
보갓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으로 마치 소드방, 곧 솥뚜껑처럼 생겼다 하여 파생된 것이다.
■ 하분등골짝(花盆嶝谷)
보갓산을 북쪽으로 돌아 나와서 남쪽으로 꺾이는 곳에 위치한 골짜기의 이름인데 마치 화분과 같이 생긴 등성이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 지느리산(쥐네리끝)
화분등 골짜기 아랫부분에 위치한 평평한 지대의 이름으로 마치 쥐가 내려오는 것 같은 지형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무재골(舞雩祭谷, 水祭谷)
화분 등 골짜기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마을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무제란 무우제(舞雩祭) 곧 기우제를 뜻하며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제를 올린다는 의미에서 수제(水祭, 舞祭)라고도 한다.
■ 물바우칭덤(水岩崖)
무재골 중간 지점에 있는 층암의 이름으로 그 사이에 샘이 있었다. 가뭄이 들면 이 샘 가에서 무제 곧 기우제를 올렸는데 바위 사이에서 물이 난다 하여 물방우라고 했다.
■ 가마봉(轎峯)
보갓산 동남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의 이름으로 사촌 마을의 주산이다. 이 봉우리 너머에 단장리가 있다.
■ 절티골(寺址谷)
가마봉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인데 옛날에 절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시리봉(甑峯)
가마봉 동남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이다. 형세가 시루(甑)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매뺑이 양달(鷹走嶝)
시리봉 남쪽으로 두 개의 펑퍼짐한 등성이가 있는데 각각 일자번등(一字反嶝), 이자번등이라고 하며, 매우 양지 바른 곳이다. 매가 마을의 병아리를 채어 내빼는 곳이라 하여 매뺑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곳은 본래 미촌리의 동유림이었으나 해방전에 안법초동학교의 설립자금에 투자하기 위하여 개인에게 매각했다고 한다.
■ 무당방우(巫堂岩)
매뺑이 양달 밑에 있는 큰 바위의 이름이다. 무당들이 이 곳에 와서 정성을 드리고 굿을 하는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양달들(양당들, 陽坪, 兩塘坪)
사촌 마을 뒤쪽, 구미 마을 동북쪽에 있는 들판의 이름이다. 동쪽과 서쪽이 확 트여서 햇빛이 비치는 양달에 위치한 들판인데, 이곳에서 나는 쌀의 품질이 좋기로 이름이 있었다. 양당 봇물을 끌어대어 농사를 짓는다 하여 양당들이라고도 한다.
■ 가가들(가깔들)
양달들 아래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 양당보(兩塘洑)
사촌 마을 뒤 양달들에 물을 대기 위한 원거리 보(洑)인데, 단장리 경주산 기슭의 사당수(泗塘水)와 금수(錦水) 어구의 석계당(石溪塘) 등 양당의 물을 끌어들이는 보라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 보는 보갓산 북쪽 기슭으로 난 도로를 따라 봇도랑이 흐르고 있으며, 수량도 매우 많아 양달들, 집들의 관개(灌漑)를 충분히 하고 있다.
■ 밭덮들(田覆坪)
사촌 마을 앞에 있는 들 이름인데 밭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든 들이라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 이 밭덮들에도 관개용 보도랑이 별도로 흐르고 있는 비옥한 들이다.
■ 사천보(사촌보, 沙村洑, 沙川洑)
밭덮개들에 물을 대기 위한 보의 이름이다. 사촌 마을 앞을 흐르는 안법천의 물을 끌어대는 것이라 하여 사촌보 또는 사천보라고 한다.
■ 외암들(外內坪)
밭덮들 위쪽의 들인데 사촌 바깥 마을 안쪽에 있는 들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안법리 구역에 속해 있다.
■ 행기보
사찬보 아래쪽에 있는 보의 이름이다.
■ 독뫼(獨山)
사촌 마을 앞에 있는 나지막한 산 이름인데 산줄기에 연접해 있지 않는 독산(獨山)이다.
■ 사복골(사북골, 司福谷)
사촌 마을 북산에 있는 절터골 동남쪽의 골짜기 이름이다. 사복이란 말은 사북의 변음으로 가위의 교차점에 박은 못과 같이 가장 요긴한 장소를 말한다. 이 곳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마을에 거주하던 진사 남순길(南順吉)의 처 광주(廣州) 안씨(安氏)가 숨어서 피난하던 골짜기이다. 결국 왜적이 욕을 보이려 하자 결사 항거하다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한 순절의 거룩한 장소이다. 전쟁 후 그 장소에 시신을 묻고 나라에서 정려를 내린 곳이라 하여 사북골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사복곡은 사북골의 한자음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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